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비(金龍庇): 첨사공(詹事公)
고려개국(高麗開國)과 함께 문호(門戶)를 개방한 의성김씨(義城金氏)는 8세손 김공우(金公遇)의 아들 대(代)에서 크게 번창하여 세도가문(勢道家門)의 기틀을 다졌다. 장자(長子)인 김용비(金龍庇): 태자 첨사(太子諂事: 동궁에 속한 종 3품 벼슬)는 고려말 공민왕(恭愍王)때 홍건적이 대거 쳐들어와 임금이 복주(福州) 현 안동으로 몽진하고 이 고장의 옥산 성골 등지로 피란을 예정할 즈음 의성 일원에서 날뛴 도적의 무리를 현주(縣主)로 있던 공이 물리쳐 소란한 민심을 수습했다.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이등공신 고려 금자광록대부(高麗 金紫光祿大夫) 태자첨사 의성군(太子詹事義城君)이 되었다 .습봉 의성군(襲封義城君)하여 의성읍인(義城邑人)이 대공덕(大功德)을 찬양(讚揚)하여 진민사(鎭民詞)를 세워 춘추향사(春秋享祀)를 봉행(奉行)하였다가 그 후(後) 본손(本孫)이 인수(引受)하여 오토산(五土山) 묘하(墓下)에 묘우(廟宇)와 재사(齋舍)를 건립(建立)하여 봉행(奉行)하고 있다.
차자(次子) 김용필(金龍弼)은 수사공(守司空)을,셋째 김용주(金龍珠)는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여 명성을 날렸다.
◆ 김의(金宜): 복야공(僕射公)
태자첨사(太子諂事)를 지낸 9세손 김용비(金龍庇)의 맏아들로 고려조에 전리 좌랑(典理佐郞)을 역임했다.김거두(金居斗)의 증조부이다.
부군의 생년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八年乙卯(一三三九)이나 졸년은 전한바 없다.
그러나 부군께서 경주부사(慶州府使)로 재임시인 조선태조삼년갑술(朝鮮太祖三年甲戌·一三九四)四月에 삼국사기(三國史記) 중간발문(重刊跋文)을 지으셨으니 향년(享年)이 五十六세 이상임은 틀림없는 바이다.
부군은 고려조에서 문하주서(門下注書)를 거쳐 봉익대부공조전서(奉翊大夫工曹典書)에 이르렀고 조선 개국후에 李太祖 二年 癸酉(一三九三)十月에 가선대부경주부사(嘉善大夫慶州府使)로 부임하셨다. 고려의 국운이 끝날무렵 남하(南下)하였다.
그때에 계씨(季氏·弟氏<男의 아우>)인 文學公 居翼(거익)과 함께 개성(開城)을 떠나 한양성(漢陽城) 남문밖에 이르러 부군이 계씨에게 말씀하시길 우리 형제가 한곳으로 간다면 뒷날 거주지가 협소할 것이니 일찍이 서로가 먼곳에서 살되 자네는 호남(湖南)으로 가고 나는 영남으로 가서 살겠다고 하여 서로가 헤어졌다. 그래서 부군은 경기도 죽산(竹山) 궁원(宮院)에서 잠시 머물다가 안동의 풍산현 新池洞(현上里洞)에 정착하였다.
◆ 김한계(金漢啓)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형운(亨運),호는 휴계(休溪)
아버지는 현감(縣監) 김영명(金永命)이며,아우는 예조정랑(禮曹正郞),송호공(松湖公) 김한철(金漢哲)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고조부(高祖父)이다.
1438년(세종 20)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집현전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1451년(문종 1) 좌정언(左正言)이 되었으며, 경연(經筵)에 출입하여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다.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1454년(단종 2) 성균관직강이 되고 이어 승문원교리를 겸하였으며, 또 기주관(記注官)을 겸하여 《세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승정원부승지를 지내고 다시 정언(正言)이 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부지승문원사(副知承文院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같은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으나 사양하였다.
