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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민초문학상 수상
단편소설
로렐라이의 진돗개 복구(3)
“따르릉……“
전화 벨이 또다시 무섭게 울렸다.
행여 무슨 일이 생길까 지레 겁을 먹은 춘자는 전화 받기를 주저하고 애들 방으로 마치 할 일이라도 있는 듯 쪼르르 들어 갔다.
“따르릉…….”
거듭 전화 벨 소리에 편지 함을 뒤지던 대규가 수화기를 들자 대뜸.
„슈바인 코리아나 소포르트 라우스.(한국 돼지 새끼들아 당장 꺼져라.)”
대규가 말도 꺼내기 전에 욕을 퍼 붓고는 찰깍 전화를 끊었다.
도대체 어떠한 내용을 방송 했길래 이토록 벌집 쑤신 듯 야단 법석일까 호기심과 더불어 불안한 마음이 서서히 일어 나기 시작 했다.
<한국 사람 야만인! 불쌍한 개들이여…. 오! 그들에게 저주를… 지옥으로 보내세요.> 울먹이며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어느 할머니의 떨린 음성이 미애의 귓가에 맴 돌았다.
그리고 <우리도 개를 사랑하는데….> 미애의 가냘픈 한숨이 흘러 나왔다.
하우프슐레(중학교정) 3학년인 미애. 한 학년 아래인 미숙. 그리고 그룬드슐레(초등학교) 2학년 일영, 이들은 한국에서 학기가 끝나는 시기에 독일로 이주하여 6개월 가량 유치원 보모인 리타양을 가정교사로 독일어 교육을 집중한 탓인지 아니면 한국인 특유의 끈질긴 근성에서 인지 그 해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8월에 입학하여 별 탈 없이 2년이 지났다.
대규는 그런 애들이 대견스럽고 이국 생활에 잘 적응해 주는 것이 퍽 다행으로 생각 했다.
큰 딸 미애 만은 민감한 사춘기를 외국 땅에 와서 고등 학교 과정을 배울 나이에 사뭇 어린 애들과 중학교 과정을 다시 배워야 하는 데다 고학년이 될수록 독일어 실력이 뒤져 학교 생활에 점점 흥미를 잃어 가고 있었다.
로렐라이 하이디 슐레는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같은 건물 안에 있고 학생 수가 400여 명에 외국인이라면 터어키 민족과 아랍쪽 애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아시아계는 베트남계 두 명과 혼혈아 몇 명이 있을 뿐 한국인은 학교가 창설 된 이래 처음이라 했다.
언제나 단정한 옷 차림과 바른 예의 때문인지 한국이 지구 어느 쪽에 붙어 있는지 관심이 없던 애들도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초등학교 시절에 응원 단장을 했던 미숙이는 성격이 발랄하고 붙임성이 좋아 특활 시간과 교내 행사가 있을 때는 독일 애들을 제치고 가끔 앞장을 서고 했다. 일영이는 유치원 시절부터 배우기 시작한 태권도 실력을 발휘하여 제 키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코 밑에 검실검실한 털이 쫑깃쫑깃한 터어키 애들이 <찡짱쫑>이라는 중국 사람을 비하해서 부르는 속어로 야유를 하며 괴롭히자 돌려 차기로 일격을 가한 것이 요행히 무방비 상태인 터어키 애들 중 한 명의 관자놀이에 적중 뒤로 넘어지자 일약 태권도 스타가 되었다.
매주 주말이면 동양 무술인 쿵후.태권도 가라데 등 고난도의 묘기를 보여 주는 영화가 독일 안방 극장을 독차지 할 만큼 인기가 대단하던 때였다.
날렵한 몸매로 공중을 날아 오르고 수 십장의 기와 장을 주먹으로 박살을 내는 동양 무술에 깜짝 놀란 유럽 사람은 동양 사람은 누구나 한가지 무술을 지니고 있는 줄 알고 섣불리 얕잡아 보고 시비를 거는 일이 없었다.
“따르릉….“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전화 받아 봐요.”
