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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교회 지체들 게시판에 비공개로 올려진 글인데 전도사님이 다른 회원들을 위해 공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 여기에
일부 편집하고 수정하여 올립니다.
내가 경험한 기독교
*결혼 후 어머니의 소천으로 엄청난 충격을 겪었고 장래식장에서 순복음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계셨던 이모가 울면서 기도하던 모습과 어머니가 천국에 가셨다는 말을 듣고 신에 대해 어렴풋이 관심을 갖기 시작함.
첫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내가 죽으면 내 아내와 아이를 누가 돌봐주나 하고 갑작스럽게 걱정이 되면서 내 능력의 한계를 처음으로 실감하였고 직장 내에서 진급문제와 여러 가지 업무적인 문제로 직장을 옮겨야겠다는 생각으로 형수가 다니던 교회를 자발적으로 나감.
교회에서 시편 127편 말씀으로 설교를 하시던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그 당시 내가 살려고 발버둥쳤던 게 여호와 없이 집을 지으려는 것이고 성을 지키려는 것이라는 것에 동의하면서 하나님을 처음으로 영접함.
내가 몇 주를 혼자 교회를 다니는 모습을 보고 아내가 하는 말이 자기도 신의 존재를 믿어야 할 거 같다면서 진지하게 자기도 교회를 다니겠다고 말하고 함께 교회를 다님.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도 여러 교회를 옮기게 됨. 그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 인해 잠시 교회를 안 나가게 됨. 그런데 주일마다 작은 차 사고가 계속 나면서 엄청난 공포가 임하면서 내가 하나님한테 코가 꿰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됨.
교회는 가야겠는데 다니기는 왠지 부담스러워서 대형교회를 찾아 부담 없는 신앙생활을 시작함. 충현 교회 (국수 맛이 끝내줌), 명성 교회 등을 전전하며 주일예배를 몇 년 보다가 종교가 없던 동생이 이재철 목사님의 주님의 교회를 다녀오고 나서 목사님 설교가 끝내준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를 교회 다닌 지 처음으로 정식으로 등록해서 약 2년을 다님. 다니는 중에 구역예배도 처음으로 1년 정도를 참석함.
*나의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하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처음 다니고 몇 년 동안은 그야말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려는 신앙이었음. 그러나 어릴 때부터 보았던 신앙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은 여전히 지닌 채로 있었기 때문에 교회에 깊이 발을 들여놓기를 주저함. 신앙인들의 이기적인 모습과 일반 사회인보다도 못한 윤리도적인 면이 나로 하여금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했고 과연 바른 신앙적인 삶이란 어떤 삶인가를 고민하면서 신앙생활을 함. 이때는 김동호 목사님의 신앙에 매료되었었음.
직장생활을 하면서 독립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회사 사장님이 전에 있었던 직원들이 회사 나가면서 회사 돈에 피해를 주는 사건을 두 번이나 당했다는 것 때문에 크리스찬으로서 그런 식으로 회사에 누를 끼치면서 나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여러 해를 고민하면서 직장생활을 함.
*이재철 목사님의 주님의 교회를 다니면서 내가 고민했던 신앙적인 삶이 사회에서 윤리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생활을 함. 아내와 함께 세례도 받고 누나와 동생, 둘째 형과 함께 착실하게 교회 다니다가 일산으로 이사 오게 되면서 일산에서 제일 큰 B교회를 역시 등록 안하고 거의 7-8년 동안 다니게 됨.
그러는 동안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회사를 개업하게 됨. 회사를 하면서도 이 세상을 밝게 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회사 운영에서 찾으려 하여 세금 착실히 내려고 노력하고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불쌍한 이웃 도우려고 노력하며 신앙생활을 함. 그러나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 없다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도 세상을 맑게 하고 밝게 하는 청지기로서의 사명이 크리스찬의 사명이라고 생각함.
미국의 9.11사태 후에 큰 오다를 받으면서 하나님이 나한테 왜 이런 선물을 주시나 의아해 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기쁘게 받아주시나 보다 하고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의 뜻을 왜곡함.
