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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新堂정붕鄭鵬도학의 형성과 전개
- <안상도案上圖>와 대학大學을 중심으로 -
1)권 상 우
본 논문에서는 선산 지역 유학자 정붕의 도학의 전개 과정을 논의하였다. 우선적으
로 선산 지역의 도통道統에 관해 살펴보았다. 선산 지역은 당시의 정몽주, 길재, 김숙
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을 거부하면서 김굉필, 정붕, 박영으로 이
어지는 도통을 제기하였다. 조선 사림에서는 이들 학파의 도통관을 인정하지는 않았
다. 하지만 선산 지역은 기존의 조선 도통관에 포함된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모두가 이 지역과 연고가 있고, 이들 외에도 덕망 있는 유학자들이 즐비하였다. 이러
한 사실에서 선산지역 유학자의 도통관을 긍정적으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선산 지역 유학자의 도통관에서 정붕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위로는 김
굉필에게 도학을 배웠고, 아래로는 박영에게 도학을 전수하였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정붕이 김굉필에게 배운 도학을 이해하기 위해 김굉필의 <한빙계>와 정붕의 <안상도>
를 비교 분석하였다. 정붕은 김굉필의 <한빙계>에 근거해서 자신만의 수행도를 만들었
다. 김굉필은 ‘소학동자’라 불릴 정도 일상생활에서 실천과 수신을 중시하였다면, 정붕
은 <안상도>를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도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정붕이 박영에
게 대학의 정수를 전수하면서 선산 지역의 도통을 전수하였음을 논의하였다.
핵심 단어: 선산 지역, 도통道統, 정붕鄭鵬, 안상도案上圖, 박영朴英
DOI URL: http://dx.doi.org/10.18399/actako.2016..65.006
Ⅰ. 선산 지역의‘도통道統’
조선 전기 성리학은 도통道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나 도통의
기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도통은 유학사에서 이단과 구별된 정체
성을 언급할 때 사용된 용어이다. 중국유학사에서 보면, 맹자는 당시에 유
행하던 양주와 묵자를 비판하기 위해 도통道統관을 제기하였고, 한유는
불교와 도교와 구별하기 위해 도통관을 제시하였다면, 정주학에서 유학의
도통관은 구체적인 인물을 중심으로 한 사승관계를 중심으로 도통관을 제
시하였다. 정주학 내부에서는 이단의 비판을 위해 도통을 주장하기 보다
는 유학 내부의 다양한 학파 중에서 자신의 학파의 정통성을 밝히기 위해
도통을 제시하였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유학사에서 도통관은 자신의 정
체성을 드러내면서 다른 사상이나 학파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
용된 용어이다.
유학의 도통관은 한국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여말선초에
는 불교와 도교, 그리고 사장학과 구별하기 위해 도통을 제시하였다. 조선
초 성리학의 도통에는 성리학의 조예가 있는 학자를 중심으로 도통을 세
우면서 이제현-이색-권근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조선 정치가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임금에 대한 충절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으로 간주되면서
충절을 중심으로 도통관이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도통관에서 볼 때 정몽
주와 길재는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세종은 유교의 삼강윤리
를 신하와 일반 백성에게 보급할 수 있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길
재와 정몽주의 항절을 수록하였다. <삼강행실도>는 유교의 삼강윤리를 신
하와 일반 백성에게까지 보급하면서 길재나 정몽주와 같은 충절을 요구하
려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그래서 정몽주는 성종 때 문묘종사자로 공인되
었다. 중종 때 김굉필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요순-공
자-맹자. 주돈이, 이정, 주희로 이어지는 도통은 정몽주, 김굉필로 이어지
게 되었다. 이어서 조광조는 김종직에게, 김종직은 길재에게 배웠으며, 길
재는 정몽주의 문인이라고 하여 정몽주-길재-김종직-김굉필로 이어지
는 도통관을 제기하였다. 이로써 길재 또한 중종대 초반까지 충절을 표상
하는 모습에서 벗어나 도학의 계승자로서 거론되기 시작했다. 그 이후 조
광조는 그의 후학에 의해 도통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6세기 사림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자 하였다. 사림은 성
리학을 보급하고 성리서의 간행 및 서원을 건립하면서 이를 ‘도통道統’과
연관시켰다. 1560년대 이황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성리학 관련 서적을
간행해서 보급하였다. 그는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에서 송
에서 명까지의 주자학파를 정리하면서 조선의 도통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
였다. 이황은 그 이전의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관을 수용하면서 자신과 학문적 입장이 같은 이언적을 문묘
에 종사하고자 하였다. 이황이 사망한 이후에는 이황의 문인들을 중심으
로 이황을 조선 도통관에 포함시키면서 자신들의 학통을 조선 성리학의
도통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위와 같은 도통관을 조선 성리학자 모두가 수용한 것은 아니었
다. 율곡 이이는 조광조-이언적으로 연결된 도통관에 대해 비판적이었으
며.1) 경암敬菴 노경임盧景任(1569~1620)이 저술한 숭선지嵩善志의
<도통상승차제도道統相承次第圖>에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
金叔滋-김굉필金宏弼-정붕鄭鵬-박영朴英 등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제시
했다.2) 이것은 김굉필의 도통을 조광조가 아니라 정붕과 박영이 계승하
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 최현이 저술한 일선지一善志에서도 이런 도
통관을 찾아볼 수 있다. 노경임은 장현광과 유성룡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
으며, 성주 목사를 역임하고 말년에 낙동강 강변에서 보내다가 선산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3) 이들은 대부분 선산과 연고가 있는 사람들이었
1) 李珥耳. 石潭日記(上). 明宗 22年 (1567).
2) 松堂先生文集卷3, 附錄, ‘道統相承次第錄’. 盧景任의 嵩善志를 인용한 것임.
다. 실제로 선산은 ‘불사이군不事二君’, ‘절의정신節義情神’의 표상인 길재
의 고향이고, 김숙자와 김종직이 활동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김굉필 또한
김종직이 선산부사로 재직할 때 선산향교에서 수학하면서 선산을 고향으
로 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 초기에 선산은 사림의 산실이었고, 그
이후 김종직의 동지로 알려진 김지경金之慶과 정석견鄭錫堅도 선산에서
도학적 토양을 조성하였고, 정석견의 형인 정철견은 선산에 덕망 높은 도
학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연유로 인해 선산 출신 사림은 도학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가 강하였으며, 이러한 자부심을 지닌 선산의 노경임과 최
현은 선산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도통관을 제기하였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들의 도통관이 선산이라는 특징 지역을 중심으로 제기되었지만 조
선 유학사에서 결코 소홀히 다룰 수는 없어 보인다.