<참고문헌>
文宗實錄, 端宗實錄, 世祖實錄, 國朝榜目, 誌狀輯略. 〈李泰鎭〉
◆ 김진(金璡)
1500(연산군 6)∼1580(선조 13)
조선 중기의 선비.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영중(瑩仲), 호는 청계(靑溪)
증조부(曾祖父)는 원사공(院事公) 김한계(金漢啓)이고,조부(祖父)는 통례공(通禮公) 김만근(金萬謹)이며,부(父)는 교위(校尉) 김예범(金禮範)이다. 참봉(參奉) (贈)통정대부(通政大夫) 이희안(李希顔)의 처남(妻男)이며,통훈대부 의흥현감(通訓大夫 義興縣監)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의 외숙부(外叔父)이다.
안동(安東)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고 뜻이 높아 기묘명유(己卯名儒)들을 찾아 가르침을 배워 견문을 넓히고 학업에 정진하였다.
또한, 음사(淫祠:邪神을 祭祀하는 사당)나 귀신은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멀리하매 무당이 그의 마을에 감히 들어가지 못하였다. 마을 남쪽 산에 염흥방(廉興邦)의 사당이 있었는데, 그는 “네가 전조(前朝:고려)의 간신으로서 죽었어도 남은 죄가 있는 터에 어찌 너의 귀신을 용납하여 백성들을 미혹(迷惑)하게 하랴.” 하고 이를 헐어버렸다.
그는 다섯 아들에게 “사람이 차라리 곧은 도(道)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무도하게 사는 것은 옳지 않으니, 너희들이 군자가 되어 죽는다면 나는 그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길 것이고, 만약 소인으로 산다면 그것을 죽은 것으로 볼 것이다.”라고 훈계하였다.
뒤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嶺南人物考. 〈文守弘>
※ 생원(生員) 김진(金璡)의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대에 이름난 거유(巨儒)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읽고 문명(文名)을 날렸는데, 맏아들 자(字)-백순(伯純),약봉공(藥峯公) 김극일(金克一)은 내자시정(內資寺正)을, 둘째 귀봉공(龜峯公) 김수일(金守一)은 찰방(察訪)을 지냈으며, 셋째 운암공(雲巖公) 김명일(金明一)은 효행(孝行)이 지극한 학자(學者)로 유명했다.
넷째 자(字)-사순(士純),학봉공(鶴峯公) 김성일(金誠一)은 1568년(선조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호당(湖堂)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부제학(副提學)·나주 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여 사성(司成)으로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일본(日本)에 다녀왔다. 그후 1592년(선조 52)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초유사(招諭使 : 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초유하는 일을 맡은 임시벼슬)로 참전하여 죽산(竹山)·함양(咸陽) 등지에서 의병(義兵)을 모아 진주성(晋州城)을 사수하다가 진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에 능통했으며 사후(死後)에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으로 이조 판서(吏曺判書)에 추증되었다.
막내인 자(字)-계순(季純),남악공(南嶽公) 김복일(金復一)은 명종(明宗) 때 사마시(司馬試)를 겨처 1570년(선조 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전적(典籍)·낭관(郎官)·전라도 어사(全羅道御使)를 거쳐 울산 군수(蔚山郡守)·창원 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고, 성균관(成均館)의 사예(司藝)와 풍기 군수(豊基郡守)를 지냈다.
◆ 김성일(金誠一)
1538(중종 33)∼1593(선조 2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峰). 안동출신
증조부(曾祖父)는 통례공(通禮公) 김만근(金萬謹)이고,조부(祖父)는 김예범(金禮範),부(父)는 생원 청계(靑溪) 김진(金璡)이다. 통훈대부 의흥현감(通訓大夫 義興縣監) 송간(松澗) 이정회(李庭檜)와는 내외종간(內外從間)이며,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1556년(명종 11)아우 복일(復一)과 함께 도산(陶山)의 이황을 찾아 《서경》·《역학계몽 易學啓蒙》·《심경》·《대학의의 大學疑義》 등을 익혔으며, 1564년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수학하였다. 그후 다시 도산에 돌아와 이황에게서 수학하고, 그로부터 요순(堯舜)이래 성현이 전한 심법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156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고, 이듬해 정자가 되었다. 이어서 검열·대교 등을 거쳐 1572년 봉교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端宗의 陵)으로 봉축하고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錄用)하도록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이듬해 전적과 형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이 되었고,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지제교·경연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다.