춘자가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고무 장갑 낀 손을 쳐 들어 보이며 말을 했다.
전화 벨 소리가 나기 바쁘게 냉큼 전화기 앞으로 달려 가던 춘자가 물 묻은 장갑 낀 손으로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표정은 실은 전화 받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제기랄 웬 놈의 전화가…..”
대규도 전화 받기를 멈칫하다 계속 울리는 전화 벨 소리에 마지 못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본(Boon)에서 식당을 하는 동생 친구 길용(朴吉龍)이었다.
„ 형님! 전화를 늦게 받는 것을 보니 형님도 모질게 당한 모양 입니다. 그려.“
„동생! 말도 말게 당장 너희 나라로 꺼지라는 전화가 오고 냅다 욕만 바가지로 퍼 붓고 전화를 끊더구먼. 애들도 불안 해서 학교도 못 가고 나도 시장에 가려다 작파하고 말았네.
도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이처럼 야단 법석인지 큰 도시에 사는 자네는 잘 알겠구먼.”
„형님이 당한 것은 약과요. 이곳은 밤새 식당 유리가 박살이 나고 대사관을 폭파하겠다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답니다.
하여튼 조심하세요. 다행히 형님 집은 난 시청 지역이라 애들이 텔레비전을 못 봐서 다행입니다. 망할 놈의 독일 놈들!
호기심이 발동했다고 하지만 이곳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의 입장도 생각해서 숨길 것은 숨겨 주어야 도리인데, 이건 정말 동양인에 대한 경시풍조와 백인 우월주의가 저의에 깔려 있다니까요.”
흥분해서 말을 제대로 못하면서도 어려운 용어를 섞어 가며 하는 말이 약간 듣기에 거슬렸다. 그가 말하는 텔레비전 프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88서울 올림픽 이후의 한국이라는 프로의 내용은 올림픽 기간 중 자취를 감추었던 보신 탕이 다시 고개를 들고 나타나 여름 철 복날 산 기슭에 터를 잡은 보신 탕 집 앞에 광택이 나는 검은 자가용이 미끄러지듯 밀어 닥치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의 신사들이며 나이 지긋한 점잖은 부인들이 줄을 이어 찾아 와 개고기와 소주를 마시며 즐거워 하는 장면과 개를 잡는 잔인한 장면이 생생하게 공중 파 방송으로 독일 전역에 알려 졌다 한다.
굵은 밧줄로 올가미를 만들어 개 목에 걸고 나뭇가지에 매달아 혀를 내 밀고 죽은 개를 다시 맛을 내기 위한 방법으로 가스 불로 털을 태우는 장면과 밧줄에 매달린 개가 발버둥을 치며 죽지 않고 앙탈을 부리자 커다란 망치로 두개골을 때려 하얀 골수가 흘러 내리는 잔인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보여 주었다 한다.
신경통 약재로 살아 있는 채 가마 솥에 넣고 삶아 그 진액을 축출하는 재료로 고양이를 사용하는데 가마 솥에 들어 갈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고양이가 철망 속에 갇혀 두 눈망울을 말똥거리며 애처롭게 카메라를 주시하는….. 차마 눈을 뜨고 바라 볼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잔인한 장면이 계속 되었다 한다.
한국 사람인 우리의 눈에도 소름이 돋는 잔인하고 생소한 장면을 찾아 카메라에 담은 취재진의 놀라운 직업 의식을 높게 평가 할 수 있다 치더라도 돈 몇 푼에 이런 장면을 카메라에 담도록 알선해 준 파렴치한 한국 사람 안내인의 검은 양심에 길용이 자신도 분개했다는 그의 말에 대규도 동감이 갔다.
기르던 개나 고양이가 죽으면 동물 공동 묘지에 묻고 대리석 비문에 이름과 동판으로 사진까지 판을 떠 걸어 놓고 철철이 꽃다발을 들고 묘지를 찾는 독일 사람들이 이러한 잔인한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 그 충격에 정신을 잃은 노인도 있었다 한다.