실제로 16세기 중반 선산 지역에는 정붕의 학술을 계승한 박영을 중심
의 송당학파가 등장하면서, 박영 자신의 학풍을 도통으로 삼고자 시도한
다. 이를 위해 1572년 박영의 제자인 최응룡과 김취문 등이 선산부사에
게 선산에 서원 건립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안향을 모시는 백운동서원, 정
몽주를 모시는 임고서원 있다면 길재를 기리는 서원이 필요함을 주장하였
다. 서원을 건립할 장소로는 길재가 노년에 보냈던 금오산으로 정하였다.
이들의 요청에 따라 길재를 주향으로 하는 금오서원이 건립되었다. 금오
서원은 송당학파들이 주축이 되어 건립되었는데, 이들은 금오서원 건립에
참여하는 동시에 야은집을 발간하면서 길재에서 박영으로 이어지는 도
통의식을 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도통의식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도
통상승차제록>이다. 선산 지역 사림은 1540년과 1550년대 이후 본격적
인 활동을 개시한 후대의 학파들 즉 서경덕의 화담학파, 이황의 퇴계학파,
조식의 남명학파 등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된다.4)
3) 노경임은 장현광과 유성룡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주 목사를 역임하고 말년에는
낙동강 강변에서 보내다가 선산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차장섭. 2013. 신당 정붕의
생애와 정치 사상적 역할 . 신당 정붕선생의 학문과 사상. 경상북도문화원연합회. 구미
문화원. 124쪽.
선산지역 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신당新堂 정붕鄭鵬은 매우 중요하
다. 정붕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도통을 계승하였을 뿐만 아니
라 송당학파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그의 유작으로는 <안상
도案上圖>가 전해지고 있는데, 퇴계는 안상도案上圖에 대해 “정붕의 학문
함이 정미한 곳까지 나아갔음을 알고자 한다면, 후학들은 마땅이 안상도
를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극찬하였다. 이황의 평가에 근거해 본다면, 정
붕은 단지 양자 간에 매개 역할만 한 것이 아닌 조선 성리학에 크게 기여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붕에 관한 자료가 임진왜란 시기에 소실되
면서 최근까지 연구가 진척되지 못하였다. 그래서 논문에서는 <안상도>를
중심으로 정붕이 김굉필의 도학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박영에
게 어떻게 도학을 전수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Ⅱ. 신당新堂 정붕鄭鵬의 도학道學 전승傳承
정붕鄭鵬은 해주정씨海州鄭氏로 자는 운정雲程이며, 호는 신당新堂이
다. 선산 출신으로 부친은 정철견鄭鐵堅이며, 모친은 의령宜寧 옥씨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정철견이 생원 옥형종玉荊宗의 딸과 혼인하여
선산 신당포에 거주하면서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선산지역은
야은 길재의 고향이자,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의 고향이며, 도학을 숭상
하는 학풍이 전해지고 있었다. 정붕은 이러한 도학적인 분위기가 농후한
4) 선산지역 유학자들은 이후 퇴계학파와 여헌학파도 귀속되었다. 장현광은 박영의 제자인
노수함에게 수학하였다 17세기 이후 선산지역에 약화되었던 송당학파는 여헌학파로 흡
수되면서 선산지역의 계보 또한 정몽주-길재-김숙자-김굉필-정붕-박영-노수함-장
현광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김학수. 2007. 17세기 영남학파 연구 . 한국학중앙
연구원 한국학대학원 한국사학전공 박사학위논문. 106-109쪽).
환경 속에 성장하고 활동하였다. 그는 학문함에 있어서 부친 정철견의 절
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정철견은 당시 선산에 덕망 높은 도학자로 알려져
있다. 인천 부사인 정미수가 인재를 천거하는 상소에서 정철견을 추천하
면서 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신이 평소 듣건대 경상도慶尙道 선산善山 사람인 생원生員 정철견鄭鐵堅
은 청렴한 성품性品을 스스로 지키면서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
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이는 60세가 넘었는데, 절개가 굳은 행실이 더욱
높아져서 일찍이 상사를 당해 동정에 있어 옛 제도를 준수하니, 한 고을에서
효행을 칭찬하였으며, 마음을 작정하여 세우는 것이나, 처신하는 것을 사람
들이 모두 본받아 자기에게 착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정철견에게 알려져 사
람 축에 끼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였으며, 송사를 다투는 자가 있으면 먼저
정철견에게 묻기 때문에 실정이 없는 자는 부끄러워하여 스스로 그쳐서, 사
람들에게 신임信任을 얻는 바가 이와 같았습니다. 또 성품이 원래 엄숙하고
굳세어서 스스로 규범을 갖추고 집안에 있으니, 자제들의 허물도 없었습니
다. 그 아우 정석견이 지금 성명을 만나 발탁되어 승지의 직임職任을 맡고
있는데, 또한 정철견의 교회敎誨한 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
실로 성조의 일민으로서 권장할 만한 사람입니다.5)
경상도 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은 정철견을 박시명朴始明, 곽순종郭順宗,
김굉필金宏弼 등을 은일지사隱逸之士로 천거하였는데,6) 이는 정철견의
학문과 교화는 선산뿐만 아니라 경상도 전 지역에 널리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철견은 청렴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세상에 알려지기 보다는
위기지학을 추구하면서 시골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는 것에 뜻을 두었고,
그의 동생 정석견은 김종직의 문인이며 김굉필과 동학이기도 하다. 김종
직은 선산 부사 시절에 사상적으로 학문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오
5) 成宗實錄. 286卷. 25年 1月 3日.
6) 김성우. 2009. “15세기 중·후반~16세기 도학운동의 전개와 송당학파의 활동”. 역사
학보 제202집. 14쪽 참조.
