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길상호·시인, 1973-)
이번 가을은 농부들 마음 위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라. 그리하여 섬돌 아래에서 사발로 줍게 하라. 튕겨낼 듯 댓가지 휘고 있는 가을 과일들도 그 꽉 찬 결실만 생각하며 따게 하라. 혹 깨물지 못할 쭈그린 얼굴이 있거든 그것은 저 빈 들녘의 허수아비 몫으로만 남게 하라. 더 이상 지는 잎에까지 상처받지 않고 푸른 하늘과 손잡고 가고 있는 길 옆 들국화처럼 모두가 시인이 되어서 돌아오게 하라. (김영남·시인, 1957-)
+ 들국화의 교훈
넓은 들판 내 집 삼아 유유자적 노닐고 있는 작은 얼굴을 가진 들국화 무리들
보는 이 없으면 어떠하랴 만져 주는 이 없어도 외롭지 않은데 은은한 향기로 가득 밴 소박한 미소 던져 주고 있는데
세상사 초월한 인내로 삶의 순리를 보여주고 있잖아 (이순복·시인, 경기도 출생)
+ 가을꽃 국화
해는 저만큼 물러서고 들판에 떨어져 남은 낟알들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리고 굴참나무 숲은 그 많은 잎을 다 쏟아내고 있다. 하루하루 도토리 여물고 하루하루 강물 차가워질 때 살아있음의 절정에 닿는 가을꽃 국화 땅의 열기 식도록 향기 담고 있다가 사람들 무채색의 시간을 덮으며 한 뼘씩 점령한다 남아있는 날들을 물들인다. (안경원·시인, 1951-)
+ 들국화
바람 부는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생각 말자고, 아주 아주 생각 말자고.
갈꽃 핀 등성이에 혼자 올라서 두고 온 옛날은 잊었노라고, 아주 아주 잊었노라고.
구름이 헤적이는 하늘을 보며 어느 사이 두 눈에 고이는 눈물. 꽃잎에 젖는 이슬. (나태주·시인, 1945-)
+ 들국화
발끝에는 네가 두고 간 기억들이 그림자 밟기를 하고 있어. 너를 보내고 아픔을 먹고 자란 그리움이 찬이슬에 목을 축이며 보라색 꽃잎으로 떠올랐지. 아마, 너는 지금쯤 내 눈물을 보고 있을 거야. (목필균·시인)
+ 국화
꽃이 필 무렵 첫눈 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다가 그리움이 이울기 전 돌아누운 그림자 한아름 모두어 향을 피운다 코끝에 차오르는 너의 향기 새하얀 무서리 밟고 여윈 계절 아쉬워 눈물 흘린다. (권영민·시인)
+ 들국화
사랑의 날들이 올 듯 말 듯 기다려온 꿈들이 필 듯 말 듯 그래도 가슴속에 남은 당신의 말 한마디 하루종일 울다가 무릎걸음으로 걸어간 절벽 끝에서 당신은 하얗게 웃고 오래 된 인간의 추억 하나가 한 팔로 그 절벽에 끝끝내 매달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곽재구·시인, 1954-)
+ 들국화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김용택·시인, 1948-)
+ 들국화
간밤 무서리에 추운 기색도 없이 담담히 서 있네
어둔 밤 찬 서리 견디어낸 아침 더 환한 얼굴
바람비 저렇게 견디었을까 들꽃 향기는 저기서 날까
더러는 찢긴 잎새 가슴 저려도 나즉이 나즉이 흔들리면서 저렇게 뿌리를 지키고 살까 (손상근·시인)
+ 들국화를 위하여
꽃을 피우지 못한들 어떠랴. 두 팔 벌려 서 있는 것만으로 가슴 가득 하늘을 마실 수 있고
씨를 맺지 못한들 어떠랴. 향기를 피우는 것만으로 가을은 알차게 익어가는데
돌보지 않는다고 시든 적 없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눈물 흘리지 않는 들국화를 위하여
조금은 외로운 곳에서 그리움 가득 그대 이름 불러보는 것만으로 (이남일·시인, 전북 남원 출생)
+ 들국화
무심히 지나치는 들꽃이 아니길 소원하였다
그리움이 설움으로 전해져 잰걸음으로 다가와
수줍은 영혼에 손을 내미는 간절함이 아닐지라도
그저 님 그리워 그리워서
첫 길목에서 맞이하고픈 수줍은 바램이
길 먼지 흠뻑 뒤집어써도 나는 좋아라 (공석진·시인)
+ 국화꽃 아래 눕다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빨강 노랑 유리구슬 이 가을에 하나하나 꽃으로 꽃으로 피어난다
노란 구슬 꽃이 되어 가을 하루 열리고 초록구슬 꽃잎 벌려 추억 하나 생각 진다
올망졸망 꽃 구슬 하나, 둘 세어보다 끙! 그만 국화꽃 아래 눕다. (김영철·시인)
+ 국화잎 베개
국화잎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몸에서 얼핏얼핏 산국 향내가 난다
지리산 자락 어느 유허지 바람과 햇빛의 기운으로 핀 노란 산국을 누가 뜯어주었다 그늘에 곱게 펴서 그걸 말리는 동안 아주 고운 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마른 산국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
몸에서 자꾸 산국 향내가 난다 나는 한 생각을 끌어안는다 (조용미·시인, 1962-)
+ 국화꽃을 따다
햇볕과 맑은 바람에 잘 그을린 국화를 고른다 그리움이 꿈틀거리는 향내를 최대한 숨기고 있는 국화꽃을 딴다 국화차로 거듭나기 위해 누군가의 손에 간택되어 질 때까지 다음 생을 침묵으로 마감하며 태양과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을의 뜨락에서 청춘을 바치고 비로소 빈 들녘처럼 떠나갈 아름다움이여, 꽃술을 흔들며 그 흔한 고독을 느껴 볼 겨를도 없이 나의 찻잔 속에서 윤회의 고통을 우려내고 있다 (김규리·시인, 충남 예산 출생)
+ 국화차(菊花茶) 한 잔
생명이 꿈틀대는 엷은 초록 빛깔처럼 곱고 깊은 맛, 뒤끝이 깨끗한 삶을 위해
차 한 잔 앞에 놓고 뜨거운 물 속에 차 잎을 띄운다.
채 우려내지도 못한 차 잎의 떫은맛 같던 날들은 국화의 향기로 짙어지고 진솔함으로 잘 우려낸다.
국화차 한 잔, 연노랑 빛 따스함이 스며 나온 담백하면서도 향긋한 여운이 남는 삶을 음미하며
은근하면서 잔잔하게 우려낸 국화차 한 잔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엷은 초록 빛깔처럼 곱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노라면 오랜만에 가슴이 더워진다. (이인혁·시인, 1954-)
+ 노란 국화 한 송이
가을에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는 노란 국화 한 송이를 선물하세요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두 사람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지게 만들어줄 거예요
깊어만 가는 가을밤 서로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불어오는 바람도 포근한 행복에 감싸게 해줄 거예요
밤하늘의 별들도 그대들을 위해 빛을 발하고 밤길을 밝혀주는 가로등도 헤어지기 싫어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예요 (용혜원·목사 시인,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