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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집이문족론 제17권
8. 칠법품 ②
[7비묘법]
[문] 7비묘법(非妙法)이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불신(不信)이요, 둘째는 무참(無慚)이며,
셋째는 무괴(無愧)요, 넷째는 해태(懈怠)이며,
다섯째는 실념(失念)이요, 여섯째는 부정(不定)이며,
일곱째는 악혜(惡慧)이다.
[문] 어떤 것이 불신(不信)인가?
[답] 모든 믿지 않는 것[不信]과 믿지 않는 성품과 현전(現前)을 믿지 않는 성품이며, 따르지 않고[不隨順] 인가하지 않으며[不印可],
이미 인정하고 욕구[忍樂]하지 않았고, 장차 인정하고 욕구하지 않을 것이며, 현재도 인정하고 욕구하지 않고 마음이 청정하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불신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무참(無慚)인가?
[답] 모든 자신에게 부끄러워함[慚]이 없으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을 무참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무괴(無愧)인가?
[답] 모든 남에게 부끄러워함[愧]이 없으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을 무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해태(懈怠)인가?
[답] 모든 정진에 낮은[下] 성품이요, 정진이 열등한[劣] 성품이며, 정진에 겁내는[怯] 성품이요, 정진을 두려워하는[懼] 성품이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마음이 게으르고 게으름을 피우는 성품이요, 마음이 용맹스럽지 않고 또 용맹스럽지 않은 성품이니, 이것을 해태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실념(失念)인가?
[답] 모든 염이 공한 성품[空念性]이요, 염이 헛된 성품[虛念性]이며, 염을 상실한 성품[失念性]이요, 마음 밖의 것을 염하는 성품[心外念性]이니, 이것을 실념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부정(不定)인가?
[답] 마음이 산란(散亂)한 성품이다.
[문] 어떤 것이 마음이 산란한 성품인가?
[답] 마음이 흩어지는[散] 성품이요, 마음이 어지러운[亂] 성품이며, 마음이 조급(躁急)한 성품이요, 마음이 유탕(流蕩)한 성품이며, 한 경계로 되지 않는[不一境] 성품이요, 편안히 머무르지 않는 성품이니, 이것을 마음이 산란한 성품이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이 악혜(惡慧)인가?
[답] 이치대로 이끌지 못하는[不如理所引] 간택(簡擇)에 대하여 이치대로 이끄는 것[如理所引]이라고 고집하는 것이요, 이치대로 이끄는 간택에 대하여 이치대로 이끌지 못한다고 고집하는 것이니, 이것을 악혜라 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를 비묘법(非妙法)이라고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일곱 가지를 비묘법이라 하는가?
[답] 묘하지 않다[非妙]는 것은 곧 훌륭한 사람[善士]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그가 지닌 법이므로 묘한 법이 아니라는[非妙法] 것이니, 이런 모든 법은 훌륭한 사람이 아닌 이의 곁에서 얻을 수 있고, 이것은 곧 그 사람이 소유한 것[所有]으로서 실제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를 말하여 비묘법이라 한다.
[7묘법]
[문] 7묘법(妙法)이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신(信)이요, 둘째는 참(慚)이며,
셋째는 괴(愧)요, 넷째는 정진(精進)이며,
다섯째는 염(念)이요, 여섯째는 정(定)이며,
일곱째는 혜(慧)이다.
[문] 어떤 것이 신(信)인가?
[답] 모든 믿음[信]과 믿는 성품과 현전을 믿는 성품이며, 따르고 인가(印可)하며,
이미 인정하고 욕구[忍樂]하였고, 장차 인정하고 욕구할 것이며, 현재 인정하고 욕구하면서 마음이 청정한 것이니, 이것을 신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참(慚)인가?
[답]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것[慚]과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성품이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을 참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괴(愧)인가?
[답] 다른 이들에게 부끄러워하는 것[愧]과 다른 이들에게 부끄러워하는 성품이며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을 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정진(精進)인가?
[답] 정진이 낮지 않은[不下] 성품이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것을 정진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염(念)인가?
[답] 염(念)하고 따라 염하며[隨念]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마음에 분명하게 기억하는 성품이니, 이것을 염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혜(慧)인가?
[답] 이치대로 이끄는 간택(簡擇)과 각(覺)에 대하여 이치대로 이끄는 것이며, 이치대로 이끄는 것이 아닌 간택과 각에 대하여서는 이끌지 못하는 것이니, 이것을 혜라 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를 묘법(妙法)이라고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일곱 가지를 묘법이라 하는가?
[답] 묘하다[妙]는 것은 훌륭한 사람[善士]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그가 지닌 법이므로 묘한 법이라 하는 것이니, 이런 모든 법은 오직 훌륭한 사람 곁에서만 얻을 수 있으며, 이것은 곧 그 사람의 소유(所有)요 실제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를 말하여 묘법이라고 한다.
