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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문학사
1. 원시문학
1) 구석기 시대의 문화와 언어 예술
원시공동체였던 구석기시대에는 사냥이 잘 되도록 하는 주술이나 의식이 공동의 관심사였으므로 이와 관련된 사연을 노래나 말로 풀이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신석기시대로의 전환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전환에서 가장 중요한 계기는 농사의 시작이다. 따라서 농업 노동요나 추상적 사고의 상징적 표현을 특징으로 하는 신화 등이 신석기시대에 이르러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자에서는 노래의 종류나 가창 방식의 기본이 마련되었을 것이며, 후자에서는 수호신의 유래를 무당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주관하여 굿을 거행했을 것이다.
2. 고대문학
1) 건국 신화, 국중 대회, 건국 서사시
文學史에서 둘째 시대가 시작된 증거는 建國神話의 출현으로, 이는 국가 성립을 뜻한다. 건국 신화는 정복민이 원래의 신화를 가져와서 선주민의 신화를 보태고, 건국을 위한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나타낸 것으로 국가적 질서 수립을 위한 이념까지 표현하였다. 국중 대회는 농사가 잘 되게 하자고 굿을 하면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춘 행사로, 신석기시대 이래 농업 사회의 굿놀이였다. 임금이 무당이었고, 하느님을 섬기는 굿과 더불어 건국 시조를 섬기는 굿도 했다. 이때 건국 시조신의 내력을 서사시로 들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의 이념은 중세의 보편주의와 구분되는 자기 중심주의였으므로 어느 정복 집단이든 각기 나름대로 건국 서사시를 내세우고 상호 배타적인 選民意識을 가졌다.
2) 고조선의 경우
고조선의 건국 서사시인 壇君神話는 최초의 건국 서사시이다. 桓雄이 熊女와 혼인한 것은 天神族과 地神族의 결합이며, 天符印은 무당 임금의 권능을 상징하는 물건이다.
3) 부여, 고구려계의 전승
부여의 건국 서사시는 解慕漱 解夫婁 동명 주몽 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천신족으로서의 우월감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임금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 지배 체제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迎鼓라는 국중 대회도 있었는데 임금이 무당이 되어 하늘에 제사 지내는 나라 굿을 하였으며, 이 때 건국 서사시도 불리워졌을 것이다. 부여의 건국 신화는 古朝鮮의 것과 西나라의 것을 보탠 내용이다. 高句麗의 시조인 주몽은 고귀한 혈통을 지니고 비정상적으로 출생한 다음, 凡人과는 다른 탁월한 능력을 타고 나서는 어려서 버림 받아 죽을 고비에 이르렀다가 양육자에 의해 구출되고, 자라서 다시 위기에 부딪쳤다가 위기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승리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바로 '영웅의 일생'이며, 후대 敍事文學에서 재창조된다.
4) 삼한, 신라, 가락, 탐라 쪽의 사정
마한에는 나라의 무당이라고 할 수 있는 종교적 지배자가 있어서 굿을 주관하였지만, 굿 가운데에 건국 신화가 포함되는 단계에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新羅의 赫居世는 하늘에서 바로 내려왔으며, 특별한 고난을 겪지 않고 왕이 되는데 알영과의 관계로 보아 金氏族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연합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비해 昔氏族의 유래는 주몽과 같이 脫解는 비정상적으로 태어나서 버림 받았다가 왕이 되는 내력을 갖는다. 탈해는 자신의 조상이 대장장이라고 했는데, 이는 금속을 다루는 정복자를 뜻한다.
駕洛國의 首露는 혁거세의 경우와 흡사하나 배필을 맞는 과정은 탐라국과 비슷하다. 탐라의 건국 시조 高乙那, 良乙那, 夫乙那는 땅에서 솟았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밖에 日本과의 관련이 있는 건국 신화도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일본으로 간 것이 많다.
5) 짧은 노래 몇 편
노동요나 굿노래는 본래적인 양상을 계속적으로 유지하면서 詩歌文學의 저층 노릇을 해 왔다. '龜旨歌', '公無渡河歌', '黃鳥歌'는 노랫말이 남아 있는 최초의 작품이며, 우리 노래의 기본적 형식을 갖추고 있다.
