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 말엽의 대석학인 고운 최치원을 든다. 최치원은 그 높은 학문이 이 나라는 물론 멀리 중국까지 널이 알려진 성리학자일뿐 아니라 동방 문학의 시초를 이룬 문호로도 이름 높다. 그런데 이 최치원은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있다.
원래 경주 최씨의 시조는 금빛나는 금돈에서 낳았다 하여 일명 '돼지 최씨'라고 불리어 오는데 이것은 단군이 곰에서 낳았다는 전설과 또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박속에서 낳았다는 우리 전래의 민족설화와 함께 이 경주 최씨에 관한 것도 중요한 민족설화의 하나가 되어있다. 그 설화가 지금은 행정상으로 군산시에 속해 있는 고군산열도(古君山列島)의 하나인 내초도(內草島)와 연관지어져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최치원의 아버지가 하루는 내초도란 섬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누런 황돼지한테 붙들려 바위밑 토굴로 끌려가서 몇 달 동안을 사는 동안에 황돼지에 태기가 있어 열달 후에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이 점점 자라나자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육지로 나오려고 해도 못나오고 황돼지와 같이 짐승처럼 살게 되었다. 하루는 어미 돼지가 이웃 섬으로 사냥을 나가고 없는새에 다섯살 난 아들에게 아버지는 사실 이야기를 다하면서 치원이 너를 육지로 데리고 나가 공부를 시키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나 빠져나갈 재주가 없다고 한탄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은 어미돼지가 날마다 해다 놓은 나무토막으로 몰래 배를 엮어서 만들어 타고 나가자고 제의했다. 그리하여 어느날 돼지가 또 산에 나무를 하러 나간 사이에 나무를 발처럼 엮은 뗏목을 타고 육지로 나오는데 어느새 어미돼지가 알고서 헤엄을 쳐 쫓아오고 있었다. 금새 앞발이 배에 닿을 듯하자 아들이 미리 잘라서 실어 놓은 나무토막 하나를 던져주었다.
욕심이 많은 돼지는 나무토막이 떠내려 갈까봐 아까와서 얼른 물어다가 섬에다 갔다두고 또 쫓아오자 아들은 계속 나무토막을 던져주어 끝내는 어미 황돼지가 기진맥진해서 죽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육지에 당도한 아들은 머리가 총명하여 아버지의 가르침에 열심히 공부해서 뒷날에 훌륭한 인물이 되었으니, 그가 바로 경주 최씨의 시조요 신라의 대문장가였던 최치원이라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 의해서 군산시 일대에 경주 최씨는 금돼지의 자손이라는 말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내초도에는 금돈시굴이라는 굴이 아직도 그 흔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경주 최씨가 금돈시굴에서 낳았다는 전설상의 최치원은 바로 내초도안에 아직도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금돈시굴이 출생지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최치원은 전설상으로만 전해지는 인물은 물론 아니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여지승람(輿地勝覽)》에는 그의 뛰어난 사적을 정사에 담고 있고 또 그만한 출중한 인물이기에 그만한 전설상의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임에 분명하다.
다만 그의 출생이 오늘날에 와서 믿어질 수 없는 금돼지에서 낳았다는 것인데 이것이 내초도에 있는 금돈시굴과 묘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는데 비상한 흥미를 끌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군산지방의 인근인 옥구 일대는 최치원과 얽힌 사연을 여러 가지 문헌상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금 군산시 상평마을에 있는 자천대(紫泉臺)가 바로 그것이다. 《옥구구지(沃溝舊誌)》에 나타난 이 자천대는 최치원이 일찍 당나라에서 큰 벼슬과 학문을 닦고 나라에 돌아왔을 때 세상이 극도로 어지러워 민심이 흉흉하자 그 홀로 이 자천대에 올라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독서삼매로 시름을 달랬다는 것인데 애당초 이 자천대는 군산의 현 비행장 안에 있었던 것을 상평마을에 옳겼다는 것으로 원자천대(元紫泉臺) 부근에 곧고 매끄러운 암석 위에는 최치원의 무릎 자욱과 먹을 갈았던 흔적이 남아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옥구구지에는 또 그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고을의 태수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보다 더 큰 벼슬이 내렸어도 그는 이를 사양하고 이곳 태수만을 지냈다고 한다.
아무튼 최치원과 옥구땅은 이러한 일련의 전설을 통해 기이한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고 그래서 내초도의 금돈시굴에서 최치원이 낳았다는 설화를 더욱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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