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리쿠션 세계 챔피언 이상천
당구 많이 쳐본 독자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정말 생초보 아마추어 동네 당구인으로 300점 실력에 오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200점 넘긴 지 십여 년, 더러 상대하기 쉬운 동료들에게 250점을 놓고 자장면 내기 하면서 '언젠가 반드시......' 하는 마음으로 300점을 갈망해 왔으나 십여 년 째, 그 자리다. 어쩌다 너댓점 치다가 '키스'(당구대 안의 공이 원치 않게 맞부딪쳐 실패가 되는 샷) 한번 피해보려고 용 쓰다가 제 이닝을 넘겨 주고 마는 초보 주제에 정말 300점은 가당치 않은 경지다.
그럼에도 잠시나마 정주하게 되는 사무실을 오가게 되면, 인근의 '물 좋은' 당구장부터 찾아보는데, 여기서 '물'이란 당구대 사이가 제법 널찍하고, 조용하고, 더러 고수들의 빛나는 샷을 구경할 수 있는 당구장을 말한다. 신사동 사거리의 간장게장 식당 많은 곳의 큰 빌딩 지하 당구장이 그랬고, 종로 5가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던 보령빌딩 맞은편 유창선 당구클럽이 그랬다. 동네 사거리에 사람 이름 내건 당구장이 있다면 대체로 프로 선수가 운영하는 곳인데 그곳이 바로 현역으로 활약하는 유창선 프로의 당구장이었다.
90년대 말에 그 당시의 유행대로 음악평론가 강헌, 문화평론가 이윤호, 영화평론가 김정룡, 작곡가 문대현, 영화감독 이정욱 등의 선배들과 '문화콘텐츠'로 뭐 좀 할 게 없을까 하고 보령빌딩 17층에서 날마다 모였는데, 일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점심 저녁을 유창선 당구장에서 자장면 내기하면서, 그때는 200점을 갈망하며 소일 했었다.
임윤수 프로(사진 수원일보)
매일같이 '죽돌이'가 되어 치고 또 치면서도 늘 그 형편이니까 유창선 프로가 보다 못해 넌지시 다가와서 한 가지 가르침을 주셨다. "초크 칠할 때, 큐 위에다 그렇게 박박 문대는 게 아녜요. 손가락을 대면 적당히 묻어날 수 있도록 부드럽게 문질러주세요." 그런데, 놀라워라. 진실로 샷이 부드러워지고 원하는 곳에 가서 공이 멈추는 듯했다.
그때 이후로 내 당구 실력은 일취월장, 200점을 단숨에 돌파했는데, 아쉽게도 도모했던 일이 무산되어 그 당구장을 떠나게 되었고 그래서 여지껏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누군가 초크 칠 다음의 필격 한 수 가르쳐 주면 좋겠건만......
내 사는 곳은 일산인데, 마두역와 뉴코아백화점 사이에 뒷 길이 있다. 몇 해 전에 이사 와서 그 뒷길 자전거 타고 가다가 어느 건물 6층의 간판을 바라보게 되었다. '임윤수 당구 클럽'. 나는 곧장 6층으로 올라갔다. 천하의 고수가 운영하는 당구장이 바로 내 집 앞에 있었던 것이다. 심야 케이블 채널에서 신중한 샷을 날리던 임윤수 프로를 '알현'하기 위해 나는 원래 목적을 잊고 곧장 올라갔다.
과연 현역 프로 고수가 하는 당구장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널찍했고 조용했고, 큐대와 당구대는 단단하고 매끄러웠다. 그곳에서 임윤수 프로만이 아니라 2002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로 김경률, 강동궁, 최성원 등과 국내 리그를 선도하고 있는 황득희 선수의 날카로운 눈매도 이따금 볼 수 있다.
