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의 크루즈 낭만여행
제21화 황제의 온천 도시 부다페스트-
2016년 7월1일
14일간의 크루즈 여행을 마치고 오늘은 하선하는 날이다
그 동안 함께 지내든 사람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모습을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았다
우린 출국 전에 예약해 두었든 현지 가이드와 함께 하루 더 부다를
관광하기 위하여 하선하여 가이드와 조우했다
가이드를 만나 가이드 차에 우리 짐을 싣고 2일째 관광을 시작하였으며
세체니 다리를 천천히 구경하면서 부다 왕궁으로 올라갔다
다뉴브 강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고 부다페스트의 전체적인 풍경의
구심점이 되는 현수교가 바로 세채니 다리이다
두 개의 개선문 같은 교탑에 케이불 길이가 380m이고 상판의 길이가
202m인 다리를 1842년 착공 1849년에 완공한 초기의 현수교로써
당시에는 유럽에서도 현대적인 다리 중의 하나였고
부다와 페스트 지역의 문화와 경제를 활성화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1873년 ‘부다페스트“라는 도시를 탄생시킨 다리이기도 하다
“솨사슬 다리”라고 불리는 이 다리는 이 다리의 건설을 계획하고 추진한
사람이 정치가 이슈트반 세체니(Szechenyi1791-1860)의 이름을 따서
세체니 다리라고 명명했다고 한다
다리 입구에는 용맹스러운 사자상이 2개씩 조각되어 있는데 이 사자상을
만든 조각가는 이 완벽한 사자상에 하나의 흠이 있다면 이 다리에서 뛰어
내리겠다는 말을 하였는데 어린아이가 자신의 부모에게 이 사자는 왜 혀가
없는가라고 묻는 것을 보고 자신의 살수를 인정하고 다리에서 뛰어내려
투신자살하였다는 일화가 있어 이 사자상이 더욱 유명해 졌으며 그 혀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관광객이 증가 했다고 한다
또한 세체니 다리는 헝거리의 역사를 간직한 다리이기도 하다
부타페스트를 탄생시켜 헝거리를 크게 발전시켰으나 1848년
완공을 앞두고 합스브르크가에 항거하여 독립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이 다리가 폭파될 위기에 있었을 때 공사 감독관 아담 클라크
(Adam Clark)는 맨몸으로 이 다리를 지켰다고 한다
또한 2차 대전으로 다리가 폭파되어 부다와 페스트가 분리되어
암울한 시기가 되었는데 1949년 다시 복구되었울 때는 공산화된
헝거리는 어려운 시기가 되었고 50년이 지난 1989년에 이 다리
위에서 민주화를 외친 시민들은 자유와 희망을 얻은 다리이기에
이 다리는 헝거리의 역사를 기록하는 다리이라고 한다
부다 왕궁은 궁정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아담 클라크 광장에서
출발하는 증기기관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 (현지에서는 '시틀로'라함)를
1870년에 만들었고 지금은 전기로 움직이는데 2분 만에 가파른 언덕을
올라 기니 왕궁 입구에 도착했다
왕궁 입구에서 테라스에 서니 도나우 강을 가로 지르는 세체니 다리와
페스트시가가 한눈에 들어 오고 이슈트반 대 성당도 아련히 보였다
이 처름 부다 왕궁은 페스트지역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부다 남쪽
167M나 되는 언덕에 1265년 몽골의 침략이 많을 때 벨라4세는 이곳에
불락의 궁전을 짓도록 하였다
지금은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지만 왕궁의 역사는 헝거리의 역사
처럼 외세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왕궁은 15세기 헝거리 황금시기인 마타슈 왕은 유럽의 여러 건축가를 불러
르네상스식으로 왕궁을 짓도록 하였으나 1541년 터키의 오스만 제국에 점령
당하면서 약150년간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고 1686년 영웅 오이겐 공이
터키를 몰아내고 성을 되찾아 왕궁의 기능을 회복했으나 십자군 전쟁이후
17세기 초부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가의 지배를 받으면서 더욱 화려하게
변신되었다
1723년까지 이탈리아 건축가 데 프라티(De Frati)에 의해 바로크식으로
개축되었으며 그 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까지 더욱 확장,증축되어
합스브르그 왕궁으로 사용하였으나 1849년 헝거리 독립 전쟁으로 많은
