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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나라사랑 시화전과 사화집 발간의 의의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 심 상 운
시인들의 현실참여는 역사의 진실을 감성적인 예술언어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예술의 아름다운 결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협회는 2005년 광복절을 맞아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나라사랑 테마시를 사화집에 수록하여 회원들의 뜨거운 나라사랑 마음을 시대의 중심에 언어의 솟대로 세운 바 있다. 그리고 2012년 3월 15일 중국대사관 앞에서「탈북난민 북송반대 성명서」를 발표하고, 중국정부에 대해 탈북난민들의 인도주의적 해결을 촉구하는 시낭송과 길거리 퍼포먼스를 통해 이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인권 운동’을 보여주었다.
시인들이 민족이나 역사문제에 관여하는 것은 ‘시정신의 바탕’에 평화주의와 인도주의 정신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광복 68년이 지난 21세기의 오늘날에도 한⦁일 간에는 미해결의 문제가 암癌 덩어리처럼 남아 있으며, 휴전선을 경계로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시대에 ‘평화통일의 실현’은 이 시대 우리 민족이 성취해야할 과업으로 남아 있다.
이런 역사적 시대적 문제 앞에서 협회의 시인들이 한마음으로 미래지향적인 <제3회 나라사랑 시화전 및 시낭송 공연>을 하는 것은 매우 의의가 있는 행사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협회의 행사에 <한국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여 시화전 출품 작품들을 모아 <100인 나라사랑 시집>으로 발간하게 된 것과 역사의 향기가 아름답게 서려있는 경복궁에서 품격 높은 시화전과 시낭송 공연을 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는 <한국문화체육관광부>의 높은 문화의식을 조명하는 행사라는 점에서도 의의를 갖는다.
이 행사가 매년 정기적인 행사로 자리 잡아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들의 나라사랑 마음이 우리 사회에 파문처럼 번져나가기를 희망하고 기대하며, <제3회 나라사랑 사화집>의 발간이 그 파문의 동력이 될 것을 확신한다.
2013년 10월 19일
(차례)
가영심/ 직녀봉 연가
강소이/ 사랑법
강정화/ 새벽강
경규희/ 門-壁의 대화
고광자/ 별들에게
공정식/ 낮달
권혁모/ 다시 무녕왕릉
권희자/ 새소리
김 경/ 오래된 집이 있는 풍경
김경희(자연)/ 영월
김규화/ 한강을 읽다
김금아/ 소록도 겨울
김길애/ 내린천
김동애/ 바람의 눈
김미정/ 이슬
김병제/ 섬진강을 따라
김선진/ 저녁 산책
김연하/ 산수경
김완용/ 꽃장수
김우현/ 白石山 궁노루
김운중/ 돌뜬 절 흰구름
김운향/ 강
김점숙/ 도라지꽃
김정현/ 별
김종희/ 젊은 그들
김지향/ 아름다운 금수강산 그리고 가을
김필영/ 응
김해빈/ 청자의 미소
김현호/ 인왕산(仁王山)
남민옥/ 대나무에 기대다
노유섭/ 한려수도 꽃섬 하나 되어
맹숙영/ 시골 빈집
문덕수/ 아내의 침묵
문재구/ 눈
민문자/ 오솔길
박강남/ 홍유릉, 그곳에 가면
박건웅/ 충혼
박경희/ 무화과 여인
박기임/ 하늘물감
박영숙영/ 바람구멍
박일소/ 갈대12
박필경/ 입동
배학기/ 지팡이의 삶
서윤석/ 몽마르뜨의 시인
서종남/ 매화차
손기섭/ 한복
손해일/ 새벽바다 안개꽃
송낙현/ 요양원 창문너머
신규호/ 도봉산에서
신극주/ 방구리에 표주박
신세훈/ 고국의 울엄매 그리버서
신주원/ 빗장속 햇살
신현득/ 휴전선에 선 감나무
심상운/ 고향산천 ・ 30
안혜초/ 수박을 쪼개며
양윤덕/ 소리를 끓이다
여영미/ 도마
여한경/ 나비의 세상
오동춘/ 임꽃 모습
오양호/ 4월 소식
오하룡/ 진땀
유승우/ 4월 19일
유회숙/ 보고 싶다
윤하섭/ 경복궁
윤희선/ 단풍
이견숙/ 고궁과 하늘 사이
이삼헌/ 두물머리
이 선/ 경복궁 조감도
이성남/ 규방
이성애/ 들꽃사랑
이수정(미랑)/ 시월의 들판
이순욱/ 나의 노래
이승용/ 벚꽃
이신강/ 뒷모습
이아영/ 은방울꽃
이유미/ 경회루
이준희/ 라면과 소면
이춘하/ 이팝곷
이혜선/ 흘린 술이 반이다
임병호/ 달밤, 백마강
임애월/ 백령도의 밤
전덕기/ 속사람이 아름다워
전민/ 여름 달
전영모/ 할머니의 십자수
정광섭/ 면봉산 앞에 서서
정명숙/ 촉석루에서
정민호/ 겨울꽃
정연덕/ 그리움
정연석/ 바람 부는 날
정연자/ 서울 그대
정유준/ 화개
정창운/ 만날 수 없는 너를 위하여
정 호/ 억새 능선에서
조덕혜/ 괜찮아요
조명제/ 채송화
조병무/ 무슨 색깔이 나올까
주경림/ 구름 무덤
지한주/ 기다림
최계식/ 화조도
최영희/ 길
최은하/ 빈 의자
최진연/ 호남평야
최창순/ 쓴 소리
한여선/ 분홍향기
한연순/ 창덕궁의 가을
한지혜/ 봄같이 오시는 님
함동선/ 유둣날 뻐꾸기 울음은
허만길/ 아침 강가에서
홍순미/ 인터넷 호박고구마
황상순/아내에게 해바라기 씨를 건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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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편입니다
직녀봉 연가
가영심
푸른 시간 향해
오래 오래 귀 열고 들었지요
저 억세고 질긴 조선의 뗏장
인동초 동아줄로 엮어놓은 인연 하나
꿈 속 북풍이 비껴간 뒤엔
하얀 새벽달처럼 눈물 뿌리며
댓돌 위 동그마니 놓인 기다림의 고무신들
백두산 비취옥 천지 연못에
층층 빛과 소리로 쌓여진
물빛 닮은 천년 사랑이여
천년 사랑의 노래 불러가던 님
그 고운 님께서 내게 주신 가락지 하나
님께서 주신 가락지 하나.
사랑법
강소이
서울 하늘,
물총새 한 마리
눈멀어 날아오를 때
세상 어디쯤
냉각된 사랑도
눈물 가시를 닦는다
새벽강
강정화
어둠에 단잠 못 이룬 밤
벅찬 삶의 무게에 짓눌려
눕지 않은 그림자로 가부좌 틀고
아득한 외로움에 면벽하다
앉은자리 저편으로 두런두런
훌쩍거리는 물의 혼령 만났네
길 찾는 머나먼 행군으로
잠들지 못한 물들의 속앓이
낮게 몸 낮추어도 기죽지 않고
입 다문 침묵으로 속내 나누면
느리지만 서두르는 법 모른 채
분노에도 일어서지 않는 낮은 자세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속에서도 돌고 돌아
꺾이어 상처나도 혼자 이겨내며
여명의 새날 기다리며
차디찬 이슬로 이마 훤히 씻은
의연하게 흘러온 장한 물결 맞이할 때
서둘러 달려나가
장한 모습 버선발로 맞이하리라.
門-壁의 대화
경규희
문을 닫아만 두면
벽이나 다름없지
벽을 세워만 두면
칸막이나 다름없지
너와 나
확 터놓으면
햇살 들어 환한 집.