당吾黨’이라고 부르면서 제자와 동료 간의 단결과 유대를 강화하였고, 정
석견을 김맹성金孟性, 표연매表沿沬, 유호인兪好仁등과 함께 가장 믿을
수 있는 당파 구성원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7) 오당이 되기 위해서는 주
자학을 신봉하면서 소학과 주자가례를 실천하고, 각종 정변이나 급변
하는 시국 상황에서도 지조를 지킨 정주학자이어야 했다. 정석견은 1474년
(성종 5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안현감과 사간원 정언을 지냈다. 1483년
에는 천주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485년 이조정랑에 올
랐으며, 이듬해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정석견은 정붕을 ‘가문의 보배’라고 칭찬하면서 그의 학문에 대해서 관
심을 가졌다. 그는 정붕이 김굉필 문하에서 공부하기를 권유하였으며, 정
붕은 숙부 정석견의 추천으로 김굉필 문하에 나아가 도학을 공부했다. 하
지만 김굉필의 景賢續錄 師友文人錄의 41명에는 정붕이 수록되어 있지
않다. 이에 박선정은 기존 ‘사우문인록’에 게재되어 있지 않던 정붕을 수
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붕은 김굉필의 갑자사화 때 김굉필의 제자
라는 죄목으로 경상도 영덕으로 유배를 떠난 정황으로 볼 때 정붕이 김굉
필의 제자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김굉필이 정붕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
는지에 관한 자료는 찾아볼 수 없다. 이를 알기 위해서 먼저 김굉필이 무
엇을 중시했는지에 대한 이해에서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김굉필은 일반
적으로 소학을 핵심으로 하고, 일생동안 소학에 명시된 가르침을 공부하
였다고 해서 ‘소학동자’라 불렸고, 도학의 조종으로 불린 것을 생각해 볼
때 조선 성리학에 미친 그의 영향은 지대하다고 볼 수 있다. 김굉필의 흔
적은 그의 문인 이적이 쓴 행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기자 때부터 비로소 문자가 있었고, 삼국과 고려를 지나 우리
왕조에 이르기까지 문학은 찬란하였으나 도학에 대해서는 들어 본 일이 없
었다. 도학을 처음으로 제창한 분은 오직 공 한 사람뿐이다. 일찍부터 글을
잘한다는 명성이 있어 경자년의 사마시에 합격하고 크게 분발하여 문장가에
대한 공부를 힘썼는데, 소학을 읽다가 곧 깨닫고 시를 짓기를 “소학 책 속에
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다라고 하니 점필재가 평하기를 이 말은 성인
이 되는 근기이다. 노재 이후에 어찌 사람이 또 없겠는가? 하였다. 공은 개연
히 성현의 취지와 다른 여러 학자의 학설을 배척하고 날마다 소학과 대학의
글을 읽어 이로써 규모로 삼고 육경을 탐구하고 성과 경을 힘세 지켜 존양.
성찰을 체로 삼고, 제가. 치국, 평천하를 용으로 삼아 위대한 성인의 경계에
이를 것을 목표로 삼았다.8)
김굉필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학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소학과
대학을 기준으로 육경을 공부하였으며, 성誠과 경敬으로 존양存養과 성찰
省察하고 나아가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통해 성인의 경지
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매우 절
제되고 엄격한 실천을 하였으며, 제자들에게 마음 다스리는 공부를 가르
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굉필이 비록
소학을 핵심으로 삼았지만, 그가 대학 공부와 육경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다. 김굉필 또한 수신서로써 대학을 중시하였다. 그도 주자의 격물
궁리 방법을 강조하였으며, 이러한 격물궁리 방법을 통해서 육경을 공부
하여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붕이 김굉필에게서 대학을
배웠는지에 관한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정붕이 이후에 신당 박영
에게 대학을 전수하였다는 기록에서 볼 때 김굉필 문하에서 대학도
공부하였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김굉필은 소학이 대학의 근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소학을
중시했다. 소학은 김숙자가 김종직에게, 김종직이 김굉필에게 강조한 책
이다. 그러나 김굉필의 소학에 대한 태도는 이전 스승들과는 달랐다. 소학
에는 크게 입교, 명륜, 경신의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 입교가 강학
8) 李績. 景賢錄. 行狀上. 국역 경현록. 26-30쪽.
의 방법을 설명한 부분이라면, 명륜과 경신은 강학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다. 그 이전의 스승들은 소학에서 명륜을 중시했지만 김굉필은 오히려 경
신 즉 수신을 더욱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이황은 김굉필을 동방 도학의
개창자로 불렸다. 실제로 정몽주, 길재의 불사이군은 군주와의 도리 즉 명
륜을 준수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종직은 문장을 좋아하면서 경신
을 소홀히 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인륜보다는 경신을 중시하면서 ‘소학
동자’, ‘도학의 조’로 칭해졌다. 이는 김굉필이 제자들에게 가르침 내용에
서도 알 수 있다.
김굉필은 반우형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하자 수기와 접물의 방법에 관한
한빙계를 주었다. 이 글은 정심솔성正心率性, 정관위좌正冠危坐, 통절구습
痛絶舊習, 질욕징분窒慾懲忿, 지명돈인知命敦仁 안빈수분安貧守分, 독서
궁리讀書窮理, 주일불이主一不二, 지경존성持敬存誠 등 전체 18조목으로
되어 있는데, 김굉필은 이 글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청색과 얼음이라고 하지 않고 특별히 한빙계라고 한 것은 그 공부가 나보
다 휠씬 높기를 바라는 동시에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는 뜻으로 경계하기
위함이다. 소학에 이르지 않았는가? 증자가 ‘깊은 연목을 마주친 듯이 하고
얇은 얼음을 밟듯이 하라고 한 것은 계신 공구의 지극한 것으로 실로 소학
공부의 대강령이 되니, 인의예지, 효제충신,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 경하
지 않음이 없는 것, 경이 태만을 이기는 것 구사. 구용 쇄소응대 스승을 높이
고 벗과 친하게 지내는 도가 모두 말미암은 문호이다. 만일 계신. 공구의 성
실함이 깊지 않으면, 경전을 배우는 것이 한갓 겉치레일 뿐 실질적인 공부가
되지 못한다. 내가 소학을 읽는 이래로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깊이 가져서 일
을 따라 행하여 보니, 이 마음이 언제나 가슴 속에 존재하며, 사지에 퍼지고
사업상에 표현되는 것을 스스로 믿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빙계의 여러 조목
을 내가 진심으로 너에게 주는 것이니, 혹시라도 틈이 있으면 지금 세상에
화를 면하기 어려우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9)
9) 潘佑亨. 題寒氷戒後. 景賢附錄. 上 國譯 景賢錄. 420-421쪽.
