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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식의 유래에 대해 한번 알아볼까요?
쫄면, 떡볶이, 김밥, 라면 등등의 분식은 원래1960년대 쌀 부족시대에 정부의 혼식·분식 장려 정책에서 유래확산이 되었습니다. 70년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쌀의 자급자족시대에 이르기 이전 60년대는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와 쌀농사 기술의 후진성으로 인한 쌀농사의 흉작이 빈번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타파하고자 한국정부에서는 댐 건설, 농지 정리 등 기반시설의 정비와 더불어 전 국민적인 쌀 소비 억제와 식량 증산 정책을 동시에 추진했는데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밀가루를 중심으로 한 분식·보리 등 잡곡을 혼합한 혼식 장려운동을 벌였고 그 결과 미국의 잉여 농산물인 밀의 수입이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분식은 그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유래됐다고 볼 수 있죠.
미국내에서는 한인들을 상대로 하는 특화된 메뉴를 가진 분식전문점은 의외로 없는것 같습니다. 마켓에서 여러가지 재료를 사다가 간편하게 만들수 있기에 다 고만고만한 맛이죠. 한국에서 들어오는 프랜차이즈 분식브랜드는 가격만 되게 셉니다. 분식은 저렴한 맛에 먹는 것인데…
분식점에서 간과하면 안되는 물컵의 청결. 이상하게 분식점은 지저분해야 맛있다라는 아주 변태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가게 주인들이 많죠.
1.분식라면의 유래
1963년 9월15일, 일본의 명성식품으로부터 라면기술을 도입한 삼양라면이 처음으로 라면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당시 가격은 10원이었다. 처음에는 생소하여 판매가 부진했지만, 무료시식회에서 그 맛을 인정받으며 곧 서민들의 음식으로 각광 받게 되었다. 당시 정부의 혼분식 장려정책도 라면이 널리 보급되도록 했다. 1960년대 정부는 쌀부족문제 해결을 위해 혼식(잡곡밥)과 분식(밀가루 음식)을 강제하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덕분에 라면은 많이 팔릴 수밖에 없었다.그 실례로 1969년 한 해 동안 천 오백만 봉지가 팔렸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즉석 짜장면, 칼국수, 냉면 등의 다양한 제품이 나왔다. 1980년대 중반 이후에는 라면의 고급화가 이루어지고 용기에 직접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컵라면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러다 1985년 농심이 라면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게 되고, 우지 파동으로 삼양라면이 잠시 생산을 중단하게 되자 농심이 출시한 신라면이 시장을 독차지, 19년 연속 1위 자리를 지켜내고 있다.
2.쫄면의 유래
쫄면은 면발의 쫄깃함과 양념 고추장의 매운 맛, 신선한 야채를 곁들이고 있어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가장 사랑받는 음식 중 하나다. 쫄면은 30년 전 인천 중구 경동의‘광신제면’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우연히 한 가닥 불거져 나온 굵은 국수가락을 발견했는데 이것이 쫄면의 원조가 됐다. 보통 냉면 면발은 가는데 사출구멍을 잘못 사용해 쫄면같이 굵은 면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장 사장은 순간 이것을 음식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서 공장 앞의 분식점에서 판매를 하게 된 것이 ‘쫄면’이다.
‘쫄면’이라는 이름은 70년대 초 중구 인현동의 분식점 ‘맛나당’에서 일했던 주방장 노 모씨가 면이 쫄깃쫄깃 하다고 해서 ‘쫄면’이라고 처음 불렀다고 한다. 분식의 대명사, 쫄면의 고향이 인천인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2002년 일본 신주쿠의 한 백화점에서 ‘월드컵 맞이 한국문화 페스티벌’행사의 하나로 열렸던 ‘한국 10대 도시 향토요리 전시회’에 서울의 모듬전, 부산의 동래파전, 대전의 죽순회, 인천의 쫄면, 수원의 찹쌀 부꾸미, 전주의비빔밥, 광주의 홍어찜, 대구의 양하산적, 서귀포의 돼지고기 양념조림, 울산의 해물볶음이 소개됐을 정도로 쫄면은 인천의 대표 먹을거리이다.
쫄면의 인기는 갈수록 더해 일본에서도 한국의 ‘매운맛’이 알려지면서 젊은 층 사이에서 사랑받고 있다. 인터넷 네티즌들도 쫄면 동호회를 구성해 쫄면을 가장 맛있게 먹는 법과 요리법에 대한 정보를 서로 공유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3.떡볶이의 유래
누구나 즐겨 먹는 간식거리인 맵고 달콤한 떡볶이는 예전에 임금님 수라상에 올라가던 귀한 음식중의 하나였다. 궁중의 정월요리였던 그 떡볶이는 고기와 야채를 듬뿍 넣고 고추장 대신 간장으로 양념을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정월차례를 떡국차례라고 했는데 메(飯) 대신에 떡국을 올렸기 때문이다. 원단(元旦)의 절식은 흰떡, 떡국, 만두국, 약식, 약과, 다식, 정과, 강정, 전야, 빈자떡, 편육, 족편, 누름적, 떡찜, 떡볶이, 생치구이, 전복초, 숙실과, 수정과, 식혜, 젓국지, 동치미, 장김치 등으로 구성이 되었는데 여기에 올라가는 궁중 떡볶이가 오늘날 고추장 떡복이의 유래가 된 것이다.
