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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과 이신칭의
잘못된 구원관을 가진 설교자가 근본적인 변화를 막고 있다. 믿음과 행함, 곧 믿음과 순종을 구분하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입술의 신앙고백으로 얻는 구원만을 구원으로 인정하고 순종은 별개로 취급한다.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 복음에 대한 순종마저 제외하는 것이 아님에도 마치 순종하는 행위를 율법적 행위로 취급해 버린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때는 입술에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까지 은혜를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진실한 믿음과 함께 진실한 순종, 진실한 회개로 고백되고 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일체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요 은혜이다. 인간 스스로가 율법을 지켜 자신의 만족을 도모하는 것과 하나님이 복음으로 명하신 것을 순종하는 것은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세상에 이름난 어떤 목사도 십자가의 보혈을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강조하면서 말씀에 대한 순종은 상급과 관련될 뿐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해서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설교한다.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에 행함을 이에 덧붙이는 것은 율법주의라고 한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당연한데 순종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물론 행함이 구원의 조건은 절대로 될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과 우리가 이루어 가야 할 구원과의 관계를 생각지 못하고 복음을 통합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행함이 있는 믿음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믿는다고 하면서 행위로 부인하는 자는 구원이 없다. 거짓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시는 짐승의 피로 제사드릴 필요가 없게 만드셨지만 구약의 율법의 일점일획도 폐하지 아니하시고 지극히 작은 것을 다 이루시고자 하셨다. 그래서 지극히 작은 것을 소홀히 하지 말고 행하고 가르치라고 하셨다.
믿음을 마음과 입술의 고백에만 한정하고 행함과 믿음이 분리된 것처럼 생각하고 행위를 율법적인 것으로 몰아세우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고 신약성경 전체의 내용에 반하는 것이다. 행함을 율법적인 것으로만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령하신 바를 행하는 순종하는 것이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토대임을 간과한 것이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약 2:18-20)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구원관은 현대 교인들의 편안한 신앙생활을 부추기면서 사람들을 구원받게 하려는 논리이지만 실상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비진리이다. 겉과 속이 다른 교인들이 생겨나는 이유도, 그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출입해도 변화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과 순종을 분리하여 생각하고 적용하는 것은 사람의 지혜에서 난 것이다. 일회적인 믿음의 고백으로 손쉽게 얻는 구원을 하나님의 은혜라고만 가르치는 교회는 십중팔구는 육신적인 교회, 사람에게 속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하나님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순종의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으면 베드로처럼 마귀의 공격 한 방으로도 넘어지게 되고 마귀의 도구로 쓰임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행동한다(마 16:23).
은사와 가시적인 능력이 여러 방면에서 나타나도 사람을 거룩하게 단장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게 된다. 결국엔 외모만을 강조하고 외모를 자랑하면서 외형적으로 사업하는 교회가 된다. 그런 설교자는 성도로 하여금 외형적인 일에 얽매이게 하고 눈앞에 보이는 지도자에게 절대 충성을 강요하며 성경이 말하는 순종을 막고 사람들을 멸망으로 데려간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마음과 말로 고백하는 것 외에 말씀에 대한 순종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면 그 구원은 성경이 말하는 온전한 구원의 개념에서 벗어난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을 교훈하고 책망하고 바르게 하고 의롭게 해서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준다. 계속적인 믿음과 지혜를 부여하여 궁극적인 구원에 이르게 한다.
성경이 강조하는 믿음의 개념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회성의 믿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주님을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한 몸이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갈 2:16) 라는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9, 1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면서 "다 이루었다"(요 19:30)고 하신 것은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명, 곧 하나님의 뜻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의 제사는 죄에 대한 단번의 영원한 제사로서 다시는 짐승의 희생 제사가 필요 없게 하였다. 예수님은 율법의 불완전한 것을 완전케 하시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영원한 길이 되셨다. 자신을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영구한 효력을 주는 것으로 완성하셨다(히 10:14).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예수님 자신의 구속사역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은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즉각 완성되기도 하지만(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한편 강도가 그 고통 중에서 주님을 영접하므로 즉각 낙원에 들어간 것처럼), 대체로 점진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바로 영접하고 죽는다면 몰라도, 그것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회개시키시고 데려가면 몰라도 구원의 약속(소망) 가운데서 점진적으로 완성되어간다. 영구한 말씀과 성령을 통한 역사로 말미암아 구원의 씨앗이 움트고 자라서 열매를 맺는 일련의 과정과 순서가 있다(막 4:26-32).
예수님이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과거나 현재 미래의 죄까지 값을 다 지불했다고 선포되었다. 하지만 그 선물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에게만 주어지고 또 실제적인 죄 씻음과 더불어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은 늘 예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에 의해서 주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큰 틀 안에는 칭의와 함께 성화와 영화도 함께 한다. 우리가 구원이라 할 때 구원과 성화를 분리하는 것은 잘못이다. 구원을 믿음의 시초에 주어지는 칭의에 국한 하는 것은 더 큰 잘못이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부르심으로 시작해서 칭의와 함께 시작되는 성화와, 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영화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다.