김굉필은 그의 제자에게 소학의 강령은 계신戒愼. 공구恐懼에 있다고
하면서 이에 해당되는 사례를 증자가 인용한 시경에서 재인용했다. 인
의예지仁義禮智. 효제충신孝弟忠信. 구사九思. 구용九容 등은 계신, 공구
에서 나오며, 계신, 공구하지 않으면 소학을 읽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김굉필은 위의 글에서 경敬과 성誠을 강조한
다. 그는 경敬을 주일무적으로 해석하고 있으며, 성誠을 완전무결한 순수
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가 말한 성誠은 끊임없이 사욕을 극복하
여 도덕적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경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성
과 경은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해야 하며, 보는 것을 존엄하
게 하고, 앉기를 시동처럼 하라는 등 모두 경공부에 해당된다.10) 이와 같
이 김굉필의 한빙계는 자신의 도덕적 인격을 완성하는 수신 지침 조항이
라 할 수 있다. 김굉필은 공부가 도덕실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치국.평천하로 이어질 때 유학의 수기치인의 정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
다고 본다. 그의 제자에 대한 가르침은 남효온의 다음 글에서도 알 수 있
다. 남효온은 “김굉필이 소학으로 몸을 다스리고 옛 성인을 표준으로 삼
아 후학을 불러 차근차근 잘 이끌어가니, 쇄부의 예를 행하고 육예의 학문
을 닦는 사람이 앞뒤로 가득하였다”11)라고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
굉필은 소학을 중시하면서 뛰어난 인품을 갖추고 실천하는 여러 명의 제
자들을 배양했음을 알 수 있다. 정붕 또한 이러한 제자 중에 한명으로 볼
수 있다.
정붕에 대한 김굉필의 이런 가르침은 <안상도>에서 알 수 있다. <안상
도>는 특정한 이론서이기 보다는 정봉의 일상생활에서의 수신서이다. 김
굉필이 소학을 통해서 일상생활에서 도학을 실천하고자 했듯이 정붕은
<안상도>를 보면서 일상생활에서 도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안상도 는
10) 김용헌. 도학의 형성. 점필재 김종직과 그의 문생들의 도학사상 . 한국학논총(45).
2011. 167-168쪽.
11) 南孝溫. 冷話. 秋江集 券7.
아침, 저녁에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밥상에 새겨 놓은 130자의 짧은 그림
이다. 이황은 “정붕의 학문함이 정미한 곳까지 나아갔음을 알고자 한다면,
후학들은 마땅히 안상도를 보아야 할 것이다”12)라고 극찬하였다. 이와
같이 정붕이 김굉필에게서 소학의 수신을 계승하여 더욱 체계화하였다는
사실에서 그의 학문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안상도>에 대해 정
유성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포은이 주자의 도를 받아들여 그 심오함을 나타내고, 그 공효가 가까이
있음을 밝혀 성의, 정심, 수신, 제가의 대경, 대법이 환연히 다시 세상에 밝
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야은 길재는 홀로 그 종법을 이어 이 도를 김숙자에
게 전하고, 김숙자는 그 아들 점필재 김종직에게 전하고, 정필재는 한훤당에
게 전했다. 나의 선조 신당선생은 일찍이 한훤당을 종유, 정주를 연구하여
정밀하게 사색하고 힘써 실천하여 성문의 광대한 규모를 체득하고 격언을
주어모아 안상도를 만들어 항상 천제를 대하듯 엄격하기가 공자께서 앞에
계시는 것과 같이 했으니, 선생께서 힘들여 이 안상도를 저술했음의 뜻이 어
찌 우연할 일이었겠는가? 그리고 후인들 가운데 유학에 뜻을 둔 사람은 이
안상도를 버리고 어찌하겠는가?13)
윗글은 정붕이 김굉필에게서 정주학을 공부하면서 <안상도>를 그렸고
그것을 중시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안상도>가 비록 소학과 관련
된 절목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지만 성리학적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안상
도>에 대한 해석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전하지 않아 그 의미를 정확하
게 파악하기 어렵다. 홍우흠 교수는 최근 연구에서 정붕의 <안상도>와 김
굉필이 문인 반우형에게 전한 <한빙계>와의 관계성을 논의하면서 정붕의
<안상도>가 김굉필의 <한빙계> 보다 더 체계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음을
12) 鄭鵬. 案上圖. 新堂先生實記.
13) 鄭惟城. 謹書先祖案上圖後. 新堂先生實錄 홍우흠. 신당 정붕의 한시 소고 . 신당
정붕선생의 학문과 사상. 97쪽 참고.
지적하였다. 홍우흠 교수는 <한빙계>의 18조항이 정붕의 <안상도>의 구
조에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안상도>에 쓰인 경구중에 <한빙계>의 경구
와 유사한 어구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홍우흠 교수가 제시한 유사한 어구
는 다음과 같다.
(1) <寒氷戒> 제3조 正冠危坐, 尊瞻視
→ <案上圖> 正其衣冠, 尊其瞻視
(2) <寒氷戒> 제3조 潛心以居, 對越上帝
→ <案上圖> (明鏡) 潛心以居 對越上帝
(3) <寒氷戒> 제3조 足容重, 手容必恭
→ <案上圖> 足容重, 手容恭
(4) <寒氷戒> 제 7조 知明
→ <案上圖> 安命
(5) <寒氷戒> 제18조 持敬存城
→ <案上圖>, 省義以方外 無不敬14)
홍우흠 교수는 한빙계와 안상도의 관계성을 주장하면서, <안상도>는
<한빙계>에 나타난 도통을 계승했으나 도의 개요를 인식하고 전달하는
표현방식을 나열식에서 도식화 및 시각화로, 귀납적 논리에서 연역적 논
리로 바꾸어 놓았다고 평가하면서 정붕이 한원당의 도학을 계승하고 살신
성인의 도통을 이어 어떤 경우에도 명분과 인류의 도를 이탈하지 않았다
고 말하고 있다.15) 홍우흠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한빙계>와 정붕의
<안상도>는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
이 김굉필은 소학을 핵심으로 하여 확고한 도덕성에 근거해 대학에 이
어 육경을 탐구하고 성誠과 경敬을 매개로 한 존양存養과 성찰省察 공부
14) 홍우흠. 2013. 한훤당이 정신당에서 전수한 도통 . 한훤당 김굉필의 도학사상과 교육
활동. 한훤당기념사업회. 47쪽.
15) 위의 논문. 48쪽.
