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 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 평온케 하심을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 시의 저작시기가 시편기자의 노후, 안락한 평화의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가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압살롬의 반란시기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을 경험하면서 쓴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시가 두 견해 중 어떤 것이든 어울리지 않는 내용이 아니긴 하지만, 굳이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가정을 할 경우에는 전자의 견해에 필자의 한 표를 행사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를 읽으면서 독자는 평화롭고 안락한 전원의 평화를 연상하지, 칼과 창으로 상대를 찔러 죽이고 피를 흘리는 전장터를 연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시는 모든 사람에게(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데 기여하고 있다.
하나님이 다윗 왕의 목자시라면,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목자이다. 오늘 날 다윗의 위(位)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심을 신약성경은 증거하고 있다. 이 시는 다윗의 시대도 뛰어넘고 신약시대도 관통하여 재림의 날까지 평안을 견인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 되심을 찬양하고 있다.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시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절,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3절,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시...”라고 한다. 하나님에 대한 ‘목자’라는 은유는 결코 유대교와 기독교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고대 근동의 지역의 곳곳에서는 그들의 왕이나 지도자들을 목자로 불러왔다. 이스라엘의 왕들 또한 백성의 목자로 불려졌다. 물론 목자라고 해서 모두 선한 목자는 아니었다. 어떤 목자(왕)들은 백성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문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시”라는 고백에 주목하시라! 오직 여호와만이 완전하신 우리의 목자이시기에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고백할 수 있다.
2절에서는 목자의 인도로 푸른 초원에서 평안을 누리는 양의 이미지와 맑은 물가에서 노니는 양의 이미지를 눈에 확연하게 그려낼 수 있다. 푸른 초장이란 양들에게는 그저 단순하게 녹색초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초장’(草場)이란 말의 히브리어 해당어는 ‘네오트’로, 이는 ‘거처’를 의미하는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듯 양들에게 있어 푸른 초원이란 단순히 낭만적인 정경이 아니라, 뜨거운 태양을 피하여 안전하게 쉼을 누리는 양들의 거주 혹은 생활공간이다. ‘쉴만한 물가’는 급류가 흐르는 곳이 아닌, 잔잔하게 흐르는 물이 있는 곳이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라고 3a은 말하는데, ‘소생하다’라는 말은 ‘되돌아오게 하다’라는 말로 히브리어로는 ‘슈브’라는 말이다. 죄악과 곤경으로 헤매던 영혼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말로, 나아가 목자 되시는 여호와의 인도로 시편기자가 곤경으로부터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3b,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에서 ‘의의 길’이란 도덕적으로 옳은 길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 ‘평탄한 길’, ‘형통한 길’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평탄한 길과 형통한 길을 주심은 자신의 이름을 위함이다.
4절의 ‘사망의 음침한’이란 말은 히브리어 원어로 ‘그림자’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는 ‘죽음’ 그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죽음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많이 쓰인다. 더러는 죽은 자의 거처의 어두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팔레스틴의 산지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한다. 죽음이 안개비처럼 내려앉는 골짜기를 지날 때에라도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영혼의 목자 되시는 주님의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때문이다. 또한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목자의 장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양들을 해치는 짐승들에 대한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다.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절,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둘째 연, 즉 5절부터는 목자와 양의 은유에서 주인과 손님의 은유로 바뀐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주인으로, 시편기자는 주인의 풍성한 환대를 누리는 손님이 된다. 그래서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라고 한다. 이는 목자와 양의 관계보다 더욱 긴밀한 관계로서의 발전을 의미한다. 여기서 ‘베푸시고’는 미완료시제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래왔으며, 또한 그런 관계의 지속은 미래를 향해서도 개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라는 문장 속에서 우리는 흔히 왕과 제사장, 선지자의 위임식에서 치르던 의식을 말함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기름은 주로 귀족들이 사용하는 귀중품으로, 그들이 잔치나 연회를 할 때 머리나 수염 등에 바르는 일종의 향수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다윗의 왕실에는 이 귀중한 기름이 풍부했다고 한다. 또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시편기자는 말한다. 여기서의 ‘잔’은 기업 또는 분깃을 의미한다. 시편기자는 이 잔이 흘러넘친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시편기자가 이스라엘 국가의 왕으로서 누리는 기업의 복스러움은 타인의 어느 것에 비유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언약하신 사항은 세세토록 영원무궁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자신에게 내리신 복의 풍성함이 이후에도 계속하여 진행될 것임을 확신하기 때문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어서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고백하는데, 이는 단순히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인 축복을 담보로 인해 내가 하나님의 집에 영원히 거할 수 있게 되었다”는 표현이 아니라, “양과 목자와 같은 관계로서, 나아가 하나님의 집안의 한 가족 일원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겠노라”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의 물질적으로 부요로운 공급의 관계를 초월하여, 더 깊은 영적인 교제 가운데로 나아갈 것임을 다짐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목자로서의 하나님을 탐구하는 시 23편을 읽을 때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나는 선한 목자라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의 죄의 책임으로부터, 죄로부터, 그리고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돌보는 왕으로서의 목자이다. 하나님은 역시 그에게도 목자이며, 목자로서 시편기자를 보호하고 의의 길로 인도한다. 시편기자인 다윗 역시 젊었을 때는 목자였다. 그가 젊었을 때의 목자적 감성을 가지고 이 시를 저작했을 것은 틀림없다.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목자와 양의 관계이듯이, 자신과 백성들과의 관계 역시 양과 목자의 카테고리 안에서 그의 직무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정신을 가진 다윗의 뿌리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탄생하셨고, 그가 양들을 위해 목숨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