별들에게
고광자
별 총총
널따란 시골집 마당
해송 아래
별빛을 센다
유월 밤
6·25 참전용사였던 옹은
별들에게
전쟁이야기 열중이다
귀담아 듣던
그 때, 한살박이 딸
용맹스러운 아버지의 영상을
별, 별밭에 만들고 있다.
낮달
공정식
납짝하고
통통한 송편같은
새하얗고 향긋한 떡 하나
푸른 접시
담아 놓인 너는
님이 먹다가 감겼는지
공복空腹이 주는 환상 군침이 흐른다
다시 무녕왕릉
권혁모
기름등 밝혀 두고 생각에 잠겨 있네
비는 화관(花冠)을 돌아 산문(散文)으로 내리는데
어디쯤 단편을 맺고
다시 쓸까 사초여.
위엄도 사랑마저도 부질없는 술래놀이
영계란 이승을 빌린 휘휘한 현실(玄室)일 뿐
사신(四神)이 지켜 온 천 년이
하냥 눈먼 그 자리.
웅진성 한 구비가 삭아 내린 뼈마디가
사금파리로 흐느끼는 비단강 한 끝에 와서
먼 그날 어전에 올릴
상소문을 적는다.
새소리
권희자
나팔꽃 아침
햇빛 속에서 우는 새야
무더우에 젖는 옥피리 소린
내 그리운 인기척이다
열면 피어오르는 소리
환한 하늘빛이다
별빛소리는
죽은 풀뿌리를 살린다
마음 옥피리 피는 소리에
나팔꽃 아침은 햇빛소리로 열린다
오래된 집이 있는 풍경
김 경
‘바보 상자 앞에 앉아 돌부처 노릇이나 하냐?’고
창틀 옆 달력 사진이 말없이 꾸짖네
‘···시간이 흐르지 않냐?’고 거듭 꾸짖네
담 곁 화단엔
어울려 킬킬대며 신바람 튕기는
노란 개나리꽃,
강 스파이크 때릴 때마다
진한 향 터지는,
열띤 배구 시합중인
하얀 라일락꽃,
깊은 속을 찌르고 번지는
맑은 휘파람새 소리,
환한 새봄
새 활력을 찾자고 대기하네,
금빛 햇살 쏟아지는
섬돌 위에 놓인 정든 신발 한 컬레
영월
자연 김경희
청령포 선혈빛 단풍 단풍아
멍든 가슴 갈무리하는 동강아
예서 무슨 일 있었는지 말 좀 해다오
삿갓 쓰고 방랑하던 도인의 눈물과
왜란에 끌려간 누이들 눈물로
길고도 긴 푸른 강 홀로 만들었더냐
희뿌연 산허리 새벽안개 속에서
산새가 지저귀는 옛이야기
오롯이 너희들만 알아듣기냐
지금쯤 속 시원히 털어놓아다오
고씨동굴로 그들은 왜 숨어들었을까
위기엔 구국(求國)이 먼저일 터-
청정한 바위 베개 삼은 그들이 자못 궁금하다
산꿩이 푸드득 날개 칠 때마다
심장과 간만큼 졸아든 하늘 보고팠을 터-
이 사연 저 사연 시치밀 떼고 모른 척 하느냐
살핏 눈요기나 하고 간다며 날 비웃기냐
아름다운 산천 돌아돌아 돌이키다
갈바람에 떠난 님들에게나 속삭일 테냐
동강의 물거울 속 물고기들에게 물어볼테다
내가
한강을 읽다
김규화
이젤을 거꾸로
일요일의 한강이 그림을 그린다
우우우 몰려와 늘어선 물가의 아파트군
단숨에 세우고
짐짓 흔들어본다
하늘을 제 가슴 깊숙이 클릭하고
그 위에 구름 몇 송이 흘리다가는
이내 지워버린다
아파트를 흑수정으로 꾸며놓고
욜랑촐랑 물살속의
창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구부정한 어머니
뒤따르는 나를 덥석 안는다
돗단배 하나 지나간 뒤
한강은 우리를 지운다
피사로의 '수문'을 물새가 가로지른다
소록도 겨울
김금아
낡은 벽에 청동거울이 걸려있다
눈썹이 없는 여자가
얼굴을 굴리며 걸어 나온다
여자는 손가락을 잘라
돌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손마디마다 동백나무가 돋아난다
여자가 거울을 향해 돌팔매질을 하자
바닷물이 쏟아진다
유리파편에서 초승달이 떠오른다
여자는 파도를 끌어내어
거울 안으로 사라진다
깨어진 문 안으로
푸른 길이 열리고
물결위에 붉은 핏물이 일어선다
내린천
김길애
투명과 투명이 겹쳐지면
싯푸름이 된다하네
내린천이 된다하네
그 물 먹고 자란 돌도
나이테 두르고
반점 키우며 닳고 닳아
내린천이 되었다네
등 부비며
달그락거리며
내린천으로 흘러가며 산다네
바람의 눈
김동애
전나무 숲을 그리려
화판에다 직선을 가득 채우고
그 속을 들여다본다.
근엄하신 할아버지가 서계시고,
반듯하신 시어머님 눈빛이 반짝이고,
토굴 속 스님이 막 득도하려는 찰라가 스치고
창밖엔 겨울바람이 불고 있다.
얼른 다른 화선지를 꺼내어
곡선의 그림을 그렸다.
그 속엔 여인의 몸짓이 있어
꽃 향이 흩날리고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다닌다.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숨어 있는 그림자는
가슴 안에 있는 바람의 눈, 눈이다.
이슬
김미정
대지의 수염에 내린
달빛의 숨결이다
밤새
천지간을 더듬어 연주한
우주의 점자 악보이다
아, 한마디
흔적 없는 영혼이다
떠가는 저 구름의
짚신이다
섬진강을 따라
김병제
일어서며 깨어나며 강은 끼륵끼륵
날고 있었다. 지나가지 못한
꿈으로 서 있는 세상도 시퍼런 억새 그늘도
그렇게 많은 세월의 가루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낮게 더욱 힘겨운 목마름을 오르내리며
강 밖의 강 속을 짊어지기까지의 기다림은
얼마나 오래도록 뼈저리고 따뜻한가
날갯짓이 겹겹인 다함없는 그리움의 물살들
가지치고 섞이며 매화 산수유 배꽃과 푸르게
융성할 길을 내며, 나의
온 하루를 활짝 날고 있었다, 강은
저녁 산책
김선진
뒷덜미가 보인다
밀어내지 않아도
어느새 봇짐 꾸려
저만치 달아나고 있다
늙은 느티나무가
아침이면 동녘 하늘을 품었다가
저녘이면 산란하는 노을을 분만한다
푸름도 취하면 붉어지는 것
흔들리지 않아도
스스로 떨어지는 이파리들
바람과 동행하는
가을이 붉다.
산수경山水景
김연하
녹음이 우거진 청산
춤을 추는 초록빛 숨결 속에
흰 구름 한가로이 떠가네.
바람은 서늘해지고
우뚝 솟은 산 계곡물 휘돌며
가슴 벅차게 오는 솔향기
석간수에 갈증을 풀며
세월 속에 매달린 번뇌들을
깨끗이 흘려보내네.
꽃장수
김완용
현충원 입구 먼지 낀 축대 옆
사계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꽃을 파는 할머니 있다
향기 대신 영혼을 얹어 파는
할머니 손끝에서는
봄·여름·가을꽃이 함께 어우러져
지나가는 추모객들 부른다
죽음 섞어 만든 화사한 꽃다발
요령鐃鈴처럼 흔들어야 살 수 있는
시든 꽃 할머니
손등 기어가는 파란 지렁이 실핏줄 위에
시들지 않는 꽃잎 피워놓고
기다린다
수천수만 차가운 묘비들 속에
묻어둔 그리움의 결정체
혼魂들
아버지, 서방님, 아들……
白石山 궁노루
김우현
北으로 北으로
황톳길에는
녹슨 다래넝쿨
잿빛 산을 넘는다
백치로 저린
잘린 지뢰밭은
늙은 삵의 自由인데
꿈꾸는 궁노루
하루해가 멀어
白石의 준령
비탈로 산화하고
홀아비바람꽃
生香을 문지르면
향낭이 운다
바람꽃이 운다.