를 강조하였다. 이런 김굉필의 학문적 태도는 정붕에게도 계승되었을 것
으로 보인다. 그것을 정붕이 박영에게 대학 공부에 대한 가르침을 준 실례
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김굉필이나 정붕에게서 소학은 학문함의 시
작일 뿐만 아니라 핵심이라 할 수 있다.
Ⅲ. 신당新堂의 소학小學 이해: <안상도案上圖>
정붕의 문헌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신당선생실기 1권만이 전해지
고 있다. 실기에는 한시漢詩 7수首와 안상도 가 기록되어 있는데 정붕
의 학문적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김굉필이 ‘소학동자’라 하였듯이 정붕
은 <안상도>를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도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안상
도>는 정붕이 아침저녁에 스스로 경계하고자 밥상에 새겨 놓은 130자의
짧은 그림이다. 그의 스승 김굉필이 문인 반우형에게 전한 <한빙계>와 유
사한 내용을 좀더 정밀하게 체계화한 잠도箴圖라 할 수 있다. 이 도표에
배열된 어휘나 어구는 역경, 예기, 논어, 단서, 맹자에 나오는
성현들의 격언들을 배열하여 정자 모양으로 배치하고 있다. 각 문구는 분
산되고 독립되어 그려진 것이 아니라 상호 유기적인 관계로 구조화 되어
있을 것이며, 그 전체는 성리학의 핵심 내용에 근거해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도표를 제작한 정붕이 그림이 지니고 있는 의미에 대해 해설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입안했던 사색의 구조와 논리를 정확하게 이
해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가 보기에 정붕의 <안상도>는 소학의 구체적인 덕목을 성리학적인
구도로 재배치 한 잠언도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안상도는 소학의 구
용과 구사를 성리학의 공부 방법에 근거해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
다. 이는 그의 후선 정유성의 설명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대개 일신을
주재하는 것이 심이며, 이 심을 존양함을 경이라 하나니, 경은 성학의 시
작에서 끝날 때까지의 요체이며 이 안상도를 작성한 까닭이다”라고 하였
다. 정유성이 말한 바와 같이 정붕의 안상도는 존양과 성찰 공부를 대조시
키고 여러 격언과 조목을 배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존양과 성찰은 김굉필
의 공부 방법이기도 하다.
김굉필은 “성과 경을 힘세 지켜 존양. 성찰을 체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안상도에서도 존양과 성찰로서 여러 절목과 문구를 배치시키고 있다. 존
양存養은 존심해서 양성하는 것이며, 이는 마음에 어떠한 의념이나 사려
가 생겨나지 않는 미발의 단계에 있어서 경공부는 사람의 마음에 담지 되
어 있는 이치를 존양하는 실질적인 공부이다. 일정한 정황을 접하여 마음
에 구체적인 의념이나 사려가 찾아드는 이발의 단계에서는 성찰공부를 필
요로 하게 된다. 사람들이 마음을 함양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
다. 이에 일상생활에서 아주 용이한 것으로부터 경공부를 해야 한다고 보
았다. 그래서 정붕은 존양과 성찰, 경과 성의 공부를 예기의 구용九容과
논어의 구사九思로서 절목을 삼아 자신을 성찰하는 지표로 삼았다. 우
리는 그의 구사와 구용의 공부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구용은 앞에
서 언급한 바와 같이 예기에 등장하는 절목이며, 구사는 논어에 등장한다.
이 두 가지 함께 언급한 책이 바로 소학이다. 실제로 안상도는 소학의 내
용을 정공부와 동공부의 관점에서 체계화 한 것이지 소학의 범위를 벗어
난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정붕은 소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주자의 심학 구조에 근거해서 소학의 내용을 대조적으로
배치하면서 체계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의미
에서 그의 안상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래에서 안상도를 강령,
수양방법, 경의 방법, 수도의 구조, 수도의 결과로 구조화해서 해석해 보
고자 한다.16)
16) 이완재. 2013. 신당 정붕 선생의 안상도와 도학 . 신당 정붕선생의 학문가 사상. 경
樂天 安命
正其衣冠尊瞻視 己所不欲施於人
存養 (靜) 省察 (動)
敬以直內 (內) 義以方內 (外)
嚴若思 無不敬
九用 九思
潛心以居對越上帝 (靜時 마음) 出門如賓承事如祭 (動時 마음)
夜卜夢寐 晝驗妻子
心勿忘泛泛悠悠都不濟事 勿助長勉勉循循自有所至
怠(心動) 慾(性忍)
1. 안상도의 기본 강령
낙천樂天은 하늘의 뜻(天理)을 즐긴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천으로부터
인의예지의 도덕본성을 부여 받는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도덕 실천에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분수와 한계
를 아는 것을 안명이라고 하며, 그 분수와 한계를 알고 편안해 짐을 말한
다. 천명이 도덕적 본성을 뜻한다면, 안명은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욕심
을 부리지 않고 편안히 처함을 말한다. 인간은 분수와 한계를 인지하지 못
하고 과욕을 하게 될 때 도덕적 본성에 벗어나게 된다. 공자는 50세에 ‘지
천명知天命’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보았다.
낙천 아래에 “의관을 바르게 하고 시선을 높이 둔다.”를 적고 있다. 이
는 논어 요왈 편에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군자가 의관을 바르게 하고
바라봄을 높이하면 엄연하여 사람들이 바라바고 두려워하니 이는 위엄이
있으되 사납지 않음이 아닌가?”17)라는 말에서 끌어 왔다. 이 말은 주자의
상북도문화원연합회. 구미문화원. 37-48쪽 참고.
17) 論語. 堯曰.
경재잠 첫 구절이기도 하다. <한빙계>에서는 심성이 곧으면 외형이 바르
며 거처를 공손히 하면 평안하지만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니. 바라봄을
높이고 시동처럼 바로 앉음은 다 경을 하는 것인데 어찌 방종하거나 게을
리 할 수 있느라. 바른 자세를 갖지 못함은 학자의 큰 잘못이니 경계하고
경계하라고 하였다. 안명 아래 “자기가 바라지 않는 바를 남에게 하지 말
라”는 말은 상대방에 대한 윤리이다. 상대방을 항상 존중해야 함을 말하
고 있다. 공자는 이를 충忠과 함께 논하기도 한다. 충이 자신의 마음을 다
하는 것이라면 서恕는 그 마음을 미루어 상대방을 대하는 것을 말한다.
