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基督敎와 世界歷史, 人物史 스크랩 (권력무상) 상앙(=공손 앙=위 앙)
sooaram 추천 0 조회 15 11.10.16 21: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일그러진 난세의 혁명가 상앙(기원전 390~338년)

 출중했던 앙의 재능


진(秦)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왕조이며, 현재 중국을 지칭하는 china의 어원이 된 나라이고, 또 불로장생을 꿈꾸었던 진시황등의 일화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나라이다.

하지만 진나라는 중원에서도 멀리 떨어진 서북방면에서  후진국 취급을 받던 나라였으며, 그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많은 역사가들은 변법의 성공적인 시행을 손꼽고 있다.

그리고 그 변법을 만들고 적용하고 완성하였던 사람이 바로 상앙이었다.



  상앙은 원래 위나라 공손씨 가문의 사람으로 본명은 공손 앙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위나라 왕의 후처였고, 공손씨 또한 위나라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대표적인 권세가였다.  위나라 재상을 지니고 있던 공손 좌역시 일찍이 그의 재능을 발견하였으며, 또  같은 가문 출신이기도 하였던 앙을 후임재상으로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위혜왕이 병석에 있을 때, 공손 좌에게 일이 생기면 그 후임으로 누가 적합할지를 물었다. 그러자 공손좌는 공손 앙을 추천하였는데, 혜왕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공손 좌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만약 그를 채용하시지 않으신다면 그를 죽여 없애야 합니다."


 공손좌는 앙의 뛰어난 재능이 다른 나라를 위해 쓰일것을 염려했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가문 출신인 앙에게 위해가 가해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따라서 공손좌는 앙에게 다른 나라로 망명하라는 조언을 하였지만, 앙은 자신을 채용하라는 건의도 듣지않았던 혜왕은 다른 의견역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며 태연하였다. 결국 그의 장담대로 혜왕은 애송이에게 불과한 앙을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공손좌까지 멀리하고 말았다.

  얼마 후 자신을 후원 해 주던 공손좌가 죽자 앙은  진(秦)나라로 망명하였다. 당시 중국 지식인들 사이에는  가문의 지위나 권력을 계승하는 것 보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고 채용해 줄 군주를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유행처럼 되고 있다.  공손 앙도 이러한 대열중 한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기원전 362년 진나라 왕위에 오른 효공은, 약 300년 전 목공시대 때 잠시 차지하였던 패권국의 지위를 회복하기 위해 널리 인재를 등용하면서, 한편으로는 영토수복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런데 효공역시 처음에는  공손 앙의 주장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았고, 오히려 공손 앙을 천거하였던 사람에게 "그대가 소개한 사람은 미친 사람인가, 어찌 그런 사람을 등용 할 수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며 심하게 질책하였다.

 

그러나 상앙은 네번의 대면 끝에 효공을 설득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를 추천햇던 경감도 그 영문을 몰라 어떻게 효공을 설득시켰는데 물어보았다. 공손 앙의 논리는 의외로 간단하였다.

 처음에는 제왕의 도로써 점진적이면서도 이상적인 정치 실현을 말하였지만 효공은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 처음의 만남에서 공손 앙은 효공의 성향을 이미 파악하였다.

 

즉 효공은 진나라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쳐저 있는 만큼 보다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개혁을 원하였으며, 정치적 이상실현이나 패권국의 지위를 획득하는 정도로는 그 야망을 채울 수 없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대면을 거듭하면 할 수록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부국강병책을 강변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효공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를 이끄는 제왕의 리더쉽

 
공손앙 주장한 핵심은 제왕이 이끌면 백성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하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감룡이었다.


 감룡은 전통적인 관습과 법을 존중하여야 된다는 보수적인 견해로 공손 앙의 주장에 반발하였다. 그러나 공손 앙의 반론은 더욱 예리하였다.

 " 법과 관습에만 의지하는 사람은 관직에 앉아 법을 지킬 수는 있어도 그 이상의 일은 해낼 수 없습니다. .... 나라를 이롭게 할 수 있다면 굳이 옛것을 따라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예를 지킨다고 해서 무조건 잘하는 것도 아닙니다."

 효공은 마침내 공손 앙의 주장에 적극 찬성하고 그를 중용하였으며,  그리고 효공에게 증용되자 공손앙은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강도높은 혁신안을 제출하였다. 상앙의 혁신안은 주나라 이후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관습적인 씨족사회를 타파하고 대가족제도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즉 씨족 사회가 뿌리깊히 박혀있는 이상, 제왕의 권리는 궁성밖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리고 이 씨족사회의 가족 근간이 되는 것이 같은 혈연으로 묶여진 대가족 제도였고, 이들은 세습적인 부와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인 능력발휘가 대단히 제약될 수 밖에 없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왕권강화/부국강병/법치주의)

아들이 성인이 되어도 분가시키지 않으면 두배의 세금을 징수하여 소가족 제도를 적극 유도하였으며, 공적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을 내리고 귀족이라도 공적이 없으면 지위를 제한하여 능력중심의 신분제를 추구하였다.