돌뜬 절 흰구름
김운중(金運中)
봉황산 산비탈엔
춤추는 의상
후린 가슴 선화.
하양꽃 능금볼은
부석사 나래
정토산 태백산.
배뿔뚝 무량수전
뜬 돌 아랫길
지킨 당간지주
능금꽃 맑은 텃물
인삼막걸리
새빨간 아씨볼
강
김운향
꽃내음이
시린 가슴에 묻어 온다
누굴까
물기 젖은 잎새가
푸른 심줄을 흔든다
비에 젖고 바람에
밀려 온 세월
미소 하나
손짓하던 햇살처럼
반짝인다.
도라지꽃
김점숙
산꼭대기 자갈밭에
도라지꽃 만발했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바다 건너간
열대여섯 살 소녀들의 한이
돌 틈 사이사이를 뚫고
쓴 뿌리 올려 대궁마다 피워낸 꽃
꽃봉오리 열리자
바람결에 꿈꾸는 듯 꿈을 꾸는 듯
조국산천 돌짝밭에 써놓은 시
별
芝園 김정현
보송보송 바람 좋은 날 먹물 짙은 하늘에 그이와
내 눈에만 보이는 보석들 그 중에 가장 영롱한 보석 몇 개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값 잘 쳐준다는
보석상인 만나면 돈 두둑히 받아 고장난 몸
튼튼히 고치고 싶어하는 농아인 아저씨
병원비 내 드리고 툭하면 수돗물 난방 고장으로
고생하는 월셋방 사는 윤할머니
수돗물, 난방 잘되고 월세 걱정 없는 방 한 칸 마련해 드리고
그래도 남으면 이씨 할아버지 부실한 치아
틀니 끼워드려 식사 꼭꼭 씹어 드시게 하고 싶다
그런데 나도 그이도 그 보석 손에 닿지를 않아
키가 한참 더 자라기를 기다려야겠다.
젊은 그들
김종희
전장에 나갔던
이 땅의 젊은이들
동작동 국립묘지에
돌이 되어 돌아왔다
똑같은 키에
똑같은 모습으로
돌이 되어 돌아왔다
흙이 되기가 서러워
한없이 가볍고
연한 목숨이 싫어
무겁고 단단한
돌이 되어 돌아왔다
모든 아픔 벗어버리고
이름 석 자 새겨
돌이 되어 돌아왔다
아름다운 금수강산 그리고 가을
김지향
사철이 모두 다른 이 나라 금수강산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가을이 오면
창밖의 허리 굽은 느티나무 팔뚝에
목이 트인 서리까마귀 빨간 목청들이
대롱대롱 열린다
밤이면 싸움을 걸어오는 검은 오뇌의 줄기,
쇠방울로 등솔기를 때리고 재빨리
머릿속에 뿌리내린 그 어둔 줄기를
몽땅 뜯어내버리고 나는
아침마다 손가락을 펴들고 금가루를 뿌리는
햇빛의 머리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거리엔 선잠 깨어 벌써 볼에 연지 찍은
가랑잎을 초롱초롱 유치원 아이들 소리가
뒤덮고 간다
무거운 시대를 메고 가는 한반도
어깨 위로 황금빛 꽃비가 된 가을이
뚝, 떨어지면 온 세상이 커다란
웃음으로 화안해진다.
응
김필영
정겨운 대답 위쪽과 아래쪽이 원이다
두 개의 동그라미 속에 마음 하나씩 들어있다
둘로 나뉜다 해도
절대로 각이 질 수 없는 이응과 이응
한 가운데 거울 하나 들여 놓고
마음과 마음을 마주한다
긍정의 應도 마음 心부에서 찾아야하듯
스스럼없이 마음 한가운데에서 샘물처럼 솟는 응!
응 속의 동그라미들이 굴렁쇠처럼
서로의 마음속으로 경쾌히 굴러들어온다
옹알이를 내려다보는 엄마의 눈빛과
막 뗀 아기의 입술과 맞닿는 교차점, 응!
둥근 소리의 꽃, 응!
Oh Yes! 맨 처음 민얼굴의 내가 보인다
슬며시 손을 잡는 그대 웃음이 바싹 다가온다.
청자의 미소
김해빈
푸르른 날
왕실의 사고는 열리고
실록에 담긴 묵빛 천년학 날아오른다
날아라 퍼져라
푸르던 그날의 흙내까지 단숨에 들이키는
화원의 손길 부드러운 농담(濃淡)을 담아라
활짝 연 모란 얼굴에 상감 기풍 번지고
매끄러운 빛살 지탱하는 향불 높이 타오른다
연적에 흘러내린 선비의 기개(氣槪),
한 마리 학이 차지했다
날개로 잉태한 십장생 거머쥐려
유리벽 안으로 푸른빛 투시하는 정적
두어라 탐낼 것이 어디 비색의 날개뿐이랴
청자의 미소 살얼음 진다
인왕산(仁王山)
김현호
사대문안 넓은 터전 오백년 도읍지에
바위성벽 인왕산은 경복궁에 우백호라
광화문 수도 서울을
늠름하게 지켜 섰다
북악 아래 청와대요 한양성에 구중궁궐
길게 놓인 아리수는 춘강추강 펼쳤는데
남산의 푸른 정기가
세계 향해 뻗어간다.
대나무에 기대다
남민옥
죽녹원에 갔다
한낮의 푸른 광선이 잎마다 넘실거린다
습한 흙냄새를 따라
곧게 뻗은 정갈한 숲이
강물로 흐르고 있다
하늘 향한 마디마디 그 어디쯤
깊게 엎드린 그늘
목울대를 지나며 머뭇거리던 소리
마디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잎은 쉼 없이 자라나는데
맑은 노래는 댓속 깊이 갇혀있다
비워낸 곧은 줄기
눈과 비 삭아 울이 되고
쇄쇄 잎을 스치며 넘나드는
바람의 소리를 꿈꾸는 나무
기대어 나도 바람이 된다
한려수도 꽃섬 하나 되어
노유섭
어느 골목길에선가
그대가 나를 부르면
꽃섬 하나 되어
나 그대에게 달려가리
어느 선창가에선가
내가 그대를 부르면
꽃섬 하나 되어
내게로 달려오라 그대여
그만큼의 거리에서
우리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여도
그리운 꽃섬 하나로
그대와 나 남아 있으리니
물결치는 그리움 하나로
오늘도 가슴 적시며
그대와 나
꽃섬 되어 마주보리라
시골 빈집
맹숙영
허물어진 대문이 취객처럼
비스듬히 빗금으로 서있다
한때는 웃음이 봇물 쏟아지듯
꽃춤 추며 화무를 그렸다
불꺼진 지 오랜 시간
굴뚝엔 연기 마르고
냉한 습기가 안개처럼 덮고 있다
아가의 울음 발자국 소리마저도
어디론가 묻혀버린 목마른 땅
어둠은 그림자를 삼키고
무겁게 말뚝에 꽂혀있다
인기척 사라진 빈집엔
담장 한 귀퉁이의 주목나무만이
소리없이 붉게 울고 있다
바람도 머물고 싶지 않나보다
달빛은 눈감은 채 속눈썹 맞대고
아내의 침묵
문덕수
아내는 겉보기에 밉살스럽다
거리의 버스 안내판 기둥에 기대어 기다릴 때엔
그렇지 않다 어디서 잠자리 한 마리
은빛 투명한 쌍날개를 제트기처럼 가지런히 편 채
그녀의 흰 산행山行 모자 차양에 허락도 없이 앉는다 그때
아내는 마음 속으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왼발 끝을 갈지자 모양으로 들어 올리더니 이내 내려서
땅바닥에 나비와 바위 모양의 그림을 그린다
너무 추상적이어서 나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그때 나는
높은 산봉오리가 허공에 기대서듯이
아내의 침묵에 기댄다
눈(眼)
문재구
내 눈 속에
네 모습 있고
네 눈 속에
내 얼굴 있는데
내 눈 속 너는
내 가슴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데
네 눈 속의 나는
너의 어디쯤에 있는지
내 눈 속에 네가 있고
네 눈 속에 내가 있는데
오솔길
민문자
어리뱅이 시절
학교 오가던 길
내 꿈 아롱진 길
불여우 백여우 꾀쟁이 친구들
풀 묶어 넘어지고
장난치던 오솔길
남학생이 어설피
건네주려던 연애편지
바람에 날아가던 가파른 언덕길
멀리서 오시는 손님
마중 나가 기다리던 길
솔밭으로 이어지던 길
고향집 가는 길
도시화로 사라진 길
아, 그립다 이제는 옛이야기
홍유릉, 그곳에 가면
박강남
온몸으로 바람을 막다
살구꽃으로 하얗게 떨어져간 님
이 땅의 사람들 웃을 수 있게
능 언덕에서 초록비, 새소리 뿌리면
개구리노래가 세상을 헹구어
산자락이 부드럽게 출렁거리는 곳
먼 강 거기서도
홍유릉 달빛으로 굽어보실
그곳에 가면
사람은 나무가 되고
나무는 사람을 닮으려 수행중이다
충혼
박건웅
향로에 지핀 연기
탑 위로 오르고
젊음을 불살라 나라를 구했음은
겨레의 가슴에 가슴에
불사조로 남으리
고귀한 한 목숨을
나라를 위해 바쳤건만
동서를 잇는 긴 철조망은
지금껏 걷힐 줄 몰라
충혼의 노한 음성
탑신을 흔든다
무화과 여인
박경희
달디단 몸속에 꽃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는 열매, 여인
욕망은 그렇게 깊이 묻혀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몸을 쪼개야 맛볼 수 있는
극치의 쾌락
한 입 베어무는 순간
무화과는 이미 꽃이 아니다
꽃물 든 가슴에
타오르는 열정은 숨어있다.