2. 수양방법
존存은 존양存養을 의미한다. 마음을 보존하여 도덕본성을 기르는 것을
말한다. 맹자는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거
두어들이는 것이다”18)라고 하였다. 그래서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거두어
도덕적 마음을 보존하면 인의예지의 도덕본성을 기를 수 있다고 본다. 성
찰은 마음이 외물에 접하여 의념과 감정이 동할 때 그 실천이 절도에 맞
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의 경으로써 안을 바르게 하고, 밖
으로 의로써 행동을 방정하게 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경은 존양의 방법이
라면, 의는 절도의 준칙이 된다.
그 아래에 엄약사儼若思와 무불경無不敬 또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 엄
약사儼若思는 예기 곡례 편의 첫 구절이다. 선비의 태도가 사색하듯이
엄숙해야 함을 말한다. 그리고 무불경無不敬은 매사에 공경해야 함을 말
한다.
18) 孟子. 告子(上). 學問之道 無他 求放心而已矣.
3. 경공부
명경明鏡과 지수止水는 밝은 거울과 물결이 움직임이 없는 상태를 말한
다. 거울이 어떤 사물이 비치면 그대로 비치고 그 사물이 사라지게 되면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이 마음도 이와 같이 외물에 휩쓸리지 않는 상태
를 유지해야 함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을 때 마음은 외물에 접촉하게 될
때 그 대상에 맞게 감응할 수 있다.
명경明鏡 아래에 “마음을 가라앉혀 상제를 우러르듯” 한다고 했다. 그
리고 지수止水의 아래에 “문을 나서면 손님처럼 점잖고 일을 하는데 있어
서는 제사를 모시는 듯 조심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이 두 구절은 주자의
<경재잠敬齋箴>에서 경을 강조하는 말을 가져온 것이다. 전자가 고요할
때의 마음가짐이라면, 후자는 움직일 때의 마음가짐이다. 정붕은 고요할
때와 움직일 때 모두 명경지수와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아래의 야복몽매夜卜夢寐와 주험처자晝驗妻子는 경전에서 인용한 내
용은 아니다. 하지만 이 두 구절은 실생활에서 살펴야 할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다. 밤에는 꿈과 잠자리에서 밝은 마음가짐을 지녀야 하며, 낮에는
처자를 대하는데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림 없이 고요한 마음을 지
녀야 한다는 내용이다.
그 아래에는 “마음에 잊지도 말고(심물망心勿忘) 조장하지도 말라(물
조장勿助長)고 적고 있다. 이는 맹자에 나오는 말로서 앞에서 구방심求放
心과 같이 마음을 수렴하는데 생각을 하고,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만
마음이 산만하지 않도록 하는데 인위적으로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다. 이 말은 맹자가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법인데 성리학자는 경敬공부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삼았다.
4. 수도修道의 기본구조
정붕은 마음 공부를 위한 구체적 절목으로 구용과 구사를 들고 있다.
구용九容은 예기 옥조 편에 나온다. “발가짐은 무거워야 하며(足容
重), 손가짐은 공손해야 하며(手容恭), 눈가짐은 단정해야 하며(目容端),
입을 함부로 늘려서는 아니하며(口容止), 목소리는 조용해야 하고(聲容
靜), 머리는 반듯하게 가져야 하고(頭容直), 기상은 엄숙하게 가져야 하고
(氣容肅), 선 모습은 덕성스러워야 하고(立容德), 얼굴 표정은 장엄해야
한다(色容莊).19) 구용九容의 공통적인 글자는 용容이다. 용이란 모습, 모
양, 형태, 행동을 의미한다. 이 때 용의 주체는 군자이다. 군자라는 도덕적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사소한 기본적인 몸의 모양을 이야기함으로써
구용은 경敬을 유지하기 위한 수련의 방법임을 알 수 있으며 주자도 구용
을 경의 조목이라고 말하였다. “경은 자신의 자아를 체험하고 그것을 지
켜나가는 함양 공부의 방법으로, 그 주요 내용은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여
달아나지 않도록 하는 것(主一無敵)이며,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는 것이다”20) 경은 주일무적 이외에도 경외敬畏, 수렴신심收
斂身心, 정제엄숙整齊嚴肅, 수사전일隨事專一 등의 다양한 함의를 갖는
다.21)
그리고 구사九思는 논어 계씨 편에 나온다. “보는데 있어서는 분명
하게 보고자 하고(視思明), 듣는 데 있어서는 잘 듣고자 하고(廳思聰), 표
정은 온화하고자 하고(色思溫), 태도는 공손하고자 하고(貌思恭), 말은
충직하고자 하고(言思忠), 일은 공경스럽게 하고자 하고(事思敬), 의문이
있을 때는 묻고자 하고(疑思問), 화가 날 때는 뒷 끝이 어려울 것을 생각
하고(忿思難), 이득이 있을 때는 의리를 생각한다(見得思義)”는 구용은
19) 禮記. 옥조 .
20) 蒙培元. 2008. 성리학의 개념들. 홍원식 외 역. 예문서원. 835쪽.
21) 위의 책. 839쪽.
용容이 명사로서 사용되어 몸의 상태를 의미한다면, 구사九思에서 사思는
뒤의 명사를 실현하는 동사의 의미를 지닌다. 구사에서 사는 마음속의 아
홉 가지 행위에 대해 조절, 통제, 선택하여 올바른 행동이 원활히 나오도
록 하는 작용이다.22) ‘시視, 청廳, 색色, 모貌, 언言, 사事, 의疑, 분忿, 견
득見得’은 모두 내 몸과 일상적 삶의 경험이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아홉 가지가 어떤 방식으로 실행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방
향성을 ‘명明, 총聰, 온溫, 공恭, 충忠, 경敬, 문問, 난難, 의義’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사는 이 두 가지를 연결하여 우리의 몸과 행위가 바람직한
구체적 실천으로 나아가도록 돕는 작용을 한다. 무엇보다도 구사의 사는
실천의 사思라고 할 수 있다.
예기에 나오는 구용과 논어에 나오는 구사를 함께 다룬 책은 주희
와 유청지가 엮은 소학이다. 소학小學 경신敬身편에서는 심술지요心
術之要, 위의지칙威儀之則, 의복지제衣服之制, 음식지절飮食之節의 네 가
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구사는 심술지요의 한 방법으로, 구용은
위의지칙의 한 방법으로 제시되고 있다. 조선유학사에서 처음 구사와 구
용을 함께 거론한 학자를 율곡 이이로 간주한다. 이이는 심술지요와 위의
지칙의 여러 방법들 중에 특별히 구용과 구사를 골라 지신持身의 방법으
로 제시했다. 하지만 이이 이전에 정붕은 구용과 구사를 심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였다.
