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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심수행장
분황사에 모셔진 원효스님 영정
《發心修行章》
夫諸佛諸佛, 莊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欲不捨.
無防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無誘惡道, 多往入者, 四蛇五欲, 爲妄心寶.
人誰不欲 歸山修道, 而爲不進, 愛欲所纏.
然而不歸 山藪修心, 隨自身力, 不捨善行.
自樂能捨, 信敬如聖, 難行能行, 尊重如佛.
慳貪於物, 是魔眷屬, 慈悲布施, 是法王子.
高嶽 巖, 智人所居, 碧松深谷, 行者所捿,
飢 木果, 慰其飢腸, 渴飮流水, 息其渴情.
喫甘愛養, 此身定壞, 着柔守護, 命必有終.
助響巖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歡心友.
拜膝如氷, 無戀火心, 餓腸如切, 無求食念.
忽至百年, 云何不學, 一生幾何, 不修放逸.
離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
行者羅網, 狗被象皮, 道人戀懷, 蝟入鼠宮.
雖有才智, 居邑家者, 諸佛是人, 生悲憂心;
設無道行, 住山室者, 衆聖是人, 生歡喜心.
雖有才學, 無戒行者, 如寶所導 而不起行;
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往東方 而向西行.
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沙作飯.
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覺法 而改癡心.
行智具備, 如車二輪; 自利利他, 如鳥兩翼.
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檀越 應羞恥乎?
得食唱唄, 不達其趣, 亦不賢聖應 愧乎?
人惡尾蟲, 不辨淨穢, 聖憎沙門, 不辨淨穢.
棄世間喧, 乘空天上, 戒爲善梯.
是故破戒, 爲他福田, 如折翼鳥, 負龜翔空, 自罪未脫, 他罪不贖.
然, 豈無戒行, 受他供給?
無行空身, 養無利益, 無常浮命, 愛惜不保.
望龍象德, 能忍長苦; 期獅子座, 永背欲樂.
行者心淨, 諸天共讚; 道人戀色, 善神捨離.
四大忽散, 不保久住, 今日夕矣, 頗行朝哉.
世樂後苦, 何貪着哉, 一忍長樂, 何不修哉.
道人貪, 是行者羞恥; 出家富, 是君子所笑.
遮言不盡, 貪着不已, 第二無盡, 不斷愛着.
此事無限, 世事不捨, 彼謀無際, 絶心不起.
今日不盡, 造惡日多, 明日無盡, 作善日少.
今年不盡, 無限煩惱, 來年無盡, 不進菩提.
時時移移, 速經日夜, 日日移移, 速經月晦,
月月移移, 忽來年至, 年年移移, 暫到死門.
破車不行, 老人不修, 臥生懈怠, 坐起亂識.
幾生不修, 虛過日夜, 幾活空身, 一生不修?
身必有終, 後身何乎? 莫速急乎, 莫速急乎!
<海東>沙門<元曉>述.
원효(617~686)의 『발심수행장』은 총 706자의 짧은 문장으로, 그 형식은 운문체로 되어있다.
내용은 욕심을 버리어 수행을 완성하는 것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으며,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는 계와 염불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무지한 이들에게도 노래와
춤을 추어 불타의 칭호를 알려‘南無(나무)’를 칭념하게 한 그의 교화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발심수행장』은 현대에 와서 불교를 알려고 하는 이의 주요 교육과정중의 하나로서,
주로 입산초심자에게 구도의 정열을 격발시키며, 출가 승려들에 있어서는 출가의 근본정신을
철저히 지니도록 강조하려는 ‘발보리심’의 권장문으로 유명하다.
발보리심이란 보리심= 求道心(도를 구하는 마음)으로 성불의 원력을 굳게 세워
구도에 정진하는 것이다. 이러한 발심에 대해서는 여러 경론에서 논하고 있는데,
즉『대승의장』에서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보리는, 번역하면 도라 할 것이니
도과(道果)와 그 덕이 원만하게 통성(通成)함을 보리라 한다.
큰 보리를 구하고자 간절한 뜻을 일으킨 것을 보리심을 일으켰다 이름 한다.”라 했으며,
『유마경혜원소』에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고자 함을 발심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발심과 수행’에 대해서『기신론』의「분별발취도상(分別發趣道相)」조를 보아
이해를 돕기로 하면, 보살의 발심은 셋, 그리고 수행은 다섯으로 나누고 있다.
발심은
① 믿음을 성취하는 신성취발심
(信成就發心:십신(十信)의 단계에서 신심(信心)을 닦고 십주(十住)의 단계에 들어감),
② 알고 행하는 해행발심
(解行發心:십행(十行)가운데 법이 공함을 알아 육바라밀을 닦아 십회향(十回向)에 듦)
③ 도를 증득하는 증발심
(證發心:보살의 초지(初地)이상 십지(十地)의 지위에 이르는 진여(眞如)의 경계를 증득하는
발심)로 나뉘는데,
이 세 가지 마음을 발하여 어떠한 악에도 물들지 않고, 선을 닦아, 중생을 구제할 때
그것을 무상의 보리심이라고 한다.
또한 도를 닦는 수행의 다섯 가지라 함은
①베풀어 주는 시문(施門:구하는 중생에게는 힘대로 베풀어 기쁘게 해주고,
힘껏 가르쳐 주는 것)
②계를 지키는 계문(戒門:십계(十戒)와 구족계(具足戒)를 지키며,
부처님의 계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것)
③참고 견디는 인문(仁門:다른 이가 나를 욕하고 멸시하더라도
마음 움직임 없이 견디어 참는 것)
④게으름이나 뒤로 물러남 없는 진문(進門:몸뚱이와 생각이 하나도 이익 됨이 없음을 알고,
대승의 행으로 뭇 고통을 여의는 것)
⑤선정을 닦는 지관문(止觀門: 밖으로 일체경계의 분별상을 그치는 것,
즉 정(定)에 들어가는 수행)등을 이른다.
이렇게 발심의 양상과 정도는 많은 경론에서 말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느 정도 진척되어도 나아가 성취하는 바가 다 같을 수가 없다.
마치 원효의
“부처님의 뛰어난 몸을 보고 그 마음을 발심하고,
혹은 스님들을 공양하다가 발심을 하고, 혹은 이승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발심을 하고,
혹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다가 발심을 하기도 한다”
(『대승기신론소』별기) 는 초발심의 지적과도 같이 『발심수행장』은,
크게 세부분의 내용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다.
