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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정체성에 대한 물음인가?
아니다. 이 영화는 얼굴에 대한 물음이다. 의심없이 숀의 정체성은 확고하다. 그의 윤리적 고뇌도, 의지도, 무엇 하나 의심스러운 점이 없이 잘 알려져있다. 오우삼 영화에서 익히 보던 건실한 캐릭터이다. 나는 이 영화가 정체성에 관한 물음이 아닐꺼라는 근거있는 확신을 가지고 영화를 보았다. 역시나, 오우삼 감독은 날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숀은 절대적으로 노력하고 싸우며 자기의 본분을 다한다. 이야기는 꼬이고, 확대되며, 해결되고, 방점이 찍혀진다. 우리는 그 장면 장면의 늘여지고 확대된 감정들을 마주친다. 기꺼이 그 흐름을 탄다. 짜여진 줄거리 속에서, 순차적으로 사건은 전개되고, 오직 이미지들이 증폭된다. 증폭,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우삼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페이스오프]는 자아정체성의 위협을 받는, 사이버펑크시대에 잔존한 구인류들이 갖는 위기감이나 이의 극복의 스토리랑은 전연 상관이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대대적인 공인을 받은 지금의 시점에서 그런 소리를 떠들어댄다면 그건 또다른 복고풍이 될까? 글쎄, 아직은 모더니즘이 다시 신선하게 느껴질 만큼 많이 돌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도리어 오우삼 개인이 무슨 윤리를 가지고, 무슨 생각을 하든간에 그가 만들어낸 것은 낡은 전통을 이용한 무한속도의 실험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즉 주윤발의 자아는 상당히 오래된 낡은 것이지만, 오우삼의 액션은 바로 오늘의 다음날을 향한 것이다. 자기 얼굴을 적한테 뺏기고 악당의 얼굴로 살아가야하는 불행한 숀-니콜라스 케이지!의 상황과 대응의 수준은 기본적으로 영화 [체인지]의 사춘기 소년소녀들의 자리바꿈 정도와 다를것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마지막에 숀의 부인에게서 사정을 전해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의심없이 니콜라스 케이지를 아처라고 부르는 부하직원들의 단순함은 숀의 자아정체성의 안정성과 부합된다. 이를 보고 보수적이다! 하고 외치면 안 된다. 이미 정체성 문제와는 상관없는 곳을 이 영화는 달리고 있으니까, 그런건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얼굴에 대한 사유
[페이스오프]의 핵심기술은 역시 얼굴을 붙였다 뗐다 하는 고강한 과학기술 발달에 있다. 자기를 구성하는 마지막 보루라고 믿었던 얼굴마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거라면, 수많은 고민들이 사라지고, 다른 어려움들이 등장한다. 예전에 사진기술이 발달하여 증명사진이라는 게 행정에 이용되어 얻게 된 파문이나 이렇게 혁신적이었을까, 그렇다면 이제 개개인에게 그렇게나 절대적인 의무와 권리를 부여하는 현대국가의 위용은 별볼일 없게 된 때가 온 것인가? 그렇다. 이미 비디오의 등장과 컴퓨터를 이용한 새로운 이미지 창출의 가능성만으로도 개인과 국가를 잇는 써비스모델은 위협받고 있다. 여기에 직접 육체적인 개조와 맞바꾸기, 창조가 횡행한다면, 당연히 새로운 과학기술과 그것이 가지고 오는 새로운 생활양식과 국가권력의 통제정책은 한판승을 벌여야할 것이다. 당장에 언제부터나 그런 기술들이 실용화될지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 영화에서 보는 것은 가장 가까운 미래로서, 아니 그보다는 미래완료로서 우리에게 제시된 현재의 잠재력이다. 이미 얼굴마저 없는 시대가 왔다. 얼굴을 사진에 박는 것으로 모자라 지문을 박아도, 눈알의 모양을 박아도, 이 사람이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그라는 것을 말해줄 어떤 확신도 제공받을 수 없고, 우리는 단지 돈들여 나쁜 짓을 했을리 없지, 하는 막연한 실리적 추정만으로 어제의 인물과 오늘의 인물의 동일성을 가정해야한다.
