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리스도인의 회복 : 정체성 11.
제3부 하늘의 상이 정체성이다.
2. 가장 큰 상 : 이웃사랑의 상
● 전도의 상?
하늘에서 상을 주신다면 어떤 일에 가장 큰 상을 주실까? 흔히들 하늘에서는 전도의 상이 가장 크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전도는 성도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행해야 하는 중요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자체가 영혼구원, 곧 전도에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모든 생명을 바쳤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전도에 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복음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사명을 받아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상을 받기 위해 하는 일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고전 9:16-17)
교회에서는 전도를 많이 한 사람에게 가장 큰 상을 주며 전도왕이니 전도대장이니 하는데 하늘에서는 상이 없다는 말인가? 세상 마지막 날 까지 전도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를 말씀하신 것이다. 교회에 전도를 해도 당연한 일을 한 것이기에 상은 없으며 오히려 다만 무익한 종일뿐임을 겸손한 마음으로 고백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겸손한 전도자의 마음이다.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그러면 하나님은 전도에 대해 무시하신다는 말일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제공하는 사람들은 상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천하보다 귀한 한 사람을 구원시키셨는데 아무런 상도 주지 않으신단 말인가? 전도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이 해야 할 일이지만 사람을 구원하는데 쓰임 받은 사람은 하늘에서 상이 클 뿐 아니라 밤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12:3)
교회에서 말하는 전도왕이나 전도대장은 등록시킨 사람들의 숫자에 따라 주어지는 상이고 명칭이다. 그러나 천국에는 그런 등록 숫자 개념은 없을 것이다. 전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복음전파와 권면과 희생과 기도로 인하여 이루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많이 데려온 사람이 상을 많이 받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예수님을 믿기까지의 과정 중에서 수고한 많은 사람들이 모두 상을 받을 대상이라는 점이다.
전도의 열매는 나눔과 섬김과 사랑과 기도와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결과물이다. 직접 전도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로 사람을 감화시키는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
양육이 한 사람의 구원에는 훨씬 중요한 전도가 될 수 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 참다운 전도는 예수님의 전도이다. 순종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든 삶의 결과물이 전도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목숨을 희생하는 순종으로 모든 죄인들이 의의 길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던 것이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사도 바울은 직접전도, 곧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탁월한 분이지만, 그 탁월함도 모든 사람의 종이 됨으로써 열매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 자체의 초점이 이 영혼구원에 있을 때 그 사람의 정체성은 아주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작은 예수들로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이 땅에서 구현해내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섬김과 사랑의 삶을 통하여 전도하지 않으면 그것은 온전한 열매로 열리기 힘들다. 한 영혼을 구원한다는 것은 많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합력으로 영혼구원이 가능하다. 전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합작품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전도는 여러 전도자들의 오랜 노력으로 이루어지지만 열매를 맺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당연히 열매를 거두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결신시켰다고 해서 모든 것이 결신시킨 그 사람의 공로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결과는 하나님께 영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도자에게 상을 주신다. 다만 전도의 상은 여러 사람이 나누어 가진다.