그 당시 나의 신앙은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음. 그래서 땅콩박사 조지 워싱턴 카버의 전기를 읽고 이런 삶이 크리스챤의 모델이 아닌가 생각했었음. (땅콩으로 여러 가지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할 때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과 그것을 무료로 공개하고 자기는 일체 이익을 얻지 않고 노후에도 어린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삶)
그리고 박원순 변호사의 미리 작성한 유언장과 그가 하는 아름다운 재단의 일을 보고 어떤 목사님보다도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과연 이 분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는데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었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나는 오로지 세상 사람들에 대한 육적인 사랑이 전부라고 생각한 시기였다고 생각함. 예수님이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자기를 찾는 사람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하라는 말씀을 전도사님 통해 듣고 이 문제가 해결되었음. 세상 사람들의 문제를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처방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음.)
*회사를 운영하던 중 바이어가 값싼 중국으로 가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매출이 줄면서 생존과 번영에 대한 두려움과 나와 가족의 미래에 대한 불안함으로 엄청나고 특이한 고통을 경험함. 외고 다녔던 큰아이를 유학반에 집어넣고 곧 미국으로 유학을 가야 하는 상황이 겹치면서 그 고통과 환란이 극에 달함.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친구 따라 교회 갔다가 울고 불고 하는 목사님과 교인들을 보고 교회 다니면 이상한 사람이 되나 보다 하고 교회 다니기를 포기 했었는데 (이 경험으로 내가 신앙을 갖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지체됨) 환란이 나에게 오니까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금요 철야 기도회에 혼자 나가서 6개월간 울고 불고 하는 것이었음. 참 신앙생활의 아이러니를 느끼는 시기였음. 그리고 울고 불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정말 많구나 하는 것을 보게 됨).
성경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확실하게 자리 잡지 못한 상태에서 고난이 임한 후 여러 경건 서적을 읽던 중 오강남 교수, 길희성 교수의 책과 대광 고등학교에서 강희석군 사건으로 학교에서 물러난 류상태 목사의 책을 읽으면서 그리고 TV에서 김용옥 교수와 김수환 추기경이 대담을 하면서 카톨릭은 이미 다원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고 전부터 약간의 관심을 가졌었던 다원주의가 성경의 정답내지는 종착지가 아닌가 강하게 끌렸었음.
(만약 내가 지금의 주님의 교회로 오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다원주의자가 되었을 것임을 의심하지 않음. 그러나 주님의 교회에 참석하기 훨씬 전 이 까페에서 전도사님의 글과 설교를 접하면서 곧바로 다원주의는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정리가 되면서 미련을 버렸음. 지금 생각하면 오강남 교수, 길희성 교수, 김용옥 교수의 학력이 나로 하여금 저렇게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의 결론이 다 이유가 있지 않겠나 하는 나의 편견이 아주 강하게 작용한 결과였다고 생각함.)
*그 당시 아주 특이하게 괴로워서 마음의 평강을 찾으려고 경건서적도 많이 읽고 성경도 많이 읽었음. 나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책이 "긍정의 힘"과 "목적이 이끄는 삶" 이었는데 책을 읽으면 너무 위로가 되나 유효기간이 몇 시간 안 됨. 그 당시 가장 내가 의아해 했던 것이 성경을 읽고 이성적,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분명히 머리 속에서는 평강이 임하는데 그 자리를 떠나면 곧바로 불안 모드로 돌아오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었음. (하나님은 분명히 나를 사랑하시고 그 증거로 자기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셨고 예수님을 통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 먹을 것 입을 것 구하지 말라고 하시고 다 알아서 해주신다고 하시고 바울을 통해서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이 지키신다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그것을 생각하면 평강이 임해야 하는데 왜 내게는 평강이 임하지 않고 이렇게 불안과 근심이 떠나지 않는가 ?)
*그러다가 뉴조(인터넷 교계 신문 뉴스엔조이)에서 내 눈에 확 띄는 댓글을 발견하고 "해방"이라는 필명의 댓글에 관심을 가지게 됨. 마치 길 잃은 어린아이가 사람이 많은 광장에서 엄마를 잃어버려 어쩔 줄 모르다가 멀리 있는 엄마를 찾는 느낌과 흡사함.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고 드디어 전도사님의 까페를 발견하고 카페의 글과 설교를 접하기 시작함. 팔복을 읽으면서 뭐 이런 사람이 있나 놀라게 됨. (마치 도사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나중에 그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함. 알고 보니 전 도사였음.)