1574년 부수찬을 거쳐 다시 정언이 되어 변장(邊將)으로부터 초피덧저고리를 뇌물로 받은 우의정 노수신(盧守愼)을 탄핵하였다.
이듬해 이조·병조의 좌랑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77년 사은사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으며, 돌아와 이듬해 홍문관교리가 되고, 이어서 장령·검상·사인 등을 역임하였다.
1580년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史)로 함흥·삼수·길주·종성 등을 살피고 돌아와, 변장으로서 직무에 충실한 혜산첨사 김수(金燧)를 당상관에 승품하고, 영건만호(永建萬戶) 우응장(禹應長)과 정현룡(鄭見龍)·김광옥(金光玉) 등을 선전관(宣傳官)에 기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1583년 사간이 되고, 이어서 황해도순무어사로 다녀와 군기관리(軍器管理)를 소홀히 하고 창곡(倉穀)을 부실하게 한 황주목사 윤인함(尹仁涵)의 파직을 건의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로 부임하여 민원(民寃)의 처리에 노력하고, 오랫동안 끌어온 이 고을 임씨(林氏)·나씨(羅氏)간의 송사(訟事)를 해결하는 등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또한, 이곳 금성산(錦城山)기슭에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세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 등을 제향하는 한편 선비들을 학문에 전념하게 하였다.
1586년 나주 사직단(社稷壇)의 화재에 책임을 지고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이황의 《자성록 自省錄》·《퇴계집》 등을 편집, 간행하였다.
1588년 종부시첨정이 되고, 이어서 봉상시정·경기추쇄경차관(京畿推刷敬差官)·예빈시정·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돌아와 일본의 국정을 복명할 때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왜가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 그해 부호군에 이어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승문원부제조를 겸하였고,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을 역임하였다.
1592년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일의 복명에 대한 책임으로 파직, 서울로 소환중, 허물을 씻고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하는 유성룡(柳成龍) 등의 변호로 직산(稷山)에서 경상우도초유사로 임명되어 다시 경상도로 향하였다.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활동을 고무하는 한편, 함양·산음(山陰)·단성·삼가(三嘉)·거창·합천 등지를 돌며 의병을 규합하는 동시에 각 고을에 소모관(召募官)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또한, 관군과 의병 사이를 조화시켜 전투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해 8월 경상좌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곧 우도관찰사로 다시 돌아와 의병규합·군량미확보에 전념하였다.
또한,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으로 하여금 의병장들과 협력, 왜군의 침입으로부터 진주성을 보전하게 하였다.
1593년 경상우도순찰사를 겸하여 도내 각 고을의 항왜전(抗倭戰)을 독려하다가 병으로 죽었다. 정치적으로 동인(東人)에 가담, 1590년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최영경(崔永慶)의 신원(伸寃)을 위해 서인(西人)의 영수 정철(鄭澈)을 규탄하였으며, 그후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유성룡·김우옹 등과 입장을 같이하여 남인을 이루었다.
또, 학문적으로는 이황의 고제(高弟)로서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장흥효(張興孝)―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 전해졌다.
또한, 예학(禮學)에도 밝아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서는 모든 예절을 《가례 家禮》에 따라 행하였으며, 《두씨통전 杜氏通典》·《구씨의절 丘氏儀節》·《향교예집 鄕校禮輯》 등을 참고하여 《상례고증 喪禮考證》을 지었다.