칭의도 믿음의 시작과 함께 이루어지는 단 한 번의 선포적인 의미로 끝나지 않는다. 그때도 예수님과 말씀 순종을 보시고 의롭다 하시는 것이고 날마다의 실질적인 칭의(성령의 임재)도 예수님과 그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없는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 속에서 주어진다. 처음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사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예수님의 의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실체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은혜의 실체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이다.
현재에 예수님과 관계하여 살고 있다면 과거의 구원이 현재완료 상태로 유지된다고 볼 수 있지만 과거에 의롭다 함을 받아도 현재 예수님을 떠나 습관적인 죄악가운데 산다면, 그는 구원에서 떠나 사망에 속한 자가 된다(겔 3:18-20; 요일 3:14). 그는 지금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 아래 있고 회개치 않음으로 계속 진노를 쌓아가는 것이다. 죄성이 우리 안에 남아 있는 한 우리가 죄를 짓는바 실제적인 사죄의 은총은 주님 안에서 성령의 깨우치심과 함께 삶의 변화를 수반하는 진실한 회개(믿음)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늘 깨어 근신하며 회개함으로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할 것을 강조한다.
구원의 필수적인 한 요소인 성화도 다른 요소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 계속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힘쓴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눈물 흘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집중해야 할 노력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이 노력이란 것은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성령은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 자에게 자연스럽게 임하신다. 우리가 자신을 포기하면서 주의 영의 인도를 받아 살 때 우리는 율법에 매이지 않는 생명과 자유함 속에서 온전한 믿음의 진보를 드러내게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
주님을 모시고 성령으로 행하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은혜에 속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여 버리는 것 자체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믿음과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도움 없이 스스로 지키려고 하니까 말씀이 무거운 짐이 되고 수고가 되어서 포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하려는 것 자체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인 것을 알아야 한다. 순종의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은 순종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은혜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지시대로 할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자기 일한 것을 내세우므로 칭찬받으려는 생각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셨고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했는데 무엇을 자랑하며 내세울 수 있겠는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할 일을 했는데 우리에게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예수께 존귀와 감사와 찬양을 세세무궁토록 돌려드리는 것이다. 자기가 받은 상급인 면류관을 던지면서 말이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리는 것도 늘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은혜 가운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말씀을 행함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언제나 자기의 이름을 높이려 하고 누군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행하는 것에도 문자적으로 행하는 것이 있고 그 속뜻, 정신까지 이루는 행함이 있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했다. 왜 무거운 짐이 되지 않는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이다.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문자적인 것만을 준행하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더 세밀한 성령의 법(힘, 능력)에 따라 그 정신을 이루게 된다. 성령의 보증이 있고 성령의 인도가 있기에 힘들다고 생각되지도 않고 기쁨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게 되는 차이가 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문자적인 준행에서 머물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의 사람은 성령으로 행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마음의 은밀한 것까지를 행한다. 기도를 해도 구제를 해도 금식을 해도 은밀하게 한다.
믿음의 사람은 늘 하나님을 의식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죄들, 칭찬받고자 하고 대접받고자 하고 섬김 받고자 하는 죄들을 순간순간 처리한다. 그래서 속과 겉이 깨끗하게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미움, 불평, 원망, 분노 등을 말씀에 비추며 늘 회개하므로 마음을 관리 하고 그 입과 손을 깨끗이 하기에 그 중심을 하나님이 받으시고 후원해 주신다. 이런 삶이 믿음의 삶이요 내 몸 성전을 세우고 건축해가는 삶이다.
외식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잘 행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무시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의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자기 한 일을 나팔 불면서 사람 앞에서 행하는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사는 사람,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은 늘 자기의 들보를 보며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 일을 하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처럼 자신을 숨긴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면서 지극히 작은 것,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행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문자를 뛰어넘어 지킨다.
문자적인 행함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을 따라갈 수 없다. 이들은 겉으로는 흠 없이 살았다. 예수님이니까 그들의 속을 보고 회칠한 무덤이니 하시면서 신랄하게 책망하셨지만 우리는 문자적으로도 말씀을 행하지 못하는 만큼 그들을 비난할 수준이 못된다. 우리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보다 나으려면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표면적인 준수를 뛰어넘어서 그 말씀의 본뜻을 헤아리고 마음으로 지키려하게 된다. 자신을 버리고 성령의 생각과 주장을 따르기에 율법에 매이지 않고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면서 율법을 이루게 된다. 그래도 늘 말씀에 다가가지 못하는 부족과 연약함을 절감하고 긍휼히 여겨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애통하며 자복한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아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죄를 날마다 회개하고 주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지극히 작은 죄라도 소홀히 여기고 회개하지 않으면 작은 구멍이 큰 방축을 무너뜨리는 것처럼 된다.