지금도 그 당시 팔복을 읽는 중에 기억나는 것이 우리가 사막에서 살면서 천국을 찾고 있는데 사실상 천국은 사막 건너 저편에 있는데 모두들 사막 안에 있는 오아시스를 발견하고는 천국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는 말에 정신이 버쩍 듦. (그 동안 나의 신앙생활이 오아시스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닌가?) 그리고 또 다른 표현은 하나님을 우리 안의 사랑방에 모셔놓고 내가 안방을 차지하고 있다는 표현에 깊이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됨.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으로의 재창조를 강조하는 글과 설교를 계속해서 접하면서 구원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보는 관점을 기존 교회와 달리하는 시각에 눈을 차츰 뜨면서 내가 직면한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함. 그 동안의 나의 신앙 생활이 내 문제의 단 1%의 해결도 해주지 못함을 발견하고 그 당시 "나는 내 모든 신앙을 버렸다" 고 선언함.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과거의 신앙을 버린 게 아니고 신앙의 종착점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곳이 바로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었음.)
구원이라는 것이 결국 육에서 영으로의 존재의 변화라는 것에 눈뜨면서 내가 그렇게 울고 불고 했던 것은 내가 육에 속한 것. 죄와 사망의 법안에 속해 있다는 것의 명백한 증거였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런 존재로부터의 해방 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됨. (기존 교회도 육에서 영으로의 존재의 변화를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단지 관념상의 표현일 뿐 현실에서 실제로 그런 존재가 된다고 하는 데까지 나가지는 못함.)
설교중에 "원복음" 을 들으면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으로 인해 인간 존재 자체가 선악판단의 주체가 되었고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몸부림 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것이 모든 인간 비극의 시작임을 듣고 또 예수님이 오신 이유가 선악판단 주체로서의 삶을 청산하게 하시기 위함임을 듣고 마치 안개가 걷히듯 하면서 성경이 다시 보이기 시작함.
*새로운 피조물로의 존재의 변화를 위해서 반드시 성령이 임해야 하고 성경에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신 것이 바로 성령을 구하라는 것과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성령의 임재를 기도하게 됨.
그러면서 내가 울고 불고 했을 때 했던 기도가 잘못되었음을 확인함. 즉 울고 불고 한다는 것은 내 존재가 육에 속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니 이때는 성령을 구해서 내 안에 성령이 임해야 그 고통에서 해방 되는 것인데 그 당시 나는 그야말로 하나님 바지 가랑이 잡고 살려달라고만 기도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함께 울고 불고 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안타까워 보이기 시작하면서 6개월 정도 울고 불고하다가 더 이상 이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깨닫고 중단함.
*전에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는 크리스찬은 이렇게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윤리적인 삶을 강조했다면 전도사님을 통해서 알게 된 기독교는 그런 인간으로 재창조해 주신다는 약속으로 보는 것이었음. 성경을 약속으로 본다는 발상의 전환은 그러나 사실상 구약, 신약이 모두 약속에 대한 옛 약속, 새 약속이었다는 것을 새삼 보게 됨.
약 2년간을 눈팅으로 매주일 설교를 들으면서 구원에 대한 새로운 시각으로 점차 내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면서 (구원이 무엇인지,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모습, 이 땅에서의 우리의 부활, 새로운 피조물이란 등등으로 인해) 많은 은혜를 받으면서 내 목을 죄었던 고통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존재의 변화로는 이어지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성령의 임재를 구하게 되지만 진도가 나가지 않음을 계속 확인함. 눈팅 1년 동안은 은혜만 받았던 시간이었다면 나머지 시간은 과연 이게 성경적으로 맞나 하고 객관적으로 신앙을 점검하고자 노력함. 주위 사람들에게도 주로 팔복 중에 하나를 프린트해서 주면서 한번 보라고 권유하고 의견을 물어봄.
"괜찮네" "참 좋다" 등등 의견이 분분했으나 나처럼 완전히 빠지지 않음을 이상하게 생각함.
그 당시 나의 고민
*왜 나는 전도사님의 설교내용과 칼럼에 완전히 함몰되어 이게 맞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까?
