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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혼의 선객 배동신 |
배 (1947) 90.5x72㎝ 유화
일본 하네다 공항 세관에서 한 여인과 세관원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행색으로 보아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미술작품을 여인이 소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라한 행색으로 미루어 훔친 고가 미술품을 위장반입하려는 게 분명했다. 여인의 등엔 칭얼대는 딸이 업혀 있었고, 손엔 어린 아들이 매달려 있었다. 취조하듯 세관원이 다그쳤다.
"이 작품들이 누구의 것인가요?"
"제 것이에요."
"작품을 그린 작가가 누구인가요?"
"제 남편이에요."
"남편의 이름이 무엇이지요?"
"…"
여인은 웬일인지 한참을 머뭇거렸다. 도망치듯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나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남편이라면서 이름을 못 대다니 훔친 게 틀림없군요?"
생각을 정리한 여인의 입에서 이내 단호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작업중인 배동신
"제 남편의 이름은 배동신!"
세관원은 그 즉시 한국의 미술협회로 전화를 걸었다. "배동신이라는 화가가 한국에 있습니까?" 당시 한국의 미술협회는 아직 홍익대학파와 서울대학파가 통합되기 이전인 혼란기였다. 화가의 명단이 제대로 파악돼 있을 리 없었다. 한 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건너오지 않았다.
이런 훌륭한 작품이 초라한 여인의 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자체가 수상쩍은 일이었다. 압수하고 수사의뢰를 부탁하면 사건은 전모가 드러날 것이다. 세관원이 전화기를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이었다. 전화선을 타고 희미하게 대답이 건너왔다.
"아, 있다네요! 지방에서 활동하는 작간데 활동이 그리 신통치 않아서 파악하는데 늦었습니다."
명부에 기입되지 않아서 그런 작가는 한국에 없다고 말할려는 참이었는데 때마침 미협 사무실에 놀러왔던 한 화가가 남도지방에서 활동하는 화가라고 귀띔해주었던 것이다.
세관원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그리는 화가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니. 그동안 통관되는 예술품을 감식해온 안목으로 봐서는 여인이 지닌 작품들은 국보급의 엄청난 작품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배동신의 일본인 아내 ‘와타나베 마사에’였다. 한국동란 후의 엄청난 혼란과 가난 속에서 그녀는 도저히 아들과 딸을 키울 수 없음을 절감하고 도망치듯 한국을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한국을 빠져나오면서 그녀가 챙겨온 것은 남편이 버려둔 수채화 7점과 아이들 뿐이었다.
초라한 가방에서 발견된 이 수채화들로 인해 일본 하네다 공항은 갑자기 떠들썩해져버렸다. 기자들이 취재를 해대고 신문 방송을 통해 이 사실은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공항에서의 이 사건으로 배동신은 일본에서 먼저, 그리고 한국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일본의 신문과 NHK 등에서 여인의 짐짝에서 발견된 놀라운 그림이라며 떠들어대자, 한국에서도 깜짝 놀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수많은 화상들로부터 매도를 부탁 받았지만 마사에는 굳이 거절을 했다. 남편의 그림이 한꺼번에 폭발하듯 꽃피워질 때를 그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화상(1953) 38x27㎝ 수채화
일본 여인 와타나베 마사에가 배동신을 만난 것은 가와바다 미술학교 시절이었다. 마사에는 그곳의 유명한 미술교수의 딸이었다. 당시 배동신은 여수항에서 밀항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와 가와바다 미술학교에 어렵게 입학했다. 무일푼으로 건너온 그는 신문배달, 당구장 잡일 등 온갖 고생을 하며 그림공부를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43년 신인미술가의 등용문인 <자유미술창작가협회전>에 <초상>이라는 작품을 출품해 입선의 영예를 안았다. 그 그림이 우에노 미술관에 내걸리자, 당시 일본신문들은 "조선의 젊은 천재 우에노에서 꽃피다." 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다. 한국유학생 환영회를 겸한 축하자리에서 이중섭은 아리랑을 불러 배동신의 일본 등단을 축하해주었다. 배동신의 실력과 기질이 화려한 앞날을 예고하며 선뜻 싹을 내밀던 시기였다.
배동신의 그림을 지켜보던 마사에는 한 눈에 반해버렸다. 그림에서 그토록 투명한 집중을 그녀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다. 아무런 기교도 드러나지 않는데 그림은 완벽했다. 선은 꾸밈이 없으나 모든 움직임을 포착했고, 색채는 물빛이었으나 모든 것을 담고 있었다. 선禪과 예술이 한 몸이 돼 뿜어내는 광휘에 그녀는 눈 멀어버린 것이다.
무등산(1968) 78x55㎝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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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신의 몰입ㆍ열정 탄복
日 전설적 화가 호쿠사이와 비교
일본에서 그림공부를 했기 때문일까. 흔히 배동신을 일본의 전설적 화가 호쿠사이와 비교한다. 일본에서는 1800년경에 활동한 호쿠사이에 대한 이런 일화가 흘러다닌다.어느날 지인이 찾아와 수탉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호쿠사이는 일주일 후에 오라고 말했다. 일주일 후에 그가 다시 찾아 왔을 때 그는 다시 한 달을 연기해 달라고 부탁했다.
지인이 한 달 후에 찾아 왔을 때 호쿠사이는 다시 두 달을 연기했다. 두 달 후에 왔을 때 다시 6개월을 연기했다.
매번 그런 식으로 어느덧 3년이 흘러갔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기다림에 지쳐버렸다. 3년이 지났을 때 그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찾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호쿠사이가 다시 연기하려는 눈치가 보이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며 당장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릴 것을 요구했다.
