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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7일 주일메시지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말씀 / 마가복음 4 : 21-41
요절 / 마가복음 4 : 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나폴레옹은 백만 대군의 대포와 칼을 가지고도 자기의 제국을 이루지 못했는데, 나사렛 예수는 갈릴리 해변의 12명 제자를 데리시고 온 세상을 영원히 다스리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과 말씀역사는 처음에는 작고 미약해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강한 생명력이 있으므로 싹이 나고 자라나 온 세상을 바꾸는 큰 역사를 이룹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말씀의 생명력을 확신하고 부지런히 1:1 말씀전파에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21-29)
21,22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북쪽 국경지역, 시골 갈릴리에서 주로 사역을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속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이런 시골에서 역사를 섬기니 세상이 알아 줄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전하실 때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니 이 분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이런 말씀을 전하시는 이 분은 누구인가? 알아주기 힘들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역사는 등불을 감추어 두는 역사가 아니었습니다. 등잔대 위에 밝혀 둔 불빛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조용히 역사를 섬기셨지만, 그 생명의 빛은 세상에 널리 퍼졌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주셨으나 그 속에 담긴 생명력은 결코 숨어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야로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나 예수님께서 이루시는 십자가와 부활의 비밀은 온 세상에 구원과 영생을 주시는 생명의 길로 온 세상에 알려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들어야 합니까?
23-25절을 보십시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첫째, 들을 귀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집중하고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영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들을 때 자기 마음에 드는 말씀만 받고자 하는 사람이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의 귀를 열어야 합니다. 진심을 가지고 받아들이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모르면 알고자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는 일에는 기를 쓰는데 성경말씀은 들리는 대로 그냥 흘려듣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듣고자하고 알고자 하는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둘째, 연구하고 또 전해야 합니다. 24절 말씀을 새 번역 성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듣는 것을 마음에 새겨라 너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만큼 너희가 받을 것이며 그 외에도 더 주실 것이다” 성경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그다음엔 다른 사람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성경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알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깊이 소화시킬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새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말씀은 받기만 할 때보다 오히려 전해줄 때, 전해주고자 깊이 연구할 때 더 큰 은혜를 받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우리 주님께서는 은혜를 주시고 은혜위에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연구하고 찾고 캐고 깊이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자는 더 큰 은혜를 받을 것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그가 가진 것마저도 빼앗기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항상 연구하고 사랑하지 않을 때 그나마 있는 은혜마저도 사라져 버립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예수님은 하나님나라가 전파되는 말씀 역사를 씨뿌리는 일에 비유하십니다. 27-29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하나님 나라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라나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말씀 역사는 그 말씀이 사람들의 심령에 역사하여 그 사람의 인격과 내면과 영혼을 바꾸며 성장해나가지만 정작 사람들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잘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한 사람의 내면에 말씀의 씨가 떨어졌을 때 그 말씀이 자라나 열매 맺는 것을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알지 못할 때가 많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변화의 능력이 있고 열매 맺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열매가 있으면 반드시 추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씨를 뿌리고 자라나 열매가 익었을 때 그것을 추수해 들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생명의 씨를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그 생명의 말씀을 전하심으로 생명의 씨를 뿌리셨습니다. 이 씨가 자라나 충분히 열매맺고 익었을 때 하나님께서 이 땅에 추수하시러 낫을 대는 때가 옵니다. 세상에는 씨를 뿌리는 때가 있고 추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에도 씨를 뿌리는 때가 있고 자라는 때가 있으며 열매 익어 추수하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낫을 대실 때 하나님은 익은 낟알과 빈 쭉정이를 구분하여 알곡은 하나님 나라 창고에 들이시고 빈 쭉정이들은 모아다가 불태울 것입니다.
