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그가 평생 제작한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다양한 시대성과 예술 사조를 동시에 목도할 수 있는 기회이다. 특히 일제강점기라는 굴곡진 시대에 태어나 급변하는 한국 근현대사의 정점에서 활동한 작가와 그의 작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남다른 감회와 감동을 선사한다. 이러한 작가 가운데 현초 이유태(玄艸 李惟台, 1916-1999)가 존재한다. 1916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유태는 스무 살이 되던 해인 1935년 이당 김은호(金殷鎬, 1892-1979)의 사숙인 낙청헌에 입문하여 화가로서 첫발을 내딛었고 1938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미술학교에서 가와사키 유이치에게 사사를 받으면서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해방 이후에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의 운영진으로 참여하거나 여러 전시를 개최하여 한국의 대표하는 동양화가로서 명성을 높였다.
무엇보다도 이유태의 가장 큰 행적은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 교수라는 직함이다. 이유태는 이화여자대학교에 미술대학이 처음 설립된 직후인 1947년 조교수에 부임했고, 1972년부터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1977년 퇴임했다. 이화여대 동양화과를 독립 학과로 정착시킨 장본인이자, 30년 동안 본교를 한 번도 떠난 적 없는 진정한 이화인인 셈이다.
이 글은 현초 이유태의 탄생 100주기를 맞이하여 교육자 이유태의 행적과, 그와 불가분의 관계인 이화여자대학교 동양화과의 성장 과정을 추적하고자 한다. 특히 이유태가 본교 교수로 재직했던 1947년부터 1977년까지의 학과 변천 과정과 이유태의 공헌도를 파악한다. 이 글을 통해 한국 여성 미술 교육의 산실로 성장해온 이화여대 동양화과의 역사가 추적될 것이다.
Ⅱ. 미술대학 동양화과의 성립 과정
조선 왕조의 유일한 공적 서화 교육기관이자 왕실 회화를 담당했던 도화서가 19세기말 폐지되면서 일제강점기에는 에도시대 이후 일본에서 성행한 화숙과 동경미술학교 등, 일본의 미술교육 제도와 유사한 여러 미술 연구기관이나 사설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특히 일본인에 의해 시작된 여성 미술교육은 기성서화회, 서화연구회 등에서 수행되었다. 그러나 1920년 이전까지는 여성 미술교육의 대상이 대부분 기생이었고, 그들이 주로 창작한 장르도 사군자류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후 여성만을 별도로 교육하기 위해 1922년 12월 창신서화연구회가 조직되었고, 비슷한 시기 경성여자미술학교가 시작되었다. 경성여자미술학교는 수업 연한이 본과 2년, 연구과 1년이었으며, 커리귤럼은 공통 교수 과목의 영어, 수신, 자수, 미술사, 가사, 음악, 재봉과, 추가 교과목의 동양화, 서양화, 공예 등으로 구성되었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한국의 미술계가 급변하는 가운데, 종합대학교에 미술대학이 개설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미술대학을 창설한 종합대학교가 바로 이화여자대학교이다. 1945년 9월 처음으로 종합대학교 학생 모집 광고를 낸 이화여대는 한림원, 행림원, 예림원의 3분과를 개설했고, 이에 문과, 음악과, 가사과, 보육과, 교육과, 의학과, 체육과, 미술과. 약학과 등 8개의 학과를 배속시켰다. 1945년 10월 22일 “미적 능력을 개발하고 창의적 조형 능력과 인격을 갖추기 위해” 출범한 예림원에는 음악과와 미술과가 소속되었다.
1945년 예림원 미술과의 초대 교수는 동양화가인 김영기, 서양화가인 심형구(沈亨求, 1908- 1962),자수 전문가인 장선희(張善禧, 1894-1970)가 역임했다.최초의 입학생은 49명이고, 그 중의 18명이 1949년 졸업했다. 예림원의 미술과는 1947년 예림원 미술학부로 명칭을 바꾸고 동양화, 서양화, 자수, 도안의 4가지 전공을 설치하면서 동양화 전공에 이유태, 서양화 전공에 김인승, 자수 전공에 주순목, 도안 전공에 김원 등 신진 교수를 보강했으며, 심형구가 초대예림원장을, 장선희가 초대미술과장을 맡았다. 이유태는 30년 6개월을 이화에 머물렀다. 동양화전공은 미술과 초대교수인 김영기와 신임 교수인 이유태가 이끌어 나갔는데, 이들이 담당한 과목은 주로 사군자였다.
예림원은 1951년 교육령 시행에 따라 예술대학 미술학과로 개편되었고, 1960년 미술대학으로 독립하여 회화과, 생활미술과, 조각과, 자수과의 학과를 두었으며, 같은 해 미술관도 준공하였다. 예림원의 동양화 전공과 서양화 전공이 회화과로 통합되었고, 도안전공이 생활미술과로 전환되었으며 조각과가 신설된 것이다. 1956년 박노수, 1958년 전덕혜, 1965년 안동숙이 교원으로 부임하여 김영기, 이유태와 함께 1960년대의 동양화 실기를 담당했다.
