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강원 남부에서 동학 재건
1. 해월의 도피 생활
이필제 따라 단양피신
윗대치에서 간신히 탈출한 해월과 이필제, 강수, 김성문 등은 봉화군 춘양으로 넘어갔다. 거기서 가까이 있는 영월 중동면 소미원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수운의 부인과 자녀들이 살고 있었다. 4일을 굶으며 낮에는 숨고 밤에만 길을 나서 찾아갔으나, 사모께서는 이미 소식을 듣고 정선으로 피신을 갔으며 며느리만 남아 있었다. 겨우 밥 한 그릇 얻어서 나누어먹었다.
일행은 이필제를 따라 단양 가산의 정기현의 집으로 향했다. 정기현은 문과에 급제한 지식인이었다. 정몽주의 후예로서 장차 이 나라의 임금이 될 꿈을 꾸는 사람이다. 그는 태백산 월정사 승려 초운이 “이 나라 주인은 단양 가산에 사는 정진사”라고 한 말을 굳게 믿고 있었다.
해월은 정기현의 소개로 정석현의 집으로 들어가 고용살이를 했다. 지도를 잘못한 것을 뉘우치면서 농사일에 매달렸다. 정석현은 해월의 사람됨을 알고 가족을 데려다 살림을 차리게 했다. 다행히 연락이 되어 손씨 부인을 모셔다 살림을 꾸몄다.
5월 어느날 영춘에 있던 강수가 찾아왔다. 관에서 지목하고 뒤따르니 이곳에서 속히 피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월은 강수를 따라 영월 피골[직동] 정진일의 집으로 갔다. 얼마 후 출동한 교졸들은 손씨 부인을 붙잡아 갔다.
영월 산중에 은신
직동으로 피신한 해월은 이웃의 궂은 일을 도맡아 돌보면서 살아갔다. 강수는 아동을 가르치는 훈도가 되었다. 박용걸의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 6월 어느 날 피신중인 영양접주 황재민이 인근에서 살고 있음을 알고 서로 왕래하면서 고달픈 처지를 달랬다. 8월 2일에 이필제와 정기현은 문경 초곡에서 군창을 습격하다가 잡혔다. 관가에서는 일족인 정진일의 가산을 몰수하고 정사일의 처를 잡아갔다. 해월 일행은 다시 산으로 들어갔다.
며칠을 굶으며 지내다가 박씨부인이 사는 영월 소미원으로 넘어가 도움을 요청했으나 수운의 아들 형제는 낯빛을 바꾸면서 내쳤다. 하루밤을 신세지고 해월 일행은 다시 산으로 갔다. 하지만 10여일 산중 생활 끝에 막동 박용걸의 집으로 다시 찾아가 도움을 청하니 자기집 안방에서 겨울을 지낼 것을 권유하였고, 해월은 친척도 아니면서 안방에 지낼 수는 없으니 결의형제를 맺자고 하였다.
2. 영월과 정선에서 재기
해월과 강수는 박용걸의 안방에서 49일간의 기도를 올렸다. 11월 20일경 박용걸의 형이 찾아와서 두 형제는 입도식을 올리고 동학도가 되었다. 박용걸 형제는 두 분에게 옷 한 벌씩 지어 올리고 이후로 동학재건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2월 중순에 이르니 이필제. 정기현의 문경변란도 일단락되어 평온을 얻었고, 정선에서 유인상 등 10 여인이 찾아왔다. 모처럼 도인들도 해월의 말씀을 청하자 해월은 대인접물에 대한 강론을 하였다. 전체적인 요지는 사람을 대하거나 생물을 대할 때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존엄하게 대하라는 말씀이다.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하지 말고 하늘님이 강림하였다고 하라” 무슨 일을 처리할 때, “첫째로 우직하게, 둘째로 묵중하게, 셋째로 눌직하게 행하라고” 했다.
최세정 최포되다
1872년 1월 5일 해월은 박용걸의 집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잘못 지도한 과오를 뉘우치는 제례를 올렸다. 많은 도인들을 희생시키고 동학활동을 위기에 빠뜨린 잘못을 뼈저리게 반성하였다. 해월은 이후 신미교조운동의 실패를 교훈삼아 모든 일을 신중하게 결정하였다.
