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9 : 최초의병 곽재우의 활약과 남도 근왕군의 참패
04.08.21
일본군은 개전 10여일 만에 경상도 일대의 주요 읍성을 점령하였지만, 일본군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주둔군이 점령하고 있는 일대뿐이었다.
일본군이 휩쓸고 지나간 뒤 곧바로 5월초부터 경상도 전역에서 의병군이 대거 봉기하였다.
그 중 가장 먼저 의병군을 일으킨 사람은 (다들 잘 아시듯이) 의령의 곽재우였다.
곽재우는 전쟁이 일어난 지 열흘 만인 4월 24일 가솔 50명을 중심으로 의병을 조직하였다.
전 훈련판관 심대승을 선봉장으로 전 훈련봉사 권란을 돌격장으로 삼아 부대를 편성하였고, 관군이 버리고 간 무기를 거두어 무장하였다.
일본군은 작전 계획에 따라 낙동강 하구 김해 칠성포에서 군수물자와 병력을 싣고 강을 따라 북으로 영산, 창녕, 현평, 고령, 성주, 왜관, 구미, 금산, 상주까지 내륙 깊숙히 물자를 이동시켰다.
곽재우는 의병군을 조직한 후 치고 빠지는 hit and run 작전 위주의 훈련을 시킨 후 낙동강변을 따라 일본군을 괴롭혔다.
한편 5월 중순 전라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일본군 제 6번대의 주장인 고바야카와다카가게는 부장인 승장(僧將) 안고쿠지 에케에이로 하여금 의령 방면으로 진출하게 하였다.
안고쿠지는 스스로 '전라감사'라 칭하며, 연도의 수령들에게 감사 행차를 영접하라는 통고문을 보내는 한편 5월 하순에 함안에서 남강을 건너 의령으로 진입하려 하였다.
곽재우는 안고쿠지가 의령으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김해, 창원 지역의 일본군이 남강을 도하하여 의령으로 진입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남강 북안의 정암진 일원에 병력을 매복시켜 놓고 일본군을 기다렸다.
정암진(鼎巖津)나루는 부산이나 마산에서 전라도로 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요충지 중 하나였다.
여기를 건너 산청, 함양을 지나 팔량치로 넘어 남원으로 가거나 육십령을 넘어 장수로 가게 된다.
5월 24일 안고쿠지는 2천 여 병력을 이끌고 정암진 대안에 도착하였다.
안코구지군은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도하 지점을 선정하고, 정찰대로 하여금 도하 후 그들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펫말을 꼽아 표시해 두고, 뗏목을 만들어 도강 준비를 했다.
밤 사이 곽재우는 군사를 동원해 방향 표시를 늪지대로 돌려 놓고 숲속 요소요소에 복병을 배치하는 한편, 정암진 숲속에도 복병을 배치시켰다.
날이 밝자 일본군 선봉대가 도강을 시작하였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미래 대기하고 있던 곽재우 의병군에 의해 섬멸되었다.
뒤이어 안고쿠지 군의 주력이 남강을 도하하여 정암진에 상륙하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곽재우 군이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안고쿠지 군은 불의의 기습에 당황하여 조직적인 반격을 하지 못한 채 달아나기 바빴다.
정암진 전투에서 곽재우 의병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일본군 제 6번대 별군(別軍)은 더 이상 이 길을 통한 전라도 진격을 포기하고 말았다.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이 의령과 삼가 두 현의 군사를 모두 곽재우 지휘 아래 편입시켜 병력이 1천 여 명이 되었고, 민가의 양곡도 곽재우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전 목사 오운과 박사제가 거느리 3천 여 병력이 합세하여 곽재우 의병군은 총 병력이 4천으로 늘어났다.
선조가 개성에서 평양으로 피난길에 오를 무렵인 4월 20일 경, 전라감사 이광은 관할지역에서 군사 8천여 명을 징발하여 근왕을 위해 북상하다가 선조가 이미 개성을 떠나 평양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주에서 회군을 하고 말았다.
이광이 군사를 돌려 돌아오자 전라도 백성들 사이에 이광이 적과 싸우지도 않고 돌아왔다며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태인 출신 조방장 백광언은 칼을 빼들고 이광에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이광은 겁먹고 사죄한 뒤 다시 싸우러 가기로 결정하였다.
이광이 다시 각 군현에 동원령을 내려 전라도 일대에서 4만 여 명의 대군이 전주로 집결하였다.
이광이 평양의 피난 조정에 보고를 했고, 평양 조정은 충청도 순찰사 윤석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에게 각각 군사를 이끌고 충청도 온양에서 전라도 군사와 합류하여 서울을 탈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광은 전라방어서 곽영과 함께 징발된 군사 4만여 명을 2개 군으로 편성하였다.
일로군(一路軍)은 주장에 이광, 선봉장으로 전 부사 이지시, 중위장에는 나주 목사 이경복을 임명하고 총병력 2만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한 군은 곽영을 주장으로 선봉장 전 부사 백광언이 중위장에는 광주 목사 권율이 임명되었고, 총병력은 2만명으로 구성되었다.
곽영군은 전주 - 여산 - 공주 - 온양으로 진격하게 하였고, 이광 자신은 전주 - 용안 - 임천을 지나 온양에서 합류하기로 하고 출발하였다.