1664년(현종 5)에 신도비(神道碑)가 세워지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하동의 영계서원(永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해사록》·《상례고증》 등이 있으며, 1649년(인조 27)에 문집으로 《학봉집》이 만들어졌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 김복일(金復一)
1541(중종 36)∼1591(선조 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계순(季純), 호는 남악(南嶽)
아버지는 생원(生員) 김진(金璡)이며,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김성일(金誠一)의 아우이다.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이다.
1564년(명종 19)사마시에 합격하고, 1570년(선조 3)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학유(學諭)·전적(典籍)을 역임하고, 형조·호조·공조의 낭관을 지냈다.
그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였으며, 1587년 울산군수에 이어 창원부사가 되어 폐단이 심한 그곳을 잘 다스렸다. 이어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성균관의 사예·사성(司成)및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안동의 사빈서원(泗濱書院)에 제향되었다.
내앞의 의성김씨 대종가는 내앞에 자리잡은 김만근(金萬謹 1446∼1500)의 손자인 靑溪 김진(金璡1500 -1580)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는 종가이다. 그에게 한 관상가가 "살아서 벼슬을 하면 참판에 이를 것이나 자손 기르기에 힘쓰면 죽어서 판서에 오를 것"이라고 예언을 해서 자신의 벼슬보다는 자손의 영예를 선택했다는 속설이 전한다. 또 그는 장학제도를 마련하여 文章劍, 文章밭(畓)을 두어 자손 중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에게 전수하도록 할 만큼 학문 장려에 힘을 기울렸다. 그래서인지 그의 다섯 아들 중에 셋이 문과에 급제하고 둘은 소과에 급제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청계 김진의 집을 일컬어 "다섯 아들이 급제한 집"이라는 뜻으로 "五子登科宅"이라고 불렀다. 김진의 넷째 아들인 학봉 김성일을 비롯하여 내 앞의 의성김씨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사람이 24명, 생원이나 진사에 나간 사람이 64명에 이른 것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그러나 학문하여 스스로 닦는 것을 급제나 벼슬보다도 더 중히 여기는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의성김씨는 퇴계의 학맥을 가학으로 받아들여 성리학자 집안을 이루었다. 옳은 일에 굽히지 않는 반골기질로 말미암아 "금부도사가 세번 찾아왔다"는 것을 집안의 자랑으로 삼는 가풍을 지니고 있다. 이 세번이란, 시비를 규탄 하여 국사를 바로잡으려는 선비의 기개로 숙종 24년(1694)에 지촌 김방걸이 실정하여 규탄했을 때, 숙종 33년(1707)에 칠탄 김세흠이 거유 이잠의 탄핵이 부당함을 상소했을 때, 영조 13년(1737)에 재산 김성탁이 스승 이현일의 신원소를 올렸을 때를 말한다.
이런 가풍 때문인지 귀봉공(龜峯公) 김수일(金守一)의 아들이며,청계공의 손자인 목사(牧使) 운천(雲川) 김통(金涌:자-도원道源)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니, 대종가의 바로 옆에 있는 소종가는 바로 운천(雲川)을 불천위로 모시는 집이다. 또한 한말 애국계몽기에는 마을의 교육기관이었던 가산서당을 협동학교로 만들어 외세에 맞설 학문을 가르쳤으며, 그 설립자인 김동삼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과 조국광복에 일생을 바치기도 했다.
◎ 의성김씨 청계공파(靑溪公派)의 세거지 임하면 천전리(川前里)-내앞
안동시내에서 청송방면의 국도를 따라 11km 정도 가면 임하보조댐이 나타난다. 여기서부터 천전리이다. 천전리는 1리와 2리로 분리되어 있으며 1리는 임하보조댐에서 1km 정도 국도를 따라 가면 왼편에 있다. 2리는 임하보조댐에서 도로 건너에 있는 작은 도로를 따라 2km 정도 들어가야 나타난다.
천전리는 원래 안동군 임하내면의 지역이었으며 1914년에 현재의 천전2리 지역인 반시동 일부를 병합하였다. 그리고 1931년에 행정구역 변경에 의하여 임하면에 편입하였다.
