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신라김씨 왕실의 적통
나주김씨 연찬회 자료
2017. 6.24 ~ 25
지상 김 근 학
(나주군36세. 대보공65세)
나주김씨 정신문화의 기둥
1. 나주 김씨의 연원
2. 나주 김씨 정신문화의 기둥『家傳忠孝 世守敦睦』
≪종훈 유래를 밝혀 나김의 정신을 살펴 보다.≫
1. 나주 김씨의 연원(淵源)
*나주김씨는천년신라김씨왕실의적손이다*
천년을 연면히 이어온 나주김씨의 본래 뿌리는 “신라김씨 시조인 대보공((大甫公) 세조대왕(世祖大王 추존) 김알지(金閼智)께서 서기 65년 계림(鷄林)에 계명성(鷄鳴聲)과 함께 탄강”하신 이래 신라 천년의 56대왕 중 38대왕이 즉위하여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창달하고, 만세 융성할 배달의 터전을 다졌던 신라 왕실의 적손이다.
신라 마지막 “경순대왕(敬順大王)께서는 신라가 더 이상 나라를 존속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가없는 경천순민(敬天順民)의 대의(大義)”를 따라 935년 천년사직(千年社稷)을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손국(遜國)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경순대왕과 정비 죽방왕후 박씨의 계자(季子 막내아들) 황왕자(湟王子)께서는 형인 태자 일(鎰 마의태자)과 더블어 손국을 극력 반대하였으나 가납되지 않자 통곡하며 망국한을 품고 충절을 지켜, “고려에서 제수한 평장사(平章事)를 받지 않으시고(賜爵不授) 왕자빈 옥저하씨와 운발(雲發) 우발(雨發) 두 공자를 속세에 두고(棄妻子) 부왕의 영정을 모시고 가야산 법수사(法水寺)로 영사입산(永辭入山), 범공(梵空)스님이 되어 해인사(海印寺)를 왕래 주석하시며 국태민안과 국민통합, 일체중생제도에 용맹정진하다 열반(涅槃)”에 드시니 고려 조정에서는 황왕자가 비록 신라천년사직에 충절을 끝내 지켜 스님이 되시어 힘들고 고통 받는 일체중생제도에 용맹 정진하여 고려 건국 초기의 안정과 화합에 크게 기여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의행과 의덕을 기리고 선양하기 위해 의영공(懿英公)의 시호(諡號)를 내려 후세의 귀감으로 삼도록 하였으며, 개성 오룡산에 장례 하였다.
계자가 범공스님이 된 “법수사지(址)에 있는 삼층석탑은 국가보물 1656호로 지정”되었는데 그 안내판에 ‘삼국유사에 경순왕의 계자 김황(金湟, 나주김씨의 비조)이 승려가 되어 법수사에 머물면서 해인사에 드나들며 산승으로 일생을 마쳤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다’ 고 나주김씨의 근원을 밝히고 있다.
고려는 황왕자의 장자 운발을 예우하여 문하시중 나주군으로 책봉하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관향을 나주로 하게 되었고 차자 우발은 경주군에 봉하여 경주김씨 선계가 되었다.
계자가 범공선사가 되어 충절을 지킨 역사적 사실(史實)에 대해 삼국유사, 동사강목, 증보문헌비고 등 사서와 사료, 신라김씨 보책 등에 기록되어 회자(膾炙)되어 내려오고 있다.
특히 조선 영 정조 때 유명한 실학자 순암 안정복(1712~1791)은 우리나라 역사를 자주성과 정통성의 입장에서 1778년 동사강목을 저술하였는데<<신라가 귀려(歸麗) 시 계자가 충절을 지켜 범공선사가 되어 종신하신 일은 중국 촉한의 멸망시 북지왕(北地王) 유심(劉諶)과 관련한 고사에 비견할 정도로 의기가 장렬하지만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 참으로 애석하다>>고 할 정도로 역사상 충절이 높은 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나주군은 슬하에 3형제를 두었으며, 평장사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며 고려 초의 안정과 통합, 제세안민(濟世安民)에 크게 기여 하여 새로운 나라인 고려의 초석을 다지시었다.