뜨겁게 품은 애욕이
쪼개져 꽃피울 때
그 이름 아름다운
‘무화과 여인’
하늘물감
박기임
하늘은
물감을 잘 들인다
아지랑이 봄이면
아른아른 꿈을
물들인다
내 마음이 아플 땐
연노랑 마음을
하늘에 풀어 놓는다
봄의 하늘엔
내 기도도
올라가
하늘물감을 들인다
바람구멍
박영숙영
나와 같은 나를 만날 수 없는
삶의 광장에는
늘 고독한 바람이 분다
기쁨은 슬픔을 숨기고 오고
행복은 불행을 숨기고 오고
만남은 이별을 숨기고 오고
사랑은 외로움과 그리움을 숨기고 오고
내 죽음은
내 삶의 뒤에 숨어
나와 함께 오늘도 길을 가고 있는데
풀씨처럼 지나가는
이름없는 사람들과 마음을 주고 받아도
나와 같은 나를 만날 수 없는
삶의 광장에는
늘 항상 고독한 바람이 불어
더 오래오래 뼛 속을 채워오고
마음에 드나드는 바람구멍 막을 수 없다
갈대 12
박일소
이제는 그 얼굴 퇴색되어
잊어 질 듯도 하건만
가슴에 못이 되어
하얀 그리움으로
푸른 하늘에 꽃잎 날리며
이 가을 피어나네
주인 잃은 낡은 빈배만
나룻터에 정박되어 있는
강물에 뿌리깊은 갈대는
행여 오실까
오지 않는 님 기다리며
떠나지 못하네
입동
박필경
몇 뼘 안 되는 가을의
꼬리마저 잘라먹고
입동은 입덧이 심하다
떡갈나무 잎을 따 먹고
포식한 배를
트림으로 터뜨리는 바람
바람에 적셔간 칼끝에
살점을 뜯어먹힌 숲은
앙상한 갈비뼈만 남아
해골과 사촌이다
오돌오돌 떨수록
더운 체온이 그리워지는
입동 전후
지팡이의 삶
배학기
당신은
언제부터 나를 필요로 했나요
무쇠 같던 사람도
철 같은 다리를 다치거나
늙어지면 나를 찾지만
눈먼 이에겐 나침반,
약자에겐 호신용으로도 그만이고
민중의 지팡이로도
크게 쓰임받던 당신
흐르는 세월앞엔
바싹 말라
볼품은 없지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친구삼아 보란 듯
의좋게 살아보자구요.
몽마르뜨의 시인
서윤석
몽마르뜨Montmartre 언덕엔
높은 모자를 쓴 시인詩人이 산다
대성당大聖堂의 종소리 울린다
가파른 언덕길을 내려와 개선문凱旋門의 밤길을 거닐면
나폴레옹의 나팔소리 울리고 에펠탑Eiffel Tower 불빛 눈부시다
어두움 속에서도 굽이굽이 센Seine강물 흐르고
가로수 아래 벤치에는 돌아갈 줄 모르는 행인들이 누워있다
아침이 찾아와 따뜻한 햇살 비치면
우리 호수가로 가 모네Monet의 연꽃을 본다
고마운 큐리Curie부인도 깨우고 빅톨위고Victor Hugo도 불러본다
쇼팡Chopin의 피아노소리 들리는 강가에서
글을 쓰고 노래하는 당신은
노틀담사원 신도들의 좋은 이웃이요
살며시 웃어주는 모나리자Mona Lisa의 애인이다
배르사유Versailles궁전 속에서도
눈부신 쇼핑몰 속에서 당신이 함께 산다
당신의 시가 들리면 비둘기 푸른 하늘로 날아가고
솔본느상아탑象牙塔이 살아 움직인다
몽마르뜨의 시인이여
파리Paris의 지성知性이여
당신의 시는 우리의 역사歷史요 미래의 등불이다
매화차
서종남
찻종지 바닥에 뿌리를 박고
늦은 봄눈 날리며 멧새가 운다
갈색가지에 엷게 남은 초록빛 몇 개
줄기의 손끝까지 피가 돈다
백매화 송이송이 온 몸으로
꽃 이파리 열고 꽃향 길어 올린다.
한복
손기섭
내가 한복을 입는 날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나에게서
절 받고 싶어 하시는 날
대대로 효성이 지극했던 우리 가문
불현 듯 한복 한 번 입고 싶어도
아이들 눈치 보여
매사가 조심스러운 나이
명절이나 되어야지
나이답지 않게 기다려지는
추석 날 설 날
한복 갈아입고 책상다리 하고 앉으면
손자 손녀들 때때옷 갈아입고
나풀거리고 다니다가 내 앞에 와
꽃 본 나비 같이 나붓이 엎드린다
새벽바다 안개꽃
손 해 일
바다는 육지가 그리워 출렁이고
나는 바다가 그리워 뒤척인다
물이기를 거부하는 모반의 용트림
용수철로 튀는 바다
물결소리 희디희게 안개꽃으로 빛어날 때
아스팔트에 둥지 튼 갑충(甲蟲)의 깍지들
나도 그 속에 말미잘로 누워 혁명을 꿈꾼다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덧없는 날들을 어족처럼 데리고
시원(始原)의 해구(海溝)로
요양원 창문너머
송낙현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
비야
쭉쭉 오너라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
눈이라도
펑펑 쏟아져라
아무도 오는 사람 없어
바람아
찬바람아
너라도 쌩쌩 달려 오너라
도봉산에서
신규호
도봉산 메 부리 바위 끝에
혼자 앉은 마음으로
늘 그렇게 살아 갈 일이다
책갈피 뒤적이듯
마음속이나 살피면서
나뭇잎 재껴보는 푸른 바람으로
살 일이다
욕망 하나하나
바둑알 놓듯
집 지어 들여앉혀 잠재워 가면서
가슴 속
사나운 수리매 한 마리 길들이며
살아갈 일이다.