천전리는 내앞이라고도 한다. 마을 앞에 반변천이 흘러서 유래된 것으로 주로 1리를 지칭하는 것이다. 내앞은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지닌 마을인데 의성김씨 청계파(靑溪派)의 동성마을로서도 많이 알려졌다.
내앞의 의성김씨 청계파 입향조는 김만근(金萬謹) 선생이다. 원래 의성김씨가 내앞으로 입향하기 전에는 안동의 풍산현(豊山縣)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 갈 무렵인 공민왕 때에 의성김씨 시조로부터 <13세손>이 되는 김거두(金居斗) 선생과 그의 아들인 김천 선생이 남향한 것이 계기가 된 것이다. 그 후 김천 선생이 풍산에서 안동읍내인 방적동(邦適洞)으로 이건하였다. 방적동은 밤적골이라고 하는데 지금의 안동시 율세동이다. 그 후 다시 김천 선생의 증손되는 김만근 선생이 해주오씨(海州吳氏)인 처가의 근처인 천전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명문세가로서의 자리매김을 시작하였다.
천전리에 이주한 김만근 선생의 손자인 청계(靑溪) 김진(金璡) 선생 대(代)에 오면서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김진 선생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에 합격하고 명망이 드높은 학자로서 이름을 떨쳤다.
천전리에는 명문세가 동성마을의 명성에 걸맞게 그윽한 고가옥이 즐비하며 많은 문화재가 있다. 특히 학문을 좋아하고 권장하는 분위기에 따라 안동 최초의 근대학교인 협동학교를 건립하였는가 하면 또 국가에 대한 애국심도 충만하여 일제강점기 때에는 수많은 애국지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2002년 8월 기준- 천전1리에는 의성김씨를 비롯한 여러 성씨 133가구에 378명의 주민들이 거주하며 천전2리에는 36가구에 83명이 거주하고 있다.
▶ 서녁
이 마을은 내앞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명칭도 위치에 관련된 것인데 서쪽에 있다고 하여 유래된 것이다. 국도에서 내앞으로 접어드는 길목이며 의성김씨 청계파의 대종택과 김진 선생의 차남인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의 종택이 나란히 있다. 서녁 앞에는 작은 하천이 있는데 하천 건너편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현재 폐교되었다. 학교 앞에는 개목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으며 여기에도 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의성김씨종택:청계 선생의 부친인 김예범(金禮範) 선생이 분가하였을 때 건립한 것이다. 그 후 가옥을 현재의 규모로 중수하였으나 선조 20년(1587)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에 의해서 중건(重建)되었다. 학봉 선생이 종택을 직접 설계하였는데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봐 온 중국의 재상집을 본 떠 지었다고 한다. 건물구조는 □자형 안채와 一자형 사랑채가 행랑채 등 다른 부속건물과 결합한 형태인데 전체적인 평면은 巳형을 이루고 있다.
◇ 귀봉종택:청계종택 동쪽에 바로 붙여있다. 김수일 선생이 분가할 때인 현종 원년(1660)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집은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양반 종가 양식을 갖춘 건축물로 고종25년(1888)에 선생의 12대손인 김주병(金周秉) 선생이 중수하였다. 건물구조는 홑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자형 집이며 대문채, 사랑채, 안채, 사당채 등으로 구성되었다. 특히 여기에는 김수일 선생의 자제인 운천(雲川) 김용(金涌) 선생이 임진왜란시 임금을 호종하면서 쓴 호종일기를 보관하고 있다.
◇ 불거리:임하보조댐 아래에 있다. 국도에서 반변천을 건너서 갈 수 있으며 근대에 형성된 마을이다. 현재 10여 가구가 거주하고 있는데 닭백숙과 닭불고기를 하는 식당이 많다.