여인상(1954) 13x21㎝ 수채화
호쿠사이는 알겠다며 그 자리에서 붓과 종이를 꺼내더니 순식간에 수탉을 그려냈다. 그것은 지금껏 볼 수 없는 최고의 명화였다. 그러자 지인은 더욱 분노하면서 말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릴 수 있으면서 왜 3년이나 기다리게 했소?”
호쿠사이는 말없이 지인을 자신의 화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놀랍게도 그 화실의 사방벽과 방 안에는 지난 3년 동안 밤낮으로 습작한 수탉그림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호쿠사이의 전설은 감동적이지만 일본 특유의 과장과 인위의 모습이 배어있다. 배동신의 몰입과 열정이 호쿠사이보다 덜하겠는가? 천재성을 타고난 뒤 최고의 몰입과 노력을 경주하지 않으면 배동신이 남겨놓은 지금의 위대한 작품은 나올 수가 없다.
배동신은 한 점의 수채화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수 백장의 스케치와 초상을 그린다. 어떤 화가도 그의 끝없는 습작과 준비작업을 능가하기는 힘들 것이다. 술 마시거나, 특별한 일 외의 모든 시간을 그는 작업에 몰두한다.
커다란 동양화 붓을 이용해 직접적이면서 빠른 공격을 선호하는 그의 모습은 위대한 검객이 검무를 추거나 면벽의 선객이 삼매에 몰두하는 듯한 몰아의 모습이다.
이처럼 타고난 천재성과 최고의 몰입만이 천상의 풍경을 지상까지 견인해낼 수 있는 것이며, 의식의 내부 가장 깊숙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영혼의 세계를 화판에 인양해낼 수 있는 것이다. 타고난 천재성과 끝없는 숙련만이 눈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천상의 세계와 영혼의 기척, 우리는 이제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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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영혼의 선객 배동신 | ||||||
日 여인과의 사랑은 불타오르고… 日미술대전서 입상 천재성 입증 - 결혼반대에 나주로 사랑의 도피 - 산천 담아내며 '남도시대' 개막
일본의 부유층 미술 여학도 와타나베 마사에가 빠진 곳은 사랑의 불구덩이였다. 예술가의 사랑방식은 말릴 수 없는 결행인 것. 식민지국 천재를 향한 마사에의 사랑이 그러했다. 배동신의 그림에 시선이 가 닿는 순간, 영혼이 먼저 숨막힐 듯한 속도로 달려나가 가슴에 부딪히고 질식해버렸다. 극도의 어려움에 빠져 익사해가고 있는 식민지국 청년의 손을 순식간에 나꿔채고는 펄쩍 뛰어오른 뒤, 현실 바깥으로 튕겨나가 차가운 나락에 함께 나뒹굴어 버린 것이다.
2004년 여수 자택에서 배동신(왼쪽)씨가 부인(가운데)과 함께 찍은 사진
절박한 사랑은 대부분 불행의 뇌관 위에서 시작되는 것. 그 뇌관마저 사랑을 위한 장식처럼 보이는 법. 지배국 상류층의 딸과 가난한 식민지국 청년 사이엔 사랑의 전율 뿐,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조선장 1952년 34 x 25Cm. 유화
일본의 신문이 '조선의 천재 우에노에서 꽃 피다'라고 대서특필하자 억눌려오던 한국 유학생들은 자부심으로 뭉쳤다. 당시 일본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유학하고 있었다. 이중섭, 강용운, 양수아, 박고석, 신상옥 등 울분을 안고 있는 한국의 유학생이 20명이 넘었다. 입선 축하자리에서 이중섭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아리랑을 불렀다. 고화흠(원광대 전 미술대학장) 씨에 의하면 한국 유학생들은 그 전엔 거의 모임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각자 학비조달을 위한 신문배달 등의 온갖 잡일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배동신의 입상은 그 와중에서도 이들의 정신을 결집하는 계기가 됐다. 이때부터 서로의 사정을 살피고 도우며 정보를 나누기 시작했다. 당시 미술유학생들에게는 물감 등의 화구가 극도로 부족했다. 흰색이나 푸른색 물감을 선호하는 사람은 붉은 물감이나 녹색이 남아돌았으므로 이것들을 서로 나누는 방식들이 생겨났다. 종이를 구하기 힘들었으므로 자연스레 다른 화판을 구하는 방법이 모색되기도 했다.
적의(赤衣)의 여인 1964. 62 x 40Cm. 유화
그 무렵,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수채화의 새로운 기법이 들어왔다. 수채화의 물맛과 자연스런 번짐을 배동신은 발견하고는 흠뻑 빠져들었다. 배동신만의 ‘영혼의 번짐기법’을 익힌 때가 이때다. 이 어려운 시기에 그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자신만의 ‘수채화 순수기법’을 터득하고는 갈고 닦기 시작한 것이다.
원 필자는 이 작품을 위의 <적의의 여인>으로 표기했으나 크기의 비례로 보아 편집에서 실수한것 같다. 이작품은 <무등산>을 그린것 같다. 다음 기회에 작품 도판을 찾아 확인이 필요하다.
사랑에 눈 먼 두 사람은 전쟁의 폭격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구한 배표를 들고 짐짝처럼 배의 밑창에서 숨죽이며 한국에 도착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쟁의 폭격과 부모의 결혼 결사반대를 피한, 사랑의 도피행. 1945년 2월 그렇게 그들은 나주 금천면에 어렵게 신혼살림을 펼쳤다. 친형이 그곳에서 조그만 과수농장을 운영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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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전에 화집에서 봤던 작품인거 같아요,, 다시보니 느낌이 새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