이유태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의 동양화전공은 서양화 전공에 비해 무시 받는 학과였다. “밤낮 서양화 세력에 밀려서 우수한 학생은 서양화과가 가져가고, 밑의 학생만 동양화과로 주었다”는 것이다.
서양화가 한국 미술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이유태는 사표를 걸고 총장에 게 분과를 건의했고, 마침내 1967년 회화과는 동, 서양화과로 분리되어 독립 학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도 동, 서양화과의 분리가 시도되었다고 한다.이듬해 1968년 이규선 교수가 가담하면서 동양화과는 학생 지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Ⅲ. 미술대학 학장 이유태와 동양화과
동양화과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유태는 1972년 9월부터 1975년 8월까지 2대 학장을 역임하면서 대학과 학과의 발전을 위해 힘썼다. 우선 이유태교수가 학장 시기에 진행된 사업은 각 학과의 학회 활동이다. 동양화과의 학회는 섭외부, 연구부, 총괄부로 조직되었고, 학술 세미나와 특강, 노대가의 화실 탐방, 동창회 좌담 등의 활동을 했다. 1년에 학술 세미나를 몇 차례 개최하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에 대한 앞선 지식을 배웠고, 스승의 작업실을 직접 방문하여 거장의 화업을 목도했으며, 동창회 좌담을 통해 졸업생의 활동과 근황을 파악했다. 특히 특강은 회화이론가의 강연뿐만 아니라 화랑 대표를 초대하여 표구하는 방법을 배우는 내용도 포함되었다.
이유태 학장의 또 다른 사업은 각 학과의 학회지 발간이다. 1958년 미술대학 학생회 편집부에서 발행했던 <예림(藝林)>이 1971년 3호로 잠시 폐간되자, 이유태는 각 학과에서 자체적인 학술지를 발간하도록 독려했다. 그리하여 동양화과 학회지인 <채연(彩硏)>을 비롯하여 서양화과의 <채림(彩林)>, 조소과의< 조소>, 자수과의 <수(繡)>, 생활미술과의 <생활미술>, 장식미술과의< 장미>, 도예연구소의 <도예연구>가 연이어 발행되었다.
<채연>은 1972년 9월 30일 창간호를 시작으로 1974년 2호, 1978년 3호까지 발행되었다. 이유태는 <채연>격려사에서 1945년 예술원 미술학부가 창설된 이래 동양화과로 독립하기까지 25년이나 걸렸음을 회고하면서 변화하는 미술계의 추이에 따라 과거의 연구 및 현재의 동향 파악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채연>은 앞서 언급한 동양화과의 학회의 결과물로 발행되었다. 즉 학부생의 작품, 특집 기획 논단, 교수논단, 동서양 고전의 번역, 노대가 화실 탐방을 발췌한 좌담회, 학부학생의 논단, 석사학위 논문 등으로 구성된 것이다. <채연>의 편집위원은 모두 3-4학년 학부 재학생이었지만 매우 수준 높고 짜임새 있는 학회지였다.
마지막으로 동양화과 출신들의 동문전인 <예림전(藝林展)>의 개최이다. 1972년 4월 신문회관화랑에서 열린 <예림전>은 원문자 교수를 포함한 11명의 동문이 각각 2점의 그림을 출품한 전시이다. 미술대학은 예림원 시절 첫 번째 졸업생을 배출한 1949년부터 <녹미전(綠美展)>이라는 동문전을 정기적으로 마련해왔다. <녹미전>은 미술대학 소속의 모든 학과 졸업생의 동창회인 녹미회의 동문전이다. 그러나 동양화과는 녹미전과는 별개로 동양화과 졸업생만을 위한 <예림전>을 선보인 것이다. 비록 창립전으로 막을 내렸지만, <예림전>은 현재 동양화과 동문전인 <채연전>의 전신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Ⅳ. 이유태, 영원한 이화인
이유태는 우연한 기회에 붓을 잡기 시작하여 본격적으로 동양화를 배웠고, 일본에 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동양화가로서의 행보를 멈추지 않았다. 1947년 예림원 미술학부 시절 부임하여 30년 동안 이화에 재직하면서 한국 여성 동양화 교육의 큰 스승으로 활약해 왔다. 그는 미술교육의 기본은 첫째 사람 교육이고 둘째는 기술 교육이라고 했다. 언제나 온화하고 겸손한 모습을 간직한 채 훌륭한 동양화가로서, 그리고 교육자로써의 면모를 잃지 않았던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였던 셈이다. 이제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예술 정신과 교육 철학을 계승하여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