'龜旨歌'는 굿노래의 한 대목이나, 굿을 하지 않을 때에도 누구나 부를 수 있는 노래로 떨어져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公無渡河歌'의 주인공은 무당이라고 할 수 있다. 무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것으로 작자는 白首狂夫의 아내가 1차적, 麗玉이 2차적 작가이며, 이 노랫말을 한문으로 정착시킨 사람이 3차적 작가이다. 이 작품은 그 유래담으로 보아 우리의 것이 분명하다. '黃鳥歌'는 나라 안팎에 시련이 많았던 流離王이 자아와 세계의 동질성이 흔들린 혼란 속에서 자기 고독을 생각하며 일반적인 사랑 노래를 부른 것이다.
이처럼 짧은 노래가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된 것은 사회적 유대나 질서가 흔들리면서 문학의 양상이 흔들린 증거로 볼 수 있다. 이들 노래는 굿노래나 의식요에 의거해서 부른 것이나 노래 부른 이의 절실한 심정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계를 자아화하는 방향을 택해 서정시로 변한 것이다.
6) 전설 민담 시대로의 전환
처음에는 신화가 중요했으나 세계의 자아화를 위하여 전설과 민담이 등장했다. 전설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을 세계의 우위에 입각해서 다루므로 자아의 패배를 귀결로 삼으며, 합리성을 추구하다가 더 큰 불합리에 부딪치는 이야기이다. 민담은 전설과 표리의 관계에 있는, 자아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이야기이나 전설에 비해 덜 나타난다.
3. 삼국시대
1) 한문학의 등장과 그 구실
⑴ 한자의 수용과 활용
말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정확성을 확보하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선 전달을 위해 생각을 눈으로 볼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게 되었다. 추측컨대 우리 나라에서의 경우, 그림이나 부호로 최소한의 기록을 한 것은 중국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며, 다만 중국에서 발전된 한자를 가져오는 편이 유리하다는 판단에서 우리가 만든 것은 글자로 발전시키지 않은 듯하다. 그런데 한자는 뜻글자였기 때문에 다른 민족이 그것으로 문장을 적으면 말을 그대로 나타낼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한자가 수용된 시기는 고조선 시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경우, 건국초 이른 시기에 이미 한자를 사용했으며, 한문으로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을 편찬하였다. 이런 능력은 고구려 자체에서 키웠다기 보다는 고구려 유민이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신라는 한문을 수용한 것이 삼국 중에서 가장 늦었는데, 3세기 경에는 지체가 낮아도 글을 쓰고 계산하는 능력이 있으면 벼슬에 오를 수 있었다. 여기서 육두품의 유래를 엿볼 수 있다.
삼국을 건국한 것은 군사적인 귀족이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관습을 교정시키며, 전승을 기록하고 글로 계산을 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효율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한자를 아는 사람을 발탁해서 그런 일을 맡기게 되었다. 이런 데에서 초기의 한문이 나타났는데 이는 실무 기술적인 면에서나 소용되는 글이었고, 이념적 표현이거나 문학적인 창작은 아니었다. 초기의 한문은 고대 문학에서 중세 문학으로 넘어가는 이행기의 현상을 나타내 준다. 고대 문학이 우리말 문학의 시대이고, 문화적인 자기 중심주의의 속성을 지녔다면, 중세 문학은 한문학을 상층의 공식적인 문학으로 삼고 우리말 문학은 기층 문화로 발전하도록 내버려 둔 시대의 문학이며, 중국에서 다듬어진 동아시아 전체의 공동 文語와 인도에서 생겨난 불교를 채택하면서 문화적 보편주의를 구현했다는 성격을 지닌다.
한문의 수용과 발전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우리말 문학에 의한 문화적 자기 중심주의가 기층 문화의 영역으로 떨어진 것은 불행이다. 하지만 문명권 전체의 공동 문어와 세계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지혜를 서로 나누고 고대적인 모순을 극복하는 사회 변화에 상응하는 이념적 예술적 향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 측면이다. 황제를 함께 인정하는 영역 안에서는 지배층에 속하는 문인이라면 누구나가 공동의 문어로 된 같은 격식의 시를 지을 수 있는 데에서 서로의 동질성이 확인되어 중세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환제의 나라에서조차 口語로 된 문학이 일어나 공동의 文語를 불신하게 되자 근대로의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문을 가져와 사용하는 데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우리말과 어순이나 문법이 아주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런 까닭에 한문 문장과 우리말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는 노력이 여러모로 시도되었고, 따라서 본래의 한문과 우리 말투의 한문 두 가지가 사용되었다.