하나님이 명하시는 작은 것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내 속에 있는 작은 죄들을 처리해 갈 때 교묘한 사단의 술수와 간계를 파하고 믿음에서 승리할 수 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말씀 중 하나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어쩔 수 없이 범죄할 때는 하나님께 긍휼을 호소할 수밖에 없지만 노력도 하지 않고 고의로 죄를 짓는 사람이 하나님께 습관적으로 긍휼을 호소한다면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 주시겠는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습관적으로 긍휼히 여겨달라는 기도에는 하나님이 귀를 막으시고(가증하기에) 그같이 행동하는 자에게 화를 내리신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말 1장).
우리가 열 가지 계명 중 한 가지라도 어기면 율법 전체를 다 어기는 자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노출되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그런데 말씀을 지키도록 성령을 주셨건만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기정사실화 해 버리면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성령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성령은 하게 하시고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그것이 믿음의 삶이다. 구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붙드시고 이루어 가신다(시 37:5).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일에 순종만한다면, 죄에 대해 자유하면서 공의가 정오의 빛처럼 나타내게 되어 있다.
성령님은 소망을 가지게 하신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소망, 죄에 대한 구원의 소망을 결코 버리지 않게 하신다(벧전 5:10; 벧후 3:14, 15).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 따라 말씀대로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 지키며 살려는 사람의 노력을 격려하고 사모할지언정,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러한 사람의 노력을 무시하고 훼방한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성령을 훼방하는 것과 같다. 자기는 드러나는 죄를 짓고서 긍휼을 받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의 숨은 선한 노력에 대해서 긍휼을 베풀기 보다는 비판하고 정죄한다면 얼마나 모순이 되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 긍휼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내가 할 수 없다고 성경의 말씀을 끌어내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뜻을 자기에게 끌어 맞추려 해서는 안 된다. 내가 못한다고 하나님도 못할 분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의롭지 못하다고 하나님도 의롭지 못한 분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내가 예수님의 성품과 사역을 포기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부인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모신 것은 형식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거룩한 삶을 결코 포기하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일관된 중심으로 인내하며 낙심하지 말고 거룩한 삶에 날마다 도전할 것을 격려하고 권면한다. 시편 37편에서도 인내하며 선을 행하라고 말씀한다.
거룩한 행실을 약화시키는 어떠한 교훈에도 속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새 계명)을 멸시하는 자들의 교훈에 속지 말라. 예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지 않고 순종치 않는 사람에게 미혹되지 말라.
말씀에 대한 순종과 적용을 강조하지 않는 교훈은 헛된 가르침에 지나지 않는다. 사변적인 가르침,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궁극적인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운다. 지식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말씀이라도 순종함으로 양식을 삼아야 구원에 이르게 된다. 가르치는 자가 지식을 드러내는 것은 교만에서 나오는 것으로 영혼들에게 교만과 함께 외식을 주입하는 결과를 낳는다. 기도와 함께 말씀 순종에서 생겨나는 삶을 강조하고 가르칠 때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사람들을 온전하게 세우게 된다.
말씀 순종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와 연결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연결되고 구원과 직결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말씀 순종은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풍성케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마음과 행실과 입술을 관리하는 것은 곧 자기 생명을 간직하고 지키는 것이다. 예수님과 그 말씀이 생명임과 동시에 말씀 순종은 생명을 공급받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순종이 끊어지면 생명도 고갈된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을 공급받아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된다. 말씀 순종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신다. 성령님은 말씀 순종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말씀으로 인도하고 말씀을 통해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만든다.
우리는 다시금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지만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마 5:19-20)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이 구원사역을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 이루셨고 그 은혜와 축복을 믿는 자들이 받게 되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다. 믿음은 예수님을 나의 주이시며 나의 구세주이심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다.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을 받는다.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행위와 관계없다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신앙고백은 말과 행동의 일치에 있다. 참 믿음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최초의 시인은 말로서 이루어졌다 해도 그 고백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진정한 믿음과 진정한 구원을 증거 하는 것이다. 디도서 1장 16절 말씀에 보면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고 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기 훨씬 전에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진실이었는가 아니면 그의 부인한 행위가 진실이었는가 하는 의혹을 가지게 될 수 있다. 그러나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고백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참된 회개가 나올 수 없다. 그의 신앙고백이 진실한 것이었기에 그의 부인했던 행동이 잘못된 것임을 심히 통곡하며 뉘우쳤던 것이다.
우리는 참된 신앙을 생활가운데 진실하게 고백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신앙고백에 상응하는 생활과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신앙고백에 상관없이 제 멋대로 행동을 취한다면 자신이 했던 신앙고백은 과장된 것이요, 거짓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렸던 한편 행악자의 경우, 주님께 자신의 미래를 의탁한 고백은 단순한 말만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통(현실의 삶)속에서 이루어진 진실한 신앙고백이었기에 주님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강도와 같이 예수님을 욕했던 그가 자신들은 행한 일에 보응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이 십자가에 달렸다고 하면서 자신을 예수님께 의탁한 것은 진실로 예수님을 천국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내세 소망을 가졌으며 그를 의지한 증거가 된다(눅 23:39-43).