어제의 인물과 오늘의 인물의 동일성은 상당히 오랫동안 의심받아 왔다. 편의상 동일성을 인정하지만, 변화라는 것이 늘 뒤통수를 치기 때문이다. 복잡한 성격의 인간이라는 것을 판별하는 문제에 있어 예와 지금이 달라진 것은 테크놀로지의 수준으로, 확신을 좀더 어렵게 할 뿐이다. 그러나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얼굴=그 사람'의 등식이 깨지는 순간 우리의 모든 사회적 관계와 의무, 권리-얼굴들은 절대적 기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인간관계는 테크놀로지에 의해 변한다. 때로는 완전히 폭파될 수도 있다.
기계가 사유한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감수성을 촉발한다. 곧 우리는 어제와 동일한 육신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개별 인격체에 대하여 아무런 확신을 갖지 못한 채로도 즐겁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요즘 청소년들이 친구 사이에 옷을 바꿔입듯 친한 친구들은 재미삼아 서로 얼굴을 바뀌볼 지도 모른다. 어제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난 그-A에 대해서, '응? 나 B인데, A랑 얼굴 바꿨어. 오늘은 데이트가 있어서 말야. 친구좋은 게 뭐니?' 한 마디로 '그러냐? 그럼 어제 꿔간 돈 갚아.' 하고 태도를 바꿀지 모르며, '어, 실은 장난한건데, 나 A 맞아' 하는 대꾸에 사실진위를 어떻게 판단해야할지 어려워질 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가 되면 또 개인을 판별해내는 방법이나 책임을 묻는 태도 또한 지금과는 다른 모양으로 발달할 것이다. 기계는 단지 인간의 편의를 '돕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양식을 결정하고 사고방식을 뜯어고친다. 지금까지의 과학기술만으로도 기계는 충분히 인간을 '구성'해왔지만, 성형수술로 개인들이 각자 원하는 얼굴을 가질 수 있게 되는 때나, [페이스오프]처럼 얼굴을 바꿔가질 수 있게 되는 때, 더 나아가 인간의 육신 자체를 다른 물체로 대체하는 때가 되면 더욱 직접적으로 기계는 인간을 형성하고, 기계와 인간의 구분 자체가 원천불가능한 시절로 넘어갈 것이다.
기계의 사유란 것이 지금 집집마다 깔린 케이블선과 전화선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는 PC통신으로 얻는 수많은 세계들의 단면들, MTV의 그 현란한 커트 사이에 번득이는 감각과, 호흡법을 습득하지 않고서는 현재를 사유할 수 없다. 전기가 꽂혀있지 않다면, 자신의 세계와 제대로 된 교류를 누리며 균형있는 사유를 할 수 없으며, 생물학적 의미를 넘어서는, 인간의 삶이란 것 자체가 불구가 되는 것이다. 기계를 통한 사유는 점차 더 기계의 사유에 가까와진다.
아직까지도 기계를 인간의 도구로 보며 PC통신을 주체인 개인과 개인 사이를 잇는 기특한 매개체 정도로 보는 유치한 사고방식이 사회 곳곳에 깔려있어 제대로 인간이 발달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다. 그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97년 최고의 작품이 바로 [접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가를 조금만 살펴본다면, 예나 지금이나 사회라는 것이 어떻게 운영되는가를 들여다본다면, 개인 하나하나가 생득권처럼 갖고 있는 자율적 주체라는 환상이 얼마나 근거없는 것인가는 쉽게 드러난다. 주체는 한 사람의 개인에게서 그냥 피어나는 법이 없다. 그는 남과 교류할 자기만의 고유한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외부의 세계가 그의 작디작은 뇌 속의 수많은 연결들 속에 어떤 접점들을 이루는가가 그의 개성이다. 그는 외부의 다른이들-개인들, 단체들, 작품들, 자극들에서 비롯한 신화들, 정보들을 받아들여 하나의 주체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를 구성하는 것이다.