⑵ 나라의 위업을 알리는 문학
삼국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가면서 한문을 수용하고, 율령을 반포하며,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적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 중 한문 수용이 선결 과제였고 불교는 일반 백성들까지 사람은 누구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명분론을 담당하였다. 또 차별과 수취를 제도화하고 집행하기 위해서는 유교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문으로 문장을 쓰는 능력이 우선 필요하게 되었다. 여기서 건국 서사시를 기록하게 되어 비로소 기록 문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국사 편찬에 종사한 사람을 태학박사, 또는 박사라고 했고 신라에서는 문사라고 했다. 이들은 어느 정도 그 직위가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는데 후에 신라에서는 이들이 고급 문학을 담당하게 되어 古來로부터 이어온 문학 담당층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군주들은 다투어 碑를 세웠다.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은 현존하는 문학 작품 중 연대가 확실한 최초의 것으로, 사실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등, 건국 서사시 이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중원비는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서 신라를 아우의 나라로 삼은 것을 계기로 세운 것인데 이두식 표기도 들어 있다. 신라의 赤城碑는 신라가 북쪽으로 진출한 것을 서술하였는데 문체는 한문이라기보다 이두에 더 가깝다. 진흥왕의 巡狩碑에서는 고유 명사에만 이두식 표기가 쓰였고 나머지는 한문으로 되어 있다.
⑶ 국내외의 정치 문서
다른 나라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한문으로 된 국서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는 외교상의 용건을 전달할 뿐 아니라, 문화적 역량을 과시하는 구실까지 했다. 이러한 국서는 넉 자나 여섯 자씩 짝을 맞추는 변려문이어야 하는데 백제의 '七支刀의 名文'이나 북위에 보낸 국서, 그리고 신라의 '致唐太平頌', '答薛仁貴書', '乞罪表' 등에서 잘 보인다. 이러한 외교 문서의 작성자로는 신라의 强首 등이 유명하다. 그밖에 현존하는 최초의 한시인 乙支文德의 '與隋將于仲文詩'는 반어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2) 노래의 새로운 모습
⑴ 고구려 노래
지배 체제가 정비되어 가면서 상층의 문화와 하층의 문화가 분리되었다. 상층의 문화로 '樂'이 생겨났다. 詩 歌 舞의 종합적인 공연이면서 통치 체제를 상징하고 나라의 위엄을 자랑하며, 밖으로 문화 수준을 드러내고 안으로 백성을 감복하게 하는 것으로 舞樂과 歌樂으로 구분되었다. 이는 질서 유지가 특히 중요한 구실이었으므로 禮樂으로 일컬어지기 일쑤였다. 자료로 남은 것은 세 편이다. '來遠城'은 오랑캐가 귀순하면 머무르게 한 성으로, 이를 기념하여 지은 노래이다. '延陽'은 어떤 사람이 남에게 쓰이는 바가 되어 죽기를 무릅쓰고 열심히 일하다가 자기의 신세를 나무에다 비해서 노래한 것이다. '溟州'는 시련을 극복하고 사랑을 성취한 노래이다.
⑵ 백제 노래
백제의 음악은 일본과의 교류에서는 뚜렷이 나타나지만 다른 자료는 거의 남아 있는 것이 없다. '高麗史' 樂志에 다섯 편의 제목이 전하는데 산 이름을 제목으로 한 것이 4편, 여인이 지어 부른 것이 4편인 것이 특이하다. '無等山'은 그 산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기뻐한 노래이고, '智異山'은 백제 왕의 폭정을 규탄한 노래이다. '方等山'은 도적에게 잡혀 간 여자가 자기 남편이 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을 풍자한 노래이고, '禪雲山'은 남편이 부역을 나갔다가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아내가 산으로 올라가 기다리며 부른 노래이다. '井邑'은 '樂學軌範'에 '井邑詞'라는 제목으로 노랫말이 남아 있다. 형식은 한 줄이 두 토막씩이고 모두 여섯 줄인데, 다시 두 줄씩 합쳐 보면 네 토막씩 석 줄의 형식이어서 시조의 형식과 상통한다. 이는 우리 노래의 기본형의 하나이다.
⑶ 신라 노래, 이른 시기의 모습
유리왕 5년에 지어진 '도솔가'는 歌樂의 시작이 되었는데, 이는 나라를 편안하게 하자는 주술, 또는 기원을 곁들이면서 국가적인 질서를 상징하는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會蘇曲'은 여자들의 길쌈 경쟁에서 불려진 노래다. 본래 樂은 舞 曲 歌를 포괄한 개념이었으나 뒤에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눌지왕이 지은 '憂息曲'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 있던 아우가 귀국하자 잔치를 베풀어 지은 것이다. 신라의 궁중 예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용이 풍부해졌고 우륵은 가야금으로 새로운 음악을 만들었다. 그밖에 개인적인 감정을 담은 노래도 많이 불리워졌다.