이후 나주김씨는 고려조와 조선조에서 대대로 문하시중 평장사 사공 대제학 판서 대장군 등 문무현관은 물론 보국안민한 충신열사와 효자를 많이 배출 하였고, 현대에도 각계각층에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삼한의 올곧은 명문가로 자리를 매김하고 있다.
나주김씨의 천년을 이어온 정통성과 정체성을 다지며, 문중의 기상이 천추만대에 계계승승 이어지기를 소망하고 다짐하면서 신라김씨 적통후예인 10만 종인의 뜻을 모아 국가보물인 법수사지 삼층 석탑에 비조이신 황왕자 범공선사의 입산 사실이 등재되도록 하였으며,
이어 포천 천주산 능마루에 황왕자와 나주군 두분의 영위를 모신 시조단인 조경단(肇慶壇)을 설단 한 바 있으며, 아울러 대전 뿌리공원에도 나주김씨 연원비(淵源碑)를 설단하였다.
그리고 충절의 표상인 우리의 비조이신 범공선사의 얼과 정신을 우리 종친은 물론 온 국민과 더불어 기리고 선양하기 위한 항구적인 방도의 일환으로 사단법인으로 범공선사숭선연구회를 창립하여 본격적인 <유적 발굴> <기록보전> <정신문화 계승> <인재 육성사업>을 전개하고저 하니 뜻있는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 성원을 바라는 바입니다
2017. 6
나주김씨 중앙종친회 고문 김근학 근서
2. 나주 김씨 정신문화의 기둥『家傳忠孝 世守敦睦』
≪종훈 유래를 밝혀 나김의 정신을 살펴 보다.≫
◇ 宗訓(종훈)은 문중의 염원과 그리움이 담긴 것이다 ◇
『종훈은 성씨의 시조(관조)나 역대 조상들이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행동이나 생활의 지침, 또는 문중의 도덕적 실천기준으로 삼는 가르침이다.』
종훈의 제정은 시조나 선대 조상들이 연면한 문중의 역사와 문화에 끼친 영향, 국가와 민족을 위한 충의, 인간 모든 행동의 근본인 효성 등의 행적을 종합적으로 참고하여 영원히 이어갈 자손만대의 핵심적인 가치를 고스란히 담는 내용이어야 하는데, 우리나주김씨는 천년을 면면히 이어온 천년 왕국 신라가 국운이 다하여 더 이상 나라를 유지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신라 마지막 56대 경순대왕께서 무고한 생령들이 전쟁의 참화와 도탄에서 구하고자 가없는 경천순민의 대의에 따라 천년사직을 신흥 고려 태조 왕건에게 손국하게 되었을때 계자(季子) 황왕자(湟王子)께서는 이의 불가함을 형인 태자 일과 함께 극간하였으나 가납되지 않게 되자 사작불수하고 가야산 법수사로 영사입산 범공선사(梵空禪師)가 되시어 해인사를 왕래 주석하다 열반에 드셨는데 고려 조정에서는 황왕자의 아름다운 의행과 의덕을 영원토록 기리고자 의영공(懿英公)의 시호를 내렸다.
천년왕손 나주김씨 문중에서는 1832년 대동보인 임진보의 편찬에 즈음하여 계자의 만고에 푸른 충절과 효경심, 관조이신 나주군 문하시중 운발(雲發)의 제세안민의 고귀한 얼, 월당공에 이어 참판공 훈련공 취암공 구암공을 위시한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며 충효와 절의를 지킨 위대한 역대 조상의 아름다운 명성과 자취를 세상에 알려 후세의 본보기로 삼게 하고자 임진보 편찬시 서두에 “家傳忠孝 世守敦睦”을 천명하고 후손들이 대대손손 이 거룩한 조상들의 얼과 정신을 기리고 준수하고 선양하도록 하였는바, 이후부터 우리종중에서는 이 뜻을 받들어 가전충효 세수돈목을 종훈으로 사용하고 실천하게 한것이다.
다음은 임진보 머리글의 내용이다.