주인공이 과연 존 트라볼타였나?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가다가다 혼선을 빚었는데 그것은 주인공이 니콜라스 케이지-숀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걸 느꼈을 때, 그리고 거침없이 교도관들을 쏴죽이는 니콜라스 케이지-숀을 당연하다고 느끼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이다. 순간 난 당황했다. 의심없이 주인공의 세계에 동참하고 공감하며 박진감 넘치는 스토리를 즐기고 있을 때, 내가 감정이입을 한 대상은 니콜라스 케이지였다. 그가 숀이라고? 난 단기메모리가 무척 작기 때문에 인물 하나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숀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니고 그냥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얼굴이었다.
이제 기나긴 전투 끝에 사악한 적-존 트라볼타를 굴복시키고 케이지는 자기 얼굴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기쁨에 넘쳐 뛰어들어온다. 몇십년 동안 익숙한 그리운 자기 얼굴을 되찾아, 이제는 떳떳하게 아내와 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게 되어 기쁘겠지. 그러나 관객은 천천히 등장하는 존 트라볼타의 그림자를 쳐다보며 전율한다. 아니, 또 어떤 고난이... 아니, 저 사악한 것이 또... 농담이 아니다. 그 실루엣을 바라보는 여자의 눈동자는 커진다. 거기에선 어떤 두려움이 읽혀진다. 긴장과 놀람과 함께. 관객은 그 다음 장면의 눈부시시 뜬 존 트라볼타와 아내의 감격의 포옹을 보고서야 아, 맞지, 하며 안도를 하고, 그 여자의 두려움을 벅찬 감동 앞의 두려움으로 재해석을 하든지, 그만 잊어버리든지 한다.
실은 사족처럼 붙은, 마지막에 해피엔딩의 방점을 꽝 찍는 그 장면에서 관객은 기뻐해야할지 두려워해야할지 알 수 없다. 끝까지, 정말 난 해피한지 확신이 불가능하다. 망설이는 관객을 위해 배우들은 최대한 완벽한 기쁨의 상봉을 보여준다. 바로 전 장면에서 자기 얼굴을 헤롭 하며 핣았던 화상에게 거침없이 달려와 안기는 딸네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의 두려움은 가려지지 않는다. 천진난만하고 잘생긴 아이의 등장쯤에서야 아, 그 때 그 아이... 더 옛날의 그 아이... 하면서 숀의 아내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참에서야 딴생각을 멈출 수가 있다. 이건 분명히 오우삼이 진심으로 헷갈리라고 만든 장면이겠지... 하지만 쉽게 확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너무나 열심히 헤피엔딩하고 있다.
심리적 인간의 종말
그래서 [페이스오프]에서는 심리학을 볼 수 없다. 그 급박한 상황들, 니콜라스 케이지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경우를 당해 지르는 비명, 살떨리는 순간들, 숨가쁜 추격전들 모두 어마어마한 강도로 우리의 온감각들을 총동원시키지만, 이 영화에는 심리라는 것이 없다. 니콜라스 케이지에 대해서도, 불쌍한 그의 아내에 대해서도, 우리는 마치 일말의 동정심이라도 갖는 듯이 생각하지만, 실은 엄청난 거리를 떨어져서 강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태도가 가능한 것은 감독에 대한 근거있는 믿음 때문으로, 최소한 주인공이 죽지 않고 자기 얼굴을 되찾아 행복해겠지 하는 생각에 걱정과 두려움 긴장을 순간순간 단지 열심히 즐기고 말 뿐인 관객의 오락정신은 정말 야무지다. 일반적인 액션영화에 대한 기대 이상으로, 오우삼 영화에 대한 기대는 숀의 심리적 윤리적 고뇌를 잘 알려진 오우삼 주인공의 패턴으로 자동인식하게 하며, 이미 알고있는 궤도를 달리며 얻는 유리함으로 인해 다른 풍경에 몰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근대문학이 탄생시킨 심리적 인간은 이미 오우삼 영화에는 없다. 우리들은 심리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캐릭터와 스토리와 함께 작업하고 있기는 하지만, 주목하는 순간들, 그 이미지들은 인격과 상관없이 흐르고, 증폭된다. 우리가 상관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운명이 아니라 액션의 크기이다. 우리가 공유하는 것은 심리가 아니라 감각이다. 비평가적 태도로 충만한 채, 우리는 [페이스오프]의 사고훈련에 참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양식의 측면에서 그 교과내용을 탐구해들어갈 수 있다.
