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남참전 한국군은 반역군? ▣
지난 7월6일 밤 10시55분부터 1시간 30분 동안
방영된 「MBC 100분 토론」은
「베트남戰-우리에게 무엇인가?」란 주제로 한국군의
이른바 양민학살 여부에 관한 논란을 전개했다.
蔡命新 초대 駐越 한국군 사령관과 池萬元 군사평론가 협회 부회장 對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와 한홍구 성공회 대학교 교수가 참가한 이 토론은
현실과 이론, 경험과 推論(추론)의 대립을 보는 듯했다.
駐越 한국군의 양민학살 주장은 1997년경부터 월남 거주 한국 유학생의 논문과 기사로
우리 사회에 조금씩 소개되다가 작년 가을부터는 週刊誌 「한겨레21」을 통해
최근까지 집중 연재되었다.
「한겨레 21」의 기사들은 「미군보다 잔인 했던 용병」, 「아! 몸서리치는 한국군!」
「아이건 산모건 사정없이…」 「여성 돌아가며 강간한뒤 살해」 등의 大小 제목하에
당시 사건의 목격자라고 주장하는 월남인들의 말을 중심으로 보도한 것들이다.
지난 6월27일 오후 2시경 대한민국 고엽제 후유증 전우회(회장 양상규) 소속 회원
2400여 명이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 신문사 앞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전우들의 명예를 매도한 한겨레측은 즉각 사과하라』며
시위와 난동을 벌인것도 「 한겨레 21」의 이런 보도가 주된 원인이었다.
「한겨레 21」의 보도에 따르면 駐越 한국군은
「20세기의 광기와 야만 그리고 傭兵 (용병)」으로,
월남전은 「민족 해방세력과 반역세력 간의 대결」로 정의되고 있다. 반역군이자
침략군이기 때문에 잔혹한 양민 학살도 주저없이 했을 것이란 圖式(도식)이 깔려 있다.
「MBC 100분 토론」에 참석했던
蔡命新 (채명신·73·現 대한해외참전전우회 회장) 예비역 장군을 만나
越南戰(월남전)의 성격과 양민학살과 관련된 최근의 주장에 대한 의견을 들어 보았다.
▣ 월남참전은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 희생 ▣
―월남전의 성격이 再정립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높습니다.
『육본 작전참모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월남 파병을 준비했던 저는 파병 반대 입장이었습니다.
현지 상황을 알아보니 월남 정부는 몹시 부패해 있었어요.
게다가 베트콩들은 완벽한 게릴라 전술을 쓰고 있었고
전국이 非정규전의 전쟁터였습니다.
「이러다간 뒤에서 총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산주의란 부패를 먹고 사는 이데올로기입니다. 부패한 사회에 쉽게 뿌리 내리고
사람의 마음을 증오와 분노에 휩싸이게 하여 정권을 탈취합니다.
그런데 월남은 이런 조건이 다 갖춰져 있었어요』
―그럼에도 우리가 파병해야 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군의 개입이 확실시되자
미국은 투입 병력의 우선순위를 駐韓 미군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런 조짐은 이미 1961년부터 시작되었지요.
1960년 代 한국의 입장은 지금과 많이 다릅니다.
경제적, 군사적인 면에서 북한이 월등 앞서 있었거든요.
우리에게 경제건설은 안보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안전 보장은 駐韓 미군 2개 사단에 의해 가능했어요.
미국이 駐韓 미군을 빼가는 즉시 우린 1950년도로 돌아가는 상황이었습니다.
金日成 은 그 당시에 「우리가 공격하면 잃는 것은 휴전선이요, 얻는 것은 통일이다」
라며 호언장담하고 있을 때입니다.
결국 한국의 안보를 지키기 위해 파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 보면 되겠지요』
―참전 명령이 하달될 때 병사나 장교들은 어떤 의식을 갖고 명령에 따랐던 겁니까?
『당시 월남참전 부대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구성되었습니다. 지원제도 아니었습니다.
사병부터 장교까지 모두 명령에 따라 전선에 나간 겁니다.