⑷ 향가, 사뇌가
향가는 梵聲과는 대립적인 위치에 서는 우리말 노래이고 國仙之徒가 지어 부르는 것으로 악기 반주는 없었으며 사설이 중요했다. 향가는 우리말로 된 최초의 기록 문학이고 개인 창작시이다. 기본 형식은 두 줄이고, 이를 거듭하면 넉 줄이 된다. 다섯 줄 형식의 첫 예는 '彗星歌'로, 이는 사뇌가라고 불린다. 사뇌가는 신라 귀족 문화가 사상적인 수준을 갖추어 세련되는 단계에 이르러 개인 창작의 서정시가 된 것으로 화랑의 사상을 정신적인 내용으로 하고, 거기에 불교를 보탰으며, 화랑의 무리에 속한 주술사이자 승려인 지도자가 시인 노릇을 하며 주로 창작한 것이다. 사뇌가는 남아 있는 자료에 의하면 6세기 말경에 처음 나타났다고 할 수 있으며, 사뇌가의 잔존 형태인 '悼二將歌'나 '鄭瓜亭曲'을 고려한다면 12세기 정도까지 지속되었다.
3) 향가의 작품 세계
⑴ 민요 계통의 노래
'薯童謠'는 진평왕 때 서동이 지은 것이라고 하나 원래 민요였던 것이 향가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상하층을 나누는 사회적 장벽에의 불만이 민요에 고유 명사만을 갖다 붙이고 그럴듯한 이야기를 꾸민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風謠'는 민요를 뜻하는 말로 노동요이다. 사설 중의 '서럽더라'는 노동의 괴로움을 말한 것이기도 하고 인생의 무상을 표현한 것이기도 한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까닭에 단순한 민요로 남지 않고 향가에 편입된 것이다. '獻花歌'는 꽃을 꺾어 바치면서 부른 노래로 한시로 된 '海歌'와 연결되는 작품이다. 수로 부인을 귀신들이 납치했다는 점으로 보아 수로 부인은 무당이었던 듯하고, 따라서 두 노래는 굿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같은 맥락으로 '견우노옹'도 굿에 등장하는 인물로 보면 된다. '헌화가'는 상층의 무당이 정치적인 목적과 관련해서 활용하여 향가에 편입된 듯하고, '해가'는 '구지가'를 연상하게 하는 점으로 보아 건국 서사시의 일부가 신라에 이르러 민간에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⑵ 화랑의 노래와 그 변모
'彗星歌'는 진평왕 때 融天師가 지은 노래로 융천사는 하늘의 일을 관장하는 천문관이고, 변괴를 물리치는 주술사인 까닭에 국왕의 고민을 해결해 주면서 화랑의 무리를 위해 노래를 지었다. 주술적 사고 방식 위에 화랑의 기백을 찬양하는 말을 덧보태면서 격조 높은 암시를 한 작품이다. '慕竹旨朗歌'는 죽지랑이란 화랑을 찬양하고 사모한 노래로 得烏가 지었다. '處容歌'와 함께 넉 줄 형식의 노래로 좀더 사뇌가에 가깝다. 이 노래가 지어진 효소왕 때에 이미 통일달성기의 고매한 이상이 무너지고 지배층이 횡포를 자행하는 사태가 벌어졌음을 알 수 있다. '怨歌'는 효성왕 1년에 信忠이 지은 노래로 주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 주술은 '혜성가'에서처럼 보편적인 이념을 추구하는 데 쓰이지 않고 개인적인 영달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있다.
⑶ 월명사와 충담사
月明師는 '도솔가'와 '祭亡妹歌'를 지었다. '도솔가'는 경덕왕 때, 정치적인 위기를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대응으로 타개하고자 하는 왕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두 줄 네 토막 형식이다. 유리왕 때에도 '도솔가'가 있었던 점으로 보아 '도솔가'는 노래 갈래 이름으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는 노래이다. '제망매가'는 월명사가 죽은 누이를 위해 제를 올릴 때 부른 것으로 다섯 줄 형식인 사뇌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월명사는 화랑이 밀려나는 시대에 태어나 길거리를 방황했고, 고독한 시인으로 미타를 찾아 피안을 희구하는 생각도 가졌으며, 개인의 노래를 지어 내면적인 정서를 토로하기도 하였다. 忠談師는 '安民歌'와 '찬기파랑가'를 지었다. '안민가'는 경덕왕의 요청에 따라 지은 것으로 '도솔가'와 마찬가지로 나라를 편안하게 하고자 하는 노래이나, 보다 정치 상황과 밀착된 구체성을 갖는다. '찬기파랑가'는 몰락한 화랑을 찬양한 것으로 사뇌가의 전형적인 작품이며, 사뇌가가 갖추어야 할 높은 뜻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 숭고와 비장이 함께 보이는 노래이다.