즉‘夫諸佛~不修放逸’의 부분에서는 수행자의 신심을 촉구하며,
‘離心中愛~善神捨離’의 부분에서는 계행의 철저함을 강조하였으며,
끝의 ‘四大忽散~寞速急乎’에서는 제행(諸行)이 무상함을 일러 간곡히 정진하기를 경책하고 있다.
夫諸佛諸佛 藏嚴寂滅宮 於多劫海 捨欲苦行
衆生衆生 輪廻火宅門 於無量世 貪欲不捨
무릇 모든 부처님이 적멸궁에 장엄하심은,
오랜 세월 욕심을 끊고 고행하신 결과며,
중생들이 불난 집을 윤회함은,
한량없는 세상에서 탐욕을 버리지 못 했기 때문이다.
부처와 중생의 커다란 차이는 욕망의 차이이다.
탐욕을 모든 경전에서 염려하는 것은, 3독(탐,진,치)의 첫째로서의 이유도 있는데,
『제법무행경』에서는, “만약 사람이 성불하고자 한다면 탐욕을 지니지 말아야 한다.”고
설하고 있다. 지혜로운 수행자가 항시 분소의를 걸치고 하나의 발우로 살아가는 모습,
부처님의 칭찬이 거기에 있으며, 가득 찬 욕망이 온갖 괴로움의 씨앗임을 깨닫고,
이를 과감히 떨쳐버릴 때, 우리는 점차 부처님으로 변신해 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無防天堂 少往至者 三毒煩惱 爲自家財
無誘惡道 多往入者 四蛇五欲 爲妄心寶
막지 않는 천당에 가는 사람 적은 것은
삼독번뇌로 자기의 재물을 삼음이요,
권하지도 않은 악도에 가는 이 많은 것은
사사(四蛇)와 오욕을 헛되게 마음보배로 삼음이다.
천당이란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六道:천상,인간,아귀,아수라,지옥,축생)가운데,
복이 제일 수승한 곳을 일컫는 곳이다. 그런데 이 하늘세계는 광범한 하늘의 왕이 있다고
이야기 한다. 예를 들면, 세로로는 욕계(성욕과 식욕의 세계로 6천), 색계(식욕과 성욕을
여읜 세계로 18천), 무색계(물질이 없고 心識만 있는 세계로 4천)의 28천을 말한다.
또한 욕계육천의 제2가 도리천이며, 이 도리천이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의 정상에 있고,
제석왕의 천궁이 있음. 이 정상의 사방에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8천이 있기에 33천이 가로로 있는 것이다.
사찰에서 대종을 칠 때, 아침에는 스물여덟 번을 울려 28천을 열고,
저녁에는 서른 세 번을 울려 33천을 닫는데, 이렇게 불교에서는, 하늘세계에 태어나는 것도
인간의 일이라는 것을 설하며, 또 천상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도(六道)를 들어,
자기가 행한 숱한 잘 잘못에 따라 여섯 가지의 길을 돈다는 윤회의 법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四蛇:인체의 구성요소인 지,수,화,풍 (地,水, 火,風) )과 오욕(五欲:재물,색(신체를
포함한 물질성 성욕),식,수면,명예(財,色,食,睡,名))은, 인간의 성립관계상 끊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이나, 몸에 아무리 좋은 것을 먹이고 입혀야 큰 이익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대가 덧없고 항상하는 것도 아니면서도 그 몸에 집착함이 마치 독사와 같다하여
사사(四蛇)라 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사(四蛇)와 삼독(三毒)에 집착하면,
악도(惡道)에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하며, 때문에 권하지도 않았는데
많은 사람이 그곳을 간다 하는 것이다.
人誰不欲 歸山修道 而爲不進 愛欲所纏
然而不歸 山藪修心 隨自身力 不捨善行
어느 누가 산중에 들어 수도할 생각이 없으련만,
나아가지 못함은 애욕 때문이다.
그러나 산에 들어가 수행은 못해도
자신의 힘을 따라 착한 행을 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한 악도를 두려워하여 산중에 들어 수도를 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하는 이들과의 떨어짐이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애욕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애(愛)는 항상 있다(有)하여, 그 착각의 올가미로 해서, 너는 내 것이니까,
또는 내가 너를 이렇게 끔찍이 생각하니까, 너는 내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한다며,
자기 자신의 기대감이 온통 그 사람(애인,부부,자식,친구등)의 집착에 빠져있는 것이다.
“애욕을 버리지 못하고 산에 들어 수행은 못해도
자신의 힘을 따라 착한 행을 버려서는 안 된다.”란 말은,
수행은 반드시 산에 들어가 하는 것만이 아니며, 세속에 있으면서도 자포자기 하지 말고,
자기가 세운 원력에 따라 동사섭과 같은 착한 일을 힘에 따라 해야 된다는 말씀이다.
自樂能捨 信敬如聖 難行能行 尊重如佛
慳 貪於物 是魔眷屬 慈悲布施 是法王子
자신의 향락을 버리면 믿고 공경하기를 성인과 같이 함이요,
어려운 수행을 행하면 부처님과 같이 존중할 것이다.
재물을 탐하는 이가 악마의 권속이요,
자비로 남에게 베푸는 이는 법왕의 아들이다.
무릇 역대의 성인들은 모두 자신의 향락을 접어둔 이들인 것을 알 수 있다.
『법구경』의 이야기가 있다.
“한 승려가 숲에서 오래 수행을 하면서도 탐욕을 버리지 못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그를 제도코자 함께 숲에 묵으셨다. 그
런데 때 마침 물속의 거북 한 마리가 뭍으로 기어 나오고,
그 뒤를 따라 물개가 나오며 거북을 먹으려 하였다.
그러자 거북은 머리와 꼬리, 그리고 네 다리를 몸통 속으로 감추어 버렸다.
물개가 조금 떨어지면 거북은 걷고, 다시 먹으려면 집어넣고 해서
거북은 그 위기를 면하는 것이었다.
이를 보던 승려가 부처님께
“거북은 목숨을 보호하는 배갑(背甲)이 있어서 물개는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라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르시길
“세상 사람들이란 이 거북이만도 못한 것 같다.
그들은 모두 무상을 알지 못해서 육정(눈,귀,코,혀,몸의 감각기관과 의식작용)을 멋대로 하여
외마(外魔)가 침범해 오기 쉬움이요, 죽은 뒤에는 생사가 끝이 없어서 오도(五道:천상,인간,
아귀,축생,지옥)를 윤회하여 무한고뇌를 받는 것이다. 이는 모두 마음 탓으로 생긴 일이니,
힘써 열반의 안락함을 구해야 한다. 마치 육욕(六欲)감추기를 거북같이 하고, 마음 방호하기를
성(城)과 같이 하라. 그리하여 지혜로써 마(魔)와 싸워 이기면 재앙이 없게 될 것이다”라
하셔서 수행하는 이에게 육욕(六欲)이 얼마나 해독한 것임을 알게 하셨다.