한국 당구의 상징 이상천
임윤수 프로는 중3 때 처음 당구를 쳤고 고3 때 300점에 올랐으며 그때부터는 자연스럽게 쓰리 쿠션(공식 명칭은 케롬)에 몰두하였다. 이미 동네를 평정한 임윤수 프로는 당대의 고수를 찾아다니며 한 수를 배우고 또한 일합을 겨루며 일취월장하였고 1989년에 스승 박병문을 만나면서 프로의 세계에 들어섰다.
프로 데뷔 이후 첫 출전한 90년 서울 월드컵대회에서 8강에 오르면서 당구계의 신성이 되었고 98년 방콕 아시안게임 당시에는 대표 선수 김무순과 김정규의 스파링 파트너가 되어 또한번 고수의 길로 등정하게 된다. 2002 아시안게임 때는 '2차 선발전'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종전에서 아쉽게 대표 선수가 되지 못했다.
임윤수 프로는 차분한 성정에 언제나 부드러운 음악을 들으면서 일상의 리듬을 유지한다. 우연히 공원 산책로에서 마주친 적 있는데,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걷고 있었다. '승리 보다 패배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하는 임윤수 프로는 지난 2005년 제4회 리베르떼배 전국 3쿠션 당구대회 우승을 한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다.
자주 들르지 못하지만, 갈 때마다 한 수씩 배운다. 초크 칠도 다시 배우고, 그립도 다시 배우고, 양 발 스탠스도 다시 배우는데, 실력은 전혀 늘지 않는다. 그냥, 뭔가 배운다는 그런 기분을 느껴보는 정도다. 어깨에 힘 빼고 부드럽게 샷 하는 것? 그것은 아직 엄두도 내지 못할 경지다. 허구헌날 300점 고지 밑에서 허덕대면서 자장면 값 다 내고 있는 것이다.
이상천 선수의 사인
바로 그 당구 클럽에 몇 해 전에 한국의, 아니 세계의 최정상 고수가 자주 들렀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은 비극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그 최고수는 대한당구연맹 회장이었는데 그만 위암 판정을 받아 불가피하게 일산 국립암센터로 오게 되었고 투병 중에 조금 시간을 내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임윤수 당구 클럽을 찾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10월 19일은 바로 그 세계 최정상 초고수가, 지난 2004년에 암 투병 끝에 타계한 날이다. 바로 '쌩 리' 이상천 프로다.
수재들만 모인다는 경기고에서도 내내 상위권을 유지하면서 서울대에 진학했던 이상천은 재학 중이던 1971년에 처음 큐대를 잡아 불과 3개월 만에 300점에 도달했으며 사실상 더 이상의 점수 계산이 불필요한 경지를 뜻하는 2000 점에도 쉽게 도달했다. 30분 내외에 이 정도 점수로 경기를 끝낸다는 의미인데, 이를 산술 계산하면 한 큐에 대략 500점 정도를 치는 것이다.
당구에 푹 빠진 이상천은 자비로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등 변두리 동네의 하위 문화에 그쳤던 당구라는 불모지에 몰입하여 대학마저 중퇴하고 프로의 길에 나섰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국제식 대대가 설치되어 있는 논현동 반도당구장에서 언제나 큐대를 들고 고수나 하수를 가리지 않고 실전에 몰입했던 그는 어느 재미교포의 권유로 도미하게 된다.
1995년 한국 방문한 세이그너,클르망, 이상천
혜성처럼 등장하여 1978년에서 1987년까지 무적의 십년 세월을 보낸 이상천은 1987년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9년에는 세계의 고수들이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거쳐가는 관문인 벨기에 스파 그랑프리에 출전하여 쓰리쿠션 15점을 단 한 큐에 치는 바람에 관전하던 벨기에 국왕이 기립박수를 보내기도 하였다.
이렇게 충격의 데뷔를 한 이상천은 1993년에 세계투어 성적을 종합한 랭킹에서 1위에 올랐고 이후 세계당구프로협회(BWA) 소속으로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최정상을 누렸다. 어떤 면에서는 박찬호와 박세리 이전에 세계 프로 무대를 평정했던 월드스타였다.