*그 당시 여전히 일산 B교회를 다녔었는데 정말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며 눈물까지 흘리면서 공책에 설교를 적는 사람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닐 정도였는데 왜 나는 설교내용이 늘 2% 부족하다고 느끼는가? 저 사람들의 신앙이 틀렸다는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그럼 내 신앙이 잘못되었나?
*전도사님의 방향이 제2의 종교개혁을 지향하는데 그럼 그것은 기존 교회의 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럼 나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는 것 아닌가?
(이 고민은 설교를 들으면 들을수록 너무나 성경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면서 함께 커져만 갔다.)
*나는 성경적이라고 생각해도 혹시 이단일 수도 있으니 내가 성경에서 점검해 보리라 하고 시도해 보았으나 그럴 실력이 내겐 없었음. 일반적으로 목사님들은 자기가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가 있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면 대충 어떤 신앙을 가졌는지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양반은 도대체 2년을 설교를 들어도 누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음.
(이 양반이라는 표현이 전도사님께 실례일 수 있으나 그 당시 내 심정은 "이 양반" 이었음)
주님의 교회로 하나님이 인도하심
그러는 가운데 주님의 교회에 참석하고 싶다는 소망이 점점 커짐을 느낌. 얼마나 커졌으면 내가 주님의 교회 참석하고 있는 꿈을 두 번이나 꾸었음.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위에 언급한 고민이 해결이 안 되어 엉거주춤의 상태로 있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은혜로운 묻고 답하기에 여러 가지 궁금한 점을 물어보고 답변을 얻음. 그리고 기존 교회와의 관계설정에 있어서 그 당시의 주일 설교를 통해 역할분담이나 사명감의 차이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음.
(최근에 와서 더욱 선명하게 되어가고 있는데 대충 이런 것임 ; 어차피 인간은 불완전한데 그런 인간이 성경적 진리를 찾아 봐야 뭐 얼마나 찾나. 내가 본 진리만이 정답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맡은 역할과 사명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굳이 나만 옳다고 주장할 필요도 없으며 다른 신앙은 다른 신앙대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의 퍼즐 조각이며 나 또한 그러한 퍼즐 조각 중에 하나일 뿐이고 나는 내게 주신 은혜 가운데 역할과 사명을 찾아 그 길을 묵묵히 가며 누룩으로서의 역할을 하는데도 시간이 벅찬데 내가 다른 사람들의 신앙에 대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고 말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임. 그리고 내가 보고 동의한 성경의 약속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는 있으나 그 사람들을 내가 정죄하고 판단한다면 나에게는 내가 동의한 성경의 약속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므로 회개해야 할 것임.)
그리고는 왜 나는 전도사님의 설교에 그토록 흠뻑 젖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 정도가 아닐까에 대해 이해가 되기 시작함. (그 사람들은 다른 사명을 가졌거나 아직 나와 같은 사명을 가질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
우연인지 필연인지 의왕시의 집을 전세주고 일산에서 줄곧 전세를 살고 있었는데 의왕시 집의 세입자가 계약완료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왔는데 당시 전세값이 폭락해서 다른 세입자를 구해도 몇 천만 원 차이가 나서 그 차액을 돌려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함.
또한 전세를 내 놓았는데도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거의 두 달 동안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일산 전세집도 내놓고 먼저 나가는 대로 거기에 맞추어 진행하기로 하는데 공교롭게 일산 전세가 먼저 나감. 그 돈을 받아 의왕시 세입자 주고 우리 가족은 의왕시로 이사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함. (이게 혹시 내가 주님의 교회로 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메세지는 아닐까 생각함)
동시에 친구인 김영덕 집사가 덜컥 주님의 교회에 다니기로 했다고 연락이 옴. (이건 두 번째 메세지인가?)
내가 앞으로 살 날이 지금까지 산 날 보다 도 짧게 남았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다고 이렇게 재고 있나? 나중에 죽을 때 주님의 교회에 다녀보지 못한 것으로 천추의 한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일단 다녀보자고 결정하고 이사 후 두 번째 주일날 주님의 교회에 처음으로 참석함. 내가 가기로 결정했다는 표현보다는 나를 주님의 교회로 이끄시는 힘에 내 손을 맡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함.
