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서악동 산92~2번지
이정표 뒷편으로 4기의 왕릉이 보인다.
진흥왕릉은 서악동 무열왕릉 바로 뒷편에 4분의 왕릉과 같이있으나 웬지 관리가 덜 된 듯 보인다.
진흥왕眞興王은 신라 제24대 왕(534~576, 재위 540~576). 성은 김(金), 이름은 삼맥종(三麥宗)이다.
대가야 지역을 평정하고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하는 등 대대적인 정복 사업을 벌여 신라의 영토를 가장 넓게 만들었으며 점령지에는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다.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昌寧新羅眞興王拓境碑]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교상동에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 원래 창녕군 창녕읍 화왕산(火旺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비문은 해서체이다. 국보 제33호이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 순행(巡幸)을 기념하여 비봉(碑峰)에 세운 비석.
지금은 경복궁에 옮겨져 있다. 국보 제3호이다.
국내적으로는 불교를 지원하여 황룡사(皇龍寺)를 짓고 화랑 제도를 창시하였으며, 거칠부에게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브리테니크자료,,,
진흥왕대의 업적 중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화랑도(花郎徒)의 창설이다.
진흥왕은 576년에 종래부터 있어왔던 여성 중심의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로 개편하였고
기록상으로는 576년에 화랑도가 창설된 듯하지만,
실제로는 진흥왕 초기에 이미 화랑도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562년 대가야 정벌에 큰 전공을 세운 사다함(斯多含)이 유명한 화랑이었다는데서도 확인되며
이처럼 진흥왕은 대내외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신라 중흥의 군주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내적으로는 국가의식과 대외적으로는 자주의식의 상징적 표현이었던 독자적 연호를 3개나 사용할 수 있었고.
551년의 개국, 568년의 대창(大昌), 572년의 홍제(鴻濟)가 그것이며
재위 37년만인 576년 43세로 죽었다. 애공사(哀公寺) 북봉(北峯)에 장사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