[7비묘법]
[문] ‘또 7비묘법(非妙法)이 있다’ 했는데,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답] 첫째는 법을 모르는 것이요[不知法],
둘째는 뜻을 모르는 것이며[不知義],
셋째는 때를 모르는 것이요[不知時],
넷째는 분량을 모르는 것이며[不知量],
다섯째는 자기 자신을 모르는 것이요[不知自],
여섯째는 대중을 모르는 것이며[不知衆],
일곱째는 보특가라의 나은 이와 못난이를 모르는 것[不知補特伽羅有勝有劣]이다.
법을 모르는 것[不知法]이라 함은, 여래의 교법, 즉 계경(戒經)ㆍ응송(應誦)ㆍ기설(記說)ㆍ가타(伽他)ㆍ자설(自說)ㆍ인연(因緣)ㆍ비유(譬喩)ㆍ본사(本事)ㆍ본생(本生)ㆍ방광(方廣)ㆍ희법(希法)ㆍ논의(論議)를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법을 모른다고 한다.
뜻을 모르는 것[不知義]이라 함은, 여러 가지 말과 뜻, 즉 이러이러한 말에는 이러이러한 뜻이 있다 함을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뜻을 모른다고 한다.
때를 모르는 것[不知時]이라 함은,
때인 것[是時]과 때 아닌 것[非時], 즉
‘이런 때에는 마땅히 그치는 모양[止相]을 닦아야 한다,
이런 때에는 마땅히 일으키는 모양[擧相]을 닦아야 한다,
이런 때에는 마땅히 평정한 모양[捨相]을 닦아야 한다’라고 함을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때를 모르는 것이라고 한다.
분량을 모르는 것[不知量]이라 함은, 갖가지 분량(分量), 즉 마시는 것과 먹는 것과 맛보는 것과 삼키는 것과 또는 가고 서로 앉고 눕는 것과 또는 잠자고 깨나고 말하고 묵묵히 있는 것과 또는 피로와 답답함을 푸는 등 온갖 분량을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분량을 모른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모른다[不知自]고 함은, 이른바 자기 자신에게 덕(德)이 많고 적음,
즉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온갖 믿음[信]과 계율[戒]과 견문[聞]과 평정[捨]과 지혜[慧]와 가르침[敎]과 깨달음[證]과 기억[念]과 족성(族姓)과 변재(辯才) 등을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자기 자신을 모른다’라고 한다.
대중을 모른다[不知衆]고 함은,
대중에 모여 있는 이들의 훌륭함과 하열함, 즉
‘이것은 곧 찰제리의 대중이다, 이것은 곧 사문의 대중이다, 이것은 곧 외도(外道)의 대중이다,
나는 이 가운데서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하고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며,
이와 같이 앉아야 하고 이와 같이 말해야 하며,
이와 같이 잠자코 있어야 한다’라고 하는 등을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대중을 모른다고 한다.
보특가라의 나은 이와 못난이를 모른다[不知補特伽羅有勝有劣]고 함은, 보특가라의 덕행(德行)이 훌륭한가, 하열한가, 즉
‘이러이러한 보특가라의 이러이러한 덕행이 혹은 훌륭하다, 혹은 하열하다는 등을 분명히 모른다는 것이니, 이것을 보특가라의 나은 이와 못난이를 모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를 비묘법이라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일곱 가지를 비묘법(非妙法)이라 하는가?
[답] 묘한 것이 아니다[非妙] 함은, 곧 훌륭한 사람[善士]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곧 그가 지니는 법이므로 묘한 법이 아니라 한다. 이 모든 법은 훌륭한 사람이 아닌 이의 곁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것은 곧 그 사람의 소유로 실제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일곱 가지를 말하여 비묘법이라 한다.
[7묘법]
[문] 또 7묘법(妙法)이 있다 하는데, 어떤 것이 일곱 가지인가?
[답] 첫째는 법을 알고[知法],
둘째는 뜻을 알며[知義],
셋째는 때를 알고[知時],
넷째는 분량을 알며[知量],
다섯째는 자기 자신을 알고[自知],
여섯째는 대중을 알며[知衆],
일곱째는 보특가라의 나음이 있는 이와 못함이 있는 이를 아는 것[知補特伽羅有勝有劣]이다.
법을 안다[知法]고 함은, 여래의 교법, 즉 계경(戒經)ㆍ응송(應誦)ㆍ기설(記說)ㆍ가타(伽他)ㆍ자설(自說)ㆍ인연(因緣)ㆍ비유(譬喩)ㆍ본사(本事)ㆍ본생(本生)ㆍ방광(方廣)ㆍ희법(希法)ㆍ논의(論議)를 바르게 분명히 아는 것이니, 이것을 법을 안다고 한다.
뜻을 안다[知義]고 함은, 그 여러 가지 말씀의 뜻, 즉 이러이러한 말에는 이러이러한 뜻이 있다는 등을 바르고 분명히 아는 것이니, 이것을 뜻을 안다고 한다.