해가 중천에 걸리고 늦은 봄날의 따스한 햇빛이 미루나무의 가지 사이로 스름 스름 창가의 식탁을 핥으며 기울어 갔으나 식당을 찾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구경을 못했다.
여느 때 같으면 로렐라이를 구경 가던 관광객이 삼삼오오 찾아 오는데 어젯 밤 텔레비전 방송 프로 때문인지 식당 앞을 지나는 차들은 많아도 식당을 찾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커피 잔을 닦고 있던 로자도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아니면 어젯 밤 텔레비전 프로를 보았는지 커다란 눈망울을 아래로 향해 치켜 뜨고 잔뜩 동정이 가는 말투로 위로를 했다.
“헤르 초이! 카이네 조르게(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지나면 조용 할 거요.“
창 밖에 달리는 차들을 무료하게 바라 보고 있는 대규의 모습이 로자의 눈에는 애잔하게 보였던 것이다.
폴란드 출신인 로자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비하여 하얀 피부와 금발 머리를 빼고는 별 매력을 못 느낄 두 딸의 어머니에 이혼녀이다.
간병사인 남편과 헤어진 후 매달 받는 생활비와 자녀 양육비가 생계비에 턱 없이 부족하자 시간제로 식당에서 홀 일을 보고 있었다.
대규는 오늘 같은 날은 식당 문을 닫는 편이 나을 것 같아 로자를 일찍 보내고 식당 대청소나 시킬 생각으로 주방 일을 하는 터어키 젊은이 매메와 레다이를 불러 오늘 할 일을 말하고 있을 때 집으로 돌려 보낸 로자가 다시 식당 출입 문을 열고 나타나 대규를 밖으로 불러 냈다.
그녀가 가르친 곳은 식당 출입 문으로 올라 오는 계단 옆 벽에 메뉴 판을 붙여 놓은 아크릴 게시판이었다.
굵은 밧줄에 목이 걸린 개가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 달린 엽기적인 사진이 붙어 있었다.
“누가 이런 못 된 짓을 했을까….”
독일에서 판매 부수가 제 1위라는 일간 신문 빌트(Bild)지의 기사를 잘라 붙여 놓은 것이다.
공업용 접착제로 단단히 붙여 놓은 아크릴 게시판 옆 하얀 페인트 칠을 한 벽에는 새 빨간 스프레이 페인트로 Korean Raus!(한국인 꺼져라.!)라 쓰고 섬뜩한 나치의 문장이 피를 뚝뚝 흘리는 형상으로 그려 져 있었다.
나치의 만자 문장을 보는 순간 아찔한 현기증까지 느낀 대규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행여 누가 볼까 황급히 수세미와 비누 물을 준비하여 박박 문지르고 날카로운 칼로 긁어 신문 기사는 지워 버렸으나 벽에 쓰인 페인트 글씨는 물로 지울 수가 없었다.
차고에 있는 페인트 통을 뒤져 비슷한 색을 찾아 그 위에 덧칠을 했다.
쏜 살같이 식당 앞을 지나 치던 차들이 나치 문장에 덧칠을 하는 대규를 향해, „빠아 앙…“ 요란한 경적을 울리며 더욱 부아를 돋구었다.
“목이 마를 텐데 이것 마시고 하세요.”
어느 사이 춘자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잔 가득히 내 밀자 대규는 못 볼 것을 아내에게 보인 것처럼 흠칫 놀랐다.
대규는 전화로 시달림을 받던 가족이 벽에 쓰인 섬뜩한 나치의 문장이나 신문을 보았으면 더 불안에 떨까 하여 혼자 땀을 흘리며 부랴부랴 덧칠을 하고 흔적을 없애기에 정신을 쏟다 보니 정작 춘자가 옆에 나타난 것을 몰랐다. 춘자는 도리여 남편이 겁먹을까 염려하는 눈치가 역력이 보였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집으로 돌아 간 로자가 전화를 걸어 큰 딸 미애한테,
<며칠 간 그 동안 벼르던 여행을 가족과 떠나기로 결정을 하여 식당 일을 못 한다.>는 말에 수상쩍어 다그쳐 물었더니 게시판에 붙여 있던 신문 기사와 낙서까지 소상히 알려 주고.