단순한 헐리우드 버전업일까?
아니다. 오우삼 스타일의 성공적인 헐리우드 이식이라고 할 수 있다. 성공한 프랑스 영화를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듯 오우삼 영화를 헐리우드에서 버전업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틀렸다. 오우삼 영화의 독특함은 헐리우드의 예의바르고 경건한 액션 속으로 융화되는 것이 불가하다. 헐리우드가 오우삼을 소화한 게 아니라 반대로 헐리우드가 오우삼에게 먹혔고, 따라서 이 영화는 오우삼 감독의 화려한 헐리우드 장악이다 하고 단언하는 바이다.
[페이스오프] 전에 미국에서 찍은 [브로큰 애로우]도 후에 케이블티비로 본 바에 따르면 정말 재밌고 존 트라볼타의 엄청난 뽀다구도 귀엽기 그지 없는, 전형적인 오우삼 영화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페이스오프]가 그보다 훨씬 두드러지는 점이라면, 오우삼 감독이 그렇게나 강조하는 선악의 대결 문제, 즉 선악은 고착된 것일 수 없지 않은가 하는 문제제기와 더불어, 확실히 덜 단순한 윤리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점에서 단순명쾌한 대결 구도의 [브로큰 애로우]보다 이전 홍콩에서 찍은 작품들에서 보이는 오우삼 감독의 스타일이 물씬 풍긴다.
그러나 이 작품은 헐리우드에 이식한 성공적인 오우삼영화지 절대로 헐리우드 영화와 홍콩영화의 결합은 아니다. 헐리우드 영화라고 불리는 영화들의 스타일은 물론 헐리우드 시스템의 독특함에서 많은 부분 결정되었겠지만, 그렇다고 헐리우드 시스템을 쓴다고 무조건 헐리우드 스타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헐리우드 영화가 홍콩영화의 침입을 받았다고 말하는 편이 맞다. 알은 헐리우드에서 제공했지만 핵은 오우삼이 들고온 것이었기 때문에, 수정란이 다 커서 낳고 보면 오우삼이 나오는 것이다. 좀 있으면 헐리우드 역시 침입자의 유전자와 공생법을 익히면서 탈바꿈을 할 것이다. 한계점을 벌써 몇번 돌파한 헐리우드 유형의 진부함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의 영화는 참신한 감각을, 새로운 스타일들을 원하는 것이다. 오우삼의 경우, 상당히 성공적인 이식이라고 할만하다.
구체적인 스타일로 들어가보면, 일단 화면의 이미지 크기와 각도, 호흡을 보면 이전의 영웅본색 시대와는 현격히 달라져 있다. 슬로우 모션이 등장하기 전에는 거의 오우삼의 특징적인 '과잉'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요즘 영화의 빠르고 광각인, 사각의 화면들과 비슷하다. 이를 헐리우드 영화로서 가지는 특징으로 해석할 필연적 이유는 물론 없다. 현재 시점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영화라면 당연히 그 수준이니까. [시계태엽오렌지]가 나온 이후로, 광각은 끊임없이 그 낯섬을 되풀이하며 탈각시켜왔다. 공포스러운 [시계태엽오렌지]의 광각과 지금 국내 댄스뮤직비디오의 단골 에티켓인 어안에 가까운 광각의 사이엔 참으로 많은 과정들이 있었다. 인간의 감각작용은 언제나 이미 알고 있는 것의 지휘하에 정보를 읽어들이며, 예전에 광각이 공포스러울 정도의 숭고와 긴장을 야기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지금의 우리들은 MTV 클래식의 고풍스러운 샷에 웃음을 짓는 것이다.