⑷ 불교 신앙의 노래
'願往生歌'는 廣德이 지은 노래로 종노릇을 하는 천한 사람도 불도를 닦으면 관음보살이 될 수도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千手大悲歌'는 승려가 만들어 놓은 기도문을 5살 된 希明으로 하여금 외우게 하여 그 아이가 작자인 것처럼 알려진 노래이다. '遇賊歌'는 승려 시인인 永才가 지은 것으로 이 때에 들어 사뇌가는 하층민에게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4) 불교 문학에서 문제된 이치와 표현
⑴ 불교사와 문학사
고대적인 자기 중심주의에서 중세적인 보편주의로 이행하는 데에는 불교 문학이 가장 긴요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불교 문학은 건국 서사시의 단계를 넘어선 시기에서 가장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방대하고도 난해한 불경의 전래에 의해 삼국의 사상적 수준이나 표현 능력이 전례 없이 향상되었다. 고구려는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였고, 한동안 신라에 불교를 가르치는 등,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다. 백제 불교도 번역과 저술을 독자적으로 했다는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 못지 않았던 듯하다.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었으나 일단 공인된 뒤에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불교가 세속의 이념으로 자리를 굳히는 한편, 불교에 대한 저술도 방대했다.
⑵ 원효
元曉는 '金剛三昧經論'을 지었으며 문학 사상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고 철저하게 다뤘다. 그는 유와 무의 구별을 넘어서고, 진과 속을 아우르는 데 진정한 삶의 길이 있다고 하면서 어디 치우치지 않고 거리낌 없는 인간에의 길을 찾는 것을 자기 임무로 삼았다.
⑶ 원측, 의상, 혜초
圓測은 유식학을 꿰뚫어 남보다 앞서 그 이치를 풀어 밝히는 업적을 이뤘다. 義湘은 화엄 사상의 체계를 전개하면서 신라 귀족 사회의 이념을 수립했다. 慧超는 인도를 여행하는 동안의 견문과 소감을 적은 기행문인 '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⑷ 게송의 성행
불경 원문에는 산문 서술에 이따금씩 노래가 삽입되어 있는데 이를 偈頌이라고 불렀다. 이는 글을 쓰면서 지을 수도 있고, 불교적인 깨달음이나 서원을 나타내는 노래까지도 포괄하는 높은 개념이다. 불교 문학이 일어나면서 게송도 함께 성행했는데, 게송이면서 일반 문인의 시로서도 높은 수준에 이른 작품들이 적지 않게 나타났다.
5) 설화에 나타난 상하, 남녀 관계
⑴ 신화적 상상의 유산
설화는 상하층이 함께 만들어 내는 것이고 살아가면서 생기는 일은 무엇이나 소재로 삼을 수 있으므로 문학의 다른 어느 영역보다도 포괄적인 의의를 갖는다. '三國遺事'는 전편이 설화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삼국 시대의 설화는 신화의 유산이 전설이나 민담으로 계승되거나 변모되는 양상을 보인다. 여기에서 불교는 재래의 신화를 새로운 사고 체계에 편입시키면서 본래의 의의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펴기도 했고, 신화의 필요한 요소는 차용했으면서 자생적 의의를 가지고 전설적 증거물과 결부되면서도 신화적 상징을 그대로 유지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화적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불신 뒤에도 어떤 특수 집단에서는 그들 나름대로의 신화를 한쪽에서 전승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가문 신화에서 잘 보인다. 신화의 맥락은 계속 이어졌으나 주된 것은 인간의 하층 무당이 부르는 서사무가로 넘어갔다.
⑵ 민간 영웅의 투지
영웅 서사시의 시대가 끝이 나면서 상층 집단의 영웅은 사라지고 가공적인 민간 영웅이 민담을 통해 만들어졌다. 민간 영웅은 미천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 타고난 고난을 극복하고 승리하여 왕이 된다는 것이 대표적인 유형이다. 마퉁이가 백제 무왕이 되었다는 이야기, 김유신 이야기, 그리고 居 知 이야기 등이 그 예이다.
