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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는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을 하게 되는가? 사랑을 하기 때문에 아름답게 보이는가? 보는 사람에 관계없이 그 자체로서 아름다운 대상이 있는가? 누구나 아름답게 보지 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대상이 있는가? 왜 아름다운 것이 있고, 추한 것이 있는가?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눈에 있다.
아름다움은 보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아름다움의 가치란 우리 삶과 동떨어져 존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삶 곳곳에는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아름다움, 그 순수한 단어이기도 하다. 진도 아리랑의 서글픈 가락 속에, 이중섭의 게 그림 속에, 가난 속에, 도시 빌딩 숲 속에 행복은 존재하며 아름다움 또한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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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과학
독일의 정신과 의사 울리히 렌츠가 쓴 <아름다움의 과학>은 '미에 대한 우리의 지나친 선호'가 우리 사회에 얼마나 광범위하고 다양하게, 그리고 깊게 자리 잡고 있는지 조목조목 지적한다. 얼굴이 예쁘면, 태어나자마자 엄마에게 키스 세례도 더 많이 받고, 학교에선 선생님께 덜 혼나며 숙제 점수도 더 높게 받는다. 텍사스 법원이 지난 수년 동안 판결했던 사건 2235건을 조사해 보니, 죄를 지어도 예쁜 여성은 형량이 반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단적인 예다. 험상궂은 남자가 사기나 성범죄를 지으면 형량은 훨씬 늘어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사회적 프리미엄'이 된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렌츠의 책을 꼼꼼히 읽어야 하는 것은 이제 우리도 아름다움의 사회적 권력에 대해 정직하게 논의할 때가 됐기 때문이다. '외모의 아름다움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비현실적인 주장을 교과서처럼 반복하거나, '인간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며 세상을 탓하는 태도 모두 볼썽사납다.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가 좀 더 솔직해진다면, 최소한 '아름다운 외모가 그 사람의 사회적 가치를 높여줄 수는 있어도 인간적 가치마저 높여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정도에는 합의할 수 있지 않을까? 꽃미남 꽃미녀들이 우리보다 10배쯤 돈을 더 많이 버는 것은 이해한다고 쳐도, 우리가 그들보다 감옥에 더 오래 들어가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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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가치를 팔아야 행복하다’ 삶의 행복을 디자인 하라
자동차 세일즈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제운 씨. 그는 얼마 전 그 유명한 애플의 아이팟을 장만했다. 성능면에서는 타 경쟁사 제품과 비교가 됐지만, 디자인 면에서는 훨씬 월등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제운 씨는 아이팟의 디자인이 자신의 또 다른 가치를 대변해 준다는 생각이 들어 구매 후에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애플사의 아이팟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능과 성능 면에서 별 다를 것 없는 제품이 세계 시장을 흔드는 제품으로 자리매김했다.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문가들이 꼽는 최대의 성공 키워드는 바로 ‘디자인’에 있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고객들이 제품의 성능 못지 않게 디자인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비자들에게 ‘단순함’과 ‘섹시함’의 감각으로 디자인에 승부수를 던졌다. 물론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물론 성능면에서 애플의 제품들이 확장성이나 호환성 등에서 한발 뒤쳐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애플이 신상품을 선보일 때마다 디자인으로 소비자들의 관심을 끄는데는 매번 성공을 거두고 있다.
국내에서 디자인으로 승부를 던지는 기업들이 많다. LG그룹이 대표적이다. LG는 디자인경영센터를 통해 차세대 디자인을 선보이며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LG그룹의 구본무 회장은 “최고의 제품과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완벽을 추구하는 서비스를 통해 고객감동이라는 또 하나의 가치를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기업들이 디자인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자 하는 데에는 시장의 소비자들이 디자인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와 존재를 재확인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소비자들은 기업이 어떠한 방식을 통해 제품을 생산해 내고, 어떤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제품의 결과로 나타나는 보여지는 것, 즉 디자인을 통해 자신의 심미적, 효용적 욕구를 최대한 충족시킬 수 있는가에 관심이 있다.