전도를 하기는 하는데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전도와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삶의 모습이 사실은 전도의 핵심적인 능력이 될 수도 있다. 내가 노력하고 섬긴 것만큼 하나님은 하늘에서 상을 준비해 놓으셨다. 이렇듯 이땅의 보상이 아니라 저 하늘의 상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고전 3:8)
● 가장 큰 상
어떤 일을 하면 하늘에서 큰 상을 받을 수 있을까? 말씀을 깊이 안다고 해서 하늘의 상이 주어질까? 기도할 때 삼층천까지 올라가는 사람, 예언을 모두 맞히는 사람은? 찬송을 기가 막히게 잘 해서 듣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은혜를 끼치면 상이 주어질까? 결론을 말하자면 성경에는 그런 상은 없다. 예배, 말씀, 기도, 찬송, 교제, 봉사 등은 당연한 신앙 생활이다. 그러나 이 모두의 의미를 잘 깨닫고 목적하는 바를 정확히 알고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심지어 금식이나 구제를 많이 해도 상과는 무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금식이든 구제이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빠진 채 아무리 열심히 한들 하나님은 결코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 6:2)
그러면 어떤 신앙행위에 가장 큰 상이 주어질까?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 상, 박해를 이겨낸 상,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승리한 상 등 이럴 때 큰 상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 중에서 가장 으뜸인 상은 원수사랑의 상이다. 원수사랑은 이웃사랑의 최대치이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능력이 없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예수님께서는 원수와 같은 죄인들을 생명으로 사랑하셨다. 그래서 원수사랑, 이웃사랑은 예수님 대신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을 진실한 마음으로 베풀 때마다 하늘에서 전부 다 기억하신다. 물 한 그릇이라도 반드시 상을 주신다고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마10:42)
예수님은 자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좋아하신다. 목숨까지라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다음으로는 이웃사랑을 가장 기뻐하신다. 이웃사랑이란 사람과의 관계에서 행해야 할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현실적인 삶의 모든 가치기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가 이웃사랑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 이웃사랑의 정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이웃사랑인가? 하나님의 마음은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근간이 되는 것이기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이웃사랑은 먼저 이웃의 형편을 자기 상황으로 느껴야한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도와주는 입장에서 상대방의 처지를 동정하며 베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예 그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죄인 된 우리 자신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예 우리가 되셨다. 이것이 이웃사랑의 근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그러므로 이웃사랑은 그 사람의 입장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예 그 이웃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그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진정한 이웃사랑은 내가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돕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아예 그 이웃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는 이웃사랑을 제대로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웃사랑의 본질은 내가 이웃이 되는 것이다.
"너희도 함께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고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히13:3)
우리의 이웃사랑의 대상은 먼저 스스로의 능력으로 생존하기 어려운 고아와 과부가 우선적인 사랑의 대상이어야 한다. 또한 갇힌 자를 돌보고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며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이들은 특히 마음을 잃어버려 어디에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대접해야 하는 것이 의무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소유하고 있다면 그 마음은 낮고 빈 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내려갈 것이다. 하늘의 상은 교회 차원이 아니라 성도들 자신에게 따로따로 주어지기 때문에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이웃사랑을 해야 한다.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 4:34-35)
이웃사랑의 상이 큰 이유는 그 속에 모든 계명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그 말씀 속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원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우리 이웃을 돕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아예 그 이웃이 되어버리는 진정한 의미의 이웃사랑을 행한다면 그 상은 무엇보다 큰 상으로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될 것이다. 이웃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성도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면서 이웃을 섬긴다고 열심인 것도 안 되지만, 하나님을 열심히 섬긴다고 하면서 삶 속에서 사람들을 돌보지 않는 것도 안 된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이웃을 내 자신의 일을 하듯이 돌볼 때 하늘에서는 행한 대로 큰 상이 주어진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13:9-10)
● 상을 빼앗기지 말자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섬기듯이 이웃을 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가? 성경에 의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긍휼을 베푼다는 말은 바로 이웃사랑을 행한다는 말이므로 이것을 감당하지 않으면 심판이 뒤따른다. 이 심판은 저 천국으로 올라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책임이요 의무이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약 2:13)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통로가 되는 일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들 사이의 통로가 되신 것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로이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담고 살아가는 그릇들인 것이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일 3:17)
하나님은 충성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시지만 반면에 벌점 같은 것도 있는데 성경은 이것을 불시험이라고 표현한다. 그 불시험에서 승리하면 자기가 쌓은 공적을 그대로 인정받게 되지만 의무와 책임이 있는 부분에 대해 소홀하다면 불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며 아무리 큰 공적을 쌓았어도 불시험에 타버리면 겨우 구원만 받게 된다. 하늘의 상은 눈에 보이지도 만질 수도 없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늘에 상을 쌓도록 노력해야 한다.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고전 3:13-15)
우리는 혹시라도 받은 상을 까먹을 수 있다. 달란트 비유를 통해 알듯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있던 달란트마저도 빼앗겨 버렸다. 달란트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수단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수단은 그리스도의 사랑이며 큰 능력이다. 우리는 이 강력한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곧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은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말과 같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마28:28-30)
그러나 이 땅에서의 삶을 통하여 저 하늘의 상을 쌓을 수 있다. 교회에서 열심히 충성되게 일해도 세상에서 빵점인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영성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마음과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힘써야 한다. 하늘에서 받을 상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소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정체성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더욱더 영성이 깊어져 참 신앙인으로 만들어지고 성장되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요이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