⑶ 고승의 신이한 행적
불교가 정착되면서 불교 설화에서는 영웅 대신에 고승을 내세웠다. 이는 기록에 남은 어떤 설화보다도 풍부하다. 불교가 재래의 신앙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한 고승전은 고승이란 모든 세속적 욕구나 인연을 초탈해서 오직 불도의 높은 경지에 머무르며, 마침내 그러한 경지에 대한 집착마저 떨쳐버린다는 이야기가 주종을 이룬다. 보양 스님 이야기, 의상대사의 행적 이야기, 혜숙과 혜공 이야기 등이 있다.
⑷ 백성의 소망과 시련
일반 백성의 일을 다룬 것은 왕과 백성의 관계를 다룬 것과 사랑 때문에 벌어지는 갈등에 관한 것의 두 가지로 크게 나뉜다. 그런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은 대개 왕과 백성 사이네 남녀간의 애욕이 게재되어 있다. 고구려의 산상왕이 민간의 처녀를 왕비로 삼은 이야기, 백제 도미의 아내 이야기, 선덕여왕과 志鬼의 이야기 등이 대표적이다.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의 이야기도 흔히 있다. 설씨네 처녀 이야기나 金現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남녀간의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번뇌와 고통의 원인이라고 했는데 이는 趙信의 설화에서 보인다.
⑸ 설화의 정착과 변모
삼국의 사람들은 설화를 글로 기록하는 것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설화집을 만들어 내었다. 이 과정에서 설화에 수식을 가다듬고 주제도 다소 보태는 작업이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傳奇나 稗官雜記 野談 같은 것들이 생겨났다. 이 모든 것은 설화와 소설의 중간 형태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러나 이런 설화의 성행도 한문학이 대두되면서 변두리로 밀려나게 되었다.
6) 연극의 자취를 찾아서
⑴ 굿 놀이 연극
건국 신화를 굿과 같은 행동으로 표현하는 행사를 실시하면서 굿과 놀이, 연극은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굿은 사람 아닌 것과 사람의 갈등을 주술을 써서 해결하는 것인데 비해 놀이는 화해와 단합을 꾀하고 공동의 절차에 몰입하도록 하는 것이다. 연극은 사람들끼리의 갈등을 행동으로 나타내면서 각성을 경험하게 하는 것으로 굿이나 놀이에 포함되어 있다가 분화되어 나오는 것이 일반적 추세다. 굿에서 연극으로 이어진 절차는 맞이 -- 싸움 -- 혼인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고대에서 중요시되던 연극은 중세에 들어와서는 그 의미가 퇴색하여 민간 연극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속극이 생겨나게 되었다. 굿과 연결되는 연극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농악대가 하는 굿이고 또 하나는 무당이 하는 굿이다. 농악대의 굿에서는 탈춤이 생겨났고, 무당의 굿에서는 무당 굿놀이라고 하는 또 하나의 민속극이 생겨났다.
⑵ 고구려, 백제의 놀이와 연극
기록이 남은 것은 별로 없지만 고구려의 가무가 대단했었으리라는 것은 고구려 벽화를 보아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자료를 종합하여 추측해 보면 고구려에서 탈놀음이나 연극 같은 것이 있었고, 꼭두각시 놀음도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백제에 관한 기록은 더욱 적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伎樂'에 관한 대목을 보면 백제에도 탈춤과 비슷한 것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러 정황에 의거하여 탈춤은 마을 굿과 관련된 민간 전승에서 하층의 민속극으로 자라났으며, 거기에 기악이나 다른 불교의 놀이들이 2차적으로 첨가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⑶ 신라 쪽의 사정과 처용극
신라의 기록은 다른 두 나라에 비해 많이 남아 있다. 유리왕 때에는 한가위를 맞아 歌舞百戱를 했고, 진흥왕 때에는 팔관회를 열기 시작했다. 어느 것이든 온갖 놀이를 벌이면서 왕조의 번영을 상징하면서 화해와 단합을 꾀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신라에서는 하층민 뿐 아니라 상층 계급에서도 광대가 있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할 수 있다. 헌강왕은 신라 초기 이후 민간으로만 전승되던 수호신 굿을 다시 국가적 행사로 부활시켰는데, 處容舞와 같은 것이 한 종류이다. 처용은 神격의 가면을 쓴 사람이 역신의 가면을 쓴 사람을 물리치는 것이었는데 뒤에 역신을 물리치지 못하는 나약한 인물로 성격이 바뀌면서 굿으로의 효과보다는 연극적인 내용이 관심을 끌었다.