주님의 교회 참석 이후
일산에서 교회 다닐 때 왜 2%가 부족하다고 느꼈었냐 하면 설교가 거의 칭의 수준에서 끝이 난다고 생각했기 때문. 즉 우리가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 아니냐 ? 그럼 기도하라. 기도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특권이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 거의 이 수준에서 끝이 나면 여러 가지 의문이 들게 됨.
해결해 주실 거면 왜 고난을 주시나? 장난 하나?
하나님의 자녀이면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어렵다고 느끼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평강을 주시니까
혹시 이 고난을 통해서 뭔가를 더 알려 주실 게 있는 게 아닌가? 늘 이야기하는 인내 말고. 그 놈의 인내는 도대체 얼마나 더 견뎌야 하나님한테 흡족한 건가?
주님의 교회 와서 확인해 가는 것은 칭의는 구원의 출발이며 그 후에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아직 까마득히 멀리 있다는 것이며 그 길이 성화의 길이라는 것임. 성화가 전에는 아주 훌륭한 인격적인 인간이 되는 것으로 이해했으나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 닮아가는 새로운 피조물로의 개조라는 것을 알게 됨.
성경의 약속이 점차 선명하게 보이게 됨
성경의 약속은 우리의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그것을 위해 환경의 변화를 필요 할 때 미끼로 사용하시는 것을 알게 됨. 성경의 핵심이 우리에게 성령이 임해야 하며 우리에게 없었던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임하는 것이고 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는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성령의 법안에 거하라는 말씀이고 그때만이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길흉화복의 시스템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음.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만이 선악판단의 주체인 나의 옛사람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선악관이 나의 선악관을 대치하게 되고.
문제는 나에게 성령이 임했는지를 알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는데 뭔가 화끈하게 표시 나게 오면 좋겠는데 그런 일은 없고. 그러다가 성령의 임재는 오직 성령의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설교를 들으면서는 나에게 성령의 열매가 나타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
또한 작년에 자매들과 한 형제가 자기 안에 죄성을 보면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것이 성령이 임재하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죄와 사망의 법만 있을 때는 그런 문제로 곤고할 일이 없을 테니까) 우리 공동체에 성령이 임했음을 보고 과연 나에게 성령이 임했나 임하지 않았나로 괜한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미 나에게도 성령이 임했다고 인정하기로 결정함.
세상에 악한 아버지라도 자기 자식에게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성령을 구하는 자기 자식에게 어찌 성령을 선물로 주시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을 근거로 인정하기로 결정한 것이지 막무가내로 결정한 것은 아님.
우리 공동체가 푯대로 삼고 있는 이런 내용이 지구상에 우리만 하고 있다면 그것도 염려되는 일인데 신앙논쟁학습 시간에 교회사에서 이미 슈바이처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이 성경의 핵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예수님과의 신비한 연합이라고 보았던 것을 공부하고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본 것을 보았다는 것을 알고 기뻐함.
새로운 피조물로의 존재의 변화는 성령이 충만히 임해가면서 날마다 우리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는 회개를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신앙생활이 회개에 집중되어 가고 있는 가운데 회개가 빠진 다른 교단의 오류도 보이기 시작함.
신앙생활이 결코 매일 기쁨만이 넘쳐나는 것이 아니고 In Chirst 와 Out of Christ 를 오락가락 하면서 곤고할 수밖에 없어 때로는 힘들기도 하지만 이 길 말고 다른 길이 없음을 알기에 모두들 현재는 발효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메주에 붙은 콩처럼 끈적끈적해서 메주에서 떨어지지도 못하고 화끈하게 발효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음.
기도제목
1)화목한 가정이 천국가정이 되도록.
우리 집은 어느 가정 못지않게 화목한 가정이나 천국가정이 되지 않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됨.
2)성경의 약속이 더욱 내게 선명하게 되고 내가 더 새로운 피조물이 되도록.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으면 내 가족도 내 주위 사람도 하나님께 이끄는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음. 새로운 피조물된 나를 증거하는
증인이 되기를 기도함.