그동안 해월은 수운을 대신할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무척 애를 썼다. 수운의 시천주를 인내천으로 재해석하고 신분제 타파를 생활화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어느 정도 도중(道中)에서 자리잡게 하였다. 수행면에서도 잘못 오해할 우려가 있는 천어(天語)의 관념에 대해서도 참된 말이면 천어 아닌 것이 없다는 선을 그어 건전한 수행으로 나가게 만들었다. 영해교조신원운동 전까지는 미력하나마 접(接)조직도 부활시켰고 수운에 비할 바는 아니나 해월 나름의 지도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이필제가 나타나 영해지역 도인들을 선동하여 결국 동학조직을 하루 아침에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러나 해월은 다시 일어났다. 모든 사람이 신처럼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다시 일어서야 했다.
6일에는 소미원으로 박씨 사모를 찾아갔다. 박씨 부인은 병석에서 일어나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지난 날의 세정 형제의 박대를 사과하기도 했다. 해월은 곤궁한 사모를 위해 쌀을 들여보냈다. 삼척 영장으로 있는 박용걸의 죽마고우 지달준의 도움이 컸다. 1월 20일에는 박용걸의 형이 사는 순흥으로 넘어갔다.
1월 25일에는 세정이 양양 감옥에 갇혔다는 비보를 들었다. 수운의 둘째 딸과 세정의 처도 인제 교졸에게 끌려갔다. 새 출발을 다짐하였던 해월의 심정은 크게 낙심하게 된다. 급보를 받은 해월은 소미원으로 달려가 사가를 피신시켰다. 박용걸의 집으로 모시고 왔다. 3월 10일경 정선도인들의 도움을 얻어 영춘 장현곡 깊은 산중에 집과 텃밭을 마련하였다.
최세정, 양양옥에서 장살되다
3월 18일경 해월은 세청[수운의 작은 아들]과 임생을 대동하고 양양으로 갔다. 사태를 탐문하고 하룻밤을 묵은 후 세청의 처가인 인제로 갔다. 세정의 처가는 어디론가 피신하고 없었다. 3월 25일 김연국[구암]은 인제로 찾아온 해월을 모시고 입도식을 행하였다. 3일을 머물다가 영춘 의풍으로 갔다. 얼마 후 김연순. 연국 형제도 영춘으로 이사왔다.
1872년 4월 5일 창도기념제례는 박용걸의 집에서 올렸다. 이튼날 세청의 부부가 나타났다. 해월과 강수는 4월 8일 정선 유인상의 집으로 갔다.
양양옥에서 심문을 받던 세정은 5월 12일 감옥에서 장형(杖刑)을 받다가 숨을 거두었다. 김덕중과 이일여, 최희경 등도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조선왕조는 수운의 아들까지 처형한 셈이다. 박씨 부인은 온종일 통곡을 하였고 해월은 비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관에서 다시 지목
해월은 다시 49일간 재를 베풀며 기도를 하였다. 7월 중순경에 정선의 여러 도인들이 찾아왔다. 신정언, 신치서, 홍문여, 유계홍, 최영하, 김해성, 방자일, 안순일, 최중섭, 박봉한 등이 찾아왔다. 이들은 서당교육을 받은 분들이고 일부는 한학자였다. 영월도인 박용걸, 장기서도 찾아왔다. 인제도인 김병내 등도 찾아왔다. 정선의 유인상과 신시래는 학식이 높았다. 도인 출입이 잦으면 관의 지목을 받을 염려가 있어서 고한의 적조암으로 자리를 알아보았다.
9월에 이르자 영춘 관아에서 박씨부인을 지목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해월과 강수는 영춘 장간지로 달려가 박씨부인을 모시고 나섰다. 저녁 늦게 유인상의 집에 도착한 박씨부인은 몸살이 나서 누워버렸다. 3일후 다시 30리 산길을 걸어 정선군 화암리 싸내로 갔다.
10월 보름께 해월은 강수, 유도원, 전중삼, 김해성 등과 함께 양식을 짊어지고 고한 갈래산 적조암으로 들어갔다. 49일간 주문 백만 독을 외면서 기도 공부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해월은 시 한 수를 읊었다.
太白山工四十九 受我鳳八各主定 天宜峰上開花天 今日琢磨五絃琴 寂滅宮殿脫塵世 善終祈禱七七期 (태백산에서 49일간 기도하며 여덟 마리 봉황새 받아 각기 주인을 정해주었네. 천의봉상 온누리엔 꽃이 피었고 오늘에야 쪼고 갈아 구슬 이루니 오현금 맑은 소리 스쳐가누나. 티끌세상 벗어난 적멸궁에서 49일 기도를 좋이 마쳤도다.)