방구리에 표주박
신극주
직성은, 뱃구레가
거늑해야만 풀린다
방구리 표주박 사발 핥고
낭자하게 널브려
사발 전방廛房을 벌였다
필생畢生, 사발로 오장을 절여
고주망태로 똘랑거렸다
어이새끼들 오장도
매지매지 찢겨 물클어졌다
그러구러 해묵은 어간에
칠성판 얹은 팔방망이 소리 구슬픈데
고샅에는,
악머구리 끓듯 울음소리 섧더니
이 빠진 술사발들이
거적 깔고 엎드려 죄를 청하고 있었다.
고국의 울엄매 그리버서
신세훈
고국의 울엄매 그리버서
야잣닢 엮으며 울었네
하늘도 내 고향 하늘
흙냄새 꽃향기도 다른 바 없는데
뜨거운 파촛 그늘 아래 우장을 펴고
비에 젖어 녹슨 총 닦으며
보리밭 가에서 우시는 엄니를 소변을 보시면서 우시는 엄니를
<보꼬져라 색끼 훈나
세백에 즁물떠노코
샴신께축수축슈니비러
부대부대도오
이내++다+미라
니난+작+라올놈
+가+가+색끼야
언지을꼬언지을꼬
+가지면+리뜨네〉
울엄매 울엄매야
남국 연인품에 안겨
고은 잠 들고 싶네
꼬꼬 달기 우난 대신
은은한 야포소리여.
빗장속 햇살
신 주 원
황혼바다 저편
누천빛깔 햇살
빗장속 햇살.
반달별이 깃을 단다.
단 한 번뿐인
동트는 순간,
나는 빗장속을 열고 나온다.
휴전선에 선 감나무
신현득
파편을 맞은
아픈 가지로도
아기에게 주고 싶어
감을 익혀 들고
휴전선에 선
감나무.
언제,
이 감나무 아래서
풋감을 줍다
포소리에 놀라
달아난 아기
지금
어디서
어른이 됐을 게다.
고향산천 . 30
-논바닥
심상운
장터에서 만세 부르던 할배가
시커먼 흙덩이로 누워있는
여름 논바닥에 서면
증조할배의 기침소리가 번쩍이는
건너편 참나무 숲이 보이고,
여기 저기 쓰러져 있는 풀잎들에게
일어나라, 새벽이다.
소리치는 산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나서
이 산천의 검은 뼈대로 묻힐
어느 날의 내 죽음도
환한 빛덩이로 보인다.
수박을 쪼개며
-평화를 위한 기도시
안혜초
수박 한통을 반으로
쪼개 그 반쪽을
다시 또 반으로
쪼개려다가 멈칫
손놀림이 무거워진다
절로 또 하나님 소리가 새어나온다
가슴에서
머리에서
뼈마디 마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소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두려워 말게 하시고
다시는 또 이 땅이나
지구촌 어디에서건
피 흘리는 전쟁일랑
발발치 않게 하소서
싸워도 끝끝내 입으로 싸우고
가슴으로 머리로 싸우게 하옵소서
보다 큰 나와 너
보다 큰 자유
보다 큰 사랑을 위해
보다 작은 것을 비워내게 하시고
지켜야 할 것들을 끝끝내
지킬 수 있게 하여주소서
소리를 끓이다
양윤덕
허공에 오동통한 소리들이 뭉개뭉개 떼몰려 있다
허공을 꽉 메운 소리들
할 일 없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저 소리들을 가마솥에 펄펄 끓여
사골 같은 뿌연 국물을 우려낼 수도 있지
시름시름 빈혈을 앓고 있는 바람의 내장 속에
소리의 국물을 들이붓는 거야
바람이 화색이 돋아 일어서는 거야, 일터로 향하는 거야
허공에서 떠돌고 있는 소리들이
바람의 매끼 식사가 되고 있는 거야
바람이 후루룩후루룩 소리들을 들이켜고 있는 것 좀 봐
허공이 텅텅 비어 있잖아
땅 위의 가슴들을, 입들을 수도꼭지 틀듯 열어놓는 거야
할 일 없는 소리들이 허공에 출렁 채워지는 거야
가마 솥에서 소리의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 오는 거야
말씀이 잘 익어가고 있는 거야
도마
여영미
방패보단 도마가 되기로 했어
모두가 피하는 칼
늠름히 받아내며
울퉁불퉁한 모든 삶의 재료
내 안에서 알맞게 반듯해지고
다져지는데
까짓 칼자국이야
한두 개일 때 흉터,
삶이 되고 보면
꽃보다 향기로운 무늬가 된다
나비의 세상
여한경
나비는 가슴에
하늘을 안고 산다.
하늘의 넓이와 깊이가
나비의 가슴속 어드메
바다의 너울이 되어
언제나 너울너울
춤을 춘다
하늘에서
땅에서도
나비의 세상은
웃음 벙글거리는
꽃밭
임꽃 모습
오동춘
바다 셋 옆에 끼고
다섯 즈믄 해 한 피 이어
심지 밝게 사오신 임
어찌 그리 고운지요
내 마음
뜨건 임 사랑
한 치 변함 있으랴!
불타는 임꽃 모습
바람 거센 물뭍 손길
가시 찔러 품고 가려
성가시게 괴롭혀도
한마음
몸매 삼천리
붉은 지조 뉘 꺾으랴!
4월 소식
-어머님께
오양호
뒤뜰 살구나무 하마 꽃잎 뿌립니다.
동구 앞 파란 보리
솔바람에 고개 들고
해 뜨면 쩍 갈라지는 큰 고올
실루엣
적송 높은 가지에
올라앉은 아침 햇살
옥양목 치마 적시던 진달래
붉은 함성.
오늘은 봄바람 태워 당신께 보냅니다.
진땀
오하룡
어둡고 삭막한 길을 걸어왔다 딴 길을 걷고도 아는 길을 걸은 척 했다 멀리 두르고 둘렀는데도 지름길로 온 척 했다 손해를 보고도 오히려 이득을 본 척 했다 마음에 없으면서 있는 척 다소곳이 예라고 대답한 적 있다 아니 많다 그 말로 내가 아닌 내가 되게 했다 지금도 내가 아닌 나를 나라고 생각하면 진땀 난다
하얀 밤
위맹량
하얀 배꽃
천사의 입술
방울방울 맺힌 이슬
달빛 사랑에 취해
하얀 빛을 토한다
풀벌레 소리마저
소란의 언덕을 넘어
적막이 가득한 밤
천지는 더욱
하얗게 깊어만 가는데
별들만 깜박 깜박
잠 못 이루고
달과 배꽃
하얀 사랑 이야기
귀담아 엿 듣는다.
4월 19일
유승우
거실에서 내다보이는 벚나무 가지마다
붉게 상기된 꽃들이 만발했네.
달력을 보니, 아, 4월 19일.
나는 그날을 까맣게 잊고 지냈는데,
나무는 달력도 보지 않으면서, 그날처럼
붉은 꽃으로 4.19를 기념하고 있구나.
하늘과의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구나.
좀 있으면 가지 끝마다 초록의 눈을 뜨고,
하늘과의 약속을 푸르게 지켜 가겠구나.