<당분간 식당을 찾는 손님이 없을 테고…..겁도 나고 불안해서 쉬고 싶다,>는 말을 듣고 식당 밖에서 일어 난 일을 알게 되었다 한다.
세간에 떠들썩한 큰 화제꺼리도 세월이 지나면 잠잠 해지고 사람의 뇌리에서 사라지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인데 독일 만은 예외인 성 싶었다.
그 일 이후, 며칠이 지났는데도 식당을 찾는 독일인의 발길은 여전히 뜸 했고 간간이 한국에서 온 관광객만 고맙게 찾아 올 뿐 그 후유증은 밤에도 계속 되었다. 밤 늦게 한 무리의 오토바이 폭주 족이 <부우붕붕….>엔진 소음이 귀청을 찢는 듯 한밤을 요란하게 울리며 식당 주차장에 모여 한 바탕 소란을 피우고 돌아 간 뒤. 아침 날이 밝은 후 살펴 보면 화단에 정성 드려 가꾸어 놓은 겔라리언 꽃 밭을 쑥 밭으로 만들어 놓고 벽에는 섬뜩한 나치의 문장이 새롭게 그려져 있었다.
밤마다 무슨 의식을 거행하는지 식당 주차장에 모여 웅성웅성 소란을 피우는 폭주족 등쌀에 견디다 못해 관할 경찰서에 신변 보호를 요청하게 되었다.
경찰서에서는 밤마다 시간을 정해 순찰을 돌자 며칠은 잠잠하더니 순찰차가 지나 간 뒤를 노리고 다시 몰려 와 소란을 피웠다.
기물을 파손하거나 극렬한 행동은 없었으나 한 밤중 경적을 울리며 소란을 피우는 통에 온 가족은 불안에 떨고 수면 부족으로 춘자는 신경 쇠약 증상까지 도져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급기야 춘자는 이를 더 참지 못하고 최후 폭탄 선언을 하게 되었다.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공포 속에서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으니 이곳을 떠나 교민이 많이 살고 있는 프랑크푸르트 쪽으로 이사를 가던지 아니면 한국으로 다시 보내 주던지 양단 간에 결정을 하자는 비장한 말에 대규의 입장은 난감 했다.
심한 불면 증과 우울 증 탓인지 화장기 없는 부스스한 얼굴이 한창 나이인 마흔 다섯 나이를 훨씬 넘어 병색이 짙은 중늙은이로 변해 대규의 마음을 괴롭게 했다.
“따르릉…“
다시 전화 벨이 울렸다. 큰 딸 미애는 전화 벨이 울리자 외출 약속을 했는지 나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자기 찾는 전화인 줄 알고 쪼르르 달려 가 전화를 받았다.
“아빠! 전화…..숙모야.”
기다리던 전화가 아니자 시큰둥하니 수화기를 대규한테 넘겨 주었다.
„아저씨! 저예요, 우영이 엄마예요. 오늘 저녁 일곱 시에 도착 할 거예요.“
자동차 운전을 못한 제수 혜영이가 일곱 시에 도착하는 열차로 올 테니 역에 마중을 나와 달라는 전화였다.
„택시 타면 기본 요금 정도 인데, 그 돈도 아까워 손 위 시숙더러 마중을 나오라 안달이야. 젊은 것이 버릇 없이….“ 전화로 대화하는 소리를 엿들었는지 춘자의 가시 돋친 말이 대규의 기분을 건드렸으나 꾹 참았다.
중대 발표를 한답시고 뒤셀돌프에 살고 있는 제수까지 불렀는데 괜히 분위기를 흐리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1983년도 대규가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강남 중심부에서 제법 큰 규모의 마포숯불 갈비 집을 힘들게 꾸려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광부로 독일 취업을 떠난 동생 선규한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광산 생활을 청산하고 로렐라이 관광지에 한국 식당을 개업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착실한 요리사가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대규는 자기 식당을 거쳐 간 요리사들 중에 마땅한 사람을 생각해 보았다.