심미를 담는 디자인
시각적인 아름다움의 추구는 이제 개인적인 취향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이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나의 물건, 나의 집, 나의 공간 등에서 벗어나 내가 다는 길, 우리가 만나는 장소 등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것.
사랑하는 이를 만나는 아름다운 추억 속에 아름다운 거리도 함께 기억될 수 있다면 그 거리는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또 하나의 소중한 장소가 된다.
이러한 일환일까. 얼마전 서울시는 ‘디자인서울거리’ 조성 사업의 1차 대상지로 대학로와 강남대로 등 10곳을 선정, 내년 말까지 디자인과 감성이 살아 숨쉬는 거리를 조성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서울시가 디자인 거리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디자인을 통해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사람들에게 감성적인 행복을 창출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경제적인 시너지 효과도 함께 얻겠다는 것이다.
디자인이 소비자들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행복과 함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미(beauty) 만을 추구해서는 안된다. 대상이 갖는 물질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정신적 아름다움까지 아우르는 심미(aesthetic)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제품이 주는 안락함과 편안함, 심리적 만족감 뿐만 아니라, 사랑과 우정, 행복, 가족애, 믿음, 공동체적 삶이 주는 가치 등 보다 의미 있는 것들을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이 요구된다.
세계적인 아트디렉터 스테븐 헬러는 “디자인은 시대의 명령(order)이고, 시간을 가꾸는 아름다움(aesthetics)이며, 대중과 나누는 커뮤니케이션(communincation)이자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이다. 그래서 디자인은 예술이기도 하며 또한 산업과 관련되는 서비스이기도 하다”고 말한바 있다.
사람들에게 삶이 주는 행복과 가치를 담는 그릇으로서 디자인은 미래의 화두가 될 것이다. 이제는 고객들이 원하는 삶의 행복을 디자인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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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 가치
아름다움, 즉 미(美)를 인식한다는 것에 대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미를 지각한다는 것은 육체적인 감각기관에 의한 작용이기 때문에 고차원적 이성능력에 못 미치는 저차원적인 정신활동이라는 견해다. 다른 하나는 미를 느끼는 것은 감각기관인 시각뿐 아니라 기억력, 상상력과 같은 고차원의 내적 감성능력도 필요하므로 저급한 정신활동만은 아니라는 견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의식은 후자의 견해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은 미와 선이 하나라고 하는 ‘미선합일(美善合一)’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현대로 올수록 말초적이고 감각에 치중하여 전자의 견해에 더 가까운 경향이 있다. 필자의 견해는 자연과 동질화되어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우리 옛 선인들의 미적 감성능력이 수많은 자극과 가상현실이 풍부한 현대인의 심미적 능력에 비해 그렇게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심미적 감수성이란 감각적 자극이 풍부하다고 잘 발달되는 것만은 아니지 않을까?
아름다움의 가치는 그것의 총체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의 심신능력을 통해 비로소 제대로 평가될 수 있다.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소나무의 아름다움은 과연 어떤 것에 기인하는 것일까. 아마도 사계절 잃지 않는 푸른 녹음, 철갑을 두른 듯 느껴지는 나무껍질, 힘찬 상승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곡선도 직선도 아닌 나무 줄기, 그 아래 있으면 아늑함을 베풀어주는 상부가지 등에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런 외적인 조건들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늘 푸른 녹음에서 느껴지는 굽힐 줄 모르는 선비의 기개, 거친 바위틈에서도 뿌리를 뻗어 내리는 필사의 생명력,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도 끄떡없는 강인함, 이런 것이 바로 소나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이처럼 아름다움의 감정은 겉의 모습뿐 아니라 그것이 일깨워주는 내재적 의미가 함께 결합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는 곧 선이라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에는 아름다움의 또 다른 측면이 있어 보인다. 숲과 나무의 아름다움은 미적 감흥을 넘어 삶의 한 든든한 신앙과 같은 경지로까지 이끈다. 나약한 소년시절, 세상의 거대함 앞에 자꾸 작게만 느껴지던 때 거대한 나무로 들어찬 숲속을 거닐면서 아버지와 같은 든든함을 느껴보았다. 짙은 숲속 길을 헤매며 산에 오르면서 이 세상과도 같이 거칠어 보이던 자연으로부터 두려움을 극복해보는 희열도 맛보았다. 서울 도심에 살던 유년시절 올라다니던 뒷산과 숲은 내가 한 청년으로 든든히 서게끔 도와준 또 한 분의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아름다운 숲은 미적 감흥을 넘어 인생에 대한 조감을 가능케 하고 그 뜻을 일깨워 주었다.
