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소음과 공해에 찌든 사람들이 항상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소음과 공해 없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
그러나 막상 소음과 공해가 없는 시골이나 산골에 내려가 산다고 행복해지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경제 기반이 없으니까요.
환경과 경제는 (분배와 성장만큼이나)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잘 먹고 잘 살려다보면 환경을 해치기 마련이고, 환경을 지키려면 가난해져 불행할 수 있으니까요.
이런 우리에게 특이할만한 본보기를 보여주는 나라가 있어 소개합니다.
바로 부탄(Bhutan)입니다.
부탄이란 국가를 특징짓는 가장 큰 특징은 '고립'입니다.
스위스 만한 크기의 국토를 가진 부탄은 히말라야의 산맥에 둘러 싸인 채 세계로부터 철저히 고립돼 있었습니다. 20세기 초까지 부탄의 존재를 아는 나라는 인도와 네팔, 그리고 인도를 지배했던 영국 정도였습니다.
이후 부탄이 인도와 영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해외에 문호를 개방한 것이 1960년대부터로, 이때까지 부탄엔 도로, 전기, 자동차, 전화, 우체국도 없었습니다.
부탄은 지구상에 마지막 남은 TV 시청 불가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부탄에서 TV 시청이 가능하게 된 것은 2000년 1월 1일이었습니다. (지금도 부탄의 전국 TV 소유 가정 비율은 30%에 불과합니다.)
현재 인구는 64만명이고, 이중 절반이 22세 미만일 정도로 전세계에서 가장 젊은 국가 중 하나입니다. (전국민 평균 나이는 놀랍게도 23.5세. 지금까지 평균 수명이 너무 짧았던데다, 최근 들어 유아 사망률이 급격히 줄어든 탓입니다.)
공장도, 공해도, 군대도 찾아 보기 힘든 (현존 군대 관련 종사자 수가 7천여명에 불과) "지구상 마지막 샹그릴라"라고 불리는 자연 그대로 보존된 국가이자,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지도에서 보다시피, 부탄에는 산 밖에 없다.
부탄은 세계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을 자랑하는 나라 중 하나로, 나라의 가로로 놓인 길 250km를 차로 횡단하는데 3일이나 걸립니다. 산 속에는 수도 없이 많은 주거지들이 고립돼 살아가고 있고요.
마을들도 이렇게 산과 강 사이에 고립돼 있음.
평지가 부족해 이렇게 절벽에 세워진 사원도...
국민들의 75%인 절대 다수가 농경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는데, 경작 가능한 땅은 전체 국토의 2.3%에 불과합니다. 산업을 일으킬 공장 부지를 마련하긴커녕 농사 지을 땅도 부족한 형편인 것이죠.
70년대까지 UN 자료에 따르면, 부탄은 세계 최고 빈곤, 문맹, 유아 사망률 국가이기도 했습니다.
아시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 부탄
그러나, 부탄은 지난번 소개한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http://kr.blog.yahoo.com/eg_blog/2981) 8위를 차지한 '행복의 나라'입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부탄은, 이런 최악의 조건에서도, 아시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되었을까요?
원인은 60년대부터 시작된 국가 발전 계획에 있습니다.
당시 부탄의 3대 국왕이었던 도르지 왕추크는 문호를 개방하고 국가의 '현대화'에 전력을 쏟습니다. 도로를 건설하고, 학교를 짓고, 보건소를 운영했습니다. UN 회원국 가입을 추진함으로써 국제 사회에서 인정받는 '국가'로 발돋움 했습니다.
오늘날 부탄을 있게 한 선각자, 도르지 왕추크 국왕
그리고 결정적으로, 왕추크 왕은 당시엔 개념조차 희미했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했습니다. 즉, 자연을 파괴하고 소모시켜서 국가 발전을 꾀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의 자연 환경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보호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겠다는 계획이었죠.
그래서 왕추크 왕은 국민총생산(GDP: Gross Domestic Product) 개념이 아닌, "국민총행복(GNH: Gross National Happiness)"라는 개념을 창설합니다. 자신의 나라는 생산이 목적이 아닌 행복이 목적인 나라가 되겠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자국에 묻힌 수많은 천연자원은 물론 특별히 관광자원도 적극적으로 개발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부탄은 전국토의 3/4가 숲으로 뒤덮여 있으며, 25% 이상이 국립 공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는 현존하는 전세계 국가 중 가장 높은 비율입니다.
가장 적극적으로 개발된 분야가 수력 자원으로, 수력 전력의 대부분을 인도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이외에 소량의 카드뮴과 목재, 그리고 수공예품을 수출해서 근대화에 필요한 돈을 벌고 있습니다.