또한 ‘자비로 남에게 베푸는 이는 법왕의 아들이라 할 것’이란 말은
재물로서만 베풀라는 말이 아니다.
『현우경』에 보면, 어느날 우파사나란 여인은 『법구경』을 외우고 행하려 힘썼다.
그러던 어느 날, 천신이 상공을 지나다가 경외는 소리를 듣고 허공에 멈추어 칭송하였다.
“장하여라, 누이여 법을 잘 연설하십니다. 지금 내가 천상의 보배를 주어도 누이에게는
하찮게 여겨질 것입니다. 대신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겠습니다.
존자 사리불과 목건련이 사밧티에 오다가 이곳 숲에 머무르십니다.
누이는 내일 그분들을 초대하여 공양하시고 축원할 때는 내 이름도 함께 일컬어 주시오.”
그녀는 놀라 물었다.
“당신은 누구기에 모습은 없고 소리만 들립니까?”
“나는 귀신의 왕 ‘바이슈라마’입니다. 법을 듣기 위해 이 허공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늘은 거짓이 없다고 하는데, 당신은 천신이요 나는 사람이니 어떤 인연으로
날 더러 누이라고 하십니까?”
“부처님은 법의 왕이시고 사람과 하늘의 아버지입니다. 나는 남자신도요,
당신은 여자신도이니 다 같이 법의 형제이므로 누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녀는 기뻐하면서
“부처님께서 백 겁 동안 부지런히 고행하신 것은 오로지 나를 위해서이다.
부처님의 은혜로 천신과 나는 법의 형제가 되었구나.”라고 한 것과 같이
재물에 눈 어둡지 않고 부지런히 경전을 독송하면,
여러 하늘 신들이 듣고 그 사람을 옹호하는 것이다.
高嶽 岩 智人所居 碧松深谷 行者所捿
飢峩木果 慰其飢腸 渴飮流水 息飢渴情
높은 산 험한 바위는 슬기로운 이가 거처하는 곳이요.
푸른 솔 깊은 골짜기는 행자가 깃 드는 곳이다.
배고프면 나무열매를 따 먹으며, 주린 창자를 달래고,
목마르면 흐르는 시냇물로 마른 정(情)을 가실 것이다.
이 말씀은 반드시 수행자가 산곡(山谷)에 머물러야 된다는 말은 아니다.
요즈음은 오히려 산보다는 도시에서 수행하기가 더 어렵다.
따라서 어떠한 역경에서도 스스로를 지킬 줄 아는 슬기로움이 필요한 시대이다.
즉, 진정한 수행인이라면, 시대를 살필줄 아는, 그러면서 개인의 행이 뒤따르는 것이
당연하며, 고독과 궁핍의 어떤 환경에도 개의치 말고 수행에 힘쓰라는 말로 알아야 할 것이다
喫甘愛養 此身定壞 着柔守護 命必有終
助響岩穴 爲念佛堂 哀鳴鴨鳥 爲歎心友
아무리 맛난 것으로 사랑해 돌봐도 이 몸은 반드시 무너지는 것.
부드러운 옷으로 감싸고 보호해도 이 목숨은 필히 끝나고 마는 것.
메아리치는 바위굴을 염불당으로 삼고 애 닳게 우는 기러기를 친구로 삼으라.
인신(人身)의 덧없음을 숱한 경전은 노래하고 있다.
『유마경』은 “이 몸은 감각이 없으니(원문은 무지:無知) 초목, 와력(기와)과 같다.
이 몸은 작용함이 없으니 바람에 의해 움직여 질 뿐이다.
이 몸은 부정(不淨)하니 더러움이 가득 차 있으며, 또한 이 몸은 공허(空虛)하니,
목욕, 의식(衣食)의 힘을 빌린대도 반드시 닳아 없어질 것이며, 이 몸은 재앙 그것이니,
404병에 의해 침식당한다. 신체구성의 사대(四大)에 각기 101병이 있다”라 했고,
“사대(四大)가 잠시 모여 있어 편의상 이름 지어 몸이라 하는 바,
이 사대(四大)에는 주재자가 없는 터이므로 몸에도 자아(自我)가 없다”라고 지적한
『유마경』의 말씀은 인신의 허무함과 병고가 가득하니,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에 수행을 하라는 것이다.
인간이란 시간과 공간을 통해 보더라도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
머무를 수가 없는 것이며, 그 진정한 참 주인은 깨달아야만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무상(無常) 함이 우리의 참 존재인데, 이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 위해 행여
잘못 될 새라, 맛난 것 먹이고 좋은 것 입히고, 찍어 바르고, 거들먹거리는 등
위세하며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 할 때 인간은 초라한 존재를 느낄 수 있다.
가까운 산과 강이나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싱그러운 자연의 숨결, 또한 조그마한 공원의
나무 위에서 지저귀는 새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평화로울 수 있고 행복하다.
인간의 위선 앞에 자연은 그저 그렇게 인간의 허점투성이를 감싸 안아 치유하며
올곧게 살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자연에서 치유되어 나으면 곧바로 사회로 회향하여서
자연의 공덕을 잊지 않아야 된다.
拜膝如氷 無戀火心 餓腸如切 無求食念
忽至百年 云何不學 一生幾何 不修放逸
절하는 무릎이 차서 얼음과 같더라도 따뜻함을 그리워 말고,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먹을 것 구하는 마음을 없애라.
홀연히 백년에 이를 것이니, 어찌 배우지 않을 것이며
일생이 얼마라고 놀고 닦지 않겠는가?
경허 스님의 참선곡에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짧은 틈도 아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 사람 참선할 제 잠 오는 것 성화하여 송곳으로 찔렀거늘 나는 어이 방일하며,
예전사람 참선할 제, 하루 해가 가게 되면 다리 뻗고 울었거늘 나는 어이 방일한가”라며
수행할 때 사무치지 못한 자신의 게으름을 책망 하였던 것이다.
가끔 80년대 해인사에서 정진할 때의 풍경이 언뜻언뜻 상기 되곤 한다.
그 무렵은 국가경제도 좋았던 진 탓인지 절 집의 공양도 그리 빈곤치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툭하면 반찬투정을 하는 학승들에게 한 노스님의
“스님들! 예전에 수행할 때는 김치 한 조각에 그저 밥한 그릇을 다 먹었습니다.