⑷ 다섯 가지 놀이
崔致遠의 시 '鄕樂雜 五首'에 흔히 五伎라고 부르는 다섯 놀이가 나타나 있다. '金丸'은 금방울을 굴리는 곡예로 직업적 재인이 숙달된 재주를 자랑하기에 알맞은 것이다. '월전'은 일종의 연극으로 난쟁이나 꼽추, 선비의 모습을 흉내낸 것이다. '大面'은 금빛 가면을 쓰고 우아한 가락에 느린 춤을 추며 귀신을 쫓는 놀이이다. '속독'은 탈을 쓰고 춘 춤으로 추측되며 '산예'는 사자춤이다. 이 다섯 가지는 오늘날의 오광대와 같이 다섯 과장으로 이루어진 한 가지 공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오기의 기풍은 한 마디로 구김살이 없고 씩씩하다고 할 수 있다.
7) 남북국 시대의 상황과 문학
⑴ 동아시아 문학의 판도
중국에 당나라가 존재하고 있는 동안, 동아시아 전역은 동질적인 문화를 향유했는데 그것은 한문학을 통해 표현되고 구체화되었다. 당나라 문화는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요소들을 아우른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동아시아 전역으로 전파될 수 있었다. 이러한 한문학은 이를 향유하는 나라끼리 외교 문서나 시 등을 교환할 수 있게 하였고, 당나라에서는 주변 국가의 유학생들을 위한 과거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나라의 문화 침략에 맞서기도 했으니 신라의 鄕札, 일본의 가나(假名), 월남의 字 이 그 대표적이다. 文에서는 외교 문서와 國史 편찬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전자는 각 나라마다 공통적이었으나 후자는 각기 달랐다. 시에서도 한시는 공통된 형식을 지녔으나 자국어로 부른 시를 한자로 옮기는 것은 저마다 달랐다. 한문학의 수준은 신라와 발해가 가장 높았던 반면, 상대적으로 수준이 낮은 일본은 자국어 문학을 개척하는 면에서는 더 앞섰다.
⑵ 발해 문학의 위치
발해에 관한 자료는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 그 수준을 알 수 없으나 신라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는 발해를 北國이라고 하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항상 우호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신라에서는 문학적으로 발해를 경쟁국으로 생각했으며, 일본에서도 발해를 고구려를 이은 나라로 인식했다. 두 나라는 당나라와의 교류를 경쟁적으로 했는데 발해를 海東盛國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아 한문학이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발해에서도 당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한자를 빌어 자국어를 기록하는 방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貞惠公主墓碑'에 의하면 발해는 귀족적으로 세련된 문화를 존중했다고 할 수 있다.
⑶ 발해 시인이 남긴 작품
발해 시인으로 전해지는 사람은 高元裕, 楊泰師, 王孝廉, 仁貞, 貞素, 裴 , 裴 등이다. 작품은 모두 11편으로 일본 문헌에 전한다. 양태사는 副使로 일본에 갔다가 송별연에서 일본 문인들의 시에 답한 '夜聽 衣聲'에는 고국을 그리는 마음이 절실하게 나타나 있다. 왕효렴의 작품은 5편이나 전하는데 놀이의 정경, 봄날의 꽃 등을 읊었다. 인정은 錄事의 임무를 맡았던 승려로 승려도 글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궁중에서 대접받은 사연을 적은 작품이 전한다. 정소는 일본 승려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썼으며, 배정의 시는 일본에서 지은 한 구절만이 전한다. 배구의 시는 전하지 않으나 매우 수준이 높은 시를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⑷ 신라 문학과 대외 관계
신라와 唐과의 관계는 밀접했다. 당은 신라를 친당 세력화하려 하였고, 신라는 당의 문화를 수입하고자 했다. 통일 전쟁 기간 중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조금 소원했으나 전쟁 뒤에는 곧 선린 관계를 회복하여 많은 국서가 교환되었다. 이 때에는 특히 당나라에의 유학이 성행했는데 당에서 과거를 통해 급제한 삶도 58명에 이르렀다. 신라 문인이 당에 가서 활동한 자취가 중국 문헌에 전한다. 薛瑤는 당에 가서 장군이 된 사람의 딸로 중이 되었다가 환속하면서 '返俗謠'를 지었다. 金地藏은 신라의 왕자로 당나라에 가서 승려가 되었다. '送童子下山'이라는 작품이 전하는데 짜임새와 묘미를 갖추고 있다. 金雲鄕은 신라 사람으로서 최초로 당나라 과거에 급제한 인물로 '題遊仙寺'가 전한다.