봉수. 태식이.준호 등 여러 요리사를 놓고 마땅한 사람을 찾기에 한 사람 한 사람 살펴 보았지만 막상 동생 식당에 보낼 만한 요리사가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가 마음에 들면 하나가 미흡하고 이때,
„미애 아빠! 우리가 갑시다. 남들은 많은 돈을 싸 들고 외국으로 유학도 보내고 이민도 간다 하는데 동생이 식당을 한다 하는데 나 몰라라 뒤 짐만 쥐고 바라 볼게 아니라 우리가 가서 경험도 많으니 도웁시다.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제 딸들 시집 보낼려면 갈비 집 딸이라고 변변한 혼처 자리도 없을거고 일찍감치 애들 유학 시키는 셈치고 외국에 가서 몇 년간 죽은 듯 일하고 돌아 오면 남들이야 외국에서 무슨 일 했는지 알 바 없고 애들 외국에서 공부하고 왔으니 떵떵거리며 좋은 혼처와 직장도 구해 취직도 마음대로 할 수 있을거니 우리가 갑시다…. 작은 아버지 식당이니 남의 집도 아니고 주저 할 것 없이 당장 결정 합시다.“
춘자는 오랫 동안 자식들 교육 문제며, 딸들 앞으로 혼사에 관한 일들 여러 가지 문제 점을 염두에 두고 생각 했는지 조목조목 막힘 없이 말을 했다.
„말 같은 소릴 해. 내 나이가 몇인데 동생 식당에 가서 일을 하란 거야. 당치 않은 말 꺼내지도 말고 마땅한 사람 있는가 당장 찾아 보라고.“ 퉁명스럽게 핀잔을 받은 춘자는 입을 삐죽거리며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으나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그녀가 아니었다.
아내의 말을 일언지하에 면박을 주고 난 대규도 춘자의 말이 옳다는 것에는 수긍이 갔다. 그렇다고 당장 동의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병역 미필이라는 딱지가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대규의 신상 문제 때문에 대학 성적이 우수했던 그였지만 좋은 직장을 찾아 취직을 할 수가 없었다.
장사 길에 들어 섰으나 장사와는 운 때가 맞지 않은지 시작 하는 장사마다 재미를 못 보고 손을 털고 했다.
마침 춘자 친구가 강남에 별 크지 않은 빌딩을 세워 그녀가 원하면 남보다 싼 가격에 세를 주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약간 귀가 빠진 외진 장소지만 강남이라 먹는 장사를 하면 금방 떼 돈을 벌어 들일 것 같이 좋아 설치는 춘자의 등살에 마지 못해 큰 집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약간의 빚을 보태 친구의 건물 2층에 마포 숯불 갈비 집을 시작 했다.
개업 첫해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손님이 몰려 와 금방 돈을 벌어 팔아 치운 큰 집으로 다시 이사를 갈 것 같았다.
그러나 근처에 해운대 갈비 집이 새로 신장 개업하고 직영 목장에서 사육한 육질이 부드러운 한우 고기를 푸짐하게 내 놓는다는 대대적인 선전 바람에 그 곳으로 손님을 다 뺏겨 버렸다. 가격도 대폭 내리고 푸짐한 선물 공세에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해서 고객 확보에 기를 쓰는 바람에 도저히 대적 할 방법이 없었다.
찾는 손님 수가 줄고 매상이 떨어 지니 매달 월세와 종업원 월급 주기도 버거운데다 동교동 살림 집과 떨어져 두 집 살림을 꾸리다 보니 집안 살림이나 애들 교육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도 춘자의 극성에 미애,미숙은 학교가 파한 후 피아노 학원을 거쳐 미술 학원으로 보냈고 일영이는 태권 도장을 거쳐 속셈 학원으로 보내는 등 매달 교육비 지출은 줄지를 않았다.