보고 싶다
유회숙
공원 벤치에
마음 내려놓고
풍경이 되어 풍경을 바라본다
엄마와 아이
아이가 두 손을 들어 머리 위로 동그라미를 만든다
-하늘만큼 땅만큼 우주만큼
그래 그만큼, 보고 싶다
경복궁
윤하섭
서울 북악산 자락
동맥 정맥으로
단청 화려한 심장 하나
둥 둥 북소리 울려퍼진다
파란 정맥 따라 흘러든
실망 회의 불신들이
우심방 근정전에서
산소와 희망과 용기로 정제 돼
좌심방 경회루 휘 에돌아
빨간 대동맥 세종로 따라
부산 삼척 제주, 산과 바다로
삶의 홍수로 밀려간다
6백살 먹은 조선의 심장이
협심증도 모르고
오늘도 줄기 찬 우리 가락으로
쿵덕 쿵덕 자진모리 장단이다
단풍
윤희선
서곡을 울리며 이미
산과 들에서는
야단법석을 벌인지 오래
이쁜 저고리 이쁜 치마들로
황홀하게 물들인다
강과 바다에도 둥둥
떠다니는 오색 물결들
어부는 잎새 하나 주워 들고
마음 뜰에 등불 밝히고 주름을 지운다
겨울이 오기 전에
북풍이 불기 전에
타오르는 아름다운 불꽃
영원히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옷
그런 치마 저고리 한 벌을
만들고 싶어라.
고궁과 하늘 사이
이견숙
창덕궁 연배 은행나무 꼭대기
둥근 목조건물 두 채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지그시 올려다 본 까치둥지엔
주인은 후원으로 마실나가고
빗장없는 빈 집엔
궁궐지붕 건너온 갈 바람만이
무시로 드나들고있다
오랜 세월 고락을 함께 하면
후세에 빛날 문화유산이 될까
재해에 흔들리는 누옥
기쁜소식 전하는 산실로 남고싶다
두물머리
이삼헌
마음 시린 날이면, 양수리
두물머리로 가 보게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서
몸을 섞으며 하나로 태어나는 곳
물안개 자욱이 산을 휘감고
아침해가 느티나무를 물속으로 밀어 넣으면
그리운 사람
고인돌 밟고 걸어올 걸세
한밤내 고운 잠 자고
수련이 배시시 문을 여는
안개를 걷어내면
수초들이 우아하게 머리 감는 곳
달개비꽃, 능소화 나팔꽃도 고개 올려
시샘하지만
그리운 사람 바람 밟고 걸어올 걸세
경복궁 조감도
이 선
경회루 치마폭에 앉은
아미산 뒤뜰 솔숲
북악산 산새들 날아와 망을 본다
왕비의 마른 기침소리
궁녀와 공주는 술래잡기 중, 숨죽인 웃음소리
“꼭꼭 숨어라”
600년 역사가 모란 잎에 앉아 있다
흰나비 날갯짓, 파다닥
꿀이 없어, 발자국만 남깁니다
자경전, 처마 끝에 매달린 초생달
러시아 순록의, 휘어진 왼쪽 뿔을 스치고 온
차가운 옥색 달빛
왕비 전, 잠근 방문 밖에선
키 작은 대왕별 허둥대기도 한다는
풍문
근정전, 국사를 논하는 어린 왕의 곤룡포 자락
왕비 눈 속에서 뜨는 아침 해
바람은 맨발로 출근합니다
규방
이성남
상큼한 바람 한 자락
머리맡에 몰려와 기척을 알리네
삼경이 지난 한밤중
열려진 창문 너머
누가 기웃거리나 싶었네
노란 봄개나리 벌써 꽃잎 벙글고
내 비어 둔 규방 옆자리에 오르네
들꽃사랑
이성애
작은 웃음으로
잔잔한 마음 건네려 해요.
보아주지 않아도
그리운 눈길 머물도록 잡아두겠어요.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하게
작은 꽃잎으로 피어
오가는 사연 벗 삼아
마음 물들이며,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 채워
나그네의 쉼터가 되려 해요.
사랑의 미풍 속에 피고 지며
따뜻한 둥지 틀었으니
이름을 불러주어요.
시월의 들판
미랑 이수정
만삭(滿朔)이 되었다고
오곡(五穀)들 물결을 이루며
손짓을 하더니
벼. 콩.깨.조.수수
이윽고 제대로 무르익었노라.
저마다 분만(分娩)을 보채
풍성하고 고마운 하늘에
감사의 제(祭)를 올린 뒤
그을린 검은 얼굴로
가을걷이를 한다.
나의 노래
이순욱
초여름 벌판을 뒹굴던
유년의 어느 아침
우리들 맑은 노래는
선생님의
그 금빛 피리소리에 실려
금빛 햇살로 부서지며
푸른 벌판에 무수히 깔리고
놓치고 싶지 않아
가슴에 묻은
햇살조각 하나
속살 헤집고
끊임없이 다시 살아나
숯불 피우듯
잿빛 가슴 태우는
무지개빛 나의 노래
벚꽃
이승용
놀랍도록
저 환하고 맑은 것
저토록 포근한 질감 있을까
소녀같은 저 여림 있을까
절로 눈감게 만드는 순결함
새벽지나 선녀들 향연이
막 끝난 자리
감쪽같이 들켜버린
천상 천하 사이
아름답게 미친 것들
뒷모습
이신강
사람들은 앞모습에는
다 신경을 쓰고
뒷모습에는 덜 신경을 쓴다
그러나 앞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이 뒷모습이다
있으면 환하고
없으면 빈자리가 큰 사람
뒷모습이 아름다운 그런 사람 되고 싶다.
은방울꽃
이아영
초대받아 먼 길 떠난 조붓한 샛길
누구를 기다리다
해마다 그 자리에 꽃등 내거나
오롱조롱 방울소리 들릴 듯 말 듯
은자골 막걸리 그윽한 맛에 취해
노을빛으로 흔들리네
저무는 성주봉 산기슭
꺼지지 않는 혼불이 되어
천 년 어둠 밝힌 꽃등 저리 환하네
경회루
이유미
넓은 연못 한가운데
사뿐히 내려앉은 누각
고아한 자태
경복궁 구경하러 온 사람들
구경하며 서 있다
그 물그림자 밟고 선
연잎 사이로
숨바꼭질 하며
몰려 다니는
비단잉어 떼
연못 둘레 맴도는
온 세계 사람들
평화 기원하며
강강술래 강강술래
속으로 부른다
라면과 소면
이준희
꼬불꼬불한 라면들이 한 뭉텡이로 뭉쳐져서
제 집속에 접혀져 있다
통발 속에서 잠든 미꾸라지들 같다
꼿꼿한 소면은, 초년병 시절의 내 모습이다
누워서도 자세를 흩뜨리지 못한다
말라빠진 스프 한 봉지에도 간 맞출 줄 아는 라면은
대충 끓여도 목구멍으로 슬슬 잘 넘어 간다
아버지는 추어탕을 좋아 하셨다
뜨거운 물속에서도 쉬 몸 풀지 못하는 소면,
까탈스런 시누이처럼 요구조건도 많다
멸치 우린 국물에 몇가지 고명을 얹으라 한다
세상 그리 살지 말라고 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늦은 밤 책상머리에서 나는,
라면과 소면사이에서 갈등한다
이팝꽃
이춘하
늦은 봄날, 하얀 이팝꽃이 一家를 이루고서 피어있네
무더기, 무더기로 둘러앉아 얇은 그림자를 만들면서 풀린 실밥처럼 늘어져 있네
구순의 어머니, 컴컴한 부엌 한쪽에서 하얀 쌀밥을 푸고 계시네
열 몇 그릇의 하얀 밥그릇들 동그스럼하게 자리를 잡네
( - - - - )
차츰 차츰 초록 잎사귀들 두꺼워져 여름길 열리면 그 그림자 붙들고 나는 울것이네
실밥처럼 풀어져서 하얗게, 하얗게 울것이네
흘린 술이 반이다
이혜선
인사동 포장마차에서 그날 술자리의 화두는
‘흘린 술이 반이다’
연속극 보며 훌쩍이는 내 눈 들여다보며
‘우리 애기 또 우네’ 일삼아 놀리던 그이
요즘 들어 누가 슬픈 얘기만 해도
그이가 먼저 눈물 그렁그렁
오늘도 퇴근길에 라디오 들으며
한참 울다가 서둘러 왔다는 그이
새끼제비 날아간 저녁밥상에 마주 앉은 희끗한 머리칼
서로 측은히 건네다 본다
흘린 술이 반이기 때문일까
아직 함께 마셔야 할 술이
술병에 반나마 남았다고 믿는,
달밤, 백마강
임병호
밤 깊은
구드래 나루
백마강 물소리
열 나흘 달빛 고요한데
어이해
풀벌레는
나그네처럼
잠 못 이루는가
삼천궁녀
호곡인 듯
들려오네,
고란사 종소리
백령도의 밤
임애월
장산곶 새벽닭 우는 소리 바다를 건너왔다
인당수 해무 속엔 난류 한류 몸을 섞고
심청의 치맛자락은 꽃으로 피어났다
섬 머리를 때리는 두무진 파도소리
별빛 아래 주파수 잠 못 들어 뒤척이고
길 잃은 가마우지들만 時空을 넘나든다
산맥처럼 무성하게 웃자란 소문들은
섬 속의 떠도는 섬, 놓쳐버린 길을 안고
칠십 년 아픈 뼈들이 경구처럼 삐걱인다
속사람이 아름다워
전덕기
슬픔에 잠긴 마음
스산하니
뜨거운 눈물이라
산처럼 조용하고
들처럼 잔잔한
다사로운 생각 잠기니
바람 스치듯
진실을 깨닫는 순간
속사람이 아름다워
소리쳐 지네
여름 달
전민
들마루에 누워
쫓아가본 초승달
갓 시집온 새 각시
동물 치는 울안
닦은 속살 간지럼 치다가
쑥 타는 냄새
모깃불 연기 감싸주다가
정자나무 밑
장기판 읽어 주다가
들창문 열어
긴 발 걷고 넘어가
합죽선 손에 든
옥색 치마 날 올 따라
봄바람처럼 흐르는.