참된 구원은 순종의 믿음과 진실한 회개에서 이루어진다. 성경은 진정한 회개에 기초한 믿음을 항상 강조한다. 믿음의 두 축은 회개와 순종이다.
형식적인 신앙고백이나 인간적인 방법이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단순히 영접기도를 하고 새 신자 프로그램을 이수한다고 영생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출석 경력과 직분이 영생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다. 봉사활동이 생명을 주는 것도 아니다. 매일 교회를 출석한다고 천국 문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님을 자신의 문제나 처리해 주는 분으로 모시는 사람은 문제가 있을 때만 찾게 될 것이다. 예수님을 병 고치는 분으로만 알면 육체에 병이 들었을 때만 예수님을 모시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을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분으로만 알면 양식이나 물질이 떨어져서 곤란을 당할 때만 찾고 모시려고 할 것이다. 평안할 때는 모른 체 하다가 어려움만 닥치면 예수님을 찾는 신앙은 이기적이며 육신적 신앙이다. 또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명예와 인기, 권력을 교회에서 얻고자 열심을 내어 직분을 얻고 조직에 충성하며 특정 사람에게 줄을 서서 충성하는 이들은 육신에 속해 있다. 예수님을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이용하려는 자들은 진정 예수님이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놓치기 마련이다. 그런 사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도 믿지도 못한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구제주이면서 우주의 통치자와 주권자로 알고 내 인생의 심판자로 안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를 위해서 수치와 고난도 기꺼이 인내하게 될 것이다. 내 육신의 필요를 위해서 그를 좇기보다 그를 사랑하기에 그가 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모두 다 내 몸과 영혼의 유익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난 중에도 감사하며 기쁨으로 따르게 될 것이다.
교회의 가르침이나 배움에서 난 것이 아닌 베드로의 신앙고백처럼 하나님이 친히 간섭하여 그 입으로 말하도록 하시는 은혜도 있다(눅 5:1-11, 요 6:66-69, 마 16:16). 하나님이 간섭하셔서 하신 일은 하나님의 간섭에 순종없이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 강권적인 인도하심에 반응하여 스스로의 의지를 발동시키는 일은 항상 중요하고 필요하다. 사람이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고 자기주장과 열심을 앞세우면 마귀가 역사하고 마귀가 사로잡아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마귀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마귀의 사람으로 살아가면 구원은 없고 멸망이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붙들어 이끌지 아니하시면 믿는 자라도 스스로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성령님의 인도와 도움을 항상 받아야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세워지고 구원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구원은 예수님과 성령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순종하게 하는 이도 예수님이기에 선택하시고 베푸시는 은혜에 그저 감사하고 모든 영광을 예수님께 돌려드리게 되는 것이다.
성도에게 있어 예수님을 모시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예수님이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요 영생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구원이요 영생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다. 자기를 포기하고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고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는 구원의 확신은 자기도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을 모시는 일에 집중하고 강조할 때 자연히 강조되는 것이 자기부인이다. 자기부인을 통해서만 내 안에 주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모시고자 자기를 부인하는 자만이 성령의 간섭 안에서 진정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요 그것이 궁극적인 구원(천국)에 이르게 한다.
일시적이고 단회성에 머무는 구원의 확신의 강조는 형식적인 신자를 양산하고 있다. 행함과 분리된 믿음에서는 구원이 없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그 자체가 구원의 증표인데, 예수님을 강조하지 않고 구원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지식적이요 인간 노력의 산물이요 가르침이다. 그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범한 우를 같이 범하는 것이다.
한 쪽의 진리를 강조하고자 다른 진리를 배제해 버리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것도 가르치고 저것도 가르치되 통합하여 한 가지로 가르쳐야 온전한 구원, 진정한 구원을 말하게 된다. 성경은 즉각적인 구원도 말하고 궁극적인 구원도 말한다. 그렇다고 그것이 서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된 것이요 하나인 것이다. 믿음의 초보가 있다면 장성한 믿음의 분량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의 초기와 믿음의 장성함은 결국 서로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로 보아야 한다. 그것을 따로 분리해서는 안 되고 신앙상태에 따라 강조의 유연성을 보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고 믿음의 초보자를 언제나 초보자로 둘 수 없다. 처음부터 말씀 그대로를 가르치면 성령이 역사하신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서 옛것도 새 것도 가르치면 되는 것이다. 도의 초보만 가르치면 초보에 머물게 되고 자생력이 없어 곧 퇴보하게 되겠지만, 장성한 믿음을 가르치면 성령의 인도 속에 자생력이 있어 흔들림이 없이 자라가게 된다.
