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콩가루시래기국을 끓이는 것은 내게는 일상적이며, 쉽게 하는 음식중의 하나다. 무채 국물 위에 동그라니 앉아있는 생콩가루 분 화장을 한 시래기는 짙게 화장을 하여 밀랍인형 같은 작은엄마의 얼굴 같다. 그런 기억들을 되살리는 것이 지금은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온다. 나는 그 시간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음식을 만들고 즐기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시래기가 하얗게 분 화장을 했다. 생콩가루분화장이 골고루 묻어서 하얗게 빛이 났다. 유리뚜껑을 덮은 냄비에는 너무 굵지도 가늘지도 않은 무채가 헐렁한 물에 잠겨 보글보글 끓기 시작했다. 무채위에 시래기를 넣고 뚜껑을 덮은 후 아주 약한 불에 끓인다. 유리뚜껑 위로 들여다보면 무채국물이 분 화장을 한 시래기를 포근히 감싸 안듯이 끓을 듯 말 듯 아주 천천히 끓는다. 이렇게 해야 생콩가루가 시래기에서 떨어져 나가지 않고 한 몸이 되어 국물은 말갛고 시래기는 뽀얗게 끓여진다. 국을 한 숟갈 입에 떠 넣으면 콩국 맛과 시래기의 담백한 맛이 입안에 돈다.
생콩가루시래기국은 산골의 맛이며 소박한 안동 향토음식으로, 끓이는 방법이 안동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시래기에 화장을 시켜서, 참을성을 가지고 기다려야 깔끔한 맛을 낸다. 국의 레시피는 나의 것이 아니다. 딸만 여섯을 낳은 외할머니, 자식이라고는 딸 하나 낳은 우리 엄마가 하던 옛날부터 내려오는 조리법이며 이제는 나의 레시피가 되었다.
산비탈 밭에는 콩이 심어져 있고, 그 옆에는 시원하게 뻗은 무청이 검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면 무를 뽑아서 무청을 말린다. 초겨울이 다가오면 콩은 두드려 생콩가루를 만든다. 그때쯤이면 콩밭에는 냉이의 푸른 잎이 올라온다. 시래기, 냉이, 생콩가루는 맛과 영양이 환상궁합이며, 산골에서 만이 맛볼 수 있는 산골사람들의 일 년 양식이었다.
내가 어릴 때다. 엄마가 절에 기도하러 가서 집에 없던 날이었다. 작은 엄마는 내게 엄마 몰래 심부름을 시켰다. 삶은 시래기를 큰집에 가져다주고 오라고 했다. 작은 엄마는 아들이 없는 우리 집에 아들을 낳아 주려고 들어온 아버지의 여자이다. 내게 작은엄마는 엄마 소리를 듣고 싶어 했었다.
경상섬유가 들어선 그곳은 논이었다. 논둑길을 지나야 큰집이 나온다. 겨울에는 염소가 나무 말뚝에 긴 줄로 묶여져 있었다. 나는 논 입구에 가면 염소가 어디 있는지 살핀다. 염소는 저쪽 멀리 논 구석에서 짚을 뜯어 먹고 있었다. 살금살금 지나가려고 하는데 어느새 낌새를 챘는지 쏜살 같이 달려와서 뿔로 확 받았다. 나는 논바닥에 나가 떨어졌다. 염소는 껑충껑충 저쪽으로 도망을 가고, 울면서 흙 범벅이 된 옷을 해가지고 나동그라져 있는 시래기를 주어서 양은그릇에 담아 큰집으로 갔다.
저녁 밥상에는 내가 가지고 온 시래기로 국을 끓여서 차려져 있었다. 염소에게 뿔로 뜨여서 논바닥에 넘어져도 시래기는 주어서 왔다고 모두들 웃으면서 저녁밥을 먹는다. 나는 국에는 손도 가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큰집에서 자고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집에 가봐야 시래기가 생콩가루로 분 화장을 하듯이 뽀얗게 화장을 한 작은 엄마와 생전 말을 하지 않는 엄마 둘뿐이니까.
아버지는 생콩가루시래기국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매끼마다 국을 끓여도 아무런 말없이 먹는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작은엄마는 겨울이면 국을 끓여서 아래채 작은엄마 방에 밥상을 차려놓고 아버지를 그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오늘도 작은 엄마는 생콩가루시래기국을 끓여 놓고 오일장을 간 장돌뱅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무 덤덤히 바라만 볼뿐 국을 끓이지 않는 엄마가 어린 마음에도 답답해 보였다.
며칠을 큰집에서 자면서 돌아가지 않으니, 밤에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 등에 업혀서 집 가까이 가는데 우리 집 근처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렸다. 가까이 가보니 아래채 옆의 감나무에 매달아 놓은 시래기가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동네아이들이 불장난을 하고 놀다가 시래기에 불이 붙었다고 했다. 감나무 아래는 숨바꼭질도 하고 아이들이 모여 노는 곳이다. 작은엄마는 불을 끄느라고 온몸을 숯검정을 해가지고 있었다. 시래기를 태우지 않으려고 아주 결사적으로 불을 끈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때 하늘을 나를 듯이 기뻤다. 엄마 등에 업혀서 혼자 가만히 웃었다. 시래기가 없으면 작은엄마가 국을 끓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일 년 양식이 사라졌다고 걱정이 늘어졌다.
여름이라 시래기가 없어서 부추 생콩가루 국을 끓인다. 부추의 푸른색이 드러나지 않도록 생콩가루를 하얗게 바른다. 시래기에 생콩가루 분 화장을 시킬 뿐, 나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 짙게 화장을 하면 남의 모습을 대신 해주는 밀랍으로 만든 인형같이 되니까.
나는 왜 생콩가루 국을 좋아 하는가. 어느 날 문득 어린 시절 온몸으로 시래기에 붙은 불을 끄는 작은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순간 작은엄마를 이해 할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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