8) 신라 한문학의 성숙
⑴ 신문왕과 설총
신문왕은 지방 행정을 정비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며 국학을 설치하는 등 통일 국가의 면모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유학을 공부하는 육두품의 관계 진출이 두드러졌다. 하지만 골품제의 한계로 인해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는 없었고, 그로 인해 육두품 출신의 문인들은 비판 세력이 되어 갔으며 나라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문학을 스스로 개척했다. 설총이 지은 글로 전해지는 것은 '花王戒'이다. 꽃의 이야기를 가지고 임금을 경계한 글로 식물을 의인화했다는 점에서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글이다.
⑵ 전성기의 수준
신라의 전성기인 성덕왕 때의 이름난 문인으로는 金大問을 들 수 있다. 그는 '高僧傳', '花郞世紀', '樂本', '漢山記'를 지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그가 다룬 범위는 무척 넓었는데 신라 문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진골 귀족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전통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는 특징을 갖는다. 당시에 金志誠이 쓴 조상기는 현재 전하고 있는데 유가 불가 도가를 한데 아우르는 자세가 나타나 있다. 성덕대왕 신종의 序와 銘은 金弼奧가 지었는데 웅대한 기상과 세련된 표현이 갖추어져 있다.
⑶ 말기의 상황과 왕거인
下代에 이르면서 신라의 문학은 더욱 무르익었으나 예전의 진취적인 기상은 사라지고 文弱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사회의 모순은 격화되어 왕위를 두고 살육전이 벌어지고, 사치와 낭비는 증가되었으며, 백성에의 수탈은 심해졌다. 육두품은 당나라로 진출하는 길을 찾았고, 지방 호족은 후삼국의 쟁패를 준비했으며 불교에서는 지방 호족과 연결된 禪門九山이 생겨났다. 王巨仁은 당시에 세상을 등지고 산, 그러면서도 잘못된 정치에 항거한 인물이었다. 그는 옥중에서 민심을 대변하는 생동감 있는 시를 지었다.
⑷ 최치원의 성공과 번민
육두품 출신인 孤雲 崔致遠은 당나라에 유학, 벼슬에 급제한 뒤 '檄黃巢書'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신라인으로서 당나라에서의 한계를 느끼고 귀국하였으나, 신라에서도 자신의 뜻을 올바로 펼 수 없음을 느끼고 가야산에 은거하고 말았다. '桂苑筆耕集' 서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그는 영달을 위해 문학에 정진하였으나 문학이 유학이나 불교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의 시는 외국인으로서 당나라에서 느낀 비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것, 민중들의 생활 등 여러 가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그의 작품은 近體詩의 능란한 표현과 함께 내면의 고독과 회한을 오묘한 조화를 갖춘 말로 엮어져 이루어졌다.
⑸ 최광유, 박인범, 최승우, 최언위
崔匡裕는 '東文選'에 칠언율시 10수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시인으로 유명했던 듯하다. 그의 작품은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감상을 보태는 것이었는데 개중에는 고국을 떠난 비감을 읊기도 했다. 朴仁範도 최광유와 같은 시기에 당나라에서 급제한 사람이다. 그도 '동문선'에 칠언율시 10편과 贊 2편이 전한다. 문학적 취향은 최광유와 비슷했으나 고사를 많이 동원했으며 불교적 취향에 의거한 새로운 문학을 개척하기도 했다. 崔承祐는 당나라에서 급제한 뒤 귀국하여 견훤을 섬긴 인물이다. '호본집'이라는 문집이 있었다고 한아 전해지지 않고 역시 '동문선'에 칠언율시 10수가 전해온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당나라 말기의 시풍을 지녔으나 견훤의 외교 문서에는 높은 기상과 위엄 있는 면도 보였다. 崔彦위는 당나라에서 급제한 뒤 신라에서 벼슬을 얻었고, 그 뒤에는 고려의 왕건에게 가서 통일을 이루는데 공을 세웠다. 신라의 문학은 그를 통해 고려 문학으로 이어졌는데 그의 글은 덕을 내세운 부드러운 어조로 되어 있다. 고려에는 골품제가 없었던 탓에 많은 육두품 세력들이 고려를 택하여 최고 지배층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