<임진보(1832) 나주김씨족보 머리글>
<원문>
“立譜收族 宗法遺意 有攝人心 俗厚風美 惟我羅州金氏 肇自月塘公 至參判公 訓練公 鷲巖公 龜巖公 道德文章 聯芳趾美 爲世矜式 琦歟諸賢 華慈一譜 八字弁卷 警世裕後焉”
家傳忠孝 世守敦睦
<번역문>
“족보를 만들어 종족을 모으니 종법이 남긴 뜻은 인심을 추스르고 풍속을 후하고 아름답게 하는데 있다. 오직 우리 나주김씨는 월당공(月塘公)을 비롯하여 참판공(參判公), 훈련공(訓練公), 취암공(鷲巖公), 구암공(龜巖公)에 이르기까지 도덕과 문장과 충효와 절의로 나란히 아름다운 명성과 자취를 알려 세상의 본보기가 되었으니 아름답도다. 여러 현인들을 이 한 족보에 모아 가전충효세수돈목(家傳忠孝世守敦睦)이라는 여덟 글자를 책머리에 적어 세상을 경계하고 후손을 넉넉하게 하고자 하노라”
임진보는 현존하는 최고의 나주김씨 족보인 병오보(1786)에 이어 1832년(순조32)에 후손인 相彦(32세)과 그의 족제인 義倜(32세)등에 의하여 2년여의 준비 끝에 편찬하게 된다.
전 6책의 이 족보에는 편찬을 주관한 相彦과 應順(31세), 進倜(32세)의 서문이 있고 은진송씨 송치규(宋穉奎)의 서문이 있다.
이 보책은 후손에게 가르침의 준거가 되는 가전충효 세수돈목 이외에도 “나주김씨 분파목록이 기록”되어 있어 180년 전인 당시의 나주김씨 분포와 현황을 파악하는데 문헌적인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보책이다.
교통이 불편하고 많은 경비가 소요되는 봉건사회에서 이러한 훌륭한 보책을 만들어 남기신 조상님들의 훌륭함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이 머리글에 등장하는 월당공은 고려말엽 대과에 급제하고 충숙왕 이 후 공민왕대에 걸쳐 성균관 대사성, 보문각 대제학 등을 역임 하시고 가정 이곡, 목은 이색 등 대학자들과 교유 하시면서 당대 문장이 독보적이던 15세 문충공 대경(臺卿) 선조로서 그의 시가 동문선,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고, 참판공은 예종, 성종, 중종 때에 조정의 문무내외직을 지내면서 명신양리로 이름을 날리시고 치행의 으뜸으로 중종이 포상하신 20세 봉서(鳳瑞)공을 일컬으며, 훈련공은 중종, 명종조를 대표하는 명장으로 남정북벌로 보국안민하고 특히 을묘왜변 시 65세 나이로 방어사로 출전하여 전남 영암에서 왜적을 토멸한 혁혁한 공적으로 정국 1등 공신에 책훈되신바 있는 21세 용주공 경석(景錫)을 이름이며, 취암공(鷲巖公)은 김제 군수 등 목민관을 역임하다 을묘왜변 시 중군장으로 참전 공을 세워 광주목사에 승차되고 호조판서에 추증된 22세 적(適) 선조를 말하고, 구암공(龜巖公)은 정유재란에 정부인 나주나씨와 함께 순절하시어 선무원종 1등 공신으로 책훈되신 23세 충수(忠守)공을 말함이다.
어찌 열거한 다섯 분 선조만이 충효의 본보기이겠는가 !
그 이외에 고려와 조선조에 나라를 보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신 수많은 충의 열사와 효자 열녀가 있었지만 다 소개 못한 것뿐이다. 문중을 빛낸 훌륭한 어른들의 기록은 다음 기회에 소개하기로 하겠다.
현대화 세계화 정보화 다원화 사회가 진행됨에 따라 전통적인 규범과 가치관이 무너져 버렸는데 우리의 종훈인 ‘가전충효 세수돈목’의 정신과 역사성과 전통성을 실리면서 젊은 세대가 이해하고 공감하는 좋은 방안은 없겠는지 많은 종친이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고 참여하여 깊은 고민을 해보도록 하자.
36세 只常 金謹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