파괴를 당했으며 1867년 오스트리아-항거리 공화국이 생겨 헝거리가
자체 주권을 행사하자 헝거리 건축가 미클로슈 이블는 왕궁을 2배로
넓혀 지금과 같이 300m의 왕궁에 바로크 풍의 돔을 만들어 1910년에는
지금과 같이 전설의 새 투룰과 같은 형테의 왕궁이 재탄생하였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 때에 또 한번 폐허가 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1950년에 이블의 설계도 대로 복구하여 지난날의 모습을 되찾았으며
공산화 되면서 또한번 훼손되기 시작 하였으며 1965년에야 신도전주의의
현재의 왕궁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왕궁 정면 앞에는 오이겐 장군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는 데 재정난으로
이 동상을 만들다가 중단 되었는데 당시 합스브르그 가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재정적 지원을 얻어 1900년에 이 자리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케이블 카를 타고 올라오면 바로 왕궁의 오른쪽 정문이 나오는 데
정문의 아취형 출입구는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는데 승리의 문이라고
라고 하며 남쪽 코너에는 두 날개를 활짝 펴고 두발은 칼을 휘어잡고
무섭게 비행하려는 자세로 조각된 투룰은 옛날 헝거리 부족장 아라드를
도나우 강 가의 이곳으로 인도해 온 영특한 새로써 헝거리 인들의 승배하는
국모의 새이기에 이곳 뿐 아니라 여러 곳에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승리의 문을 통과하면 300M의 왕궁이 펼처지는데
연결되는 곳곳에 분수대가 있으며 15세기 항거리의 황금시대를 열었든
마차시 1세왕의 사냥하는 모습의 분수도 볼 수 있었다
현재는 미술관과 박물관 3개로 활용하고 이 국립미술관은 헝거리 미술사를
볼 수 있으며 역사 박물관은 1000년의 역사가 미술품으로 채워져
있고 20세기의 노동운동 박물관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부다 왕궁은 거의 헝거리의 왕이 거주한 사실이 없어 화려한
왕족의 유품들은 없고 있다 한들 외세의 침략으로 모두 다 탈취당하여
회화로써 민족의 아픈 역사를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린 가이드의 차를 타고 페스트로 건너 와서 부다 페스트의 제일 번화가가
시작되는 뵈뢰슈머르티 광장에 내려 명동거리와 같은 거리를 걸어면서
아이쇼핑도 하는데 광장 한 가운데에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상이 세워져
있는데 이 기념상은 서사시인 뵈뢰슈머르티(1800-1855)를 위하여 1908년에
세워졋다고 한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시대로 독일어가 공식 용어 였지만
이 낭만주의적인 서사 시인은 헝거리 어를 사용하여 헝거리의 아픔을
극작으로 표현하여 헝거리 국민의 마음을 위로 하였기에 이 기념탑의
중앙에는 서사 시인이 앉아 있고 그 아래에는 헝거리 전통 복장을 한
사람들은 물론 농부와 어린이, 학생과 노동자들 모든 헝거리 시민을 조각해
놓은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광장의 맞은편에는 음악가 리스트가 자주 찾았다는 카페“제르보의 집”
(Gerbead Haz)이 눈에 들어왔다 1884년 에밀 제르보가 물려받은 카페와
제과점아 너무나 유명해저서 제르보의 이름이 붙혀젔으며 100년이
넘게 지금까지 그 비법이 전수 되고 있다고 한다
이 광장에서 조금 걸어가니 건국1000년을 기념하는 헝거리 민족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되는 성 이슈트반( Szent Istvan Bazilika)대성당이 나온다
이 성당은 국회의사당과 같은 시기에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정치적인 중심인 국회 의사당과 정신적인 구심점인 성당을 지어 민족의
자존심을 격상하기 위하여 만든 성당으로 1851년에 착공하여 1905년에
완공하여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성 이슈트반 초대왕에게 헌정한 성당
으로 85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중앙 돔의 높이가 96M로 국회의사당의 돔 높이도 96M이다
이는 헝거리의 조상 마자르족이 처음으로 이 지역에 자리잡은 해가
