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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강론 07
디모데후서 3:1-9
말세에
지상 교회에는 금, 은그릇과 같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는 것으로 긍휼이 담겨진 그릇, 곧 진리의 아들이 된 자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나무, 질그릇이 있어서 천하게 쓰는 것으로 진노가 담겨진 그릇, 곧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교훈을 좇는 자들도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말세에 어떤 현상으로 드러나는가를 바울 사도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1절). “말세”라는 말의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인데 ‘에스카타이스’의 원형 ‘에스카토스’는 ‘맨 끝의, 마지막의, 가장 가치 없는, 가장 작은’이라는 뜻인데 최상급형으로 가장 바깥쪽에 있는 사람이나 사물, 공간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장소, 시간적으로 일련의 마지막 사건들을 의미한다. ‘헤메라이스’의 원형 ‘헤메라’는 ‘날, 낮, 하루 종일’이라는 뜻이다. 직역하면 ‘마지막 날들 안에’라는 말이다.
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에스카토스 헤메라)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18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21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행 2:17-21)
이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오순절 성령 강림을 요엘서 말씀의 성취라고 강론한 것이다. “환상, 꿈, 예언”은 말씀을 계시하신 도구이다. 이런 점에서 “말세”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율법적 행위에서 벗어나 진리의 성령께서 말씀 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마지막 날들 안에’란 종말의 상태를 표현한 것이고, 종말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다 드러난 상태이다.
“고통하는 때”라는 말에서 “고통하는”의 ‘칼레포스’는 ‘힘든, 어려운, 곤란한, 악한, 나쁜’이라는 뜻이고 “때”의 ‘카이로스’는 ‘때, 시간, 시점, 순간’이라는 뜻이다. ‘칼레포스’란 힘들고 어려운 것 자체를 악의 상태로 말씀한 것이다. 신약에서 2회 사용되었는데 마태는 “또 예수께서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시매 귀신 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나니 그들은 몹시 사나워(칼레포스)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지경이더라”(마 8:28)라고 썼는데 우리 성경에서 “사나워”라고 번역하였다. 즉 귀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을 악한 상태임을 말씀한 것이다. 세상이 악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니 이 땅의 모든 인간은 악한 영에 사로잡혀 죄악 가운데 있는 존재라는 것이 비로소 드러났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우리가 어둠이라는 정체가 들통난 것이다(요 1:5).
‘마지막 날들 안’이라는 종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악의 상태에 있다는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드러났다. 그래서 지상 교회에는 금, 은그릇과 나무, 질그릇이 있어 하나님의 긍휼과 진노를 담고 있는 자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이것을 알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2절). “돈”이란 이미 디모데전서 3:3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기 노력과 행위의 결과물로 자기 의를 상징한다(참고 눅 16:14).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이 전제되어 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드러나는 모습이다. “자랑하며”라는 말의 ‘알라존’은 ‘허풍선이, 사기꾼’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많고 더 좋은 것들, 심지어 전혀 소유하지 않은 것도 가진 것으로 여기고 자신이 행할 수 없는 것을 약속하는 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라는 말씀은 단순히 재물을 탐내지 말라거나 주를 위해 사용하도록 돈을 벌되 돈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이 베푸시는 은혜를 자기 사랑으로 대체하는 것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자 하는 우상숭배가 된다는 의미이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그러면서도 자신은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면서 사기를 치는 것이 종말의 상태에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교만”은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영생을 취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음을 말한다. “비방”의 ‘블라스페모스’는 ‘모독자, 훼방자’라는 뜻으로 율법의 행위로 말씀을 모독하는 것이다. “부모를 거역하며”라는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 부모로 여기지 않고 불순종한다는 의미이다. “감사하지 아니하며”의 ‘아카리스토스’(‘카리스’에서 유래한 단어)는 ‘은혜를 모르는, 감사하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거룩하지 아니하며”(헬, ‘아노시오스’)라고 하였는데 거룩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표현으로(계 15:4, 16:5) 하나님 안에 구별됨과 상관없는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적 행위만 양산하면서도 진리를 아는 것처럼 허풍스런 말을 하면서 사기를 치고 율법적 행위로 말씀을 거스르며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기에 은혜도 모르는 상태로 하나님의 거룩과 관계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3절). “무정하며”(헬, ‘아스토르고스’)는 ‘사랑이 없는’이라는 뜻이고,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헬, ‘아스폰도스’)는 ‘화해할 수 없는’이라는 뜻이고, “모함하며”(헬, ‘디아볼로스’)는 ‘중상자, 비방자, 마귀’라는 뜻이며, “절제하지 못하며”(헬, ‘아크라테스’)는 ‘무력한, 무능한, 힘이 없는’이라는 뜻이며, “사나우며”(헬, ‘아네메로스’)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만적인’이라는 뜻이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헬, ‘아필라가도스’)는 ‘선을 사랑하지 않는’이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기에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어 마귀의 역할을 할 수밖에 없으며 죄 가운데 무능한 데도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로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행하신 선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 종말의 상태에 있는 죄악된 모습이라는 의미이다.