예수님을 한 번만 모시고 그 다음부터 여전히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되어 있으면 그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구원과 성숙을 따로 분리하여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신행분리가 생겨난다. 구원은 성숙을 포함한다. 구원은 성화를 포함한다. 구원은 영화를 포함한다. 구원이라는 큰 틀 안에 그 모든 요소와 과정이 필수적인 것으로 자리 잡는다. 좁은 문은 좁은 길을 포함한 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구원사역(전도, 말씀사역)에 있어 인간이 주장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
언제부터인지 오늘날 교회는 사람이 주도하는 교회성장의 유혹 속에서 쉬운 구원의 공식을 만들어 내어 단기간 많은 신자들을 배출해 내었고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결과 현재 교회들의 상태는 세상교회가 되었다. 하나님께 속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교회, 세상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로 타락하게 된 것이다.
사람이 성경의 한 부분만을 떼어서 인간적인 쉬운 구원을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된다. 그런 형식적인 순서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게 되면 사람들이 믿음을 가졌다면서 오히려 더 타락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다. 오늘날 교회가 신자 수는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정화시키기 보다는 세상 문화에 오히려 점령당하고 성도의 삶이 형편없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구원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염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과 행위로 죄를 쌓아가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게 되었다. 믿고 난 다음에는 죄를 짓더라도 구원에 영향을 못 미친다는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이 중요하고도 급박하게 다루는 회개를 등한시하게 만들었다. 구원에 윤리적인 삶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원죄에서 생겨나는 자범죄를 회개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말씀순종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되고 만다. 그런 순종과 그런 회개라는 것은 형식에 불과할 뿐이다. 성경은 형식적인 관계, 외식에 대해서는 지옥에 갈 죄로 규정한다(마 23:15, 33).
실제적인 관계와 그에 근거하여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정결을 그처럼 강조한다. 성경에 나오는 회개는 처음 믿을 때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외치고 있다. 구원받았노라고 하면서 죄 가운데 거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회개할 것과 동시에 생명을 얻으라고 말씀한다. 언제나 생명을 얻는 회개를 하나님 백성에게 요청하는 것이다.
“너희가 도적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좇으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렘 7:9-10)
죄의 본성이 남아 있고 죄를 범하기에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강조는 결코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구원을 윤리적인 삶과 분리하지 않는다. 믿음과 행함을 분리하지 않는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기 때문에 영생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믿지 않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 둘째 사망에 참예한다고 했다(계 21:8). 바울은 성령의 전인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 고 했다. 예수님은 아름다운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을 말씀하셨다. 주여, 주여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아니하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7:21-23). 또 날마다 주님을 통해 발 씻지 않으면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무시하고서는 자기 영혼이 진리의 지식을 가질 수도, 진정한 구원(천국)에 이를 수가 없다.
주님의 구원은 죄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는 일이다(마 1:21). 한 번만 아니라 날마다 입니다. 시편 기자는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시 68:19)고 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를 말씀과 성령으로 거룩한 백성, 정결한 신부로 단장시키고 계신다. 구원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오늘의 일이요 순간순간의 일이 되어야 한다. 죄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함을 받으려면 늘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믿음의 길로 달려가야 한다. ‘주기도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회개를 가르쳐 주셨다.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함과 함께 회개를 통해 주어지는 사죄의 은총을 간구하라고 하셨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 없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인자하심을 역이용하여 죄를 범하는 것을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하는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날에 임할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을 볼 때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롬 2:4-5).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 말씀에 기초하지 않는 삶을 사는 사람을 주님은 모른다고 하실 것이고 그 사람은 슬피 울며 이를가는 심판에 이르게 될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눅 13:24-27)
스스로 참 신자라고하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 하면서 주님과 관계없이 사는 경우, 당장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리지는 아니했지만 성경은 그 사람의 상태가 사망 길을 가는 것으로 경고한다. 그래서 심판의 경고를 보내는 것이다. 경고에도 불구하고 끝내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을 말씀한다.
예수님은 속으로 다른 사람에 대해 노하고 욕하고 미워하는 것이 살인이라며 지옥 불에 떨어지리라고 하셨다(마 5:21,22). 이 말씀은 지금 죄를 범했다고 바로 심판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하시리라는 경고이다. 하나님은 인자하심과 오래 참으심으로 지켜보시고 여러 부분으로 믿음을 격려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고 악을 쌓다가 죽어버린다면 그 영혼은 어디로 가겠는가? 하나님이 의식불명의 상태에서도 간섭하신다면 몰라도 그 영혼이 가는 곳은 지옥일 것이다.
한때 은혜 받아 믿음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을 떠나 여러 번의 경고에도 회개치 않고 죄를 쌓아간 자들에게는 영원한 형벌로 다스렸다는 사실이다.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이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현저히 욕을 보임이라”(히 6: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 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히 10:26-29)
단순한 징계가 아니라 멸망에 이른 사람들을 구약에서와 신약에서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구약에서는 고라와 다단, 아비람(민 16:33), 아간, 사울,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 등이다. 여로보암의 경우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셔서 이스라엘을 찢어 그에게 주시면서 말씀에 순종하면 함께 있어 견고한 집을 세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는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함으로 그 약속을 빼앗기고 멸망당했다(왕상 11:38, 13:33, 34).