물론 그들이 이런 저간의 사정을 알기 어려웠겠지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가 국가의 결정을 믿고 묵묵히 따라주었던 겁니다.
명분은 「自由 수호」를 위해서 우리가 우방국 월남에 간다고 했지만 참전군인들은
「결국 우리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 이니까」하는 당위성 정도는 누구나 갖고 있었어요.
그러지 않았다면 전쟁터에서 투항하는 부대가 속속 생겨났을 겁니다.
월남 참전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애국적인 희생이었습니다.』
―월남 참전 군인들이 傭兵이란 주장이 심심찮게 나오는데요.
『용병이라면 한국군의 작전권은 미군이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미군의 요청에 의해 우리가 파병하거나 철수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한국군은 독립적인 작전권을 갖고 있었고, 파병과 철수에서 최종 결정은
우리가 한 겁니다. 매 작전시 작전명령은 사령관인 제가 직접 내린 겁니다.
한국군이 용병이라면 내가 미국사람입니까?
용병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죠.』
▣ 하느님도 양민인지 아닌지 구분 못할 곳이었다 ▣
―요즘 양민학살 주장이 빈번하게 나오고 있습니다.
『월남엔 전략촌이 많습니다.
마을과 마을의 지하는 땅굴로 이어졌고
그 속은 베트콩 들의 주둔지입니다.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 서면 주민들이 나와
땅 속에 아무것도 없다며 안심시킵니다.
무더위의 정글 속을 수색 정찰하고 안전한 마을에 도착했다고 판단한 한국군들은
휴식을 취하지요. 그러는 사이에 지휘관을 포함한 여러 병사들이
땅굴 속에서 나온 저격병에 의해 쓰러집니다. ...눈이 돌지 않겠습니까?』
―그 당시 어린아이에게도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도 많습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전쟁터 근처에도 못 가본 사람들입니다.
월남전은 6· 25처럼 밀고 밀리는 全面戰(전면전)이 아닌 국지전이요,
게릴라전이었습니다. 전선이 따로 없었고 피아 구분이 안되어
군인들은 눈뜬 장님 같은 처지일 때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사령관인 나도 두 번이나 테러를 당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았습니다.
나에게 폭발물을 숨기고 접근한 여자는 열 두세살 정도 되는 아이였습니다.
사령관도 그 지경이니 장병들에게는 어떤 상황일지 짐작해 보시오.
월남 사람들은 1년에 농사를 3모작 합니다.
그중 3분의 1은 정부 세금, 3분의 1은 월맹군과 베트콩 식량으로,
나머지는 자기들 먹을 식량으로 나눕니다.
어린아이 호주머니 속에서 안전핀이 덜렁거리는 수류탄이 나오질 않나,
부녀자 치마 속에 권총과 소총이 숨겨져 있질 않나…
심지어 그들은 낮에는 월남 정부공무원이고, 밤이면 베트콩이나 첩자로 활동하기도
했어요. 한 가족이 월남 정부 공무원, 베트콩 첩자, 월맹군 첩자, 민병대 등으로
뒤섞여 살고 있는 집도 있었지요.
하느님도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어려운 전쟁이었어요.
옆의 戰友(전우)가 여학생으로 위장한 저격병에게 쓰러지면 그쪽으로
총을 갈기지 않겠습니까? 귀엽게 생긴 일곱살짜리 꼬마가 장난기 어린 동작을 취하면서
달려와 수류탄을 떨구고 도망갑니다.
피하지 못한 戰友가 쓰러지면 그 쪽으로 총을 쏘지 않겠습니까?
이런 반사적인 보복행위가 이뤄질 수 있는 상황은 어느 전쟁에서나 다 있고
월남전은 가장 심한 곳이었어요.
그렇다고 우리 軍이 양민을 무차별 학살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민간인, 특히 아녀자가 전투행위를 했을 경우 이들을 향해 발포하면
「양민 학살」 로 볼 수 있습니까?
『제네바 협약 제1추가 의정서 37조1항은 「배신행위의 금지」란 내용입니다.
