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평할매의 걸음
-고재종
오일장 갔다오는 자갈길에서도 뽑고
보리밭 매는 두렁에서도 뽑고
아들 다섯 딸 넷 자식, 쏙쏙 뽑고도
휘파람 소리 나게
들로 산으로 달리는
저 칠순 노인의 당찬 걸음이여
한다 한다 하니까 해도 너무하는 것들
한다 한다 하니까 갈수록 빌빌거리는 것들
그 소나무 껍질 같은 손바닥으로
한 차례 냅다 올려붙이곤,
저 장군봉 하나 우뚝 세울
대지의 대지의 씽씽한 딸이여
오늘도 범벅땀 족히는 흘리며
서 마지기 논두렁 풀 홀로 다 베는구료
*고재종 시집 <앞강도 야위는 이 그리움>에서
<시감상노트> 우리는 시를 읽고 문학을 논하며 흔히 정신을 이야기합니다. 여기 이 시에 나오는 창평할매는 우리의 정신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창평할매의 생이 이 땅의 신산스러웠던 우리의 역사이고 정신입니다. 창평할매는 이 땅의 빌빌거리는 못난 것들과 해도해도 너무하는 철면피같은 것들을 소나무 껍질 같은 손바닥으로 제압하고는 서둘러 논으로 돌아와 이 땅의 어린 자손들을 거두기 위해 땀을 흘리십니다. 평생 그렇게 사신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입니다. 그리고 어여쁜 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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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고재종
1
배꽃 길을 걷는 할머님
워매! 바람에 꽃 다 져부네, 하니
같이 걷던 영감님
꽃이 져야 열매 맺제, 하네
2
별이 대숲 위에 자욱한 걸 보곤
별의 말을 옮겨 적는 은자가 되고 싶더니
어머니의 그렁그렁한 눈망울 같은 별을 보곤
별을 보는 사람의 슬픔을 적기로 했다
3
강물에 씻기는 돌은
날이 닳아서 조약돌인데
세월에 씻기는 나는
날로 거칠어서 쑥대밭이다
4
그 옛날 어머니들, 저녁연기 피워올려
아홉 자식 아귀 자식들 고봉밥 짓더니
요즈음 할머니들은, 저녁연기 피워올려
저승 잘 받아달라고 하늘에 아뢰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