한편 경상감사 김수도 병력 100여 명을 이끌고 전주에 도착하여 이광 군과 합류하였으며, 충청감사 윤선각도 충청 병사 신익, 방어사 유옥, 조방장 이세호와 함께 도내에서 8천 여 명을 모집하여 온양에 집결시켰다.
이로써 전라, 충청, 경상 이른바 하삼도(下三道) 군사가 총집결하여 총 병력이 5만 명 규모가 되었다.
(注:일부에서는 이들이 실제로 이들의 총 병력은 2만 여명 밖에 되지 않는다며 병력을 과장하여 평양 조정에 보고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들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에서 징발된 군사들을 '남도 근왕군'으로 칭하고 한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남도 근왕군은 5월 24일 온양을 출발하여 6월 3일에 수원성에 무혈 입성하였다.
6월 4일 아침, 충청도 군사는 수원으로 나가 서울로 가기로 하고, 전라도 군사는 용인으로 나가 북상키로 하여 각각 출발하였다.
전라도는 아직 전화가 미치지 않은 지역이라서 그런지 모집된 군사의 숫자도 많았거니와 각종 물자도 풍부하여 무기, 식량, 구막, 피복 등 군수품을 실은 수레들이 50리에 뻗쳐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실제 군사들은 말만 군사들이지 갑작스럽게 끌어 모은 백성들로 그 무렵 조선군들이 그러하듯 군사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더구나 각 도 지방군을 지휘하는 순찰사들이 모두 문관들이었고, 각 군현 군사 지휘관들 또한 문관 수령이 많았다.
(注:[징비록]에는 근왕군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진군하는 모습이 흡사) 양 떼들이 이동하는 것 같았과 봄 놀이 하듯 했다》)
이렇게 되자 무관 출신인 백광언은 불안해졌다.
백광언은 이광에게 부대를 10여 개 소부대로 나누어 만일 한두 부대가 패전해도 전체가 무너지지 않도록 하자고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문소산 일대에 부산과 서울까지의 주 보급로를 경비하기 위해 작은 보루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구축하고 있었다.
용인 지역은 일본군 수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휘하 군사 1천 6백 명 가운데 6백 여 명을 각 초소에 배치해 두고 있었고, 주력 1천 명은 서울에 있었다.
(와키자카는 일본에서 대표적인 수군 장수였지만, 이렇듯 내륙 깊숙한 곳까지 군사를 이끌고 와 있었습니다. 원균이 경상도 일원에서 '용감'하게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면 과연 와키자카같은 수군 장수가 서울까지 올라가 있었을까요?)
남도 근왕군은 용인성 남쪽 10리쯤에 이르러 북두문산에 있는 일본군의 작은 진지를 발견하였다.
중위장 권율이 지형상 적의 방어에 유리하고, 조선군의 공격이 불리하니 우회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이광은 공격할 것을 명령하여 선봉장 백광언이 군사를 이끌고 돌격해 들어가 적병 10여 명을 죽이고, 이날 밤 다시 야습을 강행하여 10여 명의 적을 더 죽이고 방책을 불태웠다.
그러나 상당수의 일본군은 문소산으로 대피하여 한성에 있는 주력부대에 증원을 요청하였다.
5일 아침, 용인성 북쪽 문소산에 일본군의 진지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백광언과 이지시 등 두 선봉장으로 하여금 공격하게 하였다.
조선군이 접근하자 문소산의 일본군은 조총을 쏘면서 조선군의 접근을 방해하였다.
조총으로 인해 진지로의 접근이 여이치 않자 조선군은 문소산을 포위하여 일본군이 진지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이렇게 한나절을 대치하고 있는 동안 조선군은 숲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이 때, 와카자카가 경비 진지가 조선군 대군의 공격을 받고 있다는 급보를 받고 휘하 주력부대를 이끌고 급히 달려와 이날 점심 때쯤 이미 용인에 도착하여 조선군의 동측방 방향에서 공격을 가해왔다.
이때까지 십수 명 단위의 진지 경비병만을 상대하다가 1천 여 명이 넘는 일본군의 반격을 받은 조선군 선봉대는 전의를 상실하고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버렸다. 이 때 문소산의 일본군 진지에서도 조선군을 협공하기 위해 출격해 나왔다.
선봉장 백광언, 이지시 등이 진두에서 전투를 독려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전세를 회복시키지 못한 채 모두 전사하였다. 선붕에 섰던 전라도 고부 군사 이광인, 함열 현감 정연 등의 선봉부대 역시 궤멸되며 모두 전사하였다.
이광은 주력을 광교산에 물려 진을 치고 선봉부대 패잔병을 수습했으며 수원으로 향했던 충청도 군사도 달려와 합류하였다.
6일 아침, 전군이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일본군이 기습을 해왔다.
어제 문소산의 패배로 전의를 상실한 조선군들은 앞을 다투어 흩어져 달아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패주하는 조선군을 10리 쯤 추격하다가 돌아가 조선군이 버리고 달아난 물자들을 한곳에 모아 놓고 불태워 버렸다.
단 한번의 전투로 5만 병력이 개미떼처럼 흩어져 버리자 이광은 전주로, 윤선각은 공주로 김수는 경상우도로 각각 패잔병을 이끌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