신약에서는 사도의 일원으로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지만 예수님을 은 30에 판 가룟 유다, 성령을 속이고 거짓말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예루살렘 교회의 일곱 집사중의 하나로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버가모 교회를 도덕적 자유주의에 빠져들게 한 니골라와 그의 무리, 바울과 초기 복음사역을 함께 했지만 현실의 안락과 쾌락을 더 사랑하여 사도와 믿음을 배반한 데마, 믿음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떠나 바울을 훼방하여 내쳐진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등이 있다. 처음 믿음을 저버리고 정욕을 좇아 음행이나 돈을 사랑하는 자들은 심판에 이르게 된다(딤전 5:12, 6:9, 10). 불의로 사람을 속이고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는다(살후 2:12). 죄를 알고도 회개치 아니하면 사역과 함께 약속된 구원을 빼앗기고 심판에 이르게 되리라는 사실이다(계 2, 3장).
언약 관계는 어느 일방이 깨뜨리면 무효화된다.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 분이시니 인간이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믿음으로 맺어진 언약관계이지만 그 약속을 인간 편에서 저버리고 깨뜨리면 언약관계가 깨어진다. 단 하나의 소망은 하나님이 택한 자는 끝까지 붙드시리라는 신실성에 의존할 뿐이다. 인간인 내가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고의적으로 거스르면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뻔뻔스러움의 극치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죄를 깨닫거나 진실한 회개를 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의 신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이 화인 맞았다는 증거가 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있음에도 성령이 임함에도 회개의 기회를 저버리고 자기의 죄를 합리화하며 라멕처럼 보호와 안전을 주장하는 것은 교리를 믿는 것이지 주님과의 바른 관계에 놓인 사람이 취할 태도는 아닌 것이다. 말씀에 대한 지식은 가졌으나 순종하는 믿음의 결단을 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행동을 취하므로 끝내 성령을 훼방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것이다.
거듭났고 신령한 은혜를 맛본 자들도 버림받은 사실을 히브리서에서 기록하고 있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마친 자들이 있다. 성경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지만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했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자들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다(요일 5:16).
혈육의 부자관계는 세상 법에 매여서 법적인 관계가 유지되고 아버지의 사망 후 재산을 상속받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모든 법에 초월하여 존재하시고 법을 만드신 분이시다. 세상의 법도 지키지 않으면 감옥에 가두거나 심한 경우는 사형으로 다스리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법을 어긴 자에게 징계도 하지만 심할 경우 영벌로 다스리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총회에서 제해 버리신다 그 말이다.
교회의 법에도 출교란 것이 있다. 성경에 근거한 것인데 이것은 최고의 벌로 신자에서 제외시키는 벌이다. ‘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을 의미한다(교회의 권한은 하나님께 소속된 것으로 교회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교회가 풀면 하늘에서도 푸심, 곧 용서하여 주심). 눈에 보이는 교회만 생각하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교회를 생각해야 한다.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와 양과 염소의 비유가 그것을 말해 준다.
어떤 설교자들처럼 믿다가 타락한 자들, 멸망당한 자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목사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 편에 서서 사람들을 인도하기는커녕 사람 편에 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평안을 외치는 자들이다. 죄에 빠져 죽어가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고 스스로도 죄악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않고 자기와 함께 양들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자들이다. 이런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교파주의 가르침, 취사선택한 교리적인 가르침으로 온전한 말씀을 아우르지 못하여 생명을 주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신칭의라는 교리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구원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라는데 있다.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는 분은 예수님이므로 무엇보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교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임의로 더하거나 임의로 뺄 것을 빼고 가르치는 자는 멸망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계 22:18-19).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예수님의 제자이며(요 10:4, 요 15:4) 하나님의 아들임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마 5:45). 예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멀리하도록 하고 교리적인 가르침만 좇아 구원을 받게 하려는 설교자는 자신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따르는 이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거짓 선지자라고 할 수 있다(마 23:13-15).