896년이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조정했다고 한다
네오 로마 네스크양식의 건물로 건물 입구에는 금빛의 라틴어
“EGO SUM VIA VERITAS ET VITA” 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라는
성경 (요한복음 14장 6절)구절이 뚜렷하게 새겨저 있었고
성당 내부는 여러 가지색상의 대리석 기둥으로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으며 중앙제단은 성 이슈트반의 조각상이 만들어 져 있었다
중앙제단의 왼쪽 경단에 있는 황금 성골함안에는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미라 형태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입구 오른쪽 헝거리 화가 벤추러(Benczur1844-1920)의 성화인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헝거리 왕관을 바치는 성 이슈트반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것은 헝거리가 기독교화된 장면을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네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름이 22M나 되는 원추지붕 쿠폴라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성당의 조명을 만들고 있으며 높이 떠 있는 쿠폴라는 마치 인간세상을
내려보고 심판하며 우주 만물을 조정하는 신의 존재에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았다
이 쿠폴라 구조물은 건축 도중에 한번 붕괴돤 사고가 있었기에 더욱
튼튼한 건축물은 되었으나 건국 1000년 기념 일에 맞추지는 못하고
10년이 지난 1905년 완공 되었다고 한다
언드라시 거리를 조금 걸어 올라오니 오페라 극장(Magyar Állami Operaház)이
보인다 1875년 착공하여 10년 후 인 1884년에 오픈한 국립 오페라 극장은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안드라시 거리에서도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화려한 극장의 내부 장식은 오스트리아의 에르자베스 황후가 자주 헝거리에
와서 공연을 관람하였기에 헝거리 건축가 이블(Ybl)이 더욱 많은 신경을
기울려 만든 건축물이라고 한다
1980년 현대식으로 리모델링한 오페라 극장은 1261석의 좌석과 3톤이 넘는
화려한 상제리제는 물론이고 음향시설이나 다른 시설이 스칼라 극장과
견줄 수 있는 고급스런 환경이 만들어 졌다하며 로얄석이 5-7만원정도로
구입힐 수 있다 하니 정말 부러웠다
우린 500m 쯤 떨어져 있는 리스트 음악 아카데미를 찾아 갔다
1811년 헝거리에서 태여 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는 헝거리가 낳은
천재적인 음악가이자 피아니스트이며 교향시의 창시자이다
그는 환상적이고 영웅적이며 민족적인 성격이 강한 자유로운 형식의 작품을
많이 작곡하였으며 헝거리 광시곡(Hungarian Rhapsody)은 그의 낭만적인
감정과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 헝가리 집시의 정열적인 멜로디를 결합시켜
작곡한 곡으로 마자르 지방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사망 11년전인 1875년 그의 이름으로 부다페스트에 세운 “리스트 음악
아카데미”는 그의 평소 철학인 예술가들의 “재능 오브리제”를 실천한 음악
아카데미로 150년의 역사를 가지면서 이 원칙을 실천한 국제적인 음악
아카데미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지금의 교수들은 리스트로부터 직접 교육받은
4세대의 음악인들이라고 한다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음악인을 발굴하고 후원함으로 음악의 발전에
기여하기에 우리나라 음익인들도 이곳에 조건만 맞으면 입학이 가능
하다고 하며 우리나라 유학생도 몇 명 있다고 한다
우린 오전 내내 강행군을 하며 관광하였기에 헝거리 음식을 먹기 위하여
가이드가 추천하는 헝거리 전통 음식점 “Kaltenberg Sorozo“ 갔다
지하로 바로 내려가면 넓은 홀이 나오는데 굉장이 크서 끝이 안 보일정도
이고 벽에는 각국 유명 인사들의 방문사진도 여럿이 보이고 있었다
늦은 점심이라 손님은 두 테이블만 있었으며 우리는 푸아그라 정식을 시켰다
헝거리 음식의 특징은 유럽의 육류와 터키의 향료 아채 음식과 르네상스