고추장 떡볶이 집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인데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당동 골목이 본격적인 떡볶이 골목이 되어갔다. 그 당시 연탄불에 요리되었던 떡볶이는 배고픔을 달래는 서민음식이였다. 그러다가 MBC ‘임국희의 여성 살롱’이란 프로그램에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소개된 후 입소문이 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신당동떡볶이골목을 찾게 되었다. 학생들이 몰려 들던 70년대 중반에는 지금은 없어진 ‘바보들’이란 떡볶이 집에서 뮤직박스를 설치, 아마추어 DJ가 신청곡을 받아 음악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 당시 이 뮤직박스와 DJ는 대단한 인기여서 주위에 모여 있는 떡볶이 집들도 너도나도 뮤직박스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4.순대의 유래
순대는 돼지고기를 이용한 우리고유의 음식 중 세계 어느곳에 내어놓아도 손색이 없는 먹거리이며, 영양가도 유사한 서양 소세지에 비해 오히려 뛰어난 전통음식입니다.
순대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소나 돼지의 창자속에 여러 재료를 소로 넣어 삶거나 쪄 익힌 음식' 이라고 나와있습니다.
동물의 내장을 이용한 음식을 기록한 서적에서 순대의 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6세기 중국의 '제민요술'에서 '양의 피와 양고기 등을 다른 재료와 함께 양의 창자에 채워 넣어 삶아 먹는 법이 있다.'는 기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순대는 내장에 속을 넣어 익힌 음식으로 그 고전적인 형태는 '개를 잡아 깨끗이 씻어 슬쩍 삶아 뼈를 발라 만두속 버무리듯이 해서 후추, 천초, 생강, 참기름, 진간을 한데 섞어서 질척하게 하여 제창자를 뒤집어 말끔히 빨아 먹으면 맛있다.'라고 기록된 연대 음식디미방의 개방을 필두로 하여 규합총서나 중보산림경제에는 '쇠창자 안팎을 정히 씻어 한자 길이씩 베고 쇠고기와 꿩, 닭고기를 두드려 온갖 양념과 기름장을 간 맞추어 섞어 그 창자속에 가득히 넣고 실로 두 끝을 맨 다음 솥에 먼저 물을 붓고 대나무를 가로지르고 그 위에 얹되 물에 잠기게 말고 뚜껑을 덮어 뭉근한 불로 고아 꽤 익은 후 내어 식거든 말굽 모양으로 저며 초장에 써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순대에 사용된 재료를 살펴보면 규합총서에 '쇠고기와 꿩고기, 닭고기를 두드려서'라고 하였고, 부인필지에서는 '쇠고기와 생치, 제육을 난도하고'라고 하였으며, 역주방문에서는 '연한 살코기를 만두속과 같이 잘 다져 놓는다.' 고 하여 잘게 다져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죠.
외국에서는 유래를 살펴보면 몽골의 징기스칸이 대륙 정복시 전투근무 식품으로 전장 기능속도를 유지하기 위해 돼지의 창자에다 쌀과 야채를 혼합하여 말리거나 냉동시켜 휴대하여 기동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여 세계를 정복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는데 부터 유래된 음식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식품인 순대제품은 가축의 혈액을 포함하고 있어 소장에서 흡수가 용이한 철분의 훌륭한 공급원으로 빈혈이 우려되는 여성에게 적합한 영양식품입니다. 그밖에도 순대는 지역마다 요리법이 다르지만 육류, 곡류, 채소류가 골고루 함유된 식품으로서 영양가가 풍부한 식품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5.만두의 유래
1)첫번째 유래
만두는 청조말기(약 1958년)에 빚기 시작한 130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북성 무청현(지금은천진시로 편입돼 있음) 의 고귀우라는 소년이 만두 빚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소년의 어릴 적 별명이 구불리였던 데서, 손님들은 그가 빚은 만두를 구불리 라고 불렀습니다. 한때,고귀우는 그의 만두를 덕취호라고 불렀던 까닭에 손님의 발길이 끊어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구불리 라고 이름 붙인 이후에는 더 많은 손님들이 그의 만두를 먹게 되었습니다. 고귀우가 만두를 빚을 때, 속은 별 차이가 없지만, 빚은 만두 모양이 예쁘고, 밑면이 타지 않고, 더군다나 맛이 있었다고 합니다.