할머니의 십자수
전영모
지하철 경로석, 은갈색 머리
일흔 대여섯쯤 할머니
커다란 뿔테 돋보기안경 쓰고
한 땀 한 땀 십자수를 놓고 있다
‘잘 보이시느냐’고 물으니
안경테 너머로 힐끗 쳐다볼 뿐
‘나, 아직 젊다’하며
눈길도 주지 않고 손을 계속 움직인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정신을 집중시키면
즐겁고 세월 가는 것도 잊을 수 있다’한다
면봉산 앞에 서서
정광섭
홀로 지키며 서 있다는 건
산이 우뚝하다는 일
인생이 죽지 않았다는 것
산이 무너지는 건
내가 바로 넘어지고,
뿌리를 깔고 주는 일
2,700만 톤의 물기둥이 솟아올라도
산을 넘지는 못할 일
태백준령은 그리하여 살아있다
산아, 산아, 푸르른 산아,
바람과 파도를 잠재우고
빛나는 꿈의 예봉(銳鋒)으로
늘 속삭이며
내 가슴속에 살아 있어라
면봉산: 경북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에 있는 해발 1120m의 산.
정상에 기상관측소가 있음.
촉석루에서
정명숙
촉석루가 얼비치는 남강에
얼음이 얼지 않는다.
임 그림자 안개꽃으로 피어나
의암바위 감도는 물살
천추에 해맑다.
불어오는 강바람에
울음을 멎은 새
갈대숲에 서성이고
의암 별젯날
의기사당 풍경소리만
파랗게 영기(靈氣) 서린다.
겨울 꽃
정민호
밤새 빈 가지에서
하얀 꽃이 피었다
이것은 신의 아름다운 입김.
어디선가
성큼 다가서고 있다
멀지 않는 곳에서 누가 찾아올 것 같다.
하얀 문창호지에는
어렴풋한 그림자 하나
뜰에서 어른어른 해가 지고 있다.
그리움
정 연 덕
허리 꺾인 뻘 위로
떠오르는 나비 하나
짙은 입술을 내민다
한 잔의 춘설차 속에도
섬처럼 둥둥 떠서
반짝반짝 불을 켠다
바람 부는 날
정연석
들바람을 피해 숲으로 들어서는 건
괜찮은 일이다
산책길에 늘어선 리기다소나무들 허리를 기울이고
단발머리 기대며 정담을 나누고 있다
바람이 끼어들지 않으면 이야기는 자라지 않는다
소나무들 발치에 갈참나무 잎새들 모여앉아
잡담을 늘어놓고 있다
바람은 말참견하는 버릇이 여전하다
덩달아 나도
측백나무 가지를 붙들고 있는 까치에게
‘얘 미끄러질라’하고 한마디 해주고 싶다
온순했던 정오의 숲이 이렇듯 소란스러움은
버정거리는 바람의 호기심 때문이다
서성대는 숲속에서
흥정이 오가는 재래시장의 풍경을 본다
서울 그대
정연자
어느 날은 바람이 되어
세종로를 날아 보라
남산을 휘돌아
노들강변 감싸 안고
오래 오래 사랑하고픈 이름이기에
끝없이 간직하고픈 하늘 있기에
어느 날은 단비가 되어
명동에서 내려지라
그 옛날 젊은 연인의 가슴마다에
지금도 물기 머금은 그때 그 설레임
어디를 가더라도 하나 되는 우리는
어디에 있더라도 하나 되는 우리는
멀리서도 가까이서도
예나 지금이나 그대 함께 있으리
언제까지나 그대 사랑으로 남으리.
화개花開
정유준
마음의 칼끝에서 꽃이 피었다
전나무 숲을 지나 돌계단 오르는
내소사來蘇寺 대웅전 법당문 가득,
미륵 불빛처럼 꽃이 피었다
풍경소리 바람 속을 꽃살무늬
소복히 문을 덮고 있다
무심히 드나드는 사람들
다정한 나무 결潔을 보지 못해도
나지막히 속삭이는 꽃살의 미소
세월이 그 미소를 맞고 보낸다
꽃 하나에 전생을 생각하고
꽃 하나에 과거를 돌아보고
꽃 하나에 죄를 빌어보고
꽃 하나에 인연을 지워보고
꽃 하나에, 꽃 하나에…
세월의 문 위에 꽃이 피었다.
만날 수 없는 너를 위하여
정창운
혹시나 희망을 잃고
좌절하거나 슬퍼할까해서 말이야
더러운 물이 죽음처럼 몸부림치는
캄캄한 시궁창 같은곳에
발을 잘못 디딜까해서...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있어
인간을 유인하는 함정들이
겉으로는 선하게 위장을 하고
도처에서 기회를 노리고있어
오늘 새벽 일찍 일어나
마지막 외롭고 쓸쓸히 빛나는 별 하나에게
너의 무사귀환을 빌었어
진정 두손 모아 고개를 숙이고
억새능선에서
정 호
가을엔 억새가 되어
억세게 일어서고 싶다
그렇게 한 철 열망들을 다독여
무리지어 웃음꽃 활짝 피우다가
저 하늘 높이 하얗게 소지燒紙를 올리는,
소슬바람에
함께 휘어지고 꿋꿋이 일어서는,
이제는 기진하여 서릿발에 꺾이고 밟혀도
언젠가는 이 나라 산등성이에 다시
시퍼런 칼날로 일어설 목숨이 되고 싶다
괜찮아요
조덕헤
제발 그렇게 치장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하루에도 수 없이 보는 거울 앞에서
그러나 날 향한 당신의 설레임만 치장하세요.
지금처럼 먼 훗날도 똑같아요.
하얀 첫눈이 오기만을 기다리나요?
이미, 내 안에서 내리는 첫눈인 그대
사랑 없인 못 산다던 당신의 눈, 혜안을 가꾸세요.
