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24> 제2편 제3장 심인불교 ②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제2절은 본심불교(本心佛敎)로서의 심인불교를 천명하신 대종사의 교설이다. 제1절 셋째 초점에서 언급된 바인데, 다시 독립적으로 드러내어 강조하여 강설하셨다. 본심불교는 무상불교와 더불어 심인불교의 양대 정체성이라 하겠다. 대종사께서는 먼저 이렇게 말씀하셨다.
“심인불교는 본심을 깨치는 진리이다. 내 마음이 작으면 탐진치로 인해 이웃과 동네와 나라와 화합하지 못한다. 마음의 고통은 탐진치 삼독으로 생긴 병이니, 지비용으로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약(藥)이다(실행론 2-3-2-가).”
대종사께서 불교를 ‘깨치는 진리’라 정의하고 계신다. 박성배 교수는 성철스님의 가르침과 결부지어 ‘깨달음[解悟]’과 ‘깨침[證悟]’을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깨침과 깨달음은 동일하게 수용되고 있고, 회당대종사께서는 깨침을 선호하는 경향이 보인다. 대종사께서 불교를 깨침(깨달음)의 진리라 하신 것은 불교일반의 보편적 이해에 닿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내 마음이 본심을 잃어 작게 되면 탐진치 삼독이 치성(熾盛)하게 되어 이웃과 동네와 나라와 화합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화합하지 못하는 병폐가 너무도 크다. 모두들 자신의 자아만 강할 뿐 나라와 동네와 이웃과 화합하지 못하고 악다구니만 키우면서 업을 쌓아가고 있다. 본심을 잃고 생활해서 그런 것이다. 본심을 회복하고 깨치면 즉시 화합의 바다에 접어들 수 있다.
마음의 고통 또한 화합하지 못한 불화고(不和苦)에서 온 것이니, 본심을 잃은 데서 기인한 탐진치 삼독으로 생긴 병이라고 일러주신다. 대종사께서는 “말법시대 중생의 세 가지 고통은 병고와 가난고와 불화고이다(이 말씀도 실행론 개정판에 편장되어야 함)”라 하여 삼고(三苦)를 설하신 바 있는데, 곧 병고(病苦)와 빈고(貧苦, 가난고)와 쟁고(爭苦, 불화고)가 그것이다.
대종사께서는 탐진치(貪瞋癡)를 단제하는 방법이 지비용(智悲勇)이라고 널리 설하셨다. 이 점은 불교일반의 교학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보편성도 있지만, 대종사께서 아주 명시적으로 드러내어 설하셨다는 점에서 회당교학으로서의 독창성이 크다고 할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제3편 제9장 제3절 ‘지비용 탐진치’에서 사뭇 자세히 고찰하려고 하거니와(육바라밀과의 관계 포함), 여기에서는 ‘지비용으로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것이 약(藥)이다’는 구절을 살펴보기로 한다.
‘약(藥)’은 말할 것도 없이 탐진치를 단제하는 방법을 말한다. 정작 이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지비용’이 ‘육바라밀 실천’이 된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실행론 3-9-3에서도 이 점은 적시(摘示)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와 관련된 대종사의 동일 맥락의 법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아와 탐진치는 육바라밀로 무아와 희용지(喜勇智)가 되니, 육바라밀 실천으로 인생에서 좋은 것을 증득하게 된다(실행론 3-6-4-나).”
“고(苦)의 원인인 탐진치를 없애고 지비용을 일으키고, 육바라밀의 실천을 낙(樂)으로 삼는 것이 인간됨의 길이다. 마음을 모으면 되고 흩어버리면 안 된다. 탐진치를 없애려면 지비용을 일으키고 육바라밀을 실천해야 한다. 독엽(毒葉)과 같은 탐진치도 육행을 실천하면 지비용의 감로가 된다, 좋은 것을 일으키면 나쁜 것이 물러간다(실행론 3-6-5).”
이들 말씀으로 헤아리면, 탐진치가 지비용(지희용)이 되기 위해서는 육바라밀 실천을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승보살의 실천도인 육바라밀이 결국은 지비용을 일으키는 수행이 됨을 말씀하신 바이다. 육바라밀의 보편타당한 실천수행력을 대종사께서는 지비용과 관련하여 설하시고 계신다. 그 가치는 육바라밀 실천수행이 그냥 좋다는 것이 아니라 탐진치를 지비용으로 전환시켜 주기에 좋다는 말씀이다.
대종사께서는 본심불교인 심인불교를 밀교라고 명확하게 범주화하시면서, 밀교인 심인불교를 비방하면 더욱 큰 화를 당한다고 일러주신다. 심인공덕은 속히 일어나며, 그 반면에 화도 빨리 온다고 하셨는데, 이는 본심을 회복하느냐 잃느냐에 따라 공덕과 화의 과보가 속히 드러나는(速疾顯) 이치를 말씀하신 것이다.
이러한 바를 현교와 대비하여 설하신 바, “현교는 공덕이 일어나는 것도 더디며 화의 과보도 더디다. 심인불교는 깨달은 뒤에 믿게 되고, 삼보불교는 믿은 뒤에 깨친다(실행론 2-3-2-나)”라 하셨다. ‘깨달은 뒤에 믿게 되고’는 본심(심인)의 이치를 알고 열렬하게 신행하게 됨을 뜻한다. 현교에서는 마음이 부처라고 하지만, 본심(심인)을 회복하는 것의 관건성을 생생하게 설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