 이렇게 능력에 의해 신분상승한 자는 그 지위를 보장해 주지만 사치는 엄격히 규제하여 토지와 가옥의 넓이, 노비숫자, 의복등을 제한하였다.


 그리고 다섯가구나 열가구를 하나로 묶는 상호감시제를 확립하여, 범죄자를 고발하지 않는 자는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형을 범죄자를 고발한자는 전공자와 같은 대우를 해 주었다.

이렇게 귀족계층만이 누릴 수 있었던 특권을 해체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개인을 단위로 한 납세 군역 치안조직을 확립하여 진나라 부국강병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혁신정치가 처음부터 백성들에게 호응을 얻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성인된 아들들을 분가시킬 형편이 못되었던 백성들에겐 상당한 고통이 따랐으며,  무엇보다 세습적인 지위와 특해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귀족들은 전공을 세워야만 된다는 중앙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공손 앙은 태자의 교육을 담당하였던 왕실 최측근 공손가에게 자자형을 시행하는 강력한 조치로 귀족들이 불평불만을 잠재웠다. 자자형이란 몸에 먹물로  범죄자라는 문신을 새기는 것으로 현재로 말하면 무기징역이나 다름 없는 무거운 형벌이었다. 이렇게 법의 집행에는 지휘고하와 상하가 없음을 보이자 모든 사람이 믿고 따랐다.

  공손앙이 변법을 시행한지 10년이 되자, 길가에 돈과  떨어져 있어도 그것을 줍는 이가 없었고,  생활은 풍족하였으며, 백성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앞을 다퉈 전쟁에 나섰지만, 이웃들간에는 사사로운 다툼이 없어져 오히려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위나라를 향한 칼날, 뒤늦은 혜왕의 후회

 
공손 앙이 고국인 위나라에 대해 사적인 감정으로 공격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당시 위나라는 손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손빈을 등용한 제나라에 패하고 태자마저 포로로 잡히는 등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더욱이 위나라는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위수분지와 황하강을 천연 요새로 삼아 진나라의 중원진축을 막고 있는 형세였다. 따라서 중원진출을 항상 모색하고 있던 진나라로써는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임이 분명하였다.

 진의 효공은 상앙을 장군으로 임명하여 위나라 공격을 명하였는데, 위나라는 이에 맞서 왕자중 한명을 장군으로 삼았다.


 그런데 공손 앙은 위나라에 있을 때 부터 그와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다. 그리고 공손앙은 그에게 차마 공격할 수 없으니 화친조약을 맺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공손앙의 보낸 서신 내용을 그대로 믿은 나머지 별다른 무장없이 적진으로 갔지만, 곧바로 공손앙이 배치해 놓은 복병에 사로잡혀 인질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지휘관을 어이없이 잃어버린 위나라 군대는 진나라 군대의 총공세에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혜왕은 천연의 요새인 하서땅을 진나라에게 양도할 수 밖에 없었으며, 도읍역시 동쪽으로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때 공숙 좌의 의견을 듣지 않은 것이 한스럽구나."


위 혜왕은  후회를 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국운은 기울어 지고 있었다. 그리고 위나라 군대를 대파한 앙은 상을 비롯한 15개읍을 하사받음으로써, 상군으로 부르게 되었고 공손앙이란 원래이름보다 상앙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승자박 , 초심을 잃어버린 혁명가의 최후

 이렇게 상앙은 위로는 국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천민들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재상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상에 오르는 것 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고 했던가, 10년 동안의 재상을 하는 동안, 어느 덧 상앙은 그가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던 구 귀족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차츰 그를 찬하는 소리는 줄어들기 시작하였고 원망하는 소리가 커지기 시작하였다. 상앙도 이러한 민심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조량이라는 사람을 초빙하여 듣기 싫은 말은 약이고 듣기 좋은 말은 병 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며 올바른 민심을 듣고자 하였다.

 그러자 초량은 상앙의 실책을 조목조목 말하였다.


 우선 재상을 지내면서 궁궐을 크게 증축하였는데 그것을 공적이라 할 수는 없고, 지나치게 가혹한 형벌을 통해 많은 백성들을 죽이거나 고통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백성을 교화시키는 것이 법령으로 다스리는 것보다 효과적이며, 법령으로 복종시키는 것보다 왕이 모범을 보이는 것이 더 빠른 길입니다.....


 당신은 지금 아침이슬처럼 금방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는데, 지금이라도 오래 살고 싶다면 하사받은 땅을 반환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또한 조량은 고른 인재등용을 주문하는 한편 그에게 부를 탐하고 국정을 독점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였다.

 

즉 상앙은 자신의 주장에 부합하는 인사들만을  편중하여 고용하였으며, 귀족들에게는 엄격하게 토지와 가옥을 규제하면서도 자신은 상이라는 광할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앙은 조량의 말도 무시하였다.


 

그는 어느 누구와도 소통을 거부하였고,

오직 자신의 주장과 정책만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갔다.