그래도 밥만이라도 더 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었지요.” 하는 말씀에 젊은 승려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다.
요사이는 오히려 물자의 혜택이 윤택하여 도를 추구하는 마음이 옅어지고 인욕하는 마음이
없다고 우려하는 분이 많다.『제법집요경』은 인욕에 대해서 이렇게 논하고있다.
“인욕에 안주하는 것 이것이 최고의 치장(第一藏嚴)이요 가장 뛰어난 보배요,
인욕은 뛰어난 양약이어서 능히 분독(忿毒)을 치료하며,
인욕은 공덕의 창고이므로 마음을 조복하여 번뇌에 어지럽히는 바가 되지 않는다.
또한 인욕은 천상에 태어나는 사다리여서 윤회의 공포로부터 탈출하게 하며,
이를 수행하면 지옥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또 인욕은 공덕의 물이어서 맑고 그득하여 아귀의 목마름을 구하고
방생(傍生:축생)의 죄악을 씻어준다.”고 하였다.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 “방일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은,
짧고 짧은 인생길을 정진으로 매진하라고 당부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離心中愛 是名沙門 不戀世俗 是名出家
行者羅網 狗被象皮 道人戀懷 蝟入鼠宮
마음에서 애욕을 떠남이 사문이라 이름 함이요,
세속을 그리워하지 않음이 출가라 이른다.
수행인이 몸에 비단을 두름은 마치 개가 코끼리 가죽을 쓴 것과 같고,
수도인이 그리움을 품는 것은 마치 고슴도치가 쥐구멍에 들어간 격이다.
사문이라 함은 모든 선법을 부지런히 닦고 모든 악법을 쉰다 (勤修善法 息諸惡法)는 뜻으로,
수행자도 역시 마음을 잘 조절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사십이장경』에는 “애욕에 빠진 사람은 마치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가는 경우
반드시 손을 데이는 것 같아서 꼭 재앙을 겪는다”하여 애욕의 위험함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수행인의 의복에 대한 말씀도 지적하고 있다.
예전에는 누에가 친 ‘비단’으로 만든 가사들은 큰 스님들만 걸쳤는데, 요즈음은 모두 물질이
풍부해서인지 아무나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본다.
자기 복이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다 하면서 마다하시던 옛 노스님들의 겸허한 마음자세가
올곧은 수행인의 아름다운 자세가 아닐까 생각한다.
소수의 젊은 스님들 층에서는 ‘무슨 메이커다’ 하며 신발이나 속 티셔츠 등을 뽐낼 때가 있는데,
시대에 관계없이 수행자는 항상 검소하고 절약하는 자세로 임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혹 시주물로 받았다 하더라도 뽐낼 것까지는 없다.
겸허히 떨어질 때까지 잘 입고 신어서, 시주의 은혜에 감사하면 되는 것이다.
더욱 속 깊은 이는 법우에게 양보하는 공덕을 짓는 풍경도 심심치 않게 본다.
특히 선방에서는 한철 시작의 결제일 무렵을 전후하여 안 입는 옷들을 잘 손질하여
지대방에 놓아두어 옷 없는 수행자에게 회향하는 아름다운 광경이 많다.
또한 마음이 나태해지거나 방탕심이 일어날 때는 더욱 뜻을 굳건히 하여 스스로 발분하여
참회와 공덕을 쌓아 나와 남을 구제하겠다는 원력과 정진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을 원효대사는『기신론소』에서 해태심의 장애를 딛고 일어설
네 가지 요소를 말하고 있다. 그
첫째는 참회(懺悔), 둘째는 권청(勸請), 셋째는 수희(隨喜), 넷째는 회향(回向) 이다.
첫째의 참회는 세세생생 나고 죽으면서 되풀이 되는 악업을 뉘우치는 것이며,
둘째 권청이라 함은 가르침을 청하는 일로서 부처님이 항상 상주하셔서
중생들을 제도하시도록 원하는 일이며,
셋째 수희란 따라 즐거워하는 것으로 남의 선행을 기뻐하는 일이며,
넷째의 회향이란 끊임없이 노력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것을 간절히 설하고 있다.
雖有才智 居邑家者 諸佛是人 生悲憂心
設無道行 住山室者 衆聖是人 生歡喜心
비록 재주가 있다 해도 세간에 머무는 이는
부처님이 그를 가엾게 여기시고,
설사 도행은 없더라도 산중에 사는 이는
성현들이 그를 기쁘게 여긴다.
이 말씀은, 도시와 마을은 아무래도 환락을 가깝게 접근 할 수 있고,
따라서 재주가 있는 이라도 타락할 수 있다는 염려의 말이며,
자연과 함께 하는 산의 환경은 설사 재주 없는 이라도 선근을 쌓아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러한 말씀도 언제나 항상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중국불교의 6세기 초에도 ‘삼계교’의 신행선사는 산중불교를 접고 도시불교를 지향했던
인물 중 한 사람으로서 역사적으로 실존했었다. 그러한 사유는 바로 그 시대의 사회 문화적인
풍토에 기인 한 것으로써, 이 포교방법은 곧 바로 원광법사에게 유래됐다.
나아가 ‘민중에게 불교를 알기 쉽게 전하겠다’는 원력을 세운 원효는 불교를 모르는 무지한
이들에게 ‘나무’를 염하게 한 불교사적인 역사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보다 보편 타당한 이야기로서 육근의 감각작용을 피해서
자연과 접하는 것이 아무래도 성현들이 환희하며 바란다는 것을
초보적인 수행자들에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과 벗하여 그 신심이 한층 굳건하게 다져지는 것이 바깥경계에 흔들리기 쉬운
초보자적인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며, 자기 자신을 냉철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산중의 수행이 그것을 뒷받침 한다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雖有才學 無戒行者 如寶所導 而不起行
雖有勤行 無智慧者 欲往東方 而向西行
비록 재능과 학문이 있다 할지라도 계행이 없는 자는
보물 있는 곳에 인도해도 일어나 가지 않음과 같으며,
비록 부지런히 행함은 있으나 지혜가 없는 사람은
동쪽으로 가려 하면서도 서쪽으로 향하여 가는 것과 같다.
이 대목은 윤리적 규범인 ‘계(戒)’의 중요성을 논하고 있다.
원효스님이 중시하는 것은 마음을 정화시키는 수행이 있어야 청정한 계행을
이룩할 수 있다고 보았다.