배신행 위란 「戰時에 군인이 민간인이나 非전투원의 지위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트콩이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하고 한국군에 공격을 가하면
엄연한 전쟁법 위반행위입니다. 이땐 당연히 보복의 권리가 따릅니다.
비록 아녀자라 할지라도 수류탄을 숨기고 접근해 공격행위를 하면
아녀자 이전에 敵軍(적군)이 되는 셈입니다. 그들이 양민이란건 말도 안되죠』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는 「한겨레21 」 3월2일자에서
「월남전에서 전사 5000여 명에 적군 사살 4만7000여 명이란
무려 10배 가까운 전과를 올리는 이해되지 않는 전쟁기록을 남겼다.
무릇 게릴라 전쟁에서는 게릴라군보다 정규군의 피해가 높은 것이 보편적인
현상인데도 불구하고 10배가 넘는 한국군의 전과를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라며
이 예외적인 전과와 베트남 양민학살이 직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識者라면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척」 하고 나오니 세상이 어지러운 겁니다.
한국군은 8년 동안 연병력 32만여 명이 월남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이 중 5000여 명의 전사는 결코 적은 손실이 아니었습니다.
또, 강정구 교수가 게릴라戰 이 항상 이기는 전쟁인 줄 착각하는 것은
영화나 만화만 보았기 때문일 겁니다. 정규 전보다 非정규전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으면
어느나라나 전부 非정규전 부대만 보유했을 겁니다.
강단에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 할 교육자가 저런 식으로 글을 쓰고 가르쳐도
존경받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참담할 뿐입니다.
전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맹물 평화주의자들」이
요즘은 가장 양심적인 인물이 되는 모양이지요』
―양민을 죽이고 허위로 전과보고를 할 수 있습니까?
『항공 폭격에 의한 추정 사살자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地上戰에서의 전과 보고는
반드시 일정 비율의 무기 노획이 수반되어야 인정받습니다.
양민을 죽이고 허위보고한 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죠.
부대 지휘 통솔 경험이 없는 이런 교수를 위해 한마디 더 한다면,
정신병자가 아닌 한... 전쟁터에서 군인들은 대개 신앙심을 갖고 싸웁니다.
특정 종교를 믿건 안 믿건 善하고자 노력합니다.
죽음을 지척에 두고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작은 단위부대가 단체로 정신 착란에 빠져 양민을 학살했다면
이들은 머지않아 비슷한 일을 또 저질러 결국은 세상에 알려졌을 겁니다』
▣ 한국군은 「양민 보호」, 월맹군은 「양민 학살」▣
「한겨레 21」은 지난해 9월초부터 최근까지
월남인들의 주장을 보도하면서 한국군이 학살한
양민들의 수가 9000여 명이 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목격자라고 소개된 월남인들의 주장은
당시 한국군의 양민학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책을 몇번 보았다는 蔡命新 예비역 장군은 이런말을 했다.
『월맹이 통일한 지금, 현지인들이 월맹군에게 당했다고 할 것 같습니까?
한국이 만만하게 보이니까 우리더러 학살했다고 하는거죠.
게다가 당시에도 피아구분이 힘들었는데
지금와서 진상조사를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할 줄 알고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과 방송들은 월남전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학살은
일체 거론하지 않고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9000여명 이라고 했지요?
1968년 2월 「후에」 전투에서 월맹군은 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종교인, 외국인등
그야말로 「진짜 양민」 5800여 명을 단 한번에 처형했어요.
우린 그런 아수라장을 막으러 간 겁니다』
―당시 駐越 한국군의 작전개념은 어떤 것 이었습니까?
『제가 근무하는 동안 한국군은 미군과 달리 양민 보호 개념으로
「단절 및 섬멸 작전(Cut & Destroy Operation)」을 펼쳤습니다.
6·25 당시 非정규전에 익숙했던 저는 월남전이야 말로 非정규전의 전쟁이라 판단하고
물과 고기를 분리하듯 인민들과 게릴라들을 분리하는 작전을 밀고 나갔던 겁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은 누구나 사령관이 강조한
「100명의 베트콩을 포기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겁니다.
이 때문에 미군과 마찰도 있었지만 월남 주민들로부터 가장 신뢰받았습니다.
