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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
강미나
스타트 라인. 내 생애 마지막 경주가 곧 시작되겠다. 갑갑하던 눈 가면도 오늘은 편안하게 느껴져. 가볍게 움직여 볼까. 노쇠한 세월이 닳은 편자에 전해지네.
내 이름은 루나, 직업은 경주마, 나이는 여덟 살. 내 고향 큰 섬에서 절름발이로 태어났어. 선천성 장애로 눈길하나 제대로 받지 못했어. 세살 무렵에 이 집에 와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지. 그제야 꿈이 생겼어. 그냥 달릴 수만 있다면, 절룩거리며 달리다 쓰러져도 마음껏 달리고 싶더라고. 경주마로 태어난 내 운명을 거부할 수 없었지. 재활의 고통을 견디어냈어. 드디어, 발주 칸에 세웠어. 내 이름이 장내에 호명될 땐 세상을 다 얻은 듯 했어. 데뷔 후 좌절은 계속되었지. 꼴찌의 비애를 남몰래 삼켜야 할 땐 짧은 다리가 원망스러웠어. 나에게 야유를 보내고 찌그러진 캔을 던진 인간들이 두려웠지.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이 내 생애 최선이었으니까. 포기 할 수 없는 근성이 나를 일으키고, 밤색 갈기를 세우고 바람처럼 내달리게 했어. 한때 나는 복병마였지. 은근 유명세를 치르지. 이젠 늙고 병들어 오늘 은퇴를 위한 마지막 레이스에 출전했어. 인간들이 날 둘러싸고 셔터를 눌러대네. 그래, 앞발을 치켜들어 멋진 포즈를 취해 주마.
사는 게 다 만족스럽기만 한 건 아니야. 너른 초원을 누벼야 하는 본능을 접어두고 규정된 트랙을 달려야 할 땐 참으로 답답했어, 매번 곡선 커브를 내달릴 땐 긴장된 근육을 느껴. 속도 조절이 못 되면 트랙 밖으로 튕겨 나뒹굴면 초주검을 당하지. 재수 없는 날은 동료와 부딪혀 치명상을 입기도 하지. 재발한 염증으로 수술 할 때는 기가 막혀.
저 남자 꼬라지 좀 봐라. 안 미치면 저럴 수 없어. 멀쩡한 직장을 다니다 친구의 사탕발림에 넘어가는 반편이 같은 놈 아닌가. 참 운명이라. 그날 하필이면 한 번의 초고액 배팅이 터져, 부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한번만, 한번만 더 대박이 터지면 하고 배팅을 하지만 계속 범 아가리로 들어간 발이 허방에 빠진 걸 모르고 있어. 달콤한 유혹이 직장을 삼키고 끌어다 쓴 사채와 돌려막은 카드가 목을 조이니 어쩌겠어. 파산하는 거지. 결국 이혼을 당하고 노숙자가 되었어도, 오늘도 왼쪽 관람대 중앙에 앉아 눈에 불을 켜고 허공을 쥐고 용쓰네.
저런 인간이 하나, 둘인가. 쯧쯧. 결국은 뉴스의 한 컷을 장식하는 멍청한 인간들아. 참 어리석고 가소로운 인생들아. 정신 차려.
어리석은 인간들이 돈 놓고 돈 먹는 세상을 우리가 어쩌지 못해. 우린 알 바가 없어. 우리는 단지 달리기만하면 된다고. 원로 ‘개선장군’이 나를 위로 했어.
하지만 나는 산책할 때가 더 좋아. 인간들의 아우성을 듣지 않아도 되니까. 경마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에 드물게 감동을 받지. 정문에 세워진 비대칭 조형물 ‘조우’가 멋져. 야경은 더 눈길을 끌지. 호수 공원의 산책로를 끼고 돌면 청동마상이 하늘을 달리고 있어. 그러면 너른 창공을 마음껏 뛰고 싶어. 찰칵 찰칵. 꽃마차를 탄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가 내 귀를 간질이면 난 정말 행복해. 먹을거리를 나눠 먹으며 담소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보면 난 콧등이 찡해. 고향이 생각나지.
약물검사를 마치고 예시장에 들어설 때부터 긴장은 돼. 곳곳에 방송 카메라와 아나운서의 경주 실황이 장내에 생중계되면 오늘의 역사는 새로 시작되지. 대형 전광판에 나와 기수의 전적이 자막위에 뜨고 있어. 내일이면 뜨지 않겠지만 후회는 없어.
인간들은 돈을 걸고 내가 달리기를 바라지만 난 내 길을 묵묵히 달리지. 탐욕이 얹히면 내 등 무게가 매번 달라지는걸 알기나 해. 우리보다 더 긴장된 눈빛으로 결승점에 모여 있는 수만은 사람들의 시선들. 어떤 이는 환호하고, 다른 이는 절망하는 트랙. 한방에 인생을 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찰나를 향한 순간의 승부. 그들의 질주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서서히 긴장이 몸으로 느껴져. 기수의 침착한 손길이 전해지고, 관람대의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는 순간이야. 심호흡을 길게 들이마시고 발주지점에 섰어. 심판의 손에 들린 청기가 서서히 위로 올랐다 아래로 내려진 순간, 발주, 문이 열렸어.
내 마지막 질주가 시작됐어. 또 다른 세상을 향해서.
첫댓글 에세이 포레 여름 58호에 게재되고 이은화님의 계간평 받았구요. 창작문예수필 작품과 작법2에 평 받았습니다.
쌤 축하해요 시원시원합니다, 계속 질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