‘계(戒)’라고 하는 것은 양면성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계’는 스스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연(緣)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실유(實有)가 아니 라고 하는 것은, ‘계’의 현상적 측면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또 하나는 ‘계’는 고정불변하는 영원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 또한 ‘계’의 여실한 본질에
위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계’를 받을 때에 언제나 하는 말이 지범(아무것도 하지 않음에 의해 죄를
범함과 착한 일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것으로 죄가 됨)과 개차(행위의 허가와 금지,
즉 열고 닫음)를 잘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은 곧 이 말을 뜻함이다.
또한, 『천수경』에도 곧잘 독송하는 내용으로,
“죄무자성종심기 심약멸시죄역망 죄망심멸양구공 시즉명위진참회
(죄에는 스스로의 성품이 없어 마음 따라 일어나며, 마음이 멸할 때 죄 또한 스러지네.
죄와 마음이 함께 멸할 때, 이것을 이름하여 진실된 참회라 하네)”라고 하여,
마음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를 갈파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계율’(戒律)의 ‘계’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으나,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의 조항을 위반할 때는 벌칙이 가해지지만, ‘계’에는 그러한
벌칙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특히 대승 불교권에서는 ‘율’보다는 ‘계’를 중시하는 풍조가 생겨났는데,
이 점은 외형에 얽매이지 않고 본질에 들어갈 수 있는 자유분방한 자세를 북돋아
다채로운 대승불교의 사상과 실천을 전개 시켰지만, 한편 자칫 수행자로서의 자각을 잃기 쉬운
경향이 생겨 세속화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원효스님이 주장한 계(戒)’는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석존이 가르친 중도(中道)에 이르는
것이며, 이러한 계(戒)가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8정도(八正道)이다.
‘계’의 원래 의미는 ‘흐름에 따른다’는 뜻이며, 따라서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기질, 환경,
상황에 따라 각자의 확인에 의거하여 어디까지나 자기의 행위로서 선정해 나가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윤리의 기본을 현대적 언어로 말한다면 ‘상황윤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有智人所行 蒸米作飯 無智人所行 蒸砂作飯
共知喫食 而慰飢腸 不知學法 而改痴心
지혜로운 이는 쌀로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어리석은 이는 모래로 밥을 지으려 함과 같다.
사람이 밥을 먹어 주린 창자 달랠 줄은 알면서도,
불법을 배워 어리석음 고칠 줄은 모른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지혜로 볼 수 있다.
먼저 ‘계’ 와 정(定)이 오래 숙련되면, 뒤에 지혜(智慧)의 꽃이 피게 마련이다.
지혜의 공덕을 노래한 『유교경』에서는,
“지혜가 있으면 탐착이 없어질 것이다. 스스로 잘 살펴 잃어버림이 없도록 하면
내 가르침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은 사람은 승(僧)도 아니고
속(俗)도 아니어서 무어라 이름 할 수 없다. 진실한 지혜는 노(老),병(病),사(死)의 바다를
건너게 하는 견고한 배이며, 무명의 암흑을 비추는 밝은 등불이며, 온갖 병자를 고치는
좋은 양약이며, 번뇌의 나무를 베어내는 날카로운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언제나
문(聞),사(思),수(修)로서 지혜를 계발하여 자신의 지혜를 증득 시켜야 한다.” 고 하여,
지혜의 힘이 성불의 최상의 지름길임을 설하고 있다.
또한 『법구경』에는,
“잠 안 오는 자에게는 밤이 길고,
지친 몸에는 갈 길이 멀고,
어리석은 자에게는 윤회(輪廻)가 길다.”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어서
어리석음을 경책하고 있는 것이다.
行智具備 如車二輪 自利利他 如鳥兩翼
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壇越 應羞恥乎
得食唱唄 不達其趣 亦不賢聖 應慚愧乎
수행과 지혜를 겸비하면 수레의 두 바퀴와 같고
자리와 이타를 함께하면 큰 새의 두 날개와 같다.
죽을 얻어 축원하면서도 뜻을 모르면 단월에게 부끄럽고,
밥을 얻어 염불 하면서도 그 뜻을 모르면 불보살께 부끄러운 일이다.
수행과 지혜는 수도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지구상에 인간들이 존재하는 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이보다는 지혜로운 이가
더 많은 까닭이 아닐까? 즉 좁아지는 지구의 엄청난 생명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은
악인들 보다는 현자들이 더 많아서 일 것이라고 생각해 본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몇 사람이 악인들의 무리와 마주쳤다.
이들은 아주 악질이며, 교활하고 잔인한 인간들이었다.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저 인간들은 모두 물에 빠져서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중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생각을 가져서는 안돼. 그러면 그들과 똑 같은 인간이 돼!
아무리 이 인간들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더라도 그러한 일을 갈망해서는
안 돼요. 그들이 없어지기 보다는 참회하는 것을 바라야 하오.’ ”
이렇게 같은 환경에서도 생각을 같이 못하는 것이 우자(愚者)와 지자(智者)의 현격한 차이
이다. 그런데 어리석음을 퇴치하는 수행방법으로서 소승(小乘)불교와 대승(大乘)의 그것이
많이 변경되었던 것이다.
부처님 당시의 수행관은 철저히 자리(自利)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었다.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에 팔정도(八正道),연기설(緣起說),삼십칠조도(三十七調道)등은
모두 초기불교에 있어서 대표적인 학설로서 당시의 수행관은 이러한 것들에서 기초된 것이다.
그러나 대승(大乘)불교에 들어와서는, 나 뿐만이 아니라 남을 동시에 구제한다는
동사섭(同事攝)이나, 십신(十信),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십지(十地)와 등각, 묘각, 불(佛)등의 53의 계제(階梯)를 논하여 보다 광범위적인 수행체계를
논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근기에 맞게 성문이면 성문, 보살의 성품을 가진 이는 보살의 수행을
해 나아가며 자리와 이타를 살펴야 된다.
죽과 밥 운운 하는 것은, 시주의 은혜에 부끄럽지 않는 수행을 지적함이다.
위앙조의 종조 위산스님에게 제자인 앙산이 말했다. “스님, 열반하시면 어디로 가십니까?”
위산이 말하길, “ 응, 저 아래 아무개 집 외양간 암소 배속으로 들어가!”
먹고 놀면 시주의 은혜를 몸으로 갚아야 한다는 인과응보의 벽력의 소리이다.
人惡微蟲 不辦淨穢 聖憎沙門 不辦淨穢
棄世間喧 乘空天上 戒爲善梯 是故破戒
爲他福田 如折翼鳥 負龜翔空
사람이 구더기의 깨끗함과 더러움을 가리지 못함을 미워하듯
성인도 사문이 더러움과 깨끗함을 가리지 못함을 싫어한다.