서로 바쁜 일과에 쫓기다 보니 가족이 오붓하니 모여 이야기 할 기회도 없고 그렇다고 애들 뒤를 넉넉히 대줄 만큼 많은 돈을 모으지도 못 했다.
대규는 오래 동안 생각을 했다. 어쩌면 춘자 말이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앞 섰고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좋은 기회가 온 듯 했다.
나이 마흔이지만 외국 땅에 나가 마음 단단히 먹고 몇 년 고생하여 몫 돈을 만들어 다시 돌아 오자는 각오를 했다.
남들이 보는 눈을 의식 할 필요가 없고 남의 집도 아닌 동생 식당에서 요리사 노릇을 한들 창피 할 것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미치자 딴 사람을 소개하는 것 보다 내가 직접 독일에 가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 하루라도 빨리 서둘러 독일에 가고픈 마음이 불같이 일기 시작 했다.
그러나 동생의 생각은 반대였다. 나이 많은 형이 독일 땅에 와 주방에서 요리사로 궂은 일과 힘든 일을 맡아 해야 하는데 차마 형의 고생을 보고 있을 수 없다는 동생의 솔직한 말에 대규는 동생의 마음을 자극하는 구구절절 가슴 맺힌 사연이 담긴 장문의 편지를 보냈고 춘자는 전화기를 붙들고 동생과 제수한테 목 메인 하소연을 늘어 놓게 되었다. 급기야 마지못한 동생이 초청장을 보내 오고 대규는 요리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종로에 있는 학원에 입학 속성3개월 과정을 마치고 부산까지 내려가 조리사 시험에 합격 벼락치기로 모든 수속을 마치고 가족 먼저 독일로 향했다.
1983년 이른 봄, 로렐라이에서 대규의 독일 생활이 시작 되었다.
대규가 독일에 온 지 1년이 되던 해 부활절 연휴가 끝나는 날 새벽 로렐라이 골짜기 모퉁이를 급 회전 하는 길에서 동생 선규가 교통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과속으로 달리던 선규의 BMW 승용차가 맞은 편에서 오는 소형 트럭과 정면 충돌 했다 한다.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사고 현장을 목격한 증인은 없고 가벼운 부상만 당한 상대방 피해자의 일방적인 증언을 토대로 선규의 과실로 종결 처리 했다.
군대 시절 공수 특전대의 운전 병으로 산골짝 험한 길을 누비고 다니던 운전 경력이 오래 인 선규가 초행 길도 아니고 하루에 수 차례 다니 던 길에서 급 회전 길을 과속으로 달렸다는 경찰의 주장을 반박 할 증인이 없고 현장을 목격한 자가 없어 결국 선규의 과속운전으로 처리되어 아무런 보상을 청구 할 수 없는 불이익 판정을 받았다.
동생과 머리를 맞대고 계획한 부푼 꿈이 산산 조각이 났고 독일 말이 서툴러 법적인 대응도 변변히 못한 비참한 지경에 이르자 대규는 라인 강을 바라보며 미친 듯 독한 보드카를 3병이나 비우며 분노와 슬픔을 달랬다.
그 후유증으로 일년 내내 위장병을 얻어 고생을 했었다.
그러나 선규의 죽음은 대규의 가족이 한시적인 비자를 받고 독일에 쉽게 이주 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 했고 대규의 체류 기간도 연장을 받을 수 있었다.
동생 선규가 형에게 남기고 간 마지막 선물이었다.
남편을 졸지에 교통 사고로 떠나 보낸 혜영은 남편의 체취가 묻어 있는 로렐라이와 인연을 끊고 싶었던지 아들 우영을 데리고 뒤셀돌프로 이사를 했다.
다행히 남편이 생전에 가입했던 생명 보험과 요식업 조합에서 업무 상 사고로 처리되어 매달 지불해 주는 생계비가 있어 생활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식당 운영 관계를 대규에게 맡겼다.