국왕은 자국민이 외국의 자본주의에 물들지 않도록 민족 문화의 보호와 증진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자국에 너무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들면 (환경은 물론) 문화와 전통이 파괴된다는 믿음으로 관광객 수마저 제한했습니다. 그 결과, 현재 부탄에 들어간 관광객은 하루 체류 비용 240달러를 내야 합니다. 부탄에 입국한 관광객은 길바닥에서 자도 매일 25만원 이상을 부탄 정부에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죠.
그러함에도 부탄엔 관광객의 수가 꾸준히 증가해 왔고, 현재도 계속 증가하며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우직하게 자연환경과 전통문화를 보존한 결과겠죠.
도르지 왕추크 국왕의 뒤를 이은 지그메 싱예 왕추크 국왕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했습니다.
부탄의 4대 국왕, 지그메 싱예 왕추크
80년대에 교육 혁명을 통해 80%였던 문맹률을 40%로 낮추었고, 보건소의 확대로 평균 수명은 43세이던 것을 66세로 끌어 올렸습니다. 유아 사망률은 16%에서 4%으로 격감시켰고요.
이처럼 부탄은 특이하게도 천연 자원의 개발도 없이, 특정 산업의 육성도 없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곤 이 많은 업적을 이룬 지그메 싱예 왕추크 국왕은 2006년 말,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부탄을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만들겠다고 선포합니다. 국왕이 혁명이나 전쟁, 외압없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물러난 것은 인류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라고 합니다.
지그메 싱예 국왕은 부탄을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만들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습니다. 2005년에 이미 국가의 헌법 초안을 만들었고, 독립된 의회를 구성하도록 했으며, 의회에 의해 새로운 대표가 선출될 때까지 자신의 아들이 국가 통치를 유지토록 했습니다.
부탄의 새 대표가 뽑히기까지 부탄을 다스리고 있는 지그메 케사르 남기알 왕자(左)와 그의 여동생 소남 공주(右)
부탄의 왕가는 가족간 대학살 참극을 빚은 인접국 네팔 왕가와 비교돼 더 큰 칭송을 받고 있다.
(그래서, 2008년 초에 부탄엔 의회가 개설되고 헌법이 비준돼 민주국가의 면모를 갖추게 됐습니다.)
부탄의 민주주의, 그리고 위기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국가의 변혁에 부정적입니다. 뿌리 깊은 왕실 숭배 사상에, "목수가 많으면 문을 세울 수 없다"는 신조가 워낙 강해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문맹률이 많이 떨어졌다지만 여전히 부탄의 국민들은 무지합니다. 대학 졸업자가 전체 인구의 2%에 불과합니다. 법과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 무지한 국민들은 민주주의의 가장 큰 적입니다.
그리고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산 깊은 곳에 흩어져 살던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로 인해 실업과 범죄가 급증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시 실업률 30%) 과거 자연 속에 묻혀 살던 행복한 부탄인들로서는 상상 하지 못할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더 큰 문제는 10만명에 달하는 네팔 난민들입니다. 인접국 네팔로부터 수많은 난민들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는데, 부탄을 이들을 수용할 여력도, 제압할 공권력도 없는 상황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외교력도 매우 부족한 상황이고요.
부탄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한없이 약한 나라입니다. 부탄과 수교 중인 국가는 21개국에 불과하며, 이중 인도가 유일한 우방입니다. 인도는 부탄의 군사 안보를 대신해 주고 있어 사실상 부탄은 군사 외교적으로 자립 상태가 아닙니다. 게다가 경제도 총 수출량의 80%를 인도가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인도에 지극히 종속적입니다.
지금까지 히말라야 불교 왕국들의 역사가 대부분 비극으로 끝났다는 사실도 비관적입니다. 라다크는 1842년 해체돼 인도에 흡수됐으며, 티베트는 1950년 중국에 강제 합병됐으며, 시킴 왕국은 네팔 이주민들에 의해 인도에 합병되고 말았습니다.
부탄의 전형적인 마을 풍경입니다. 아이들이 손을 잡고 하교를 하고 있는 듯 합니다.
부탄의 행복 비결은 자연과 전통 생활 방식의 보존이었습니다.
민주주의가 도입된 뒤에도 과연 부탄의 행복은 보존될 수 있을까요?
참고 자료:
http://en.wikipedia.org/wiki/Bhutan
https://www.cia.gov/library/publications/the-world-factbook/geos/bt.html
http://www.law.harvard.edu/news/bulletin/2007/summer/feature_4.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