5. 수도의 결과
안상도 마지막에는 태(動心)와 욕(忍性)을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 수도
修道를 게을리 했을 때 가져올 결과이다. 태는 수도를 게을리 하는 경우이
22) 서명석. 2013. 사람됨 교육의 관점에서 바라본 구사九思)의 세계 . 인격교육7(2). 한
국인격학회. 77쪽.
며, 욕은 헛된 욕심을 말한다. 동심動心과 인성忍性은 맹자 고자장
하에 나오는 구절이다. 맹자는 “하늘이 장차 이 사람에게 큰 일을 맡기려
하면 반드시 먼저 그 심지를 괴롭게 하고, 그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그
체부를 굶주리게 하고, 그 몸을 궁핍케 하여 행함에 있어서 그가 하는 바
를 흩트리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 까닭은 마음을 격동시키고 성질을 참도
록 하여 그가 능하지 못한 바에 보탬이 되게 한다”라고 하였는데 동심인
성에 관해 주희는 “그 마음을 크게 움직이게 하고, 그 성품을 굳게 참는
것을 말한다”23)고 하였다. 게으름이 생길 때에는 마음을 격동시켜 게으
름을 떨쳐버리고, 욕심이 생길 때에는 성품을 굳게 참아서 극복해야 한다
고 보았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태평스럽게 지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
고”, “노력해서 법도를 따르도록 노력하면 저절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음”
을 이야기하고 있다.
정붕은 역경, 예기, 논어, 맹자 맹자 등에서 수신과 관련된 구
절을 발췌해서 심학의 이론구조(동과 정, 내와 외, 체와 용, 존양과 성찰)
의 이원론적 구조로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양자가 대비된다는 것은 아
니다. 주희는 심의 공부 방법을 일동일정一動一靜의 전체로 보면서 일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항상 수양공부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듯 안상
도는 정붕의 도학 실천 지침서이다. 김굉필이 ‘소학동자’라 불렸듯이, 정붕
은 안상도를 보면서 도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주역의 경이직내敬以直
內, 의이방외義以方外를 강령으로 삼고 구용과 구사를 절목으로 하여 자
신을 성찰하고자 하였다.
그는 경공부를 통해 생활에서 절의정신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정붕이
청소부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하였다. 그 때 그의 친구이자 영의정 직을
맡고 있던 성희안이 정붕에게 잣과 꿀을 보내달라고 하자 정붕은 “잣나무
는 높은 산에 있고, 꿀은 민가의 벌통에 있는데, 태수가 어떻게 그것을 구
23) 朱子. 孟子集註. 告子章下. 謂竦動其心. 堅忍其性也.
하고자 하는가? 라며 거절하였다. 성희안은 이 글을 읽고 부끄러워하면서
정붕에게 사과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청렴한 정신은 모두 그의 수행
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정붕은 청소부사로 재직 중에 세상을 떠났다
선산 선영에 장사지냈는데 가난하여 장례를 치룰 수 없을 상황이라 경상
도 관찰사가 주변 수령들과 상의하여 장례를 도와주었다고 한다.
Ⅳ. 정붕이 박영에게 미친 영향
정붕은 김굉필에게 도학을 계승하고, 송담 박영에게 전수하면서 여러
차례 사화로 단절될 위기에 처한 도학의 맥을 이을 수 있게 하였다. 송당
박영은 고조부 박신생이 선산에서 거주하면서 선산과 인연을 맺게 되었
다. 그는 아버지 박수종과 어머니 양녕대군의 딸 사이에 태어난 왕실의 외
손이기도 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거주하다가 12세에 조부모와 부모를 모
두 잃고 선산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선산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21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가업을 계승하고자 하다가, 1496년에 관직을 버리고 선
조의 터전인 선산에 내려와 도학을 배우고자 하였다.
박영은 선산에 내려와 선산에 유학자 가문으로서 당시 학문이 성숙한
정붕에게 대학을 배웠다고 한다. 정붕이 박영을 처음 만났을 때 미봉산 너
머 청산을 가리키며 “저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라고 묻자 박영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봉은 “자네는 아직도 충분히 독서하지 않았다”라
고 하자, 박영은 그 이후 4-5년 학문에 정진하고 난 후에 다시 정붕을 찾
아갔다. 정붕이 다시 이전의 질문을 하자 박영은 “뒷산이 앞산이니 어찌
서로 다르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붕은 그 대답을 듣고 박영의
학문을 인정하면서 함께 학문을 논하였다고 한다. 훗날 박영의 제자들은
이 사건을 ‘청산대학’이라 칭하였다.
정붕이 박영에게 전수한 학문이 대학임을 알 수 있다. 정붕이 대학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박영과의 대화를 통해서 유추해
볼 때 그는 대학에도 정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에서 대학은 소
학과 함께 읽어야 할 책이다. 신당이 말하기를, ‘옛사람들의 학문하는 차
례가 어찌 다른 것이 있겠는가? 그대가 먼저 소학을 보고 또 대학을
읽어 기초를 견고하게 한 다음에야 학문을 하는 것이 어긋나지 않으리라’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정붕은 박영에게 소학과 대학을 모두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이황은 소학과 대학은 서로 기다려야 완성하는 관계이며, 한 가지이면
서도 두 가지이고, 두 가지이면서 한 가지인 관계라고 하였다. 소학과
대학의 상호 관계는 서로 기다리고 함께 행하여 한 가지도 결할 수 없
는 관계에 있다고 본다.24) 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정붕은 박영
에게 소학과 대학을 모두 중시하는 말을 남겼지만, 남아 있는 양자 간의
대화는 대학 관련 이야기가 많다. 일찍이 박영은 스스로 지은 ‘자찬自撰
묘표墓表’에서, 경신년(1500년)에 정붕과 더불어 몇 달간 송재松齋에 머
물며 책상을 마주하고 옛글을 논하였는데, 이때 가슴 속에 특별히 한 乾坤
(세계)이 있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25) 정붕과 함께 하여 책상을 마주하
고 옛글을 논한 뒤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말은 그의 학문(도학) 형성에
있어서 정붕의 영향이 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박영이 선산에서 본격적인 강학 활동을 개시한 시기는 1522~1538년
에 이르는 기간이며, 청산대학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정봉에게 대학을 배
운 이후에 도학의 지침서로 활용한 경전은 대학이다. 이 점은 그와 교유한
동지이자 조선 성리학의 대두로 추앙된 이언적이 대학연의를 연구한 것과
일맥상통한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저서 중 대학경일장연의가 가장 방
24) 李滉. 聖學十圖. 卷3. 小學圖說.