설령 당신의 모습이 검다 해도 그건 괜찮아요.
내 빛나는 검은 눈동자엔
꽃향 날리다 지는 천만송이 꽃보다
더 청아한 당신이 생생하게 꽃 피어요.
우리 이렇게 약속하는 거지요?
채송화
조 명 제
백로(白露) 가까운 언저리
담장 위에 내어 놓인 분(盆)의
빨강색 채송화
철길도 녹여 휘어뜨린다는
일만 톤의 햇살을 받고도
작은 입 모양을 하고 이쁘게만 피어 웃고 있는
저 역광(逆光)의 황홀경. 그 속에 숨어 있는,
살을 파고들어 뼈를 찌를 듯
매섭게 꽂혀 오는 부드러움의
강인한 힘.
무슨 색깔이 나올까
조병무
저 바람을 손아귀에 쥐고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저 하늘을 양손에 쥐고
더욱
꼬옥 짜면
무슨 색깔이 나올까.
그러나
그러나
저 사람의 말씀을
마음으로 눌러 짜면
또
무슨 색깔이 나올까.
사랑하는 사람끼리
그
사랑을 사랑으로 짜면
정말
무슨 색깔이 나올까.
구름 무덤
주경림
경주 황남동을 비행기 위에서 내려다보니
둥근 것에서 표주박 모양까지 초록 단추들이 볼록볼록 솟았다
문득, 초록 단추들을 눌러보고 싶다
엄지 손가락으로 그 단추들을 힘껏 누르자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봉토가 벗겨져 돌무지덧널무덤이 열린다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말다래에서
천마가 백색 갈기를 휘날리며 훌쩍 날아오른다
금관과 금허리띠가 두둥실, 배로 떠오르고
페르시아산 유리잔마다 뭉게구름이 그득 그득,
깨진 금마다 신라 천년의 꿈을
허공에 색색으로 풀어낸다
하늘에는 황마총 대릉원의 무덤들이 떠다니며
저마다 구름 한 채씩 집을 짓는다.
기다림
지한주
누군가를
기다리며 어디론가
떠나고픈 아련함
수줍은 커피 향처럼
가슴에 남은
하얀 그리움
하늘 향해
살포시 젖어든 미련 안고
허공에 불러본 그 이름
노을빛 저물어 가듯
아쉬움에 떨어본
허전한 그리움
화조도
최계식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귑니다.
산에 산에 피고 들에 들에 피고
새는 새장에 갇혔습니다.
꽃이 피고 새가 새가 지저귑니다.
산에 지저귀고 들에 지저귀고
꽃은 화분에 꽂혔습니다.
사람들의 네 모난 테두리 안에
갇히고 꽂혀 버린 새와 꽃은
산에도 없고 들에도 없습니다.
요즈음 가뜩 지위가 달라진
고양이보다는 개가 더
그림 속에 잘 보이지 않는 그림을
꽃이 아닌 꽃을 새가 아닌 새를
사람들은 즐겨 그리며
세상 참 재미있게 잘도 삽니다.
*花鳥圖 : 꽃과 새를 자연의 정취를 대표하는 대상물로 보아
옛 묵객(墨客)들이 즐겨 그렸던 그림.
길
- 달
최영희
내 유년의 비눗방울
하나
월악산 맑은 물에
얼굴을 씻고
하늘에 산다.
빈 의자
최은하
오늘도 찾아갑니다
비가 오나 눈보라가 치거나
노을이 가득 퍼져내리는 참이거나
한 줄기 바람도 쉬어갈
빈 의자를 찾습니다.
빈 의자에 얼마 동안은 앉았다가
그래, 언젠가는 나도
하늘 아래 빈 의자가 되어지이다.
호남평야
최진연
물결치는 황금의 바다
아득한 작은 섬 또는 수평선에 걸린 배 같은
더러 숨 쉬러 물 위로 뾰족이 내민 자라머리 같은 山
가뭇한 땅에 묻힌 교회가 울리는 만종소리 파문의 중심
쓴소리
최창순
울타리 밑 접시꽃 함박웃음에 취해
뜰에 앉아 막걸리를 마신다
잔디밭 초여름 신록이 싱그럽다
아니 또 술 드셔!
순간 고요한 행복이
아내의 높은음자리표에 놀라
우수수 떨어진다
접시꽃도
민망한 웃음으로 아내를 바라본다
쓴 잔소리가 약이 되고 있는
순간이다
분홍향기
한여선
나는 우주의 중심이야, 하고
중얼거려본다
그 말을 하니 향기가 난다.
너는 우주의 중심이야
너에게 속삭인다
그러면 또 향기가 난다
너와 나의 거리를 향기가 메운다.
거리가 멀수록
향기는 진하고 오래 간다.
나의 말에 향기가 있나보다
말의 중심에서 쉼 없이
향기가 나와
세상을 향기로 덮는다.
아주 기분 좋은
분홍향기
창덕궁의 가을
한연순
구중궁궐이 불타고 있다
낙선재의 하늘이 불타고 있다
찬란한 하늘이 가슴 뜨거운 것은
한 나라가 여기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여기서 울었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
지금도 꿈꾸는 후원
영롱한 모퉁이 돌아설 때마다
뜨거웠던 이름이
아름다웠노라고
조국(祖國)을 부르고 있다
봄같이 오시는 님
한지혜
심연深淵에서 허덕허덕 두레박으로 물을 긷고
울음과 웃음 범벅덩이같이 살 부비며 살면서
어느 날, 초가에 호롱불같이 울타리 꽃봉오리같이
음陰삼월三月 봄은 오고
잔설 바람은 불어도
산꼭대기에서 오두막에 흐르는 매화가지
봄의 향기 차향같이 은은하여
작은 지붕 고드름 같은 손을 녹이고
흥부네 풀어 놓은 연줄같이
산이 부르면 하늘 메아리 대답하는
우주로 퍼져가는 무언의 소리
깊은 골짜기 언 땅을 밝으며
흐르는 물 따라 살아오시는 임의 미소
우물을 지나 높이 뜨는 달 같은 그리움
유둣날 뻐꾸기 울음은
함동선
황해 물 퍼낸 숲으로 무성만 하라고
불암산 배밭에 섬으로 열린
유둣날 뻐꾸기 울음은
보리 이삭 가슬대며 가슬거리는
여름 빛깔로
칡꽃의 소리 돼
골짜기 덮네
아침 강가에서
허만길
차가운 아침 강가에서
나는 가슴 두근거렸다.
푸른 깃털 붉게 물들이는
한 마리 청둥오리라도 만날까 싶어.
차가운 아침 강가에서
나는 애타게 기다렸다.
지난 밤 강물에 띄운
한 줄기 그리움
햇살 타고 하마 치오를까 싶어.
인터넷 호박고구마
홍순미
길게 누워 있는 밭이랑에 처음 음순이 돋았다
볕을 탐하면서 위로는 덩굴손이, 밑으로는 남근을 키우더니만 무름한 흙을 불쑥 들어올린 그 놈이 오늘 녹말 짙은 진액을 흘리고 있다
여름내 뙤약볕 밑에서 발기된 해남산 호박고구마가 인터넷 속에서 야동으로 번쩍거리고 있다
아내에게 해바라기 씨를 건네다
황상순
세상의 모든 꽃들
꽃 같은 제 몸 죽여 열매를 맺느니
누군들 꽃으로 피어
꽃처럼 평생 눈부시고 싶지 않겠는가마는
보렴, 그런 마음까지 모가지 쳐 베어낸
까맣고 작은 이 씨앗 속에
걸어온 오솔길과
발돋움하며 보았던 달과 언덕과
꽃 보낸 마음까지 빼곡히 다 새겨져 있으니
자, 한 줌 받으시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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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간사 1쪽
차례 4쪽
시 11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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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열화와 같은 인기로 당일 118편의 시를 전시하고 114편의 시집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