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4절). “배신하며”(헬, ‘프로도테스’)는 ‘배신자’라는 뜻인데 누가복음 6:16에서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라고 할 때 “파는 자”라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이다. “조급하며”(헬, ‘프로페테스’)는 ‘분별없는’이라는 뜻이며, “자만하며”(헬, ‘튀포오’)는 ‘튀포스’(연기)에서 유래한 단어로 ‘연기를 일으키다, 안개로 감싸다, 흐리게 하다’라는 뜻이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말씀에서 “더하며”의 헬라어 ‘말론’은 ‘~보다 오히려’라는 뜻이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요 3:19)
종말의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판 자와 같은 가룟 유다의 모습을 하며 분별력이 없어 진리를 안개로 감싸듯이 흐릿하게 만드는 현상이 있으며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오히려 세상의 자기 즐거움을 더 사랑하는 상태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절). “경건의 모양”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율법적 행위로 종교적 외형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이다.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18, 22-24)
결국 “경건의 능력”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부인하니”라는 말의 ‘아르네오마이’는 ‘거절하다, 부인하다’라는 뜻인데(딤후 2:12-13) 여기서도 중수디포태로 썼다. 즉 거짓 교사들이며 곧 마귀의 권세에 매여 거절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진리의 아들이 되지 못한 자들은 십자가의 능력을 거절하는 자들이기에 다른 교훈을 따르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라고 말씀한다. 진리의 아들들은 주님께서 거짓 가르침에서 돌아서도록 만드신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가 진리로 든든히 서는 것이다.
“6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6-7절). “집”이란 하나님의 집을 가리키고, “어리석은 여자”의 ‘귀나이카리온’은 ‘작은 여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가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 진리의 말씀을 잘 먹지 못해 작은 상태에 있는 성도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가만히 들어가”라는 말의 ‘엔뒤노’는 ‘기어들어가다’라는 뜻으로 자세를 낮추어 자기를 숨기면서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죄를 중히 지고”라는 말의 ‘소류오’는 ‘쌓아 올리다’라는 뜻인데 완료수동태로 써서 ‘죄가 현재까지 축적되었다’라는 의미이다.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되어”라고 하였는데 사실 “그 여자는”이라는 말이 없고 ‘그것은’이라는 중성으로 표현하였다. 거짓 선생들은 죄가 쌓였다고 가르쳐 유인하는데 그것을 벗어날 욕심에 끌려 가지만 거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영지주의자들은 진리를 부인한다는 사실을 숨기고 교회에 기어들어가 교회된 자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자 하는데 그 미혹의 방식은 죄가 쌓여 있으나 거기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들어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성경 공부하지만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결코 하나 될 수 없다는 의미이다.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그들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 받은 자들이라 9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이 된 것과 같이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라”(8-9절).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름은 구약에 직접 언급되지 않았지만 모세가 바로 앞에 이적을 행할 때 그에 대적하였던 애굽의 술객들(출 7:11, 22)로 유대인들의 전승인 랍비 문헌에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 사도는 애굽적 사고방식으로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비유한 것이다. “부패한 자”의 ‘카타프데이로’는 ‘멸망하다’라는 뜻이고, “버림 받은 자들”이란 ‘아도키모스’로 믿음 안에서 말씀으로 확증되지 않은 자들이라는 뜻이다.
“나아가지”의 ‘프로콥토’는 ‘전진하다, 나아가다’라는 뜻으로 ‘행운, 성공, 축복, 성공’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이다. 종말의 상태에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기어들어와 다른 교훈을 가르치며 미혹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계속 더 전진하여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리석음”이라는 말의 ‘아노이아’는 부정접두어 ‘아’와 ‘노오스’(정신, 지각)의 합성어로 ‘이해력 부족, 분별하지 못함, 어리석음’이라는 뜻이다(누가복음 6:11에서는 “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할까 하고 서론 의논하니라”라고 “노기”라고 번역하였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분노’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거짓 선생들의 가르침은 복음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결국에는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분노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함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든든히 서 있기 때문이다(딤후 2:19).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2025031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