25) 松堂先生文集 卷1. ‘墓表’(自撰).
대한 것으로 미루어 그 또한 평생 동안 대학에 침잠했다고 생각된다. 그는
항상 이른 새벽에 일어나 세수하고 빗질하고 옷을 가듬고 꼿꼿하게 앉아
마음은 신령스러운 모든 이치를 갖추고 만사에 대응한다는 구절을 몇 차
례 암송한 다음 강론을 시작했다고 한다. 박영이 대학을 중시하는 학문적
태도는 당시에 활동한 이언적과 유사한 면이 있다는 점에서, 조선의 도학
이 소학을 중시하는 분위기에서 대학으로 옮겨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때 대학에 대한 이해는 깊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청산대학’이나 내 마음에 건곤이 있다고 한 대화는 이후 이황
과 이이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이이는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다.
고 관찰사 김취무의 발문을 쓴 것이 이미 있으니, 그 뜻을 발휘하여 유감
되는 것이 없다. 다만 김공이 박송당의 말을 인용한 것을 보니, 학문을 하는
방법은 자득이 있은 뒤에야 조존 수양할 수 있으니 만약 학문하여 자득한 것
이 없으면 무엇을 조존하고 수양하겠는가? 라고 했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의
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는 반드시 조존하고 수양한 뒤에야 자득하게 되는
것이다. 조존, 수양하지 않는 데 어떻게 자득할 수 있겠는가? 또 소위 존양이
라는 것은 본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다. 성이란 내가 본래부터 갖
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곳에서 얻을 수 있겠는가? 그런 까닭으로 맹자의 이
른바 자득이라는 것은 깊이 나아간 뒤에야 있게 된다. 만약 학자로 하여금
먼저 자득하기를 구한 뒤에 존심양성하게 한다면, 이단의 학문에 빠지지 않
을 자가 드물 것이다. 송당의 언론과 풍자는 세상에 많이 전하지 않는데, 일
찍이 퇴계가 송당의 학문을 선의 기미를 띠었다고 평했다고 들었느니, 혹시
이것을 지적한 것이 아니겠는가?26)
위의 율곡은 정붕과 박영의 대학 이해는 불교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
았다. ‘청산대학’에 관한 대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양자의 대화는 선학 조
사들의 화두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이는 유학은 수신을 통해서 성인의 경
26) 李珥. 擊蒙編跋. 栗谷全書.
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이지 갑자기 깨달음을 추구하는 학문과는 다름을 말
해 주고 있다. 실제로 주자도 이와 유사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주자가
불교에 천착하다가 유학으로 전환하면서 유학의 정체성은 리일理一이 아
니라 분수分殊에 있다고 하였다. 즉 상달에 있는 것이 하학에 있음을 지적
한 적이 있다. 그들이 대학의 격물치지를 통해 내 마음의 본체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본체는 일상생활의 다양한 구체적인 덕목을 부정하지 않는
것에 성리학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본다. 정붕과 박영은 1540년
50년대 이후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한 후대의 학파들 즉 서경덕의 화담학
파 이황의 퇴계학파 조식의 남명학파 등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송당학파는 을사사화에 피해를 입은 동시에 학파 구성원의 노쇠 학광의
학문적 학계, 제자들의 학문 계승 의지의 부재 등으로 쇠퇴의 길로 접어들
면서 1세대 학자들은 퇴계학파로 2세대 학자들은 유성료의 서애학파 및
장현광의 여헌학파로 흡수되었다.
Ⅴ. 나오는 말
위에서는 선산 지역 유학자 정붕의 도학의 전개 과정을 논의하였다. 논
의에서 우선적으로 선산 지역의 도통에 관해 논의하였다. 선산 유학의 도
통관에 있어서 정붕은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김굉필에게 도학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박영의 송당학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래
서 논문에서는 정붕이 김굉필에게 도학을 배운 학문적 영향을 <한빙계>
와 정붕의 <안상도>를 비교 분석하였다. 정붕은 김굉필의 한빙계에 근거
해서 자신만의 잠도를 만들어 성학의 공부를 하였다. 김굉필이 ‘소학동자’
라 불릴 정도 일상생활에서 실천과 수신을 중시하였다면, 정붕은 <안상
도>를 통하여 일상생활에서 도학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는 박영
의 성리학에 영향을 미쳤다. 정붕과 박영의 대화 내용 대부분 대학에
관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볼 때, 박영은 정붕에게서 대학의 정수를 배웠
다. 정붕과 박영은 선산 지역의 성리학 계보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퇴계는 조선성리학의 계보를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
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론을 수용하면서 이언적을 도통의 계보에
올렸고, 이황의 문인들은 퇴계를 도통에 포함시키면서 조선 성리학의 도
통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선산지역 유학자들은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로 이어지는 도통을 거부하면서 김굉필의 학문을
정붕과 박영이 계승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도통 계보는 다소 차이가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선도학사에서 정붕과 박영의 위
상도 적지 않다. 그래서 조선성리학의 도통을 언급할 때에 그 시기에 활동
한 대표적 유학자를 함께 언급할 필요도 있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에는 김
굉필→정붕 조광조→박영. 이언적-이황으로 볼 수도 있다. 조광조가 김굉
필의 수제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조광조는 김굉필의 소학을 사회 실천
운동으로 전개하였다. 이에 반해 정붕은 사회실천 운동보다는 수신 공부
에 천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그의 안상도에 대한 분석에서도 알 수 있
다. 그리고 정붕이 대학을 박영에게 전수하였고, 박영이 대학을 중시했
다는 사실은 조선성리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 당시 이언
적도 대학을 중시하였다. 이와 같이 박영이 활동하던 시기는 소학 중
심에서 대학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붕의 <안상도>가 퇴
계의 경공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퇴계의 경공부에서 보면, 정
붕의 <안상>도는 분명히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정붕이 퇴계 이전
의 학자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소홀히 다룰 수만은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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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11. 14. 접수 : 2016. 12. 21. 수정 : 2016. 12. 22. 채택)
권상우
계명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
학원 철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하였으며, 계명대학교 교양교육대학에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전통과 현
대의 대화를 위한 동양의 지혜 등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