우리는 성경의 전체를 보고 전체에서 구원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은 구원을 즉각적인 것으로도 말하지만 또한 지속적이고 미래적인 것으로도 말씀한다. 기본적으로 구원은 누구나 예수님과의 관계에 기초한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다. 진실한 마음과 입술의 고백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믿음의 유지와 자람은 한 번 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마음과 입에서 나온 일시적인 믿음으로 끝나고 만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지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을 포함하여 의지적인 순종으로 나아가야 진정한 믿음, 자신을 구원할 믿음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단 한 번의 믿음, 내가 예수를 처음 믿었을 때 가졌던 순간적인 믿음이 일평생을 죄에서 구원할 만큼의 효력을 지닌 것으로, 착각하고 아무렇게나 살지 말라. 진정한 믿음은 지속적으로 자라난다. 성장하고 열매를 맺는다. 수시로 변하며 때로는 없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강해졌다가 또 약해지기도 하는 정도가 심한 것도 믿음이 없지는 않으나 성령의 열매(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진정한 믿음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믿음의 형식만을 갖춘 사람인지 아니면 진정한 내면으로부터의 성령의 생명력을 가진 사람인지 스스로 믿음을 확증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 7:19-20)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고후 13:5)
구원의 약속과 실제사이에서 하나님은 날마다 은혜를 간직하며 믿음으로 살 것을 요구하신다. 오늘의 족한 은혜 가운데서 날마다 예수님을 모시고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님을 모시고 그 말씀을 지켜 행하며 인내하는 믿음의 사람이 그 영혼을 구원할 것이라고 곳곳에 강조하여 말한다.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다.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고 힘쓰고 애쓰는 사람도 많지만 다 들어가지 못한다(눅 13:24).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고 은혜 베푸는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그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을 가진 자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진실로 죄를 회개하므로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예수 안에서 사는 자인 것이다.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은 아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자이다. 실제적인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중요하고 이것이 늘 강조되어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증거가 무엇인가? 말씀을 실행하려고 자신을 부인하고 말씀의 고난을 담당하는 자가 예수님을 모신자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순종하여 살려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법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살려고 하는데 왜 성령을 부어주시지 않겠는가? 왜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겠는가? 막연히 성령을 간구하지 말고 말씀대로 하루하루 행하며 살도록 성령을 간구하라. 죄를 회개하도록 성령을 간구하라. 이미 우리 중에 계신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라. 말씀 순종으로 이끄시는 진리의 성령을 모시라. 이미 역사적으로 오순절에 임한 성령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 성령을 모시고 살라. 성령의 작은 인도라도 거절치 않고 순종하다보면 어느새 성령님이 우리 삶을 주장하게 될 것이다.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단순하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의 통치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실제적인 삶에 관련될 때에는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구원의 길 곧 생명의 길을 가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인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인 것이다.
하지만 주님이 함께하기에 천국의 기쁨과 즐거움, 천국의 평안이 있다. 기도의 응답과 성령의 희한한 역사를 경험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베푸시는 사랑, 은혜와 능력에 대한 감사와 찬양이 있다. 주님을 모셨기에 내가 주님의 편이 되어서 기도하기에 하나님께 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온전히 예수님을 모시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영생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일 5:12)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나 깨나, 살아도 죽어도,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영생이신 예수 안에 거하며 성령의 인도를 좇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장차 주어질 영광과 현재 의 고난 사이에서 성도의 믿음을 격려 한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영광이 이르도록 지켜주신다는 말씀으로 들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롬 8:17).
그리스도 안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허무한데 굴복당하지 않는다.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자유함을 받기까지 탄식하며 구원의 소망가운데 살아간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연약함을 탄식과 간구로 도우심으로 모든 것이 유익이 되고 어떤 외부적인 고난도 넉넉히 이기게 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가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보호하여 영광에 이르게 하여 주신다(롬 8:30).
그러나 본문을 유의하여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육신의 생각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한다는 사실이다. 성령의 법에 굴복하여 살아간다. 그리고 주와 그의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롬 8:17, 18, 36).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자 한다(롬 8:29). 성령과 함께 죄에서 구속함을 받기 위하여 속으로 탄식하며, 구원의 소망가운데 인내한다(롬 8:25).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는다(롬 8:36).
