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지역 근대문화유산 답사
인천의 開港(개항) 과정을 알아보고, 그 때문에 인천에 생긴 '한국 최초' 기록들을 찾아보았다.
이제 인천 답사 마무리 편... 답동성당부터 시작해서 기독교 관련 유적들과 일본은행 거리등을 답사해보기로 한다.
<답사코스... 아래 코스의 역순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畓洞)답동성당 (사적 제287호)
답사기 (15)편 약현성당, (16)편 명동성당에서도 썼지만
이 땅에 천주교가 들어와 숱한 고통과 난관, 순교를 이겨내고서야 비로소 자리를 잡았는데
그 가운데 성당이 생겨난 순서를 보면 약현성당이 1892년, 인천 답동성당이 1897년, 그리고 명동성당이 1898년이다.
인천 답동 성당이 명동성당보다 먼저 생겼다는데 급 관심이 쏠린다.
그래서인지 인천 개항기 근대문화유산중 답동성당이 유일하게 국가지정 문화재, 사적 제287호이다.
답동성당측에서는 천주교 인천교구 주교좌 답동 성바오로 성당이 정식명칭이다. 즉 인천시내 102개 본당의 주교좌이다.
19세기말 제물포에 성당이 건립된 것은 이곳이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눈 여겨 본 당시 조선교구장 블랑(1884∼90년 파리외방전교회) 주교의 결정에 의해서였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의 체결로 개항지에서의 토지 매입과 성전 건축이 가능해지자 블랑 주교는 국제도시로 부상하고 있던 제물포에 코스트 신부(1842∼1896년)를 파견해 성당 건립을 서두르게 된다. 이후 페낭신학교에 있던 빌렘(홍 요셉 1860∼1938년)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를 맡아 인천지역 첫번째 본당인 제물포본당(답동본당의 원래 이름)을 설립하게 되는데, 이때가 1889년 7월 1일이다. 빌렘 신부는 일주일 후 임시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84명(한국인 59명과 일본인 25명)이 참석한 가운데 감격적인 첫 미사를 봉헌했다.
답동성전의 건립은 빌렘 신부가 이듬해 지금의 성당 자리인 답동 언덕에 대지 3,212평을 매입함으로써 첫 발을 내딛게 된다. 1890년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로 전임된 빌렘 신부에 이어 르 비엘 신부(신바오로 1890~1893)가 2대 신부로 부임해 성당 건립 기금을 마련하고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 수녀를 요청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병으로 인해 휴양을 떠나면서 성전 건립은 1893년에 부임한 마라발(서요셉 1893∼1904년) 신부의 몫으로 넘어갔다.
마라발 신부는 부임하자마자 수녀원 건립을 시작하는 동시에 코스트 신부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아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다. 이듬해 종탑이 완공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1890∼1933년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이 거행됐다. 300평 규모로 전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1933년 신자수가 1,500여명에 육박하게 되자 제 4대 드뇌(전 으제니오1904∼1937년) 신부는 증축계획을 세우고 1935년부터 성전의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개축작업을 시작하여 2년 후인 1937년 원 라리보(1933∼1940년 재임) 주교 주례로 성대한 축성식을 가졌다.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인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답동성당은 문화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287호로 지정됐다.
<1896년 최초의 성전(左), 1937년 두번째 축성한 성전(右)...>
답동성당은 벽돌로 쌓아올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특히 정면에 설계된 3개의 종탑은 8개의 작은 돌로 된 기둥이 양파모양을 한 8각형의 돔(dome)을 떠받들고 있는 모습이 특히 아름답다. 건축 당시에는 뾰족 종탑에 아직 鐘이 없었으나 1900년 초,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외국으로부터 주문하여 들여왔고, 종각이 세워지고 3개의 종이 인천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비록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매일 낮 12시와 저녁 6시에 울리던 3개의 종은 현재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탑의 조형미와 상징성은 여전하다.
또한 숫자 ‘8’은 천상의 예루살렘을 상징한다고 생각되었기에 종탑을 8각형태로 만들어 로마네스크 건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중구 지역에서는 대부분 답동성당의 종탑이 보인다....>
<답동 성당 전경... 파사드의 3개의 종탑이 건축미의 절정을 보여주는 빼어난 건축물이다.>
<정면... 3개의 아치형 출입구는 화강암으로 둘러 붉은 벽돌 건물과의 조화를 이루었다.>
<성당 내부... 중앙의 네이브(중랑)와 좌우측 아일(측랑)은 아치가 있는 기둥열에 의해 나누어진다.>
<성당 옆모습....>
<성당 건축물의 시작점이자 매우 중요한 의미로 동쪽을 향하는 제단의 뒷쪽, 각진 모습의 앱스...>
해안성당
1958년 답동성당에 다니던 화교들이 건립했다.
이후 인천교구장의 재가로 한중 합동본당인 해안동 본당이 설립되었다.
성당 앞쪽의 해안천주교 교육관은 1939년 중국인 주택 용도인 사합원 형태의 건물로 지어진 것이다.
<해안천주교회... 일본 은행거리 근처에 있다.>
內里敎會(내리교회)
1885년 아펜젤러 부부와 언더우드가 선교하러 들어와 초가집에서 한달간 머물면서 예배를 올린 후 한양으로 올라갔고 노병일을 내려보내 1901년 벽돌을 쌓아 교회를 짓게 하였다. 한국 감리교 최초의 교회가 되었다.
한국 최초의 교회 중 하나이기 때문에 신자들은 "한국의 어머니교회"라고도 부른다.
당시 선교사들은 대부분 인천에서부터 활동을 시작해 전국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존스 목사는 영화학당 및 선교사합숙소를 건립했고 강화, 해주, 남양지방의 전도를 담당했다.