 하지만 영원한 권력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상앙의 최대 지지자였던 효공이 사망하자, 졸지에 상앙은 공공의 적이되고 말았다. 


 특히 상앙으로부터 문책을 받았던 왕자들을 중심으로 구 귀족 세력들은 일제히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상앙에게는 역모죄란 억울한 누명이 씌워졌지만 어느 누구하나 구명 해 주는 이가 없었다.

 

(="적을 만들지 말라"/ "있을 때 잘해!"는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덕행을 베풀어라)

 상앙은 급히 몸을 피해 국외망명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진나라에서 국외로 빠져 나가기 위해서는 함곡관을 거쳐가는 길이 가장 빠른데, 날이 저물자 어느 여관에서 하루밤을 묵고자 하였다. 하지만 여관 주인은 법증명서가 없는 사람은 재워줄 수 없다는 상앙의 법 때문에 방을 줄 수가 없다고 하였다.

 상앙은 탄식한다.

"내가 만든 법 때문에 내가 죽게 되는구나."

 상앙은 밤잠도 못자고 그길로 위나라로 망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지난날  위군을 속이고 승전을 한 상앙을 위나라에서 받아들일리가 없었다. 상앙은 다른 나라로의 망명을 모색하였지만,  진나라의 공격을 받게 될것을 우려한  위나라는 상앙을 강제추방하고 말았다.


 생각끝에 상앙은 가족들과 함께, 북쪽방면의 작은 나라인 정나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정나라는 진나라를 대적할만한 나라가 되질 못하였다.
 결국 상앙은 진나라의 추격군에게 잡혀 정나라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 그는 범죄자를 신고하지 않으면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좌형이란 잔인한 사형제도를 만들었지만, 범죄자에겐  수레에 매달아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이라는 더 혹독한 사형제도를 만들었다.


 범죄자로 낙인찍혔던 상앙역시, 비록 시신이 되어 진나라로 돌아왔지만 이 거열형을 피할길은 없었다.

   국력신장만큼이나 중요했던 소통

 상앙의 비극적인 최후에도 불구하고, 그의 혁신정책은 분명 성공적이었다. 이후 중국 정치는 유학파가 주도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이상으로 삼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봉건제도가 실시된 예는 단 한번도 없었다. 


 대신 상앙이 시행한 군현제는 이후 동양사 통치방식의 근간이 될 정도로 그 영향이 지대하다. 그만큼 선진적이고 당시로서는 매우 실리적인 개혁안이었다. 또 변방의 작은 후진국으로 전락했던 진나라를 단숨에 중국 최강국으로 성장시켰을 만큼, 상앙은 국가개혁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그는 소통을 거부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책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사람까지 국외로 추방하여 버렸다. 그저 무조건적인 복종만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또한 조량의 조언을 자청하였으면서도, 역시 그의 조언을 무시해 버렸다.

상앙은  지나치게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에만 집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를 유지하기 위해 권력을 독점하려 하였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강한 경제기반이 필수적이었다.

 그것은 곧 자신이 만들어 놓은 법과 사회질서를 어기는 결과를 가져왔고, 어느 누구도 예외의 대상이 될 수는 없었지만, 소통을 거부하였기에 자신이 저지르고 있던 잘못만은 예외가 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소통을 거부하였기에, 자신이 만든 개혁안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물이나 공기도 흐르지 않으면 고이고 썩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다.
흐르지 않으면 단절되고 단절 속에서 염증이 생기고, 염증에서 고통이 시작된다

 

어느때 보다 ‘흐르는 소통’의 중요함을 느끼고 있다.
소통과 흐름의 출발은 경청이다.

 

경청이란 자기의 생각과 에고를 내려놓고 비워진 겸허함으로 듣는 것을 말한다.

대화를 한다면서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의 말만 일방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대화가 아니라 차라리 독백이나 연설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자기만의 성공 스토리가 확실한 사람일수록 이런 성향은 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큰 성공을 일궈낸 사람이나 조직은
그 성공을 통해서 얻게 된 자기만의 원칙에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하게 되어있다
.

그러한 집착은 은연중에 자기만의 생각과 방식이 옳다는 자만심으로 흐르고

남들의 이야기는 겉핥기 식으로 듣게 된다.

 

위로 올라가 있는 사람일수록 자주 아랫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자문을 구해야 한다.

그것도 진정으로 말이다.

 

나는 이 구절에서 신영복 선생의 그림을 잊을 수 없다.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 벽에 그림을 거는 사람이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똑바로 걸렸는지 물어보듯이

리더는 늘 겸허한 마음으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진정으로 경청해야 한다.

그래야 진짜 소통이 시작이 된다
. 그리고 그 소통은 조직의 윤활유다.

 



이것이 없이 아무리 조직이나 회사 국가의 성과가 많이 난다고 해도 그것은 허울뿐인 성장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관계의 존재다. 관계의 질이 삶의 질, 더 나아가서 우리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

먼저 나부터 이 글을 적으면서 반성을 해 본다.

 

동료와, 아빠와 남편과, 아들로서 나는 진정 그들과 함께 흐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여러분들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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