하나님의 자녀는 분명히 이런 증거들을 가진다. 그런데 주와 그의 말씀을 인하여 받는 고난도 없는 자들, 죄의 종살이하며 성령을 거스르고 자신의 욕심을 좇아 살며 자기의 배만 위하며 땅에 것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본문의 말씀을 인용하여 위로와 보장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는 자신의 마음과 몸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데 하나님을 위해 아무 것도 드리지 않고 스스로의 정욕에 이끌려 십자가의 원수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주실 구원의 위로와 보장은 성경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도리어 진노가 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 6)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한다. 전적인 헌신을 강조하고 열망한다. 하나님의 보호는 우리의 실족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말씀 때문에 당하는 고난에서는 자기 백성을 지켜 보호해 주시고 사명을 감당케 해 주신다(시 66:12; 사 43:1-3). 전적으로 예수님께 자신을 드리는 자는 빛 안에 거하므로 실족치 않게 된다. 주님의 보호가 늘 함께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성령으로 구원을 보장해 주신다. 성령으로 인 맞은 자는 구원을 받는다(겔 9:4-6; 계 7:3, 4).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 14:23)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대하 16:9)
하나님이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보호하여 주시는가? 모든 피조물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 주신다.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9)
하나님은 신실한 그의 백성들을 외부적인 환난에서 건져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 신실한 성도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 소망을 그 어떤 것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주를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 3:12)
육신적으로 영적으로 고난을 당하지만 그 영혼의 생명은 빼앗아갈 수 없다. 우리에게 주신 영생을 어떤 물리적인 세력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영생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29)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우리의 영생을 빼앗을 자가 없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던 어떤 물리적인 세력도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지만 우리 스스로가 영생을 빼앗길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빼앗기게 된다. 스스로 실족하여 넘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자를 누가 변호하고 중보 하겠는가?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마 12:32)
죄를 범하여 성령을 근심케 하고도 회개치 않고 성령을 소멸하고(살전 5:19), 성령을 모독하고 훼방한다면(막 3:29) 영원한 죄에 처해져 심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멸망당하는 것은 외부적인 세력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우리를 능히 지옥에 던져 넣는 주권자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눅 12:4, 5). 주권자인 하나님을 범죄자로 만드는 자, 하나님께 죄를 전가하는 자, 하나님을 불의한 자로 만드는 자, 하나님을 속이는 자가 갈 곳은 지옥이다.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찌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 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겔 18:20)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판결하시려니와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그 아비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었더라”(삼상 2:25)
“내가 범죄하면 주께서 나를 죄인으로 인정하시고 내 죄악을 사유치 아니하시나이다”(욥 10:14)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가 하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요일 5:16, 17)
바울은 하나님을 고의로 배척하고 하나님을 무시한 채 범하는 모든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사형으로 벌하신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롬 1:32)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는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하지 않는다. 매일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 은혜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믿음으로 살라. 여러 가지 시험이 오고 근심이 되고 고난이 와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능력으로 보호해 주시기 때문에(벧전 1:5)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9)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이자 하나님의 긍휼의 사역의 결과이다. 죄인인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다 행할 수 없는 죄인이자 형편없는 구제불능의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음을 고백하며 통회자복하게 되는데 하나님은 이런 자를 의롭다고 칭하신다(눅 18:13-14).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을 믿음으로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회개가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 부르며 예수님을 붙들고 긍휼을 바랄 때 살아계신 전능자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신다. 이런 믿음은 구원은 하나님께 있다는 절대 주권과 긍휼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아무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용서를 받는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해 주시는 일이다(롬 4:5-9).
말로는 믿음을 말하고 이신칭의를 말하나 죽은 자를 기리고 공로주의에, 교파주의에 빠져 자기 사람들만 챙기고 조직을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진리와 상반된 행동이고 하나님의 눈밖에 나는 행동이다. 진리를 미움과 폭력으로 지키는 자들에겐 참 진리가 없는데 이는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구원에만 적용하고 멸망에는 제하는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취사선택적으로 사용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구원과 멸망을 다 포함한다. 구원만 하나님의 주권이고 멸망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님을 말하는 자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지 못하는 자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다. 하나님이 구원할 자를 구원하시기도 하시고 버릴 자를 버리기도 하신다(삼상 2:6-7).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하시기 때문에 절대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침해하는 인간의 오만이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왜곡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교회에 출석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성전을 가졌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의 표가 말씀을 단순히 듣는 다는 것인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었고 성전을 소유했고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불순종을 지속하며 경고에도 죄를 회개하기는 커녕 스스로의 길을 갈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쫓아 내시고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성전도 허물어 버리셨고 이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사람들을 내 백성이 아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추종하는 지도자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출 32:7, 호 1:9).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사람 지도자의 말에 따라 이신칭의 교리에 안주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 예배나 기도도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순종을 원하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순종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삶이며 이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삶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행하는 것은 인격적인 관계의 유지를 말하는 것이지 단순히 율법적인 행함이 아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마 12:29-31)
간구의 기도
주여, 말씀의 빛에 악한 행실이 드러날 때 기뻐할 수 있는 믿음을 주옵소서. 하나님이 회개시켜 더욱 좋은 것을 주시고자 죄를 지적하고 깨닫게 하심을 알게 하옵소서. 성령을 주시기를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죄를 덮어버리고 안일하게 살고자만 합니다. 주님을 위해서 죄를 버리지 못하고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 믿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옵소서. 주여 말로만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과 상관없는 말과 행동에 빠져 헤어 나오지 않는 자들이 과연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알려 주옵소서. 거짓말하고 우상숭배하고 도적질 하고 음행을 일삼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는데 그런 말씀 앞에서도 담대한 저들에게 회개의 영을 부어주옵소서. 주여 교회 안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생각하는 부정한 교리와 세상 불신자와 다를 바가 없는, 종교인에 불과한 영혼들의 견고한 거짓 사상을 깨뜨려 주옵소서. 정결한 마음과 순종의 결단이 있게 하옵소서. 진정 하나님을 통치자로 모시고 섬기는 변화를 주옵소서. 주님이 그 눈을 만져주시고 그 마음의 악한 것을 빼내어 주셔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옵소서. 한 성령 안에서 진리를 공유하고 한 가지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