한국 최초의 초등학교 영화학교 설립 등 여러 부문에서 "한국 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다.
1901년에 옛 교회를 허물고 새 건물을 지었으며 지금의 교회는 1985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신축 완성하였다.
<1901년 내리교회...>
<1985년, 창립 100주년을 맞아 신축한 교회건물...>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1호)
1890년 9월 영국해군 종군신부 코프(고요한) 주교와 외과의사 랜디스가 인천에 도착하여 한국 최초로 설립했던 성미카엘 교회가 바로 대한성공회 인천내동교회이다. 당초 교회는 6.25전쟁으로 소실되었고 지금의 이곳은 랜디스가 운영하던 성누가병원 자리로 1956년에 석조교회당을 완공한 것이다.
1902년 한때 6개월간 러시아 영사관이기도 하였으며, 1904년 제물포해전 당시 일본 적십자병원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내동 교회...>
유항렬 주택
1930년대 초에 건축된 주택. 당시 가장 많은 월급을 받았다는 도선사 유항렬 주택이다.
벽돌조 2층 건물로 출입구 위에 발코니를 설치하여 2층에서 별도로 출입할 수 있게 하였으며, 주택 내부의 방은 다다미를 까는 등 일본식으로 꾸몄다.
虹霓門(홍예문)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49호)
무지개처럼 생긴 문이란 뜻의 虹霓門(홍예문)은 일본인들의 증가로 거주공간의 확장이 불가피해지자, 인천 시내 남북간 교통 불편을 해소하고 새로 생긴 축현역(동인천역)과의 왕래를 편리하게 만든 교통로이다.
화강석과 벽돌을 혼용한 아치구조로 석축을 쌓아 일본 공병대가 1906년 착공, 1908년 준공하였다.
구 제물포 구락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7호)
1891년 인천에 거주하던 영,미,독,러,일본등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었던 구)제물포구락부는 1901년 현위치로 신축, 이전하였다.
설계는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담당하였으며 사교실, 당구장, 독서실, 테니스장등의 편의 시설을 갖추었다.
이후 1931년 정방각(情芳閣), 해방 후 미군 장교클럽, 휴전 후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이었으며,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인천문화원으로 사용되다 2007년 제물포구락부로 재탄생하였다.
<구 제물포 구락부... 시설공사후 옛날 모습대로 재현해놓았다.>
<구 제물포구락부 바로 아래, 작은 도로 건너... 옛 인천시장 공관이었다가 이제는 역사자료관으로 바뀐 곳이다.>
중구청 (구 일본 영사관)
1883년 일본조계지내 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일본 영사관은 이사청, 인천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33년 지상 2층으로 신축되었고, 1964년 현재의 모습인 3층으로 증축되었다.
인천부 청사로 지어져 행정구역 명칭이 바뀜에 따라 1949년부터는 경기도 인천시 청사로, 1981년부터는 인천직할시 청사로 사용되다가 1985년부터 현재까지 중구 청사로 사용되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인천의 행정중심지 역할을 해 온 중구청 건물은 역사를 간직한 채 본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고 있다.
일본 은행 거리 : 일본 제1은행(개항 박물관), 18은행(근대건축전시관), 58은행
일본 제1은행(인천시 유형문화재 제7호), 제18은행(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0호), 제58은행(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9호)이 모여 있는 곳을 테마박물관거리라고 한다.
청일전쟁 후 경제 수탈의 첨병역할을 했던 이들 일본은행 건물들은 현재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일본제1은행은 인천개항 박물관, 일본제18은행은 인천개항장근대건축 전시관으로 운영중이며, 일본제58은행은 인천시 중구 요식업조합이 사용중에 있다.
그 중 한국은행 본관을 꼭 빼닮은 인천일본제1은행지점(현재 인천개항박물관)은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쓰인 적이 있다. 1909년 일본인 니이노이에 다카마사가 설계하고 일본에서 들여온 재료로 지은 건물은 인천일본제1은행지점으로 사용되다가 1909년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2년여 동안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됐었다고 한다.
일본제18은행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나가사키(長錡)의 상인들은 상해에 수입되었던 영국 면직물을 수입하여 한국시장에 다시 수출하는 중개무역으로 큰 이익을 거두었다. 이에 따라 이들을 대상으로 나가사키에 본점을 둔 18은행이 1890년 10월에 인천지점을 개설하면서 생겨난 것이다. 이후 1936년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1954년에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인천지점으로 사용된 이후, 1992년까지 카페로 사용되었다.
일본제58은행은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은행으로 1892년에 개점하였다. 그후 조흥은행 인천지점이었다가 이전하였고 적십자사 경기도지사가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현재 인천 중구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일본제1은행... 現 인천개항 박물관 >
<일본제18은행... 現 인천개항 근대건축전시관>
<일본제58은행... 現 인천 중구 요식업 조합>
개항장 인천, 한양의 관문으로서 인천...
그에따라 많은 사연과 기록을 갖고 있는 개화기 근대문화유산들...
3번째 개항된 항구임에도 여기저기 한국최초의 기록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잘 몰랐던 인천의 역사, 차이나타운... 종교의 시작점으로서의 놀라운 가치
하루가 모자랄 정도로 바삐 돌아보았다. 나름대로 잘 정리되고 보존되고 복원, 관리되어 기뻤다.
답사를 모두 마친 우리는 신포국제시장에서 저 유명한 닭강정을 먹으면서 인천지역 개항기 문화유산 답사를 마무리하였다.
<신포시장 닭강정.....>
< 인천지역 근대문화유산 답사기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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