◇ 개 호(開湖):천전리 앞 반변천 강가에 있는 숲이다. 숲의 길이는 1km 정도이며 김만근 선생이 마을 앞 수구를 메우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다. 그 후 선조 38년(1605)의 대홍수로 유실된 것을 운천 김용 선생의 발의로 다시 조성하였고 한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하여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이라는 문중 규약을 만들었다.
-의성김씨 청계공파의 본산인 천전마을 앞 반변천 가에는 개울을 따라, 약 1키로 쯤의 울창한 소나무숲이 길게 펼쳐져 있다. 개호(開湖)숲이라 일컫는 이 숲은 개촌조(開村祖)인 통례공 김만근(通禮公 金萬謹)이 조선 成宗무렵에 마을 앞 수구(水口)가 허술함을 메우기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인 을미년 대홍수로 많이 유실되어, 운천의 발의(發義)로 다시 조성했다는 사연이, 이 숲을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문중규약인 개호금송완의(開湖禁松完議)의 서두에 전한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대대로 이 규약을 엄중히 지켜, 조상이 끼친 알뜰한 자연보호정신을 계승, 조림한 이래 400여년에 쟁기를 대 본적이 없는 이 開湖숲은 마을의 상징이기도 하다.
▶ 장구날·장고(長皐)
이 마을은 내앞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며 긴 산기슭에 연해 있으며 그 모양이 장고(長 )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현재 15가구 정도가 거주하고 있다. 임하댐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으며 마을 뒷산 아래에는 야암(野庵) 김임(金 )선생이 말년에 건립한 야암정사(野庵精舍)가 있다.
▶ 빗골(雨谷)
이 마을은 내앞 동쪽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명칭은 내앞 본동에 비가 올 때는 대개 여기에서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여 본동으로 온다고 하여 붙여진 것이다. 빗골에도 많은 고가옥이 있다.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선생의 종택, 백인재(白忍齋) 김헌수(金憲壽) 선생의 고택, 백하(白下) 김대락(金大洛) 선생의 고택인 백하구려(白下舊廬) 등이다. 현재 이 마을에는 28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갑시골:빗골의 국도 건너편에 있는 골짜기다. 현재 1가구가 살고 있다. 그리고 목암(牧庵) 김정기(金鼎基) 선생이 건립한 정자인 목암정이 있다.
▶ 구목골·구뭇골·군뭇골·운곡(雲谷)
이 마을은 내앞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명칭은 마을의 골이 좁아서 항상 구름이 끼어 있는 것 같이 어둡게 보인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구뭇골에서 구름이 모여 빗골(雨谷)에서 비가 묻어 내앞에 비가 온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마을 입구에는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선생이 1701년에 건립한 몽선각(夢仙閣)이 있다. 몽선각은 원래 임동면 망천리에 있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인하여 현재의 위치에 이건한 것이다.
◎ 의성김씨 학봉파(鶴峯派)의 세거지 서후면 금계리(金溪里)-검제
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속명은 금음지 또는 금계라 한다.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옛날에 칭하기를 천년 패하지 않는 땅이라고 했다. 사복정 배상지가 여기에 살았는데 백죽당이 있다. 용재 이종준, 판서 권예도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학봉 김성일이 임하로부터 이곳으로 옮겨와서 살았다. 여염집이 가득하고 한 줄기 냇물이 중간을 가로질렀는데 70을 넘은 늙은이가 집을 잇대어 사니 온 고을에서 일컬어 노인촌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영가지의 기록을 보더라도 조선전기에 금계마을을 대표하는 성씨는 흥해 배씨와 안동 권씨였다면 조선 중·후기에는 의성 김씨인 학봉의 후손들이다. 학봉은 임하 천전에서 청계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금계에 사는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1582년에 금계로 이주하였다. 학봉은 이 금계에서 실제 살았던 기간은 불과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주자서절요]와 퇴계의 [자성록]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청성산 기슭에 석문정사를 지어 안동지역 학문발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금계리는 마을의 지세가 거문고와 같이 생겼다고 해서 금지라 불렀으나 학봉 선생이 이곳으로 옮겨와 검재로 고치고 한자로 금계라 적었다.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로 유명한 곳인 금계리는 행정구역으로 1리와 2리로 나누어져 있으며 원주(原州) 변씨(邊氏), 의성(義城) 김씨(金氏), 안동(安東) 장씨(張氏)의 집성마을이다.