춘자는 당초부터 로렐라이에 사는 것이 못 마땅했던지 <자네만 큰 도시로 빠져 나가고 골치 덩어리 식당은 우리한테 떠 넘기고 제대로 잠이 오는가,> 하는 험한 말을 하는 바람에 전화 연락도 자주 못하고 남편 제사 때나 겨우 얼굴을 맞대는 소원한 사이로 변해 갔다.
며칠 전 가족 회의를 열겠다고 꼭 참석하라는 대규의 전화를 받고 혜영은 몇 번인가 망설이다 참석하는 것으로 결정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개고기 방송으로 한국 식당이 수난을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미애와 통화를 해서 인지 그 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꼭 자기 때문에 큰 댁이 고통을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동서의 찬 바람이 씽씽 부는 듯한 곱지 않은 시선도 마음에 걸렸다.
마지 못해 참석 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내친 김에 식당 운영에 대한 어려움이 있다면 정리를 하고 깨끗이 미련을 버릴까 작심을 했다.
이따금 불어 오는 바람에 미루나무 가지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사이로 늦은 봄 날의 아침 햇살이 눈이 부시게 쏟아져 내렸다.
창가에 앉아 있는 춘자의 화장기 없는 부시시한 얼굴 위로 햇빛이 비칠 때마다 골이 깊게 패인 주름 살이 드러나 대규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춘자와 결혼한 지 20여 년, 긴 세월은 아니지만 남들처럼 남편이 아침 일찍 출근하여 밤 늦게 돌아 오는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부부간이 같이 일을 해야 하는 직업을 가지다 보니 떨어져 지낸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눈 길만 마주쳐도 상대방이 무엇을 요구하고 무슨 말을 할 것인가를 육감으로 알아 챌 만큼 서로가 통하는 부부였다.
그녀가 로렐라이 한적한 곳에 마음을 접고 화장실 청소와 식당 허드레 일까지 가리지 않고 부지런이 일하는 것을 보면은,
<사람이 많이 변 했구나.> 하는 생각이 앞 섰고 미안하고 고마운 생각이 날로 더 해 갔다.
개 고기 소동이 일어 난 뒤 늘 불안한 마음으로 안정을 못 찾는 아내를 볼 때 마다 야속한 생각이 들고 원망스러웠다.
동생이 교통 사고로 비명에 간 이곳을 꼭 지켜 동생의 유업을 이어 보려는 마음에 찬물을 끼 얹은 것 같아 화도 났으나 혹 중년 여성한테 오는 우울증이 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하루도 편 할 날이 없었다.
춘자가 그토록 이사를 원하는 프랑크푸르트는 국제 금융의 중심지이고 유럽 최대의 국제 공항이 자리 잡고 있는 교통의 관문이다.
한국 상사가 유럽 전진 기지로 활용하는 프랑크푸르트는 한국 교민 수만 하드래도 3천이 넘는 대도시이다.
한국 교회가 십여 개 있고 한글 학교가 있어 외롭지 않게 살아 갈 수 있는 곳이라 더욱 호감이 가는 도시였다.
춘자는 한인 교회에 나가 믿음으로 봉사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길 원 했다.
대규 생각 역시 프랑크푸르트로 이사를 가고 싶은 춘자의 마음과 다를 바 없었다. 로렐라이가 속해 있는 싼티 고아하우젠 시에 거주하는 조건으로 체류 허가와 노동허가를 받은 특별한 조건이지만 그보다도 가슴 속에 깊이 망울 져 있는 동생 선규의 죽음과 동생이 꿈을 못 이루고 떠난 이곳에서 꼭 성공하여 동생의 원을 풀어 보겠다는 갸륵한 심정에서 쉽게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남들은 3년 계약도 마치지 못하고 중도에서 막장을 뛰 쳐 나오는데 6년 동안을 막장에서 탄 가루를 마셔 가며 모은 재산을 송두리째 식당에 투자하고 한번도 기지개를 펴 보지 못하고 비명에 간 동생의 유업을 개고기 소동 때문에 쉽게 포기하고 딴 도시로 자리를 옮겨 간다는 생각을 대규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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