3)주위에 사업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보면 남의 일 같지 않음.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를 잘 전하는 지혜를
주시어 때가 된 자를 하나님께 중매하는 중매장이의 역할을 잘 감당하도록
4)사업이 잘 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고 있었는데 요즘 조심스럽게 기도를 하게 됨.
전에는 그 기도가 육에 속한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기도가 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에 하지 못했는데 요즘은 위에 말한 대로
성령이 임했다고 인정을 하고 나니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기도를 하든지 다 들어주신다는 말씀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사명감당의
차원에서 그런 기도를 하기 시작함.
-끝-
댓글
드디어 쓰기 시작하셨군요 집사님. 길면 길수록 좋습니다. 후속편을 기다리겠습니다
티자치면 어께가 아푸셔요 저는 성경타자 통독을 하는데 오른쪽 손목이 아파서 한장치고는 쉬지요
집사님 글 올리신 것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작년에 쓴 제 글을 읽어보고 그 이후 제가 어떻게 살아왔나
돌이켜 봤습니다.(어떤 성질인지 잘 모르지만 일단 저에게 충격을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집사님 글 기대하면서 읽어나가겠습니다.
집사님의 신앙 여정이 글 속에서 정말 real하게 전개되는군요. 많은 분들에게 좋은 비교 자료, 그리고 귀중한 간접 경험 자료가 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집사님의 목과 어깨가 호전되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기도니 들어주실 것으로
믿습니다.)
울고 불고 하는 때도 지나가면 눈물도 줄어들고 대신 기쁨이 늘 가슴에 자리잡고 있어서 눈물보다는 웃음이 잇는데 집사님께서
기쯤의 단게에 오셨나 봅니다 감사합니다.
전 "도사"라구요 ㅋㅋ.... 5년 전에 한휘석 집사님은 어떤 분의 사무실을 심방한 저와 함께 처음 예배를 드린 후에 저녁 식사를 하러
보쌈집엘 같이 갔었는데 보쌈을 먹는 저를 보면서 마음 속에서 갑자기 '왜 스님이 고기를 먹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더군요. ㅎㅎ.
어느날 느닷없이 우리에게 닥친 환난으로 울고 불고 하게 되는 것이 사실 하나님의 초대장인 셈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구요.
그리고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던 크고 비밀한 일을 시작하시지요. (렘33:3) 그 크고 비밀한 일이 우리의 행복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기복신앙, 우리의 승리라고 해석하는 것이 번영신학, 우리의 인격적 성숙이라고 보는 것이 보수 진보를 망라한 주류
신학, 하나님과의 신비한 연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수도원적 신비주의, 우리의 존재의 실제적 변화라고 해석하는 것이 우리 교회가
채택한 성경적 신비주의입니다. 물론 그 결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변화, 그리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변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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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하나님이 약속하신 우리가 알지 못하던 크고 비밀한 일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해석에 따라 현실에서의 삶의 모습이
실제로 서로 달라집니다. 당연히 증인으로서의 모습도 달라지게 되고 따라서 사명의 색깔도 달라집니다. 어느 쪽이든 결국 양육과 선교에 초점을 맞추게 되어 있는데 각자 자기 복제품과 같은 교회들을 여기저기 세우게 되지요. 그러므로 신앙 공동체의 푯대, 즉
조직신학이 실제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끊임 없이 교리사와 교회사에서 다양한 조직신학을 공부하면서 우리의 신학적 포지션, 즉 푯대를 점검하고 확인해 나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신학이 곧 신앙의 현실적 기반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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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신앙 생활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오류는 자기의 조직신학에 대해 객관적으로 성찰을 할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미 각자 자기의 조직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골의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자식이 잘 되기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런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나름대로의 성경해석, 즉 공고한 기복적 조직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지금까지의 나의 조직신학을 객관적으로 점검한 후 향후 어떤 조직신학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신앙생활과 삶 전체가 달라집니다. 집사님의 글이 이 부분에서 생생하고 귀한 체험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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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이어질 내용이 참으로 기대됩니다. 이 글이 완성된 후에는 공개용으로 편집되어 많은 분들에게 읽혀지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증언을 하시는 집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집사님의 글을, 그리고 나아가 집사님의 삶을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귀하게 사용하실 것을 믿습니다.
