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비는 승려들이 일상복으로 입던 납의(衲衣)를 수십 년 동안 기워 입은 것에서 유래됐고,
이는 점차 누비기법으로 발전해 방한과 내구성, 실용성 등이 뛰어나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됐다. 엄창현 기자 taejueum@idaegu.com
199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07호 누비장으로 지정받은 김해자 선생은 맥이 끊겨 가던 전통 누비 기법을 복원해
누비문화연구원을 설립, 전수자들을 교육하고 있다. 엄창현 기자 taejueum@idaegu.com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미망인 모씨는 두어 자 글로써 침자(針子)에게 고하노니, 인간 부녀의 손 가운데
중요로운 것이 바늘이로되,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에 흔한 바이로다. 이 바늘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 슬퍼함은 나의 정회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통재라. 아깝고 불쌍하다.”
일찍 남편을 잃고 바느질로 소일하며 지내던 조선시대 양반 가문의 유씨 부인이 오랫동안 아끼고 애용하던
바늘이 부러지자 바늘을 의인화한 제문을 지어 애통한 심정을 달랜 ‘조침문(弔針文)’의 앞부분이다.
고등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한때 ‘오호통재라’란 유행어를 전파시킨 명문장이다.
실과 바늘만 있던 조선시대에 작은 바늘 하나가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 짐작된다.
‘누비질’은 두 겹의 천을 포개어 안팎을 만들고 그 사이에 솜을 넣어 죽죽 줄이 지게 바늘로 꿰매는 전통방식의
손바느질이다. 옷의 보온성을 살리고, 쉽게 헤지지 않도록 보강하는 실용적인 기능과 함께 반복 홈질로 문양을
표현하는 장식성을 함께 고려한 바느질 기법이다.
이 누비가 점차 세분화되어서 바느질 땀수와 넓이에 따라 세누비, 잔누비, 중누비, 모양에 따라서 오목누비,
볼록누비 등으로 불렀다. 단순한 바느질을 넘어 옛 여인들의 정신세계이자 놀이문화였던 ‘누비’라는 말이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사용된 때는 조선시대이고, 월인석보에 “누비닙고 석장디퍼”라는 대목이 보인다.
이로 미뤄보아 ‘누비’는 스님들의 장삼 대신 덧옷으로 입던 납의를 일컫기도 하는데 현재도 스님들이 조각조각
기워 입었던 옷으로 일반에 알려져 있다.
◆ 우리의 자랑스러운 정신문화 유산
2000년 6월 우리 정신문화가 깃든 누비와 가장 잘 어울리는 곳이라 생각하고 경주로 터전을 옮겼다.
호젓한 작은 마을에 자리 잡은 장인의 경주 집 공방은 무명천을 덮은 작업대가 몇 대 나란히 놓인 작업실과
염색 방, 창고로 나뉘어 있다.
이곳에서 그는 전국 각지에서 누비를 배우고자 찾은 제자들과 숙식을 함께한다. 혼자 고군분투하며 어렵게
배웠던 누비 기술을 제자들에게 모두 공개하고, 좀 더 쉽게 배워갈 수 있도록 더욱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너그러운 스승이다.
그렇게 배운 제자들이 계속 늘어날 때 누비를 사랑하는 이들이 많아져 대중화는 물론 인심 넉넉한 좋은 세상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김해자 장인은 거의 매년 크고 작은 전시회를 국내외 각지에서 열고 있다. 힘든 여건 가운데도 애써 전시회를
열어온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현대여성들이 전통누비보다 훨씬 못한 서양식 누비인 퀼트에 먼저 눈이
쏠리는 현실을 누비장의 사명감으로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비는 퀼팅보다 훨씬 예술적이고 정교합니다. 퀼팅은 조각헝겊으로 무늬를 만들어가지만 누비는 바느질만으로
삼라만상을 다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퀼팅은 배우면서도 정작 우리 것인 누비를 외면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단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노력을 세상은 외면하지 않았다. 전시회가 열릴 때면 매일 수천 명의 젊은 주부들이 몰려왔고
외국인들도 큰 관심을 나타냈다. 그들은 ‘이런 누비옷이 다 있네’라고 감탄하며 산뜻하고 날렵하기까지 한 장인의
작품들을 하나 둘 마음의 옷으로 삼아서 가슴 속에 담아 갔다. ‘경주누비공방’과 2003년 서울에서 문을 연
‘누비문화원’을 오가며 그녀가 그동안 키워낸 제자만도 천 몇백 명은 족히 된다. 경주 공방엔 푸릇한 20대로만
뵈는데 자신의 나이를 38세라고 밝힌 임주한씨를 비롯해 전국의 대학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한 젊은 여성 6명이
숙식을 하며 누비를 전수받고 있다. 김해자 장인은 누비의 맥을 잇고 나아가 누비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위해
바느질 인생 40년을 걸겠다는 각오이다.
“서양이나 중국에서도 누비가 있었지만, 옷 한 벌 전체를 모두 누벼 만드는 문화를 가진 경우는 오직 우리뿐입니다.
우리 누비옷은 외국 사람들이 더 그 가치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지요. 외래문화에 찌든 우리는 이제 한복 입는
것조차 어색해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옷에 대한 가치를 우리가 인식하고 계승해야 합니다”
강렬한 눈빛을 담아 또박또박 말씀하시는 장인의 누비 철학을 전해 듣는 동안 누비는 기능으로서가 아니라 온 정성을
다해 보존하고 지켜나가야 할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 유산임을 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누비’는 온누리를 누빈다는
뜻도 담겨져 있듯이 우리의 누비가 세계적인 문화상품이 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에도 공감하면서 한 땀 한 땀의
바느질을 통해 우주와의 조화도 꿈꾸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권순진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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