자연마을은 1리에 알실, 음지, 복당, 사망, <검제> 등 5개의 마을에 116세대 306명의 주민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2리에는 미리미, 작장골, 마누이, 텃골, 경광 등 5개의 마을에 43세대 124명의 주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 금지·금은지·<검제>·금제(琴堤)·금계(金溪)
약 500년 전에 지리에 능통한 선비가 이 곳을 지나다가 지세를 보고 천년 동안 망하지 않을 곳이라 하여 천년불패지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마을의 지형이 거문고 같다 하여 금지라 불렀다.
◇ 학봉종택(鶴峯宗宅, 風雷軒):학봉선생의 종택으로 원래 현 위치에 지었으나 지대가 낮아 침수가 자주 된다 하여 선생의 8세손인 광찬(光燦)이 그의 나이 27세이던 1762년에 현 위치에서 100m가량 떨어진 현재의 소계서당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고 종택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그러나 갑진년에 종택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옮겼다.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으로 사용케 하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사랑채로 사용하고 있다.
◇ 금계리 선돌:검제에서 금계 2리 미산마을로 들어가려면 금계천을 가로지르는 미산교를 건너서 간다. 이 미산교에서 제방을 따라 80m 정도 서북쪽으로 올라간 지점에 있다. 재질은 화강석이며 크기는 길이 120cm 높이 70cm 정도이고 형상은 염소를 닮았다.마을에서 구전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동중학교에 근무하는 직원이 학가산에 갔다가 오는 길에 이곳에 있는 돌을 수레에 싣자 갑자기 코에서 코피가 났다고 한다.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직원은 학교까지 이 돌을 운반한 후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동료 직원들이 환자를 급하게 병원으로 옮겨 별별 치료를 다 하였지만 조금도 차도가 없어서 이상하게 생각하던 차에 그 직원이 가지고 온 돌의 생김새가 신묘하여 이것 때문에 부정이 났다고 판단하여 그것을 도로 제자리에 갔다 놓았더니 병이 완쾌되었다고 전한다.
▶ 음막·을막골
서후면사무소를 지나 봉정사 방면으로 오르다가 오른편 골짜기에 자리잡은 마을로 사망마을에서 볼 때에는 서북쪽이다. 골짜기 안에 있어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고 붙인 이름이다.
◇ 음막골: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이다.
◇ 불당재:올막 뒤에 있는 산이다. 불당이 있어서 불당재라 한다.
◇ 불당사:영가지의 기록에 의하면 부의 서쪽 15리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판서 권예가 선영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에 불타고 없어졌다.
▶ 복당(福堂)·단정(丹井)
금계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석복산(石復山) 밑에 있다. 여기에 거주하는 사람은 복(福)을 받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 복당(福堂)이라 불렀다 한다. 단정(丹井)은 복당(福堂) 북동쪽에 있다.
◇ 구종가 터:학봉종가의 옛 터이다.
◇ 소복당(召福堂):소복산(召福山) 위에 있는 사당으로 매년 정월에 마을 사람들이 김씨(金氏)종가(宗家)에 모여서 당유사(堂有司)를 정하는데, 김씨(金氏) 문중(門中)에서 1사람, 타성에서 1사람, 색장(色掌) 1사람, 도가 1사람을 택하여 제삿날까지 목욕재계해서, 정월 보름날에 제사를 지내며, 유사들은 1년 동안 흉사에는 안가며 항상 깨끗한 마음가짐으로 마을의 안녕을 기원한다.
◇ 단정골:복당 마을이 자리잡은 골짜기이다.
◇ 뒷 골:복당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마을 뒤에 있다는 뜻에서 뒷골이라 한다.
