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葆光의 수요 시 산책 23)
밤늦은 시각
근무하던 곳에서 돌아와서야
지금 막 죽었다는 아이를 안았노라
두세 번 소리
임종하는 순간에 희미하게도 울었다고 하는 말
눈물 자아내누나
새하얀 색의 무 밑동이 통통히 살찌는 무렵
태어났다
이윽고 죽어 간 아이 있다
늦은 가을의 맑은 공기를
석 자 사방만큼만
마시다가 내 아이 죽어 가 버렸구나
죽은 아이의
가슴팍에 주사기 바늘 찌르는
의사의 손끝으로 모여드는 그 마음
끝을 모르는 수수께끼를 보고 있는 것처럼
죽은 아이 이마에
다시 또 손을 댄다
슬픈 마음이 한참은 모자라는
쓸쓸함이여
내 아이 몸뚱이는 싸늘해져 가는데
서글프게도
날이 밝을 때까진 남아 있구나
숨 끊어진 아이 살갗의 따스함은
-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 『한 줌의 모래』 중 「장갑을 벗으며」 마지막 8수 (『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 엄인경 옮김, 필요한책,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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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는 일본의 전통 시가인 단카(短歌)입니다. 단카는 5ㆍ7ㆍ5ㆍ7ㆍ7 의 음절을 기본으로 하는 5구 31자의 정형시입니다. 와카(和歌)의 한 장르인데 와카는 단카와 단카를 연이어 쓰는 조카(長歌)로 구분됩니다. 우리의 평시조, 연시조와 비교해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단카 중 앞의 5ㆍ7ㆍ5 세 음절을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하이쿠(俳句)입니다. 하이쿠는 시어에 반드시 계절을 나타내는 계어(季語)를 포함하는 등 음수율 외 나름대로의 규칙이 정해져 있으나 단카는 음수율 외 규칙은 없습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이 중 단카의 5구를 3줄로 바꾸어서 훨씬 더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하도록 했습니다. 위의 여러 시에서 보듯이 문장 구조에 따라 구를 자유롭게 배치했고 때로는 5음절과 7음절의 순서를 바꾸어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들이 정형시임에도 불구하고 자유시처럼 읽히기도 하는 건 아마 이런 배치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인용한 시는 같은 소재의 시가 쭉 이어져 한 편의 조카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실상은 8수의 단카입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첫 가집(歌集)인 『한 줌의 모래』의 마지막에 실린 시로 애초 가집에 포함되지 않았으나, 출간을 준비하는 동안 다쿠보쿠의 장남 신이치가 태어난 지 24일 만에 죽었고, 다쿠보쿠는 죽은 아들을 위하여 지은 이 단카들을 가집에 포함했다고 합니다. “들어라, 지금, 항간에 숨 막히는 먼지의 질풍/불어와, 젊디젊은 생명의 숲 정기가 가진/성스러움 범하려 한다고, 온종일, 딱따구리,/돌아다니며 경고를 여름 나무 고갱이에 새기네.”(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 「딱따구리(啄木鳥)」 부분, 『동경』, 엄인경 옮김, 필요한책, 2020)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본명은 이시카와 하지메(石川はじめ)로 다쿠보쿠는 필명으로 탁목조(啄木鳥), 곧 딱따구리를 일컫습니다. 위 시가 실린 첫 시집 『동경』은 다쿠보쿠가 19세 때 발간한 시집으로 일찍이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26세 때 폐결핵으로 요절했습니다. 다쿠보쿠는 백석 시인의 스승으로도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백석 시인은 다쿠보쿠의 시를 무척 좋아해서 이름에서 석(石)자를 빌려와 자신의 필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시와 노래는 내 안의 피가 끓어오를 만큼 생생한 감동을 주었다.” 책의 겉표지에 적힌 표사에는 무용가 최승희가 시인의 시를 두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쿠보쿠를 말하자면 일전에 산문으로 소개한 한흑구 작가의 시도 이야기해야 합니다. “탁목(啄木)은 고향에서 쫓겨나서도/‘인생의 정열’을 노래하려 하였고”(한흑구의 시 「시인송(詩人頌)」 부분) 작가는 「시인송(詩人頌)」이라는 시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시인들을 불러내어 칭송하였는데, 우리가 거의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이로 단테, 괴테, 셰익스피어, 밀톤(존 밀턴), 무어(토마스 모어), 키츠(존 키츠), 브라우닝(엘리자베스 브라우닝), 하이네, 에이츠, 휘트맨(월터 휘트먼), 이태백, 타고르, 샌드버그(칼 샌드버그), 김립(金笠, 김삿갓) 등과 더불어 다쿠보쿠도 불러내었습니다. “고도화된 예술이 으레 그렇듯 전통적인 와카는 정형화된 틀에서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장르 자체만의 세계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와카가 주로 귀족과 승려 계층을 통해 계승된 것에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메이지 유신 이후 (…) 독립된 장르로서의 단카는 고립된 예술의 기조가 옅어지고 점차 민중의 삶과 생활을 솔직하게 다루는 문학으로서 거듭나기 시작했다. 다쿠보쿠의 세 줄 쓰기 단카는 그러한 경향의 최전선에 있었다.”(가집의 「해제」 중 일부) 다쿠보쿠의 시는 실생활과는 거리가 먼 시는 아니었지만 애초 『한 줌의 모래』에 실린 시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하는 시가 대부분이었으나 오늘 소개하는 시는 현재의 경험에서 바로 우러나와 쓰였던 시로 현장성과 즉흥성이 매우 강합니다. 이 가집 외 죽기 전에 원고를 넘겼으나 사후에 출간되어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고집이 된 가집인 『슬픈 장난감』에 실린 시들은 거의가 현재의 느낌을 바로 살려 쓴 시로 현장성이 강하게 배어 있습니다. 생명은 누구의 것이든 고귀합니다. “두세 번 소리/임종하는 순간에 희미하게도 울었다고 하는 말/눈물 자아내누나” 젊은 아비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 담담하게 시를 적고 있지만 아무리 가장한다 한들 애절함은 자연스럽게 묻어납니다. 죽은 자식 앞에서의 젊은 아비의 절절한 감정은 미처 다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한 종교인의 죽음은 아무리 생각해도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이 뜻도 없어 보이는 죽음을 듣고 저는 혹 현대 개념미술의 퍼포먼스인가 황당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 죽음에서는 오늘의 젊은 아비가 보여주는 어떤 애절함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슬픈 마음이 한참은 모자라는/쓸쓸함이여” 자괴감에서 나오는 이런 쓸쓸한 감정 같은 것 역시 없었습니다. 그래도 생명은 고귀하기는 하겠습니다만. (20231206)
첫댓글 하이쿠 17자 < 단가 31자 < 장가 31자의 연속
백석이 무척 좋아하고, 한흑구가 칭송한 다쿠보쿠는 26세에 요절했네요. 일본시도 소개 많이 해 주십시오. 오늘도 잘 읽었습니다.
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311080107293605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