각 시대는 각기 다른 공간감각을 가지고 있다. 오우삼의 영화들은 단연 만들어진 시대의 감각으로 화면구성되었고, 지금 우리가 [영웅본색]이나 [첩혈쌍웅]을 본다면 당연히 그 고풍스러운 이미지 크기는 옛날거가 되거나 컬트가 될 것이다. 물론 한 가지 길이 더 있다. 그냥 '오우삼'으로 보이는 것. 국민학교때, 중학교때 본 감동을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그럴 것이지만, 그 이미지의 흐름으로 오우삼이 만들어낸 스타일의 독자성은 '일반적인 시각적 감수성'의 심문을 충분히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난 대학교때 봤기 때문에 '옛날스러움'에 특히 민감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컬트로 보였고, 감동했으며, 동시에 유머로 받아들여졌다.
유머인가?
유머와 진정한 감탄 사이에는 대개 역사적 시간이 있다. 이전에 진심을 담아 감정을 표출시킨 그림들은 그 다음 시대로 오면 너무나 유치하고 오버된 감상주의로 보이며, 또 다음 시대로 넘어가면 도리어 그런 과잉들이 신선하고 재밌게 느껴진다. 이게 바로 키치논쟁 진상확인 작업의 핵심기술인데, K.해리슨의 [현대미술:그 철학적 의미](서광사)라는 책에 보면 친절히 잘 나와있다. 대개 한 시대를 풍미하는 감각방식--취향와 스타일들이 있으며, 알려진 감각방법을 얼마나 잘 따르면서도 잘 벗어나는가에 따라 작품들은 뛰어나다, 혹은 진부하다, 혹은 개잡소리다 등의 평가를 듣게 되는 것이다. 리얼리즘이 참신한 때도 있었고, 환타지가 참신한 때도 있었다. 어쨋거나 이 과정은 상당한 규모로 진행되는 것이다. 서구회화의 역사의 경우, 리얼리즘의 경향은 오백년 동안 발달했고 오십년 만에 뒤집어졌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것이 뒤섞이고 혼란된 지역이 있으니, 이 지역을 관할하는 산신령이 바로 오우삼이다. 도대체 난 아직도 그가 진심으로 [페이스오프]를 찍었는지, 아니면 거리를 두고 유머를 자청했는지 영 모르겠는 때가 있다. 순간순간 번득이며 지나가는, 현재 감각에 충실한 이미지들은 생각을 시키지 않으며, 흔히 슬로우 모션과 함께 나타나는 감정의 몰입지점은 역시 오우삼이군 하는 감탄의 미소를 짓게 한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받아들이는 유머가 진짜 오우삼 감독이 의식적으로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가 판별이 불가능한 것이다. 물론 정답은 '상관없다' 다. 만 든 사람이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작품은 늘 지금 이 시점에서 향수되며, 유머는 실재하는 것이다.
