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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제의 행정지도에서 사라진 '잃어버린 섬'들 |
창간25년 특별기획-거제의 잃어버린 섬들을 찾아서① |
이후 통영군에 합병·복군 등 과정 거치며 국방부 등에 지심도·저도 등 소유권 빼앗겨
한산도·부속도서도 지역주민들 의견 상관없이 당시 실권자들의 대의명분 따라 통영군에 귀속
거제의 수많은 섬들 중 일부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군사요충지 역할로 인해 군(軍)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이후 반환되지 않고 있다. 또 통영군과 거제군이 합병된 이후 다시 복군됐지만 이전 거제군 소유의 유·무인도 상당수가 통영에 귀속돼버렸다. |
10·63. 2013년 6월말 현재 거제시에 거주하는 주민등록상 인구는 내·외국인 포함 24만9499명이다. 앞에 언급된 10은 거제의 유인도 숫자이며 뒤의 63은 무인도이다.
유인도 10개 중에 포함된 지심도는 행정구역상 거제시에 속하면서도 소유자는 국방부이며 무인도 중 저도 또한 국방부에서 거제시민들의 발길을 불허하고 있다.
거제시 일운면 옥림리에 있는 지심도는 국방부 소유지만 26가구 51명의 거제시민이 살고 있는 삶의 터전이다. 반면 저도는 아예 거제시민들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장목면 유호리 소재 저도는 대통령 별장인 '청해대'가 자리잡고 있으며 해군에서 휴양지로 이용하고 있다.
지심도와 저도가 국방부 소유가 된 것은 일제시대 때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저도는 1920년 일본군의 통신소와 탄약고로 사용된 뒤 1950년 주한연합군 탄약고를 거쳐 1954년부터 해군에서 인수, 관리하고 있다.
지심도는 1937년 일본군 1개 중대가 주둔하며 주민들을 강제철거 시킨 뒤 군사기지로 사용한 이래 해방되고 난 뒤에도 계속 국방부 소유로 남아 있다.
그나마 지심도는 최근 거제시에서 소유권 이전을 추진하고 있으며 저도 또한 한 때 거제시로의 소유권 이전이 추진된 바 있다. 이처럼 거제시 행정구역 내에 있는 이들 섬들은 거제시나 시민들이 소유권 이전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상황이지만 한산도를 중심으로 한 부속 섬들은 지심도·저도 등과 같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아예 행정구역이 바뀌어 버렸다.
주민들의 정체성 자체가 '거제'가 아닌 '통영'으로 바뀌어 버린 경우다. 한 세기가 흐르면서 거제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 가까운 거리에 있기 때문에 일부 혈연으로 연결되기도 하지만 '고향이 거제'라는 정체성은 찾기 힘들다.
한산도, 통영으로의 편입 과정
▲ 청구요람에서 보면 1896년 거제부 당시 한산도를 포함한 부속도서가 거제부의 행정구역에 포함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1895년 전국의 진보(鎭堡) 및 통제영(統制營) 폐지 후 1900년 통제영 터에 진남군(鎭南郡)을 설치하면서 거제군의 가좌도(加佐島, 가조도)와 한산도(閑山島)가 진남군의 관할지역으로 편입됐다.
1909년 진남군(鎭南郡)을 용남군(龍南郡)으로 개칭하고 일제시대인 1914년 용남군과 거제군을 통합해 통영군(統營郡)으로 개편했다. 1953년 1월1일 법률 제271호에 따라 통영군에서 거제군이 분리돼 복군됐다. 하지만 복군 당시 경제적 여건 등으로 인해 한산면과 부속도서 및 매물도까지 통영시 관할로 남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해 1593년부터 1597년까지 약 3년8개월 동안 본영을 설치하고 생활했던 한산도는 이 때부터 '경남 통영시 한산면'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한산도 주변에는 추봉도, 용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으며 주변의 풍경이 아름다워 한려수도 한려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다.
복군 과정에서의 논란
▲ 멀리서 본 지심도 |
거제군의 복군이 처음 논의된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자료에 1949년 4월27일 조선일보에 실린 '거제도민은 복군을 요망한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제도는 일찍이 임진왜란 이후 서기 1913년에 이르기까지 근 300년 간 한 고을로서 행정면의 독립을 보고 있었던 것인데 불행히도 전기 1913년에 당시의 총독부로부터 국내의 행정기구를 축소시킨다는 미명하에 동 도(島)를 가장 가까운 본토의 통영군에 합병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도민들은 제반 행정절차에 관한 수속허가신청 등에 대하여 적지 않은 곤란은 느꼈을뿐더러 나아가서는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초래케 하였던 것이며 금반 폭동의 원인(遠因) 또한 여기에 있다는 것을 도민들은 무언지중에 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7만 도민은 한결같이 거제도 복군(復郡)은 그들이 당면한 선결문제라 하여 RM 여론은 바야흐로 비등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재의 거제시인 당시 7만의 거제도민의 주장 이후 전쟁으로 인한 이북피난민 15만명을 구호하는 보건사회부 거제도분실과 통영군 거제도분소, CAC(Committee for assisting the return of displaced civilians·실향사민귀향협조위원회) 등이 거제군 복군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해 1952년 11월27일에 열린 제2대 국회에서 통영군의 행정구역 변경안이 상정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제2대 국회가 열리기 전 현재 통영시 일원의 당시 2읍 10개면 면장과 면의회 의장들은 한산도를 통영의 관할부속도서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결의하게 된다.
당시 그들이 한산도를 포함시켜야 하는 근거로 △한산도와 통영은 역사적인 충무공 임지로 불가분의 관계 △해운ㆍ교통ㆍ교육ㆍ통신ㆍ경제 등이 통영에 의존 등을 제시하며 진성서를 국회에 제출했다.
이 과정에서 한산도를 포함한 부속도서 주민들의 전체 의견이 제대로 반영된 것인지는 역사적 자료가 부실해 확인할 길이 없다.
통영시 분할에 관한 행정구역 변경안은 11월27일 국회에서 장시간 논의한 결과 통영군을 분할해 거제군을 독립시키고 한산도를 비롯한 다수 도서를 포함한 통영군은 그대로 존속시키기로 결정됐다.
이 과정에서 아쉬운 점은 전쟁 중에 행정구역 변경안이 상정됐기 때문에 지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기 힘들었다는 것과 15만명의 피난민에 대한 주변지역 주민들의 왜곡된 시선 등이 반영됐다는 점이다.
당시 국회에서 합천의 김명수 의원이 논란에 대한 결론이 없자 "거제도는 피난민 관계로 복군 않을 수 없으니 거제는 복군하고 한산도를 함한 통영군은 그대로 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하고 다른 국회의원 등의 동의를 얻어 그대로 결정됐다.
이 한마디로 한산도를 포함한 부속 섬들은 거제에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섬으로 남게 돼버린 것이다. 이후 거제에서 더 가까운 한산도 부속도서 주민들은 생활권은 거제에 두면서 행정 등 각종 민원은 통영에서 해결하는 이중생활 아닌 이중생활을 하고 있다.
자료협조:: 거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