집사님의 간증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인도해 오신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마음속에 그려지네요. 순례자의 모습이 연상되는 걸요. 환난 가운데 전도사님의 글과 설교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셔서 참 은혜가 됩니다. 앞으로 집사님께서 생생한 증인으로서 활약하실 것이 기대됩니다.
"이 양반은 도대체 2년을 설교를 들어도 누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음" (집사님의 아리송해 하시는 모습이 상상이 되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인 제 설명이 좀 필요할 듯 합니다. 저는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분들에게서 성경을 보는 귀한 지혜를 전수 받았으며, 하나님의 신비한 은혜에 대한 영감을 많이 받았지요. 하지만 저는 설교자들에게서는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그 분들은 말하자면 신학자들의 이론을 현실에 맞게 재가공해 대중에게 전달하는 분들이기 때문에 제가 따로이 그 분들의 영향을 받을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첫번째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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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이유는 저에게 귀한 유산을 물려준 많은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이 모두 콘스탄틴 기독교의 프레임에 갇혀 있어서 제가 그 분들에게서 귀한 것들을 얻기는 했지만 그 분들을 추종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콘스탄틴 기독교 프레임의 결정적 오류로는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는 인간의 선악 체계의 유지, 둘째는 불가시 교회와 가시 교회의 구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가지의 필연적인 결과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특히 휴머니즘)의 동일시 등입니다. 그 분들이 갇혀 있던 이 프레임의 심각한 오류를 인식한 제가 그 분들을 추종할 수는 없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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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20대에 불교를 먼저 거치는 과정에서 현세의 인간 존재의 실상에 대한 불교의 통찰에서 귀한 깨달음을 얻었었습니다. 그 깨달음의 핵심은 인간의 무명(無明)과 오온(五蘊)으로 인한 팔고(八苦), 그리고 그 일체개고(一切皆苦)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시된 해탈이라는 개념 등입니다. 저는 기독교로 개종한 후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불교의 그 통찰이 성경에서 더욱 깊고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창세기와 전도서,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들과 로마서 등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서구 신학은 성경에서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콘스탄틴 기독교 프레임 때문이지요. 저는 그 근원를 두 가지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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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인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헬라 철학이 성경 해석을 독점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로마 국가교회라는 괴물, 즉 가이사의 공동체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절대 모순을 가지고 있는 이 괴물을 합리화해야 한다는 서구 신학의 태생적 숙명 때문이었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 결과 서구 신학은 콘스탄틴 기독교라는 잘못된 프레임을 공고히 하게 되었고, 그것을 파악한 저는 서구 신학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정작 추종은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 이상으로 김용호 전도사가 누구의 영향을 받은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아리송한 상황이 정진호 집사님에게 일어났던 이유에 대한 김용호 전도사 본인의 설명을 마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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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제가 쓴 성경 단상의 "기독교와 불교의 관계에 대한 단상"을 읽어 보시면 이와 관련된 더 구체적인 자료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진리에 관한 세 가지 항목, 즉 인간 실존에 있어서 문제 상황의 발생 이유,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 그리고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책 등의 세 가지 항목 중 불교의 통찰을 인정하는 것은 문제 상황에 대한 분석 항목 뿐입니다. 그리고 그 항목조차도 성경에는 불교보다 더 깊고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불교의 통찰은 헬라 철학이 간과했던 이 부분에 있어서의 성경의 진 리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보조 도구였던 것입니다.