세상의 번잡함 버리고 텅 빈 하늘에 오르고자 하거든 계(戒)가 좋은 사다리가 된다.
파계자가 남의 복전이 된다 함은 날개 꺾인 새가 거북을 업고 허공을 남과 같다.
원효 스님은 수행의 기반이 엄격하고 철저한 계행을 실천하는 데 있으며,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더럽혀질 경우는 수행인에게 있어서 가장 부끄러운 일이고,
또한 수행에 크나큰 장애가 되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지계의 공덕을 경전에서 살펴보면,
『월등삼매경』에서 “지계는 깨달음의 근본이요, 도(道)에 들어가는 요긴한 문이다.
보살이 계율을 굳건히 잘 지키고 보호하여 가지면, 10가지의 이익을 얻는다.
하나, 일체의 지행(智行)과 서원(誓願)을 만족한다.
둘, 정계(淨戒)를 지키면 부처님께서 배운 바와 같다.
셋, 지혜 있는 사람이 비방하지 않는다.
넷, 원(願)을 세워 물러나지 않는다.
다섯, 바른 행으로 편안하게 머문다.
여섯, 생사를 넘어 윤회의 고통을 벗어버린다.
일곱, 모든 망상을 끊고 열반의 즐거움을 사모한다.
여덟, 번뇌를 해탈하여 얽매임 없는 마음을 얻는다.
아홉, 마음이 청정하여 수승한 삼매를 얻는다.
열, 믿음과 재물이 부족함이 없다.”라고 하여,
‘계’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自罪未脫 他罪不贖 然豈無戒行 受他供給
無行空身 養無利益 無常浮命 愛惜不保
자신의 허물 벗지 못하면 남의 죄를 속죄 시킬 수 없음이니,
어찌 계행이 없이 남의 공양을 받겠는가.
수행 않는 허망한 몸은 길러 무슨 이익 있으며,
무상하고 부평초 같은 목숨 아낀들 보전치 못하네.
원효 스님은 제 스스로의 허물은 보지 못하고, 남의 탓만 하는 이가 많은 것을 경계하여, 진정한 수행자라면 자기 앞길 만 부지런히 닦아 철저한 계행으로 부끄럽지 않게 남의 공양을 받으라 하신 것이다.
아마 신라하대의 경흥 선사도 이러한 원효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하는 일화 하나가 『삼국유사』에 전해져 온다. 경흥 스님은 국사의 신분으로서 많은 시종을 거느리고 말을 타고 왕궁을 출입하는데, 하루는 웬 걸승 하나가 행차하는 길에 방해가 된 듯. 밑에 사람과 주고 받는 대화중, “승려가 걸망에 웬 마른 북어를 넣어 가지고 다니느냐!”며 야단을 치자, 걸승 왈, “아니 생물(生物:살아있는 물건)을 사타구니에 끼고 다니는 이가 있는데 이 잘난 마른 북어 한 마리가 무슨 대수냐? ”
경흥 스님이 급히 시종을 시켜 걸승을 뒤 따르게 하니 산모퉁이의 어느 작은 절로 들어가 법당으로 들어갔는데, 불러도 대답이 없어 들어가 보니 승은 간 곳 없고 신중단에 그와 닮은 이가 있었다.
경흥 스님은 그 일이 자신의 허물을 호법신중이 화현해서 가르치려 했음을 알고, 부끄럽게 생각하여 그 후로 말을 타고 다니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항차 국사로서의 지위를 지닌 경흥 선사도 자신의 잘못을 고칠 때라야 비로서 남의 죄를 속죄 시킬 수가 있고 또한 남의 공양을 떳떳이 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제 눈에 들은 가시는 보지 못하고 남의 것만을 가지고 탓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때문에 『증아함경』에 이르기를
“평소에 툭하면 살생을 하고 남의 것을 제 것으로 하며, 오입질을 하고 거짓말 하며 요사한 소견으로 온갖 악행을 하는 이가 있었다. 그가 죽을 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죽은 후에 ‘극락에 태어나지이다’ 라고 축원한다고 해서 과연 그가 극락에 태어날 것인가? 그것은 당치 않은 말이다.
그것은 마치 연못 속에 무거운 돌을 던져놓고 떠올라라 하고 기도해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나쁜 업을 지은 사람은 제 스스로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오로지 진정한 수행자로서 자기 앞길 만 부지런히 닦아 철저한 계행으로 남의 공양을 받으라 하신 것이다.
望龍象德 能忍長苦 期獅子座 永背欲樂
行者心淨 諸天共讚 道人戀色 善神捨離
용상의 덕을 바라거든 능히 긴 고통 참아야 하며,
사자좌를 기약하거든 영구히 욕망을 등져야 하네.
수행자의 마음이 맑으면 모든 하늘이 칭찬하며,
도인이 여색을 연모하면 호법선신이 모두 떠나네.
인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숫파니파타』에서는,
“홀로 행하고 게으르지 않으며, 비난과 칭찬에도 흔들리지 않고,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남에게 이끌리지 않고 남을 이끄는 사람, 현자들은 그를 성인으로 안다.”고 해서 게으르지 않고 흔들리지 말 것을 강조하며, 사자좌를 기약하는 이로서는 모든 것에서의 집착을 여의여야 함을 말하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온갖 모욕과 고뇌를 참고 어떠한 원한도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항상 안주시키면 외부로부터의 모든 장애를 방지할 수 있어, 인욕의(忍辱依)라는 옷에 비유하며, 또한 인욕개(忍辱鎧)라고 하여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피는 연꽃이, 이 세상의 어떠한 고난이나 유혹도 물리치는 인욕행에 비유되고 있는 것이다.
‘도인이 여색운운’ 하는 부분은 탐욕의 해로움에 대해서 말함이며,
『사십이장경경』의 “애욕에 빠진 사람이란, 횃불을 들고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경우 반드시 손을 데이는 것과 같아서 꼭 재앙을 겪는다.”라는 말과,
『법집요송경』의 “욕망의 그물이 씌워지고, 애욕의 덮개가 덮이고, 어리석음의 마음이 결박된다면, 물고기가 어부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다를 바 없다.”라는 말로서 애욕의 교훈을 삼아야 하겠다.
四大忽散 不保久住 今日夕矣 頗行朝哉
世樂後苦 何貪着哉 一忍長樂 何不修哉
사대는 홀연히 흩어져 오래 보전할 수 없어서,
오늘 저녁일지 내일 아침에 올지 모르는 것.
세상의 즐거움은 고통이 뒤따라 탐 낼만한 것 못되며,
한 번 참으면 영원히 즐거운데 어찌 닦지 않겠는가.