나와는 달리 온통 감정이입되어서 유머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 이 경우, 이 사람은 좀 다른 오우삼 영화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난 그런 오우삼 영화는 논외로 치는데, 그건 그런 영화는 내가 사는 시간과는 다른 곳을 흐르거나, 멈춰 있고, 따라서 내가 상관하고 싶은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모든 진실을 상관하다가는 아무 평도 끝맺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답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사건의 진위를 의심하는 순간, 나의 곤혹 속에 있다. 이거이 진심인지 유머인지, 영 알 수 없는 순간에 나는 나의 똑똑한 기호표지와 잣대를 잃고 잠시잠깐 무중력의 하강을 누리는 것이다. 이 순간무중력 상태가 [페이스오프]가 이전의 홍콩시절의 영화들과는 좀 다른 지점일텐데, 이도 역시 다른 주장이 가능하다. [영웅본색]을 보며 저건 과연 감독이 진심으로 한건지 유머러스하게 과장한건지를 헷갈려하는 관객이 있다면, 지금의 나와 같은 증상과 즐거움을 보여주는 셈이다. 예전의 나는 아마 거의 상관않고, 진심으로 보기도 하며, 유머를 즐겼던 것 같다. 생각이 바뀐 적도 있지만, 지금은 그 시절 오우삼 감독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어쨋거나 오우삼 영화의 평가와는 별도로, 난 궁금한 것이다.
증폭
오우삼 영화가 [페이스오프]에 이르러 변화한 것이 어느 공간감각에 속해있는가 라면, 그 시간감각은 여전히 오우삼으로 남아 제역할을 하고 있다. 이미 광각의 신선함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93년에 내가 본 이전 시대의 오우삼은 확실히 고풍스러운 샷의 유머였다. 이는 확대되는 순간들과 감정들의 틈새에서 더욱 심한 과잉을 만들어내고, 많은 사람들에게는 '촌스럽군'이라는 반응을 끌어낼 수도 있는 그 유명한 오우삼의 뽀다구를 형성하는 데 일조한다. 그러나 훨씬 유머의 가능성이 차단된 [페이스오프]의 경우에도 오우삼의 스타일을 지키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슬로우모션뿐만 아니라, 폭발의 반복에서도, 모든 걸 자르고 단박에 들어가는 얼굴 클로즈업에서도, 오우삼 특유의 흐름, 즉 시간은 여전하다. 어쩌면 오우삼은 자기의 유머를 어느 정도 덜어내고, 더 많은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우삼의 시간은 특징적으로 증폭되는 시간이다. 이것은 단순히 0.1초의 순간이 1.2초로 늘어나는 식의 잡아늘림이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정이입, 적에 대한 나의 행위를 촉발하는 감각에 대한, 적의 반격을 촉발하는 나의 행위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그의 영화는 철저한 감정이입이며, 그것도 단순히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이 아니라 주인공의 생을 가로지르는 순간순간, 위기와 기회에 대한 감정이입이다. 그의 영화에서 고뇌하는 주인공이 자기 힘으론 어쩔수없는 외부의 힘과, 윤리에 맞닥뜨릴 때 폭발하는 것은 '심리적 인간'이 아니라 분노와 애정과 안타까움의 감정들, 죽음 속으로 돌진하는, 운동하는 나의 몸의 감각들이다. 이것이 상당히 전형적이고 보수적인 그의 인물과 스토리라인 사이에서 작동하는 오우삼의 본질이다.
혹시 밖에서는 적들이 쳐들어오기 0.5초 전이라도 안에 쓰러진 주인공 친구는 할 말 다하고 죽는, 심히 주관적인 영화의 시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리얼리스트가 있다면, 물리학을 다시 배워야할 것이다. 최소한 프리고진 진영의 '혼돈에서 질서로' 나아가는 과학을 기본으로 깐다면, 객관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존재한다는 황당한 선입관 따위는 함부로 주장할 수 없을 테니까. 별과 행성들의 움직임이나 원자의 진동에 따라 셈을 하는 시간은 대략적으로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익숙해져있는 그 양적이고 (실용적으로만) 균일한 시간을 무지막지하게 뻥튀기하는 오우삼의 기법은 의심없이 '증폭'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주관적인 시간은 결코 가상이 아니며 우리가 익숙한 계량적 시간 역시 절대적 실재가 아니다.
