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4장
율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의 성령을 통해서만 아들과 상속자가 된다
(찬송 268장)
2023-9-7, 목
맥락과 의미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이 믿음에서 떠나고 있습니다. 교인 중에 거짓된 복음에 영향을 받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의식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러한 생각을 돌이키기 위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이 아드님과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심(1-11절)
2. 참 사도인 바울과 친근하게 지내어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권면(12-20절)
3. 노예의 길과 자유의 길, 하갈과 사라의 비유(21절-5장 1절)
1. 하나님이 아드님과 성령님을 보내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심(1-11절)
1) 독생자와 성령님을 통해 주시는 자녀와 상속자의 신분(1-7절)
1-7절은 3:23-29에 이어서 말합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던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습니다(3:23-29). 주인의 아들이 어릴 때는 후견인이나 청지기의 보호와 감시를 받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언약 백성도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어린이처럼 대우를 받았습니다. 여러 제사 제도나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됨을 경험했습니다.
마침내 구원의 계획을 이룰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4절).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사람이 받아야 할 율법의 저주를 짊어지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주인의 아들이 자라면 스스로 독립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이 십자가에서 구원의 일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아들의 복음을 믿게 하셨습니다. 그 아들을 믿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들의 성령님을 우리 마음에 보내주셨기 때문에 된 일입니다(6절). 하나님은 아드님을 이 땅에 보내셨을 뿐 아니라(4절), 우리에게 그 아들의 영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드님을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할 “유업을 받을 자”(7절)가 되었습니다. 하늘 나라와 모든 좋은 것을 상속할 자로 삼아주셨습니다.
2) 다시 율법의 종 노릇하지 말라(8-11절)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었습니다. 다시 할례나 날과 달과 절기 등 구약의 “의식법”을 반드시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들은 “초등 학문”(9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주신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뒤에는 그런 것을 다 폐지했습니다. 그런 것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면 그것들의 종이 됩니다.
오늘날은 성도가 구약 율법의 노예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산 기도, 40일 금식, 십일조, 술 담배를 절제하는 것 등에 많은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유익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자유를 잃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을 돕는 선행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공로가 된다고 생각하면, 거기에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신 그 은혜만을 의지합시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신 것을 의지합시다. 은혜로 자녀가 된 것을 굳게 붙듭시다.
2. 참 사도인 바울과 친근하게 지내어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권면(12-20절)
12-20절은 바울과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과의 개인적 관계에 대해 말합니다. 앞과 뒤에서는 율법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가르침과 이 개인적 친분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과 복음으로 좋은 관계를 맺었습니다. 그 관계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다시 돌아오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처음 전도하러 왔을 때 몸에 병이 있었습니다.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도 갈라디아 성도들은 그런 사도 바울을 천사처럼 환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주의자들의 꼬임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은 구약의 의식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16절). 바울이 하는 이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합니다. 바울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갈라디아 성도들이 바울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바울과 교인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습니다. 교인들이 자기들을 열정적으로 따르게 만들려고 합니다(17절). 문제는 갈라디아 지역 교인들이 그들을 향하여 열정을 내며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18절). 율법주의자들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분열을 일으키는 태도가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17절).
그들과 달리 바울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성장하는 것이 바울이 수고하는 목적입니다. 이를 위해 출산과도 같은 수고를 합니다. 성도들이 율법을 외식적으로 지키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이렇게 수고합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적 성품이 자라도록 수고합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영적 성장을 이루기 위해 이렇게 희생하는 바울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을 따라야 하겠습니까? 달리 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게 하는 바울의 복음을 따라야 합니까? 아니면 자기들을 따르게 하는 율법주의자들을 따라야 합니까? 당연히 바울과 바울이 전하는 은혜의 복음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3. 노예의 길과 자유의 길, 하갈과 사라의 비유(21절-5장 1절)
21-23절: 사도 바울은 창세기의 역사적 사실을 비유(알레고리)로 사용합니다. 율법의 길과 복음 약속의 길을 대비시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은 노예의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인 하갈은 육체를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보통 아이가 태어나듯이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의 원래 아내 사라는 이삭을 낳았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을 따라 기적으로 태어났습니다.
종은 육체를 따르는 아이를 낳았고 자유자인 여자는 약속으로부터 아들을 낳았습니다. 약속은 성령님과 관계되어 있습니다(3:14). 그리고 육체는 자연적인 것인데, 악한 경향을 말합니다. 그것은 성령님과 싸웁니다(5:16-25).
24-27절: 두 여인을 두 개의 언약으로 비유합니다. 두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과 예수님의 언약, 두 가지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는 노예 언약과 복음으로 자유롭게 하는 언약이 있습니다.
노예 언약은 여종 하갈과 같습니다. 그녀는 또 다른 종인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 거주하던 아라비아 사막에(창 26:18) 시내산이 있습니다. 거기서 구약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는 자들은 율법의 노예가 됩니다. 율법의 세계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입니다(25절).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이 가려는 길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이 열렸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서 성도들은 자유를 누립니다. 율법의 정죄로부터 벗어났습니다.
28-30절: 자유자의 어머니 사라는 아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27절, 사 54:1) 명령했습니다. 그녀는 “홀로 사는 자”처럼 처량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자녀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약속의 자녀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28절) 이방인들이 약속의 자녀라고 합니다. 정통 유대인이라고 자랑하는 자들은 율법주의에 빠져서 종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는 약속의 자손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방인 성도의 수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종의 아들 이스마엘이 자유자의 아들 이삭을 놀리고 핍박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께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요청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 21:9,10).
율법주의자는 종의 자녀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 땅의 예루살렘에서 갈라디아로 왔습니다. 자신들에게 종교적 정통성이 있다고 내세웁니다. 그들은 성도들과 바울을 핍박하고 있습니다. 큰 권세를 지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쫓겨날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한 것 때문에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있을 곳이 없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입니다. 하늘에 있는 참된 예루살렘에 속한 자들입니다. 복음 안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입니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핍박받기도 하고 연약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상속할 자들입니다.
그런데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은 스스로 자유를 버리고 종의 신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어서 빨리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계속해서 지켜야 합니다.
5장 1절: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멍에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것처럼, 종의 멍에를 메지 맙시다.
믿고 복종할 일
우리 시대에도 율법주의적 행동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외적인 행동과 사람의 선행을 자랑합니다. 그것이 마치 구원을 받는 데 공로가 되는 것처럼 여깁니다.
하지만 자기의 선한 행동을 자랑하는 자는 율법의 저주 아래 있습니다. 실제로는 율법을 절대로 지키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에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율법주의자와 같이 되지 맙시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성령 주심을 의지합시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와 기쁨을 누립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25절,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쉬-스테케오)”은 4:3,9에 있는 “초등학문”(스토테이온)과 어원이 같습니다. 이렇게 같은 단어를 써서 초등학문을 바울 당시 예루살렘의 율법주의자들과 연결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