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강 스피치와 시낭송 문학의 집‧구로 2014. 1. 13. 월
어머니
민문자
오늘은 어머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거룩한 단어는 어머니,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것은 아기가 부르는 엄마!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일만 겁의 인연이 쌓여야 부모·자식으로 만난다는데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어머니는 얼마나 고맙고 귀한 존재입니까.
나는 내 어머니의 딸이고, 내 자식의 어머니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 자식의 거룩한 어머니이며, 내 어머니에게는 아름답고 예쁜 딸이었는가?’ 자문해보면 당당하게 대답할 자신은 없습니다.
풍수지탄(風樹之歎)이란 말이 있지요? 나무가 고요히 있고 싶으나 바람이 그치지 아니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려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한탄의 말입니다. 뒤늦게 후회하지 않으려면 살아 계실 때 정성을 다해 효도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다행히 내 어머니는 동생 부부의 지극한 봉양을 받으면서 백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지금 같으면 어쩌면 결혼도 않았을 젊은 나이에 홀로되어 우리 사 남매를 기르느라 고생을 많이 하신 분입니다. 아직도 칠십이 넘은 딸 부부 건강을 염려하시며 전화로 번족한 집안 친척들 안부를 물으십니다.
안방에서 대소사를 주관하시는 것을 보면 존경할 수밖에 없는 분입니다. 평생 우애로운 집안 대들보 노릇을 하신 어머니에게 세 살 아래 동서와 시누이가 있습니다. 원만치 못한 두 분 사이를 조정하시느라 애쓰셨는데 제 고모님이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지가 일 년이 넘었습니다. 어머니를 자동차로 모시고 가서 시누이올케 만나게 해드리면 그렇게 좋아하실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숙모님 생신이니 두 분이 손을 맞잡고 즐거워하실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와 작은아버지 대신 두 어머니께 우리를 잘 길러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것은, 우리 사촌 형제 십 남매가 기회 되는대로 즐겁게 해드리는 일로 생각합니다.
해마다 동짓달이면 대봉감이나 단감을 주문해서 보내드리고 제삿날과 명절과 생신날은 꼭 참석해서 인사드리면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뵐 수가 있습니다.
올해에는 어머니가 매일 나가시는 노인정에 호박떡을 한 시루 해서 한번 방문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출입할 수 없어서 서로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어머니 친구도 만나실 수 있게 하루 짬을 내 보아야겠습니다.
‘돌아가신 다음 후회하지 말고 살아계실 때 한번이라도 더 웃으시게 하자.’ 새해 들어 퍼뜩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이 올해의 제 좌우명입니다.
세상 대부분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는 목숨도 아끼지 않는 고통을 감내해내는 거룩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어머니께 효도합시다.
오늘은 어머니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꽃 /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앉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내가 만난 이중섭(李仲燮) / 김춘수
광복동(光復洞)에서 만난 이중섭(李仲燮)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눈을 씻고 보아도
길 위에
발자욱이 보이지 않았다.
한참 뒤에 나는 또
남포동(南浦洞) 어느 찻집에서
이중섭(李仲燮)을 보았다.
바다가 잘 보이는 창가에 앉아
진한 어둠이 깔린 바다를
그는 한 뼘 한 뼘 지우고 있었다.
동경(東京)에서 아내는 오지 않는다고,
나의 하나님 / 김춘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 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 어린 순결(純潔)이다.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 이는
연두빛 바람이다.
(시집 {처용}, 1974)
*전반부에서는 늙은 비애, 커다란 살점, 놋쇠 항아리 등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본래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육욕적, 물질적, 색욕적 이미지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부정적 이미지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후반부에서는, 그래도 하나님은 순결성, 절대성, 영원한 삶을 위해
인간이 찾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긍정적인 의미로 전환되고 있다.
(참고로 슬라브 여자는 릴케와 사랑하다 그를 버린 '루 살로메'로서 철학자
니체와의 사랑으로도 유명한 여자였다.)
김춘수 시인 약력
1922. 11. 25 경남 충무~ 2004. 11. 29 경기 분당.
서구 상징주의 시이론을 받아들여 초기에는 그리움의 서정을 감각적으로 읊다가, 점차 사물의 본질을 의미보다는 이미지로 나타냈다.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0년 일본대학 예술과에 입학했다. 1942년 퇴학당했으며 사상이 불순하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6개월 동안 갇혀 있다가 서울로 송치되었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윤이상·김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노동자를 위한 야간중학과 유치원을 운영하면서 창작활동을 시작했다. 1946~48년 통영중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조향·김수돈 등과 동인지 〈노만파 魯漫派〉를 펴냈다. 1952년 대구에서 펴낸 〈시와 시론〉에 참여해 〈시 스타일 시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유치환·김현승·송욱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펴냈다. 해인대학교·부산대학교에서 강의하다가 1964년 경북대학교 교수로 취임, 1978년까지 재직한 뒤 이듬해 영남대학교로 옮겨 1981년 4월까지 재직했다. 1981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제11대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당시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신군부 정권에 참여하여 정계에 진출한 것에 대해 많은 구설수에 오르내렸다. 1986년 한국시인협회장, 1991년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역임했다.
첫댓글 좋은 강의 해주시고 강의내용을 이렇게 카페에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어머니에 대한 스피치를 배우며 가슴 찡해 눈물까지 흘리는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님 사랑에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