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칩과 춘분을 지나니 6시만 되어도 어둡지 않고 밝아오기 시작 하였는데 전라북도의 명산인 선운산산행을 하기 위하여 구마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를 달려서 광주 나들목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또 달려서 장성을 지나니 선운사 도립공원을 품고 있는 고창이 나타났는데 안온한 고을이었다.
고창군 아산면과 심원면에 걸쳐 있는 선운산은 호남정맥의 끝자락에 해당되며 호남의 내금강이자 만물상으로 불리고 있으며 수려한 산세를 인정받아서 1979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곰소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변산이 평야에 솟아오른 반면 선운산은 첩첩한 산속에 들어 있어 그윽하고도 아늑하며 아기자기한 맛이 월등하였다.
암자에 평평한 돌바위(석상)가 있어서 붙여졌다는 석상암을 지나서 산행을 시작하였는데 주위에 널려 있는 차밭에서 남국의 정취가 묻어 나왔으며 높이가 높지는 않아도 볼거리가 많고 봉우리와 골짜기 모두 인자하고 후덕한 형상은 넉넉한 가슴을 활짝 열어 사람들을 품어주는 모습이니 만화방창의 봄을 맞아서 생기가 넘쳐 보였다.
마이재를 지나서 이내 선운산 시루봉에 오르니 마치 산이라기보다는 야산의 언덕같은 느낌이었는데 야트막한 산일지라도 푸른 바다와 수려한 봉우리, 깊은 계곡이 어우러져 만든 풍광이 좋았으며 양지 바른 계곡에는 진달래가 소담하게 피어서 산행객들을 환영해주니 입이라도 맞춰 주고 싶을 정도로 반가웠고 봄의 향취가 곳곳에 묻어났으며 개이빨산이라고 하는 견치봉은 여래봉이라고도 하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부처들을 한데 모아 놓은 불상같다 하여 붙여졌다고 하였다.
이곳에서 점심후 낙조대와 천마봉을 거쳐 도솔암으로 이어지는 코스는 오전과는 게임도 되지 않을 명승으로서 만물상 내지는 미국의 그랜드 캐년을 보는것 같은 웅장하고도 장엄한 계곡미를 나타내고 있으며 우주 혹은 삼라만상이 처음 열리는것 같기도 하였고 우뚝한 배맨바위와 사자암, 봉두암, 밑에서 보면 아득한 천마봉과 용문굴, 삼천굴등 모두가 경승이자 절경이었다.
도솔암 위쪽의 암벽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마애석불이 있는데 그 유명한 도솔암 마애석불로서 보물 120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연꽃무늬를 새긴 계단모양의 받침돌까지 갖추었고 지상 6미터의 높이에서 책상머리를 하고 앉아 있는 높이 5미터에 폭이 3미터인 대형 마애불로서 석불의 앞가슴에 사각형의 홈이 패였는데 옛날 검단선사가 이 감실속에다 비결을 숨겨 놓았으며 이 비결이 나오는 날 미륵불이 출현하여 한양이씨가 망한다는 전설이 있었는데 조선조말 전라감사 이서구가 석불의 가슴을 여니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어 본다”고 첫머리에 씌어 있었으며 청명한 날에 갑자기 천둥 번개가 치고 광풍이 불어와서 얼른 뚜껑을 닫았다고 하는데 일설에는 그후 녹두장군과 함께 동학혁명을 일으킨 손화중장군이 그 비결을 꺼내보았고 동학 농민혁명에서 민심을 얻게 된 기폭제가 되었다고도 전해오고 있었다.
도솔암 밑에는 천연기념물 254호로 지정되어 있는 장사송이라고 하는 특이하고도 우람한 소나무가 있었는데 높이는 23미터요,밑둘레는 3미터이고 수령은 600년 정도로서 이 고장의 옛이름인 장사현을 본따 장사송이라 하며 옆에 있는 진흥굴과 관련지어 진흥송이라고도 부르는데 소나무처럼 보이지만 40센티미터 위에 가지가 난 흔적이 있어 반송으로 분류되며 17여미터가 되는 긴줄기가 우산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간 모습이 인상적이고 비뒷면에는 이곳에서 남편을 기다리다 숨진 여인의 넋이 극락왕생한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수자리 떠난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다 쓰러진 장자녀의 애닯은 사연과 망부한의 숨결이 느껴지;며 한뿌리에서 여덟가지로 뻗어나간 낙락장송의 수려한 기품은 이나라 팔도의 지맥을 상징한다고도 하였다.