지금 월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원성이 잦다고들 하는데
이건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원하는 일부 사람들의 거짓말입니다.
월남에서 한국 군에 대한 원성이 1%라면 한국군에 대한 칭찬이 99%일 겁니다.
1973년에 우리 군대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을 때 자유 월남인들은
「다른나라 군대는 다 떠나도 따이한만은 계속 남아달라」며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 까지 벌였어요. 그런 우리더러 「양민학살을 한 傭兵」이라는 건
명예훼손 정도가 아니라 매국적 언동입니다.』
황해도 곡산 출신의 蔡장군은 6·25 당시 중령으로
유격부대 「백골단」을 조직하고 적진에 침투, 1000여명의 적사살 전과를 올렸고
인민군 對南유격대 총사령관 길원 팔과 참모들을 포로로 잡는 등
非정규전에 탁월한 군인이었다.
1965년 8월 金聖恩(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朴正熙 대통령에게 蔡命新 장군을
초대 駐越 사령관으로 강력히 추천했다.
이 배경에 대해 金聖恩 전 장관은
『蔡장군의 非 정규전 능력과 경험이 아주 우수했기 때문 』이라고 회고했다.
▣ 월남전을 잊으면 대한민국을 잃는 것 ▣
육사 5기생으로 1947년 4월8일 소위로 임관하여
부임한 곳이 제주도 9연대였다.
이미 남로당 지하조직에 의해 4·3 사태가 터져
제주도 전역이 월남처럼 피아구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소대원들도 좌익들로 가득찬 곳이어서 蔡命新 소위는 주야불문하고 그들과 친숙해지려
노력하며 마음을 돌리도록 애썼다.
이것이 주효하여 남로당 으로부터 암살 대상에 올랐지만
蔡소위로부터 감화받은 부하들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蔡命新은 6·25를 맞아 수많은 非정규전을 수행하면서 양민의 편에 서는 것만이
양민의 그늘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소탕할 수 있는 방법임을 체득한다.
그의 체험적 전투기술은 駐越 한국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친절한 따이한」이란 명성을 세워 한 ·월간 우호적 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월맹에 의한 통일 이후에도 현지로부터
「따이한」에 대한 좋은 인상이 지속되는 배경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駐越 한국군 사령관 蔡命新은 월남인들이 유교문화권에 오랫동안 젖어 있음을
간파하고 對民지원을 나가는 한국군에게 몇 가지 세부지침을 하달하기도 했다.
그중 쌀과 식량을 전달할 때엔 한꺼번에 전달하지 말고, 조금씩 갖다 주되
가능한 고급 장교나 고급 하사관이 직접 갖다주도록 지시 했다.
받는 입장에서 고마움이 지속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군의 전투력 중 對民지원에 7, 현지 전투에 3을 안배하는 전략을 고수했어요.
부패한 월남정부, 이방인인 미군, 전투만 하는 월맹군과 베트콩 등살에 고통받던
월남주민들에게 한국군은 천사였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더러 양민학살이라니…』
전쟁은 天災地變(천재지변)과 동격이다.
지진이나 홍수가 개개인의 기막힌 사연을 가리지 않듯, 전쟁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잔혹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지키려 애써 온 것이다.
蔡장군의 주장을 요약하면,
월남전은 대한 민국의 안보가 위기에 몰리지 않도록
미군을 대신해 참전한「조국 안보 수호 전쟁」이었고,
적군 앞에서 용감하게 싸운 勝戰( 승전)의 기록이 축적된
「승리의 전쟁」이 었으며,
참전 8년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아선상에서 탈출하여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게 만든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경제 후진국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글을 누비는 형제들의 노고를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에 감사할 줄 알았다.
2000년 경제 선진국을 넘보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형제들의 고통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蔡命新 예비역 장군은 마지막 말을 생각하는 듯 침묵하더니 이런 말을 했다.
『6·25를 잊으면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고,
월남전을 잊으면 대한민국을 포기하는 겁니다』
※이동욱 기자는 현재 월간조선에서 조갑제국장님과 함께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를 연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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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장군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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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5.0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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