2.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30-34)
30절을 보십시오. “또 가라사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꼬” 예수님께서 다시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31절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겨자씨는 매주 작습니다. 볼펜으로 꼭 찍어 놓은 점의 크기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겨자씨가 이루는 것은 그 씨의 크기와 같지 않습니다. 32절을 보십시오.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겨자씨가 씨로 있을 때에는 아주 작지만 심긴 후에 자라나면 보통 1.5미터 갈릴리 호수 주변에서는 3미터 크기로 자라납니다. 이렇게 다 자라난 겨자나무에는 큰 가지가 있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이 비유가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의 말씀 역사는 처음엔 미약합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 한 아기의 모습으로 마굿간에 오셨습니다. 세상은 누구도 이 아기께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 없이 가난한 모습으로 많은 병자들과 연약한 사람들을 섬기셨습니다. 배우지 못한 어부들과 세리까지 끼여 있는 부족한 모습의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그 겉모습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거지대장 같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보기에 작았던 예수님의 역사는 나폴레옹의 고백과 같이 온 세상 사람들을 다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에는 작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력이 있어서 크게 성장합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그 안에 생명을 품고 있습니다. 겨자씨 안에 있는 생명력은 작은 씨로부터 싹이 나고 줄기가 나고 점점 자라나게 합니다. 외모의 크기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생명력과 성장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역사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한히 성장해 나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나라는 그 영향력이 큽니다.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인다고 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는 이방의 다른 나라들과 민족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역사가 성장하게 되면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각 나라와 족속들에게 구원과 영생을 줍니다. 평안과 기쁨을 줍니다. 죄에 곤하고 지친 인생들에게 안식가 되고 피할 곳이 되어 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배우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처음 약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작부터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전하는 것과 우리가 모이는 것은 약하고 희미하고 초라한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시작도 작고 초라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처음의 부족함을 부끄러워하기보다 우리가 생명력이 있는가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우리가 작더라도 생명력을 가져야 합니다. 생명력은 예수님을 모실 때 강하게 역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 우리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형제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께 순종하며 예수님을 깊이 간직할 때 우리들의 초라함은 곧 성장하는 강한 생명력으로 바꾸어질 수 있습니다.
33,3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 비유의 뜻을 제자들에게는 친히 풀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깊은 의미를 배우고자 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천국의 비밀들을 쉽게 풀어 가르쳐 주셨습니다.
3. 저가 누구이기에(35-41)
35,36절을 보십시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호수를 가로질러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잠시 눈을 붙이시고 제자들은 어부출신들답게 능숙하게 배를 몰고 갈릴리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쳐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보다 수면이 200미터나 낮고, 주변에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자주 이러한 돌풍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이 지방 출신으로 뱃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돌풍 속에서 배를 제어하고자 애를 써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매우 거세고 파도가 높았습니다. 배에는 자꾸만 물이 찼습니다. 그들은 도저히 자기들로써는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제 물속으로 빠져서 죽을지 모른다는 절박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에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 하시나이까 하니”
세찬 바람에 배가 흔들리고 거센 파도에 배가 요동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차서 제자들은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잠이 깨지 않으실 수 있는가? 생각이 듭니다. 참된 휴식이란 이런 것입니다. 거센 바람과 이는 파도 속에서도 평안하게 잠 잘 수 있는 것은 능력과 확신이 가득할 때 가능합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 누릴 수 있습니다. 능력이 없거나 확신이 없거나 혹은 둘 다 없을 때 우리는 몰아치는 바람따라 우리의 마음도 요동치게 됩니다. 자연환경이 조금만 요동쳐도 우리는 심각한 상황에 빠집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 환경은 언제까지나 평안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가운데에서도 평안히 주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다급히 예수님을 깨웠을 때 평안히 주무시던 예수님께서 잠을 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다급한 요청에 어떻게 하셨습니까?
첫째,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에게 “잠잠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세찬 바람은 순식간에 그치고 바다는 금새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분으로써 바람과 바다와 만물을 복종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들 위에 계신 분이십니다. 바람을 꾸짖으실 수 있고 바다에게 명령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꾸지람을 받은 바람은 즉시로 잦아들고, 예수님의 명령을 받은 바다는 금새 순종하여 잔잔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 제자들의 마음의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을 깨우지 못하고 바람과 파도와 싸우느라 힘들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위로하지 않으시고 두려워한 것과 믿음 없음을 지적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들이 항상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실수하고 부족한 것은 용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믿는 자가 되기 원하십니다. 살아있는 믿음을 원하십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순식간에 불어오는 거센 바람은 수많은 뱃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렸습니다. 거세게 일렁이는 파도는 배를 타는 모든 사람들을 두려움에 빠지게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일렁이는 드센 파도를 잠재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람을 꾸짖으셨습니다. 바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전까지 예수님에게서 사람의 모습만 보아왔습니다. 능력을 베푸실 때에는 능력있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의 은혜를 주실 때에는 권세있는 말씀을 전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거대한 자연과 피조물을 꾸짖고 명령하시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꾸짖고, 예수님께서 명령하시자, 바람과 파도조차 복종해야 하는 분, 만물 위에 계신 분이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이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자연만물들을 명령하시고 꾸짖으셔서 조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보고 체험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예수님의 말씀의 씨가 오늘날 지금의 우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씨가 뿌리지면 인생이 바뀌고 내면이 변화되는 이 역사를 우리의 캠퍼스에서 더 많이 일어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생명력있는 말씀 역사에 쓰임받는 주역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