사대(四大: 地,水,火,風)란 불교에서 사람의 인체의 구성요소로서 통상 일컫는 말이다.
흔히 사람이 어디서 왔는가를 알려면 어디로 가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여, 죽음의 문에 이른 육신의 뼈는 땅의 기운인 흙(地)으로, 피와 땀은 물(水)로, 체온의 따뜻함은 불(火)로, 힘이 있어 움직이던 기운(氣)은 바람(風)으로 돌아간다는 사대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대는 그 실다운 체성, 즉 본질이 없어서 서로의 인연으로 해서 거짓으로 만들어 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연이 다 하면 흩어져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오늘저녁 일지 내일아침 일지라는 말은 육신의 마지막이 언제 끝날지 몰라 그저 인연에 맡길 수밖에 없는 가련한 몸뚱이가 바로 내 자신인 것을 깊이 명심하라는 말이다.
세상의 즐거움에 탐착하면 고통이 뒤 따르나 그것을 참아내면 영원한 쾌락 속에 안주할 수 있다고 하는 말씀은 『帝釋所問經』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사람이 일심과 성심으로 부처님께 귀의하고, 부처님 법에 귀의하며, 일심으로 승가에 귀의하면 그 사람은 큰 쾌락(즐거움)을 반드시 얻게 된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밤낮없이 중생을 생각해 잊지 않으시며, 또한 달마의 힘은 밤낮없이 중생을 불가사의한 힘으로 지키며, 승가의 힘은 밤낮없이 중생을 보호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여 고통이 따르는 세상의 즐거움을 접고, 불·법·승 삼보께 귀의하여 법(法)속에서의 즐거움을 얻을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道人貪 是行者羞恥 出家富 是君者所笑
遮言不盡 貪着不己 第二無盡 不斷愛着
도인의 탐욕은 수행자의 수치요,
출가자가 부(富)를 탐함은 군자들의 웃음거리네.
요것만 하는 말이 한정 없건만 탐착을 버리지 못하며,
이번만 하는 것이 끝이 없건만 애착을 끊지 못하네.
부처 佛자를 생각해 보면 사람 人변에 떨칠 弗자의 합성어로 되어있다. 즉 중생에게서 무엇인가 떨쳐버린 이가 바로 부처님인데 그 무엇은 다름 아닌 탐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때문에 삼독(三毒:욕심,성냄,어리석음)을 이야기 할 때도 제일 먼저 탐심을 거론하는 것은 그 만큼 탐욕을 제거하기가 힘들다 는 말이다.
『법구경』에 유익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탐욕의 그물로 저를 가리고 애집(愛執)의 덮개로 저를 씌워 감옥에 스스로 묶어 놓으면, 고기가 통발 속에 들어간 것과 같아 노사(老死)의 엿보는 바가 된다.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을 찾는 것같이 탐욕을 떠나고 애집(愛執)의 발자취를 없앤다면 그물에서 벗어나 가린 것이 없어질 것이며 수도를 다하여 감옥의 결박을 제거한다면 모든 것들이 풀릴 것이다.”
만일 송아지가 어미소의 젖에 너무 집착한다면, 영원히 자신의 풀을 뜯어먹는 자유를 누리지는 못 할 것이다. 사람 또한 마찬가지로, 탐욕을 부리는 그것이 윤회하는 길일임 자각할 때, 지혜 광명의 빛이 비출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인 『유교경』에서도 제자들에게 하신 “자등명, 법등명(스스로 진리를 깨닫고 그 진리를 의지하여 법답게 살라)”의 말씀이나, “마땅히 부지런히 빨리 해탈을 구함으로써, 지혜의 광명으로 온갖 우치의 어둠을 없애도록 하라”고 하신 것은, 모두 탐욕의 근절을 당부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불자들의 신행활동은 불타의 정신이나 참된 진실을 담은 불타의 가르침(敎)을 통해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능가경』에서는, “경전은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일 뿐, 달(진실)을 각자 스스로 직접 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선을 위주로 하는 선불교에서는 진실을 체득한 뒤에는 교주인 불타나 경전까지도 초월하여 틀에 박힌 언설, 개념을 떠나 자유 자재한 자기의 종교를 전개하는 경지를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此事無限 世事不捨 彼謀無際 絶心不起
今日不盡 造惡日多 明日無盡 作善日少
이 일만 하는 것이 끝이 없건만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며, 저 꾀는 다함없건만 마음을 끊지 못하네.
오늘만 하는 것이 다함없어 악한 일만 늘어나고,
내일만 하는 것이 끝이 없어 착한 일 적게 짓네.
<사진설명>달마도(16세기 일본)
이 일(此事)이란 속세의 세간사일이며, 저 꾀(彼謀)란 출세간 해탈의 길이다. 속세의 일을 이일만 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은 모두 자아(自我)가 있다고 생각하는 까닭에 일어난다. 즉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여 그로 인해서 고(苦)와 낙(樂)따위의 상태가 전개되며, 선악 따위의 생각과 탐진 따위의 번뇌가 생겨나게 된다.
출세간에서의 마음을 끊지 못하는 것 또한 결국 같은 것이다. 마음을 냉철히 분별하여 마군이의 삿된 꾀임에 빠지지 않는 것도 모두 자기의 생각을 어떻게 다잡아 나아갈까에 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아함경』에 이르기를
“덧없는 생각들을 마땅히 끊어버려야 한다. 그리하면 마음이 넉넉하고 안락하리라.
무엇이 덧없는 생각인가? 육신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좋고 나쁨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무엇을 보고 느낀 자기의 생각들이 덧없는 것인가?
자신의 생각에 매달리는 것이 덧없는 것이다.
자기중심적으로 사물을 분별하는 것이 덧없는 일이다.”라고 하여
육신, 선악, 감정과 자기중심적 사고를 모두 덧없는 무상이라고 갈파하고 있다.
설령 모든 것이 그렇게 무상하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우리는 세속사를 선뜻 칼로 잘라내듯 결단을 내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몸에 배인 습관적인 일에 연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흐르는 강물과 같이 집착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숫타니파타』는 노래한다.
“물은 흘러 언제까지 차(滿)있지 않고, 타오르다 머잖아 꺼지는 불꽃.
보게나, 해는 뜨되 금세 지며, 보름달은 어느덧 이지러짐을.
세도가 하늘 뻗은 사람에게도 무상의 바람은 한결같아라.”
今年無盡 無限煩惱 來年無盡 不進菩堤
時時移移 連經日夜 日日移移 速經月晦
금년만 하는 것이 끝이 없어 번뇌는 계속되고,
내년만 하는 것이 다함없어 깨달음에 나아갈 수 없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밤낮이 빠르고,
나날이 흘러흘러 속히 한달이 지나가네.