우리의 시각엔 1/16 초를 지속하는 잔상이 있고 영화엔 필름 옆에 뚫린 일정한 간격의 구멍이 있어 시각적 이미지를 위한 일종의 절대적 기반을 만든다. 그러나 이 하드웨어에서 발생하는 소프트웨어는 전혀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자기논리를 증식시켜나갈 수 있다. 오우삼의 시간은 그의 흐름으로 만들어지고, 이에 동참하는 관객들 역시 그의 시간을 살며 그의 시간-오우삼이라는 주체 자체가 된다. 그의 과잉된 감정들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압박감을 쾌감으로 변조해내는 그의 흐름은 수많은 다른 작품들의 모방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신선함을 잃지 않고 지속하고 있다. 그의 증폭은 관습적인 시간을 변별점으로 한 증폭이지만, 그것이 창출해내는 시간은 평범한 일상적 지속 위로 솟아오르는 예외적 인물이다. 인격적 제한 없이 그냥 뻗어나가고, 응축되는, 이미지라고 불리는 감각이다.
감각의 사유
감각이 사유하는 것은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다. 오히려 머리가 좋아졌기 때문으로, 활자를 통하지 않은 이미지 자체의 소통으로 자극받고 연장되고 확장되는 이미지 접합체들의 파워업은 상당하다. 영화와 TV, 상품광고, 케이블티비, PC통신과 각종 미디어들은 우리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사유를 하도록 충동질한다. 평생 남의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하다 생을 마친, 수없이 스러져간 우리 조상들과는 다른 형태의 삶들이 지금 전자기망과 더불어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페이스오프]가 실행하는 것은 이를 위한 초기 본격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얼굴의 경계가 없이, 사회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전자기적이든 경계가 전혀 없이 우리가 행하는 감각-사유는 자체로 새로운 세상이며 또한 스스로를 퍼뜨리는 시스템이다. '인지'라고 하는 비겁한 거래 대신에 끊임없이 순간순간의 '사유'의 모험을 즐기는 것은, 느끼고 행동하는 0.5 초 사이에 번득이는, 때로는 그보다 긴 시간을 우리와 함께하는 주체이다. 소수 사상가들의 고뇌에 찬 사고가 없어진 뒤에 새로 생겨난 것은, 끊임없는 분절과 접합과정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훈련을 거친 세대, 수많은 조합들 중 어느 하나를, 거기서 또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으로 사유의 선을 이어나가는 세대, 즉 영화를 보고 뮤직비디오 속에서 헤엄치고 CF처럼 살기를 원하는 세대다. 이중에서 우리가 말하는 주체는 형성된다. 개개인들이 갖는 망상들 속에 진리가 있다. 주도적 이미지들만이 가장 적합한 진리가 될 것이다. 오우삼의 전형적인 스타일로 탄생한 [페이스오프]의 감각훈련은 이런 식으로 철학교실 1학기를 연다.
사고란 우리 느낌의 그림자일 뿐이다. 더 단순하고 공허한. - 니체, [즐거운 지식] 청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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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ene.uos.ac.kr/~poroco/cine/faceoff.htm
poroco의 씨네마천국 - 1. 영화감상문
페이스 오프 ★★★★☆ |
1997. 8. 16. (토) 2회
극장 : 명보극장 5관
1997년 미국영화
상영시간 135분
감독 : 오우삼
주연 : 니콜라스 케이지, 존 트라볼타,
오우삼의 헐리우드 입성은 이제 완벽하게 제자리를 잡은 느낌입니다. 홍콩시절 돈이 부족해서 다 해보지 못한 액션을 이제 새로 정착한 땅에서 쏟아 놓으려는 참입니다. [브로큰 에로우]를 보고나서, 만일 다음번에도 오우삼이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한 다면 [영웅본색]과 [첩혈쌍웅]의 비디오를 다시 보는 쪽을 택하겠노라고 이야기했던 적이 있습니다. 다행이 오우삼의 다음번 헐리우드 영화를 기대해도 좋을 듯 합니다. 오우삼 자신을 위해서도, 관객들을 위해서도 정말이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그의 차기작은 주윤발과 다시 호흡을 맞추는 작품이고, 그 다음은 톰 크루즈와의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니 이 아니 기쁜일입니까?