주위 분들의 반응에 대한 집사님의 견해에 저도 완전히 동의합니다. 스펙트럼, 퍼즐, 사명의 차이, 시기의 차이 등등.... 만약 하나님께서 콘스탄틴 기독교의 탄생과 그 맹렬한 활약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면 저는 아마 지금도 불교신자로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콘스탄틴 기독교 신학자들과 영성가들의 그 귀한 유산이 없었다면 우리가 성경의 진리를 깨달아 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테지요. 기독교의 다양한 모습과 다양한 사명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한 것이라고 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장차 어찌 전개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드디어 "일단" 마치셨군요. 예전에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가정과 세상과 괴리된 순례자라는 기본 설정부터 참 아쉬운 감이 들었었는데 집사님의 천로역정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존 번연의 사명은 개인 구원 딱! 거기까지였던 것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집사님의 앞 길을 하나님께서 계속 인도하셔서 집사님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한 귀한 도구로 쓰실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믿고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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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끈한(!) 표적과 체험은 저처럼 고집이 세고 의심이 많은 사람들을 굴복시키려고 사용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잘 따라 가시는 분들은 성령의 열매 아홉가지 특징이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성령의 충만을 매일매일 확인하는 것이 정답이라고 봅니다. 화끈한 표적은 오히려 이러한 단계로 억지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전초적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계속 화끈한 표적을 추구하고 또 자랑하는 경향이 기독교에 있는데 이는 오류입니다.) 집사님의 천로역정이 앞으로 많은 분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귀한 나침반 역할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가 전개되는 현장의 모습의 핵심은 어린 자들을 섬기기 위한 큰 자들의 역할 분담과 하나된 헌신입니다. 즉 성경적 형제 사랑의 실현이지요. 하나님께서 다양한 성령의 은사를 각자의 역할에 따라 적절하게 나누어 주시는 것도 그를 위한 것입니다. 집사님께서 가이사의 세계에 나가서 하고 계시는 사업을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역할과 연결시키고 계시니 저도 집사님의 역할 감당에 꼭 필요한 성령의 은사가 집사님에게 강력하게 임하시기를 기도하고, 또 집사님의 사업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겠습니다. 집사님에게 성령의 열매가 더욱 튼실히 맺혀 가기를 위한 기도와 함께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세상 사람들의 문제를 무엇으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그 처방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정말 귀한 통찰입니다. 성경의 약속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지요.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약속이 다르게 보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우리의 문제를 무엇이라고 규정하시는지를 먼저 파악해야 하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규정하시는 우리의 문제는 가난도 아니고 질병도 아니고 바로 우리 각자가 선악 판단의 주체라는 것, 그리고 생존과 번영에 목숨을 건 죄와 사망의 법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공포와 탐욕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지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소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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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자기들)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 각자의 선악 판단의 기준을 가지고 서로 물고 먹다가 피차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삶..... 성경에서 규정하시는 인간들이 빠져있는 수렁입니다. 이것은 선악의 문제도 아니고 양심의 문제도 아니고 존재 그 자체의 문제입니다. 인간 존재 그 자체가 악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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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성경의 약속은 우리의 존재를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서 그 수렁에서 빠져 나오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강한 자 앞에서는 양이 될 수 밖에 없고 약한 자 앞에서는 이리가 되던 우리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자들로 재창조하셔서 함께 먹으며 서로 종노릇하는 작은 공동체, 즉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약속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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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굳이 작은 공동체냐 하면 세상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자기 존재가 바뀌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존과 번영이라는 삶의 목표를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자기의 주체적인 선악 판단 행위를 포기하기를 거부하는 것이지요.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이리 가운데서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뱀처럼 지혜롭게 처신하라고 하셨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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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심각한 문제는 저들이 자신들의 존재가 바뀌는 것을 단순히 거부만 하는데 그치지 않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 성경의 약속에 대한 해석을 왜곡시켜버렸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선악 판단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 이성이라고 주장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약속하셨다고 해석하는 왜곡입니다. 그들은 성경의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시 교회로서 이 땅에 임할 수 없고, 불완전한 지금의 교회가 최선이라는 치밀한 안전판까지 만들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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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상에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주의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콘스탄틴 기독교의 권력을 해체하고 계시고 그 동안의 왜곡된 성경 해석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계십니다. 기독교가 여기저기서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 동안 불가시 교회라고 치부되었던 성경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세워질 때가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의 한 퍼즐 조각으로 우리가 선택을 받았습니다. 뒤를 돌아 보지 아니 하고 소망으로 받은 푯대를 향해 더욱 열심히 달려가는 우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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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집사님의 이 글이 많은 분들에게 지금까지의 자신의 신앙을 차분히 되돌아 보게 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실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집사님의 간증이나 전도사님의 해설이나 길고도 깊어서 다 이해못하지만 공감하는면도 많고 혼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두시간을 다 보냈어요 잘보이지 않아 겨우읽었지요 감사합니다.
오랬만에 들어왔더니 반가워요
평안하시고 건강하시지요?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