[이 글의 지은이 삼암 표영삼 선생은 수운과 해월이 거쳤던 곳은 어디든지 찾아갔었는데, 1980년 1월 이곳을 탐방한 적이 있었다. 고한에서 북동으로 약 6킬로 올라가고 해발 1000미터의 백두대간 험준한 산줄기의 한복판에 정암사 적조암이 있다고 한다. 해월은 기도를 시작한 지 5~7일 후에 꿈속에서 봉황새 8 마리를 받아 각기 주인을 정해주었다 한다. 정암사에는 불상이 없고 능선 위에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있으며, 그 앞에 적멸보전이 있다. ]
12월 10일에 무은담 유인상의 집으로 하산하였다. 주지 철수자는 후세에 반드시 선도와 불도가 합쳐질 것인데, 자신의 공로를 알아주기 바라며, 해월이 거처할 곳이 없다고 하자, 단양 도솔봉 밑이 거처할만 하다고 일러주었다.
1873년 1월 전성문(중삼)이 해월에게 의형제 맺기를 간청하여 해월은 같이 목숨을 걸고 동학활동을 해오던 그를 쾌히 허락하였다. 결국 해월은 강수, 박용걸, 전성문을 동생으로 삼았으며 네 사람은 형제의 의를 살려 동학의 밑거름이 되기를 다짐하였다.
박씨부인 환원
그후 1년간 강수는 단양으로 가서 훈장이 되었고, 해월은 여러 곳을 다니면서 도인들의 수련을 지도하였다. 1873년 12월에 무은담 유인상의 집을 찾았다. 싸내에 사는 박씨부인의 안부를 묻자 유인상은 바로 어제 (12월 9일) 박시부인의 환원 부고를 받았다고 하였다. 해월은 인제도인 김계악과 함께 싸내로 넘어가서 시신을 수습하였다. 도인들에게 부음을 전할 형편이 못되어 장례는 다음으로 미룬채 가매장하고 돌아왔다. 박씨부인은 극도의 궁핍속에 영양실조로 굶주리다 병을 얻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둘째 아들 세정의 부부와 딸 둘이 있었다. 해월은 너무나 가슴이 아픈 나머지 이때부터 어육(魚肉)주초(酒草)를 금했으며 일반도인들에게도 권하였다고 한다.
1974년 2월 19일(양 4월 5일) 박씨부인의 장례를 모셨다. 해월, 강수, 정선접주 유인상, 최진섭, 신석현, 박봉한, 홍석범, 전두원, 홍석도, 유택진 등이었다.
단양 사동[절골]으로 이사
해월은 적조암 주지 철수자가 일러준대로 단양 도솔봉 아래를 탐문한 뒤에 단양군 대강면 갈래골로 이사하였다. 소백산맥 산골이지만 경상도 풍기로 가는 길과 예천으로 넘어가는 길도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4월초에 해월과 김연순은 이 안들로 이사하였다. 영춘 의풍에 살던 김병내, 홍순일 등도 이곳으로 이사왔다.
해월은 손씨부인을 찾지못해 3년째 옹색한 살림을 하다가 도인 권명하의 중매로 안동 김씨부인과 재혼하였다. 4월에 예를 올리고 권명하가 마련해준 새 집에 들었다. 10월에는 강수도 이곳으로 이사왔고 인제도인들이 같이 살면서 동학재건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875년 1월 22일 수운의 둘째 아들 세청이 처가로 가다가 소미원 장기서의 집에서 병을 얻어 급사하였다. 수운의 큰 아들은 양양 관아에서 장살당하고 박씨부인은 영양실조로 별세하고 이제 둘째아들마저 병사하게 되니 수운의 가문은 대가 끊기게 되었다. 남은 가족은 세 딸과 세청 부인뿐이다. 이들도 박씨부인 대상을 마치고 뿔뿔이 흩어졌다. 장녀는 이미 시집갔고 둘째딸은 최완인데 인제 아전 허찬에게 시집갔으며, 3녀와 4녀는 나이가 어려서 민며느리로 시집갔다고 한다. 이듬해 봄에 사위들은 힘을 모아 박씨부인과 세청의 묘를 단양 영춘으로 이장하였다. 표영삼 선생이 찾아갔으나 장소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의 묘는 1943년 허찬의 장남 허균이 영춘에서 용담으로 이장하였다. 수운의 태묘가 있는 바로 뒤편 능선에 모시었다.
첫댓글 한반도 역사상 민중이 들고 일어난 최대의 혁명, 동학! 세상 그 어떤 일이나 쉽게 되는 건 없겠지요. 최제우를 이어 탄압받는 동학의 맥을 이으면 다시 봉기하기 위하여 애쓰는 해월선생의 노력이 고스란히 잘 보여주고 있는 동학 수난사를 재미 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항상 흥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