시대의 마늘과 양파를 곁들인 헝거리 전통 음식이 어우려져서 현재의 음식이
탄생되었다고 한다
사라다와 함께 굴라쉬(Gulyas)수퍼가 나왔다 양파와 토마토를 넣어 소고기와
양배추를 넣어 만든 스프가 대표적인 헝거리의 스프이라고 한다
맛은 걸죽하면서 담백한 맛이 우리의 입맛과 비숫하여 6가지 곡식으로
만든 흑빵과 함께 메인디쉬로 맛있는 점심을 먹고 나오다가 늙은 웨이터와
기념찰영을 하고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였다
이곳에서 젊은 사람은 없고 늙은 사람들이 이렇게 서빙을 하고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중앙시장이다 파리의 벼룩시장, 런던의 포토벨로,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이스탄불의 그랜드 바자르와 함께 세계5대 시장 중의 하나로 인정받는
중앙시장이다
1890년 청과시장으로 시작하여 1994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으며 오스트리아
요세프 황제와 영국의 다이너스 왕비가 방문 했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지하1층은 수퍼 1층은 과일 채소 육류 소세지 향료등을 판매하고 2층은 자수
목각 공예품 의상등 점포들이며 프드코드도 있어 음식을 저렴하게 먹을
수도 있었다
우린 소세지 가게에서 하몽을 구입하고 한바퀴 둘러본 후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였다 정식 이름은 Nagy Vasarcsamok 이라고 한다
부다 페스트에서 꼭 둘러야 될 장소는 뉴욕 카페 (NewYork Cafe)이다
1894년 부다페스트 뉴욕 펠리스 건물에서 뉴욕카페를 오픈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대리석 기둥과 그리스 신화가 그려진 천정의 금빛 프레스코 화와
호화롭게 조화를 이루며 집기 가구 상들리에등 모두 베네치아에서 공수하여
장식하였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는 여인들도 커피를 마시며 만남과 대화의 장소로 카페를
즐겨 찾게 되었으며 이때 호화롭게 오픈한 뉴욕카페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카페라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2대 주인은 문학을 좋아하여 2층을 “뉴욕 살롱” 이라 이름 지어 유명한
작가와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로 하였으며 1층 “깊은 바다“라는 이름으로
가난한 작가와 무명 예술가들을 위해 값싼 매뉴를 개발하여 그들의
문학을 꽃 피우게 만들었다고 하며 가난한 예술가의 재정적인 도움도 많이
베풀었다고 한다
또한 1954년대는 헝거리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으나 1956년
공산화 되면서 공산치하에서도 “기적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의 모임 장소”
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자유화 되면서 지금은 옛날의 그 영화를 누리고
있다고 한다
우린 이곳에서 커피와 아이스 크림을 시켜먹고 잠시 여유로운 시간을
가져 보고 아쉬운 작별을 고 하였다
우리는 다음 행선지인 국회 의사당으로 가는 도중 돈하니 거리에 있는
유럽에서 제일 큰 유대 교회인 시나고그 (Nagy Zsinagoga)는세계에서
두번째로 큰 교회이며 3,000명의 신도를 수용할 수 있는 유대교회이다
토요일이면 검은 복장을 한 유대인들이 예배를 보는 모습은 장관을
이룬다고 하며
2차 대전 때에는 유대인 수용소로 사용하였으며 학살당한 2000여명의
시신이 이곳에 안뜰에 안치되어 있으며 정원에는 헝거리계 유대인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울고 있는 버드나무”가 서 있었으며
1859년 완공된 바실리카식 건축물로써 남녀의 좌석이 따로 만들어 져
있으며 실내장식은 여느 모스크보다 화려해 보였다
옆 건물에는 유대박물관이 있어 그들의 아픈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면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정식 명칭은 <Dohány utcai Zsinagóga> 로 도하니 거리 교회라고 하며 검은색으로
장식된 2개의 양파 모양을 한 돔은 동양의 무어식 건물이라고 한다
부다페스트 제3편이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