◇ 복병산(伏屛山):복당 앞에 있는 산으로 병풍을 둘러친 듯한 절벽이 있다.
◇ 빈솟골:뒷골 위에 있는 골짜기로 김씨의 빈소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솔거리:복당 남쪽에 있는 마을 소나무가 많이 있어서 솔거리라 한다.
<의성김씨 주요 집성촌/세대수>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에 의거, 집성촌과 세대수
경북 고령군 운수면 월산동 / 48
경북 군위군 군위면 무성동, 효령면 노행동 / 60
경북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 봉화읍 해저리 / 250
경북 봉화군 봉화읍 해저리
경북 성주군 초전면 자양동 / 40
경북 안동군 서후면 금제동, 임하면 천전동 / 170
경북 안동군 일직면 구미동 / 80
경북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 대곡동 / 80
경북 안동군 임하면 천전동, 일직면 구미동
경북 영주시 휴천동, 영풍군 장수면 화기동 / 100
경북 영천군 북안면 유상동, 임고면 사동 / 90
경북 영천군 화북면 신호동 / 30
경북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 / 51
경북 의성군 금성면 명덕동, 광현동 70
경북 의성군 단촌면 상화동, 관덕동 / 230
경북 의성군 사곡면 화전동
경북 의성군 의성읍 중리동, 사곡면 화전동 / 120
경북 의성군 춘산면 사미동 / 55
경북 청송군 현서면 구산동, 도동, 월정동 일원 / 140
경북 청송군 현서면 모계동, 안덕면 신성동 일원 / 80
경북 청송면 진보면 시양동, 이촌동, 천현동 / 120
충북 괴산군 칠성면 외사리 /80
충북 괴산군 문광면 양곡리 /50
충북 괴산군 문광면 옥성리/ 15
충북 옥천군 이원면 지정리, 미동리 / 50
충북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 70
충북 청원군 미원면 구방리/ 18
경기 광주시 실촌면 연곡리·신대리 / 42호
경기 안성군 보개면 가현리 / 20
경기 장단군 진서면 대원리 / 22
<동아일보 기사목록>
[책]의성김씨 川前파 가문 500년史 책으로 펴내
[건강/생활] 2002년 05월 29일(수)
오랜 전통을 지켜 온 한 가문의 오백년사를 엿볼 수 있는 문집과 논문집이 발간됐다. 이 문중사(門中史)를 정리해 낸 집안은 의성(義城)김씨 천전(川前)파. 이들은 시조인 청계 김진(靑溪 金璡·1500∼1580) 선생의 탄생 500주년을 기념해 준비해 온 ‘국역 연방세고(聯芳世稿)’, ‘청계선생육부자전(靑溪先生六父子傳)’, ‘내앞(川前) 500년’을 최근 펴냈다.
‘국역 연방세고’는 청계선생과 그 다섯 자제의 문집을 국역한 것이고, ‘청계선생육부자전’은 이들 부자의 전기와 함께 유물과 고택 등의 화보를 묶은 책이다. 특히 ‘내앞 500년’은 문중의 형성에서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집안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접근한 논문집으로 향촌사 연구에 중요한 성과다.
이 문중에서는 16세기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을 비롯해 많은 선비와 고위관리가 나왔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구한말 등의 국가위기 때는 의병과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대거 배출됐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김대락(金大洛), 김동삼(金東三) 등이 가족을 이끌고 간도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보수 유림의 집안이 국가의 위기가 닥치자 모든 기반을 포기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헌신한 사례를 보여 준 것이다. 문중에서는 또한 선조들이 세웠던 협동학교의 재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협동학교는 일본의 침탈이 본격화되던 1907년 보수 유림의 고장인 안동에 세워졌던 개화학교다.
김도현(金道鉉·전 문체부차관) 협동학교 대책위원장은 “이 일련의 작업들은 집안에서는 조상을 높이고 후손을 경계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전통적 가정이 해체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 한 가문의 가풍을 통해 사회의 본을 삼으려 한다는 점에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김형찬 기자 kh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