숲길을 지나 산위에 올라서면 성냥갑처럼 축소되어 펼쳐진 우리 동네를 내려다보면서 거대한 듯 위협적이기만 하던 이 도시가 별것 아님을 느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건물들과 길의 짜임새를 머릿속에 그려나가다 보면 길을 잃지 않을 자신감도 저절로 생겼다. 생각해보면 그 시절 느꼈던 자연의 아름다움과 감흥이 경관을 꾸미는 작업을 평생 직업으로 삼도록 인도해 주었는지도 모른다. 숲이 지닌 아름다움의 가치는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해주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길을 제시해주는 아버지와 같이 삶의 의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가 곧 선이 되는 경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숲은 어떤 모습일 때 우리에게 이러한 역할을 가장 잘 할 수가 있을까? 봄과 가을, 꽃과 단풍이 이루어내는 색감이 좋은 천연림의 숲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단풍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의 산과 지형이 아기자기해 거기에 자라는 나무들이 다양한 서식조건에 따라 드러내는 색조 변화에 기인한다. 반면에 서양은 거대한 지형조건 탓에 단풍을 보는 맛이 우리처럼 아기자기하지 못하다.
자연이 그렇게 좋다는 외국에 이민가서 오래 살아본 한국인들도 잊지 못하는 고국의 경관은 바로 이러한 지형의 섬세함과 다채로움에서 드러나는 자연스러움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또 다른 유익을 가져다 줄 숲의 조건이 있다. 그것은 미래를 꿈꾸고 의지를 키워줄 웅장한 숲이다. 우리 주변 산야에서 볼 수 있는 나무와 숲은 아직 어버이의 기품을 느낄 만큼 키가 장대하거나 그 품속이 깊지 못하다.
이웃나라 일본이 왕궁 소유의 숲을 수백년 동안 키워오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산림부국인 독일과 북유럽에 펼쳐진 광대한 평지 숲을 보았을 때 참 부러움을 느꼈다. 우리 산의 조건은 험준한 지형과 암반층이 많아 큰 숲을 이루는 데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치열한 전쟁과 개발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평지에 펼쳐진 광릉 숲을 지켰듯, 경제성이 떨어지는 생산조건과 험난한 지형 탓을 핑계로 돌리지 않고 가평의 우람한 잣나무 숲을 키워왔듯 조금만 더 크고 깊게 숲을 키워 보자. 그래서 우리 2세들은 숲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우리 세대는 숲이 가진 아름다움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아왔기에, 후손들만큼은 숲이 가진 웅장미가 얼마나 든든한지, 숲이 가진 정연미가 얼마나 반듯한지, 숲이 주는 공간감이 얼마나 아늑하고 깊은지 스스로 감지하는 경험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숲을 멀찌감치에서 보아왔던 외부적인 경관체험에만 익숙해 있다.
숲속 길을 걷거나 수림 밑에 누워 숨을 고르고 땀을 식히면서 올려다보는 숲속 내부자로서의 경관체험이 절대 부족하다. 숲의 심미적 가치를 제대로 깨달으려면 멀리 떨어져 산을 바라보는 것 같은 경험에 만족하지 말고 숲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 보자. 그러면 숲이 보인다. 좀더 들어서면 약동하는 생명이 보이고 또 인생도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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