‘금년만 운운…’ 하는 것은 집착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며, 이러한 집착으로 인하여 번뇌는 소멸되지 않는 것이며, 번뇌를 소멸 시키지 않고서는 깨달음에 나아 갈 수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대목이라 하겠다. 때문에 무아(無我:나의 없음)를 확실히 인식하고, 무상(無常: 항상 되는 것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면 깨달음에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연후에 처음으로 다섯 비구에게 말씀 하셨다는 네 개의 진리인, 사성제(苦,集,滅,道)도, 결국 고통을 여의고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가장 요긴한 문을 설명하신 대목으로 유명하다. 그 내용은 “고통이 있음을 알며(苦), 고통의 원인은 번뇌, 망집(集)함으로 일어남이요, 그 집착은 여읠 수가 있으며(滅),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 (道=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동, 바른 생활, 바른 노력, 바른 새김, 바른 집중)으로 팔정도(八正道)가 있다”라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성제의 힘은 한마디로 집착의 너울에서 벗어나 올바른 정진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이 어째서 고(苦)인가 하면, 일체의 사물이 여러 인연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며, 항시 변하여 한 순간에도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나의 건강, 재산, 가족의 화평, 지위 등 모든 것이 영원하다면 근심과 걱정에 떨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물은 변화해 가는 (무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 무엇인가를 나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나라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흘러 밤낮이 빠르고, 속히 한달이 지나가네’라는 말도 무상의 신속함을 말한 것으로, 『열반경』의 “만약 온갖 중생들이 행실을 닦지 않는다면, 생사의 허깨비 속에 살면서도 허깨비와 같은 상태를 인식치 못하리니, 미혹된 마음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말씀을 교훈삼아, 부지런히 행과 실을 닦아야겠다
月月移移 忽來年至 年年移移 暫到死門
破車不行 老人不修 臥生懈怠 坐起亂識
달이 흘러 홀연히 한 해가 다가오며,
한 해가 속히 지나 죽음의 문에 이르네.
부서진 차는 가지못하고,
노인은 닦지를 못한다.
누우면 게으름만 생기고,
앉으면 어지러운 생각만 일어나네.
<사진설명>백학명의 '노엽 달마도'
인생이 풍전등화라는 이야기를 하고있다.
즉,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이 언제 꺼질 줄 몰라 위태위태한 상황이 불안과 공포를 초래하여 한시도 편안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생활상이라는 것이다. 무언가 한 가지 이뤘다 해도 그것이 끝까지 영원한 것이 없고 중간에 무너지게 되기 일수다. 만약 실패하더라도 또 다시 딛고 일어나야 하는데 그것이 잘 되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 또한 걱정거리 인 것이다. 이러한 일의 번복을 몇 번 계속되다가 늙고 병들면 마음만 있게 되어 그 때 할 것을 하는 미련이 남는 것이다.
특히 윤회의 피곤함을 벗어나 열반에 이르는 수행에 있어서는 오늘의 이몸이 언제나 젊고 건강한 몸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라는 말이다. 다시 말 하면 죽음과 태어남, 그리고 또 다시 늙음과 병고의 되풀이. 이러한 순환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이냐 라는 분통함과 억울함을 냉철하게 깊이 인식해, 노인이 되기 전의 젊은 날에 부디 정진에 정진을 가해 달라는 자비의 말씀인 것이다. 몸이 늙어 정진할 기력을 놓치면 그 사람은 이미 생명이 다한 것과 진배 없다. 이러한 정진의 힘을 젊은 날에 키워놓지 않는다면 훗날 지옥의 문이 바로 나의 출입문이 될 것이며 그것은 그누구도 탓을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선사들이 죽음에 임박해서도 정진의 화두를 잃지 않으려 함은 이 때문 일 것이다.
『잡아함경』에 임종에 관한 다음의 글이 보인다. “수행자가 계율을 범하고 악행을 하면, 뒷날 병으로 고생하면서 자리에 쓰러져 온갖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 때는 전에 행했던 모든 악을 다 기억하게 될 것이다. 비유컨대 큰 산에 해가 지면 그림자가 내리 덮는 것처럼 전에 행했던 악행이 임종 때에는 모두 나타나 비로서 크게 후회한다.”
虛遇日夜 幾活空身 一生不修
身必有終 後身何乎 莫速急乎 莫速急乎
얼마나 많은 날을 닦지 않았거늘 또 밤낮을 허비할 것이며,
얼마나 헛된 몸으로 살았거늘 또 다시 일생을 닦지 않을 건가.
무상한 이 몸은 반드시 죽게 되니 후생의 몸은 어찌 할건가.
어찌 서두르지 않을 것인가. 급하고도 급하도다.
수 많은 생을 윤회의 체 바퀴 속에 속아 피곤했거늘 또 다시 일생을 닦지 않아 후생의 기약을 알지 못한다면 이 일 만큼 급하고도 급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는 정신을 차릴 때가 됐지 않나 하는 경책의 말씀이다. 일반 신남 신녀들도 독하게 정진한 이는 제 갈 길을 알 수 있는데 명색이 수행자라면 뼈저린 정진을 통하여 도를 얻어 자신의 갈 길을 알아야 하겠다.
『불반니항경』에 “수행자들이여,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을 붙들고 슬퍼 애통해 하지만 그는 이미 홀로 갔으며 그가 가는 길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도를 얻으면 죽어서 가는 길을 알 수 있느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권세를 제일이라 말하지만 천상과 인간에서 깨달음이 제일인줄 알아야 하느니라. 여러 사람이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려고 하지만 잘 맞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잘 맞히는 이는 그만큼 노력한 것이니, 누구라도 잊지않고 노력하면 과녁을 잘 맞힐 수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도를 빨리 얻지 못한다고 한탄하거나 물러서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면 반드시 도를 얻을 수가 있느니라.”
노력을 거듭하는 이에게는 빈부, 성별, 지식의 유무가 아무 필요 없다는 말씀이다.
幾生不修 虛遇日夜 幾活空身 一生不修
身必有終 後身何乎 莫速急乎 莫速急乎
얼마나 많은 날을 닦지 않았거늘 또 밤낮을 허비 할 것 이며,
얼마나 헛된 몸으로 살았거늘 또 다시 일생을 닦지 않을 건가.
무상한 이 몸은 반드시 죽게 되니 후생의 몸은 어쩔건가.
어찌 서두르지 않을 것인가. 급하고도 급하도다.
법공 스님(동국대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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