하산후 “도솔산 선운사”라는 편액이 걸린 선운사를 구경하였는데 도솔산의 한자는 투구 두, 거느릴 솔을 써서 “두솔”로 쓰이나 도솔에 한하여 “두”자가 “도”자로 음역되며 도솔이란 말은 불가의 도솔천을 뜻하며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머문다는 세계로서 성불하여 지상의 중생을 구제할때를 기다린다고 하는 곳으로서 도솔천은 또 슬픔과 번뇌가 없고 모든 중생이 지극한 기쁨을 누리며 산다고 하는 곳으로서 이산 어디에선지 도솔천의 맑은 기운이 감돌기 때문일것이다.
선운사는 조계종 제24교구 본사로서 백제 위덕왕 24년(577년)에 검단선사에 의해 창건된 1500년이나 된 고찰로서 다른 설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화와 진흥굴의 이야기도 있는데 진흥왕은 숭불왕이기는 하나 고구려의 광개토왕과 같은 척경왕으로서 백제를 쳐서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으며 그 자취는 현재도 4개의 순수비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또 삼국통일의 이루기 위한 집념으로 태자의 이름도 동륜으로 정한바 이는 불법의 수레바퀴로 천하를 호령한 전륜성왕을 본받으려 한 마당에 적국인 백제에 와서 사찰을 세우고 노후를 보내지는 않았을것으로 보며 검단선사에 얽힌 설화는 훨씬 더 구체적인데 검단선사가 선운산에 들어오니 계곡에 해적들이 살고 있어서 검단선사는 이 해적들을 교화시켜 소금 굽는 법을 가르치고 그것으로 생업을 삼게 하였는바 지금도 선운산옆 바닷가에는 “검단”이라 불리는 마을이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검단선사의 은혜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해마다 선운사에 소금을 보냈다는데 그 풍습은 근래까지 전해 왔다고 한다.
또 선운사는 그 이름처럼 대대로 선풍을 크게 떨친 명찰로서 전성기에는 산내에 89암자에다 수도터로 쓰이는 석굴이 24개나 있었고 승려수도 3천명이 모여들어 수행 정진한곳으로 정유재란때에는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는 수난을 겪고 폐허로 변하기도 했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아서 수행자들이 다시 찾아들어 선풍을 이어나간 사찰로서 아늑한 경관이 봄에는 동백꽃, 여름에는 녹음이 짙으며 가을에는 고운 단풍과 겨울의 설경과 동백숲 또한 아름다운 곳으로서 사찰을 감싸고 있는 수령 500여년의 동백나무 3천여그루가 5,000여평에 군락을 이루어 짙푸른 잎에 자주색의 붉은 꽃잎이 피어 있는 장관은 여수 오동도의 동백보다도 월등한 아름다움과 기품이 있었다.
사찰을 구경한 후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입구의 진입로도 잘 닦아 놓았는데 우리나라 최대의 꽃무릇 군락지로서 매년 9월 중순이면 승려를 사모했던 어느 여인의 애절한 사연을 지닌 상사화가 붉게 타는 노을처럼 선운산 자락 한쪽 귀퉁이를 물들인다고 하며 꽃은 꽃대로, 잎은 잎대로 피어서 한번도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애끓는 여인들의 그리움을 대변하여 상사화라고도 부르며 게다가 타는듯한 단풍이 계곡물에 비쳐서 황홀경을 자아내는 선경이라고도 하며 또 국민들의 서정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으로서 학창시절부터 “국화 옆에서”라는 주옥같은 시로 친숙한 이 고장 시인인 미당 서정주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데 “선운사 동구”라는 명시를 남긴 곳이었다.
주차장밑 상가의 청원가든 식당에서 홍성규, 김형범, 이환규 세분 선배님의 찬조로 작설차와 함께 고창의 3대 특산물인 풍천장어와 강창규동문이 낸 복분자파티를 하였는데 곰소만의 인천강에서 잡힌 장어는 실뱀장어가 민물에서 일정기간 성장하다가 산란을 위해 바다로 회귀하기전 바닷물과 민물의 합류지점에 머물게 되는데 이때 잡힌 장어를 풍천장어라 하며 미식가들이 풍천장어를 애써 찾는 이유는 그 맛이 담백하고 구수하기 때문이며 특히 복분자술과 궁합이 잘 맞는다고 하는데 동의보감에 신장과 간을 보호하고 남자의 정력을 돋운다고 나와 있으며 복분자술을 먹고 소변을 보면 너무 힘이 세어 접시가 엎어진다고 이름 붙여졌다고 하였다
정다운 회식을 마치고 오후 6시경 고창을 출발하였는데 때마침 가물어서 바싹 마른 대지에 어머니의 젖과 같은 봄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흡족한 마음으로 대구로 향했는데 바닷가라고 해서 개펄냄새나 짭쪼름한 바다냄새보다도 호남의 내금강답게 인동초같은 강인한 생명력과 정열을 간직한 동백꽃의 은은한 향이 느껴져서 마치 도솔천에라도 다녀온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