이상천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미국에서 열린 각종 대회에서 41게임 연속 승리를 했는데 이는 윌리 호프의 1941년 36게임 기록을 53년 만에 깬 것이었다. 1994년 1월 10일에는 벨기에 겐트에서 벌어진 월드컵 3쿠션 파이널대회 결승에서 코드롱 프레드릭을 3:1로 제압하고 최초로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세계 톱 랭커로서 이상천은 연중 의무 경기 최소 20회 이상을 비롯하여 각종 초청 경기에 출전하며 상금, 출전비, 개런티, 스폰서비 등을 확보했던 프로 중의 프로였다. 이를 발판으로 이상천은 뉴욕에 미니바, 카페, 오락실 등을 갖춘 복합 당구 클럽 '케롬 카페'를 경영하여 큰 돈을 벌기도 했다.
이상천과 토브욘 브롬달
1999년에 <뉴욕 타임즈>는 이상천을 ’쓰리쿠션계의 마이클 조던’이라고 표현했으며 미국당구협회(BCA)는 그의 이름을 명예의 전당에 헌액하였다. 이는 단지 그의 성적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침체에 빠졌던 미국 내 쓰리쿠션(케롬) 종목에 이상천이 일대 중흥을 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BCA는 지난 1990년부터 2001년까지 12년 연속으로 미국당구선수권대회를 제패한 이상천을 지난 2007년 5월 15일에 미국 라스베이거스 리비에라호텔 카지노에서 명예의 전당 헌액 기념식을 가졌다. 아울러 그를 추모하는 '쌩 리 인터내셔널 오픈(Sang Lee International Open)'대회가 2006년에 열렸고 이 대회는 3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다. 아래 주소에 가면 이 대회의 전체 개요와 이상천 선수의 프로필 및 주요 경기 장면을 볼 수 있다.
http://www.sangleeinternational.com/2008.html
이상천을 기리는 '쌩리인터내셔널오픈2008'에서 최장신의 네덜란드 선수 더크 스닙의 모습
이상천은 2004년 6월에 제4대 대한당구연맹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청소년 탈선 장소라는 식으로 알려진 당구장에 대한 선입관을 없애기 위해 온갖 기획과 노력을 하였고 한국 당구를 국제적인 흐름에 맞추기 위해 다양한 국내외 친선대회를 주선하였으며(그 일환으로 자넷 리가 방한하기도 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전국 대회와 랭킹을 만들고 생활 스포츠로서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했다. 그렇지만 당구대에서 가능했던 일들이 그 바깥에서는 쉽지 않았다. 갑자기 찾아온 위암이 결정적으로 방해했다. 그는 2004년의 오늘, 10월 19일 오후 2시에 51세의 나이로 타계하였다.
고수의 길을 걸은 이상천
어느 날 나는 임윤수 프로에게 '선생님께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인지요?' 하고 물어보았다. 임윤수 프로는 본인의 경기 대신 이상천 프로의 경기를 들려줬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느 국제대회의 결승전, 상대는 유럽의 고수. 마지막 한 점 남은 상황에서 이상천은 한쪽 구석의 수구를 쳐서 크게 각을 그리면서 4면을 다 맞은 후 반대 편 구석의 목적구에 이르는, 익숙한 길 대신에, 국제 대회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한 쪽 면에만 몇 차례 쿠션이 되어(동네 당구의 속어로 황오시라고 부르는) 목적구에 이르는 샷을 구사하여 경기를 끝내 버렸다.
그 경기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았던 임윤수 프로는, 투병 중에 이따금 클럽에 들른 이상천 프로에게 한번 여쭤보았다고 한다.
"스승님, 왜 그때 그 상황에서 그 샷을......?"
이상천 프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어, 그거? 그냥...... 그냥 한번 쳐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