1900년대초 원세개가 천진에서 육군을 훈련시키던 중, 구불리 만두를 먹게 되었고, 이를 북경에 있는 서태후에게 선물로 갔다주었습니다. 그 후 서태후가 구불리 만두를 좋아하게 되었고, 바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2)두번째 유래 (좀 신빙성이 없어보임^^;;)
중국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위의 맹획을 공격할 때, 어떤 사람이 "남만(남쪽 오랑캐)에서는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제물로 하여 제사를 지내는 풍속이 있는데, 그러면 신이 음병 (은밀하게 도움 을 주는 병사)을 보내 준다고 합니다." 하면서 그렇게 하기를 권했습니다. 하지만 공명은 그대로 하지 않고 양고기와 돼지고기를 섞어 소를 만들고 밀가루로 싸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후세 사람들이 이것으로 인해 음식 이름을 '남만의 머리'라는 의미로 만두라 했다가 음식 명칭인 만두로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만두가 들어온 것은 고려 시대였는데, 그 당시에는 상화로 발효시킨 찐빵과 비슷한 것이 였습니다. 상화는 가루에 술을 넣어 부풀린 반죽을 찐 것으로 중국의 만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고려사'에는 충혜왕 때 궁 주방에 들어가 만두를 훔쳐 먹은 자를 처벌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의 처음 만두란 말이 나온 것은 '영접도감의궤'(1643년) 에 처음으로 나오는데, 중국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고, 그 후에는 궁중의 잔치에도 종종 차렸다고 합니다. 궁중잔치 기록에는 생치만두, 골만두, 생복만두, 진계만두, 생합만두 등이 나옵니다. '이순록'에는 "인조가 전복만두를 좋아하였는데 생신날에 왕자가 비와 함께 동궁에서 직접 만두를 만들어 가지고 새벽에 문안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800년대의 '음식방문'의 생합만두는 "좋은 생합을 골라 만두 속처럼 만들어 넣고 녹말을 묻혀서 데쳐 초간장에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병시'라고 하는 음식이 나오는데, 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어되,주름을 잡지 않고 반으로 접어 반달 모양으로 빚고 장국에 넣어 끓인 만두국을 말합니다.
6.분식점 김밥의 유래
김밥의 유래에 대해서는 ‘한국고유음식설’과 ‘일본유래설’이 있다.
1) 한국 고유 음식설
한국고유음식설은 김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에 정월 대보름 풍습 가운데 김에 밥을 싸서 먹는 복쌈(福裏)’이라는 풍습이 있는데 이는 밥을 김이나 취나물, 배추잎 등에 싸서 먹는 풍속에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현재처럼 각종 재료를 넣어 만든 김밥의 형태는 1950년대 이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하지만 ‘복쌈’이 정확히 어떠한 형태의 음식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며, 복쌈과 김밥이 역사적으로 이어지는 음식인지는 확인이 되어있지 않다. 김에 대한 직접적 기록은 이후 조선시대의 서적인 <경상도지리지>에 토산품으로 기록되어있고, <동국여지승람>에 전라남도 광양군 태인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자료들로 미루어 보아 조선 중기에는 이미 김 양식을 시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모습의 김밥은 근대 이후에 많이 먹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2) 일본 유래설
일본유래설은 일제시대 때 김에 싸먹는 일본음식인 후토마키에서 유래 했다는 설이다. 일제시대때 일본어 교육을 받는 고연령층에서는 김밥을 노리마키라고 흔히 불렀다. 본래 일본에서는 식초를 섞은 밥을 사용했는데, 한국에서는 참기름으로 대신하여 정착하였다.
3) 양 설의 비교
원래는 김을 간단히 밥에 싸먹는 쌈의 형태에서 시작된 것으로 현재의 충무김밥과 같이 김치나 젓갈, 국과 함께 먹었다.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는 설에는 일제시대에 일식의 김으로 만든 음식인 후토마키의 영향을 받아 속재료를 안에 넣고 먹기 시작했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일본의 마키의 밥도 항상 식초를 섞은 초밥으로 만들지만 한국의 김밥은 김의 한 장을 크게 말아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 먹는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astle7k&logNo=156425510
7. 분식의 유래 결론
대한민국에서 1960년대에 정부에서 쌀부족을 해결하려고 혼식(쌀과 잡곡을 섞어먹는 것)과 분식(밀가루 음식)을 장려하면서 발전했다고 합니다.
-분식점의 효시는 1961년 동성로에서 문을 연 미성당이고, 뒤이어 1963년 같은 상호의 미성당이 남산초등학교 맞은편에 나타난다. 이 두 미성당이 마침내 지역의 분식 문화 전파자가 되었다.
-분식(粉食)은 원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뜻하였다. 이 정의에 따르면 라면, 국수, 빵 등이 분식에 해당되었으나, 현재는 떡볶이, 김밥, 순대, 어묵, 라면, 닭강정과 같이 단가가 싸서 분식점 등에서 많이 조리·판매되는 음식들을 지칭한다.
출처(위키백과: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