영화는 오우삼 특유의 스타일을 간직하면서 헐리우드적인 스케일을 취한 절묘한 조화를 보여줍니다. 미국인들로서는 상상하지 못했을 빈틈없이 계산된 움직임들과, 서로 총을 겨누고 대화하는 비장한 장면들에 미국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익히 그런 것들을 보아왔던 우리의 눈에도 새로운 볼거리들은 적지 않습니다.
존 트라볼타와 니콜라스 게이지의 연기대결은 니콜라스 게이지의 한판승입니다. 선인의 역이나, 악인의 역이나, 두 종류의 연기 모두 존 트라볼타가 니콜라스 게이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악인의 얼굴을 갖게 된 후 고뇌하며 악인으로서 행동하는 장면의 표정 같은 세세한 부분들은 대단합니다. 물론 존 트라볼타가 맡은 배역에서는 고뇌를 보여줄 여지가 없긴 했습니다만, 상대적으로 평면적으로 보이는 연기였습니다.
얼굴을 감쪽같이 바꾼다는 말도 안되는 설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거기에 따르는 무리수가 좀 있긴 합니다. 아무리 바꿔치기 해도 1주일간이나 부부생활을 하면서 부인이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은 억기죠. 혹시 마틴기어의 아내처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면 모를까. 그렇지만 그런 무리수를 감안한다면 나머지 부분들은 상당히 촘촘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덕분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진지한 고뇌까지를 곁들여 매력적인 각본으로 만들어졌고, 좋은 각본은 좋은 배우와 좋은 감독의 손에서 재미있는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캐스터의 아이에게 헤드폰을 씌운 장면의 총격전은 잠시동안 시간이 멎은 듯한 충격을 주는 명장면이었습니다. 마지막의 5자대면도 인샹적이었고, 오우삼 특유의 절도있는 총격전과 보트체이스, 최후의 주먹다짐까지 이어지는 끈질긴 액션도 박력을 놓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캐스터가 숀을 면회오는 장면도 기가 막혔습니다. 거울을 향해 총을 겨누는 장면, 교도소에서 캐스터로서 싸움을 벌이는 숀의 복잡한 표정도 인상적입니다.
결국 숀과 캐스터는 제자리로 돌아갑니다만, 서로 바뀐 역할에 대해서도 능숙하게 대처합니다. 숀도 캐스터 못지 않게 잔혹스럽게 죄수를 패고 간수와 경찰을 쏘았고, 캐스터도 숀 못지 않게 능란한 경찰과 아버지 역할을 합니다. 둘 다 자기 가정에는 충실치 못했던 주제에 남의 가정에서는 참으로 좋은 아빠역을 흉내냅니다. 어느 것이 진짜 자기의 모습이고 어느것이 내면의 숨겨진 자아인가? 장자의 나비꿈,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 마스크...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는 익명성은 스스로 파격에 대해 관대해 질 수 있게 해주고, 자신의 본모습을 찾으려는 회귀본능과 익명에 기대어 파격을 즐기려는 유희본능이 공존하게 됩니다. 숀은 회귀본능을, 캐스터는 유희본능을 보다 많이 따르고 있습니다. 만일 내 경우였다면 어땠을까요...
재미있습니다. 2시간이 좀 넘는 길이지만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올 여름 극장가의 마지막 승자가 될 가능성 1순위입니다. 홍콩 시절 담뿍 담아 내었던 허무와 비장의 영웅주의 미학은 깨끗이 사라지고 없지만, 대 제작자 마이클 더글라스가 오우삼에게 간청을 해서 연출을 맡길 만큼 명망있는 오우삼식 헐리우드 액션이라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하는 훌륭한 오락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