때를 안다[知時]고 함은, 때인 것[是時]과 때 아닌 것[非時], 즉
이때에는 그침의 모양[止相]을 닦아야 하고,
이때에는 일으킴의 모양[擧相]을 닦아야 하며,
이때에는 평정의 모양[捨相]을 닦아야 한다는 등을 바르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이것을 때를 안다고 한다.
분량을 안다[知量]고 함은 갖가지 분량(分量), 즉 마시는 것, 먹는 것, 맛보는 것, 삼키는 것과 또는 가고 서고 앉고 눕는 것과 또는 잠자고 깨어나고 말하고 잠잠하게 있는 것과 또는 피로와 답답함을 푸는 등 온갖 분량을 바르게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이것을 분량을 안다고 한다.
자기 자신을 안다[知自]고 함은, 자기 자신에게 덕이 많고 적음, 즉 자기 자신이 지니고 있는 온갖 믿음[信]과 계율[戒]과 견문[聞]과 평정[捨]과 지혜[慧]와 가르침[敎]과 깨달음[證]과 기억[念]과 족성(族姓)과 변재(辯才) 등을 바르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이것을 자기 자신을 안다고 한다.
대중을 안다[知衆]고 함은,
‘이것은 찰제리(刹帝利)의 대중이다, 이것은 바라문(婆羅門)의 대중이다, 이것은 장자(長者)의 대중이다, 이것은 거사(居士)의 대중이다, 이것은 사문(沙門)의 대중이다, 이것은 외도(外道)의 대중이다,
나는 이 가운데서 마땅히 이와 같이 행해야 하고,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앉아야 하고, 마땅히 이와 같이 말해야 하며,
마땅히 이와 같이 잠자코 있어야 한다’라는 등을 바르고 분명하게 아는 것이니,
이것을 대중을 안다고 한다.
보특가라의 훌륭한 이와 훌륭하지 못한 이를 안다[知補特伽羅有勝有劣]고 함은, 보특가라가 지니고 있는 덕행의 낫고 못함, 즉 이러이러한 보특가라는 이러이러한 덕행이 혹은 훌륭하다 혹은 하열하다는 등을 바르게 분명히 아는 것이니, 이것을 보특가라의 훌륭한 이와 훌륭하지 못한 이를 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를 묘법이라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일곱 가지를 묘법(妙法)이라 하는가?
[답] 묘하다[妙]고 함은, 훌륭한 사람[善士]을 말한다.
이런 것은 곧 그가 지닌 법이므로 묘한 법이라 하나니, 이런 모든 법은 훌륭한 사람 곁에서만 얻을 수 있고, 이것은 곧 그런 사람의 소유며, 실제로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묘법이라 한다.
[7식주]
[문] 7식주(識住)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형상이 있는[有色] 유정으로서 갖가지 몸과 갖가지 생각이 있으니, 마치 사람과 일부분의 하늘과 같다. 이것을 첫 번째 식주라 한다.
형상이 있는 유정으로서 갖가지 몸과 동일한 생각이 있으니, 마치 범중천(梵衆天)에서 겁초(劫初)에 일어나는 지위와 같다. 이것을 두 번째 식주라 한다.
형상이 있는 유정으로서 한 가지 몸과 갖가지 생각이 있으니, 마치 광음천(光音天)과 같다. 이것을 세 번째 식주라 한다.
형상이 있는 유정으로서 한 가지 몸과 한 가지 생각이 있으니, 마치 변정천(遍淨天)과 같다. 이것을 네 번째 식주라 한다.
형상이 없는[無色] 유정으로서 온갖 형상과 생각[色想]을 초월하고 대상이 있는 생각[有對想]을 없애며, 갖가지 생각을 사유(思惟)하지 않고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서 허공이 끝없는 것을 완전히 갖추고 머무르니, 마치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과 같다. 이것을 다섯 번째 식주라 한다.
형상이 없는 유정으로서 온갖 허공이 끝없는 것을 초월하고 끝없는 의식[無邊識]에 들어가서 의식이 끝없는 것을 완전히 갖추고 머무르나니, 마치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과 같다. 이것을 여섯 번째 식주라 한다.
형상이 없는 유정으로서 온갖 의식이 끝없는 것을 초월하고 아무것도 없는[無所有] 데에 들어가서 아무것도 없는 데에 머무르나니, 마치 무소유천(無所有天)에서와 같다. 이것을 일곱 번째 식주라 한다.
이 가운데서, ‘형상이 있다[有色]’고 함은, 그 유정에게 형상이 있어서 형상이 있는 몸[身]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處]가 있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界]가 있고 색온(色蘊)이 있기 때문에 형상이 있다고 한다.
‘유정(有情)’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諦義]에서나 으뜸가는 이치[勝義]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蘊)ㆍ계(界)ㆍ처(處)에 의하여 가정[假]으로 유정을 세워서 모든 생각[想]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施設)과 언설(言說)로 구르면서 유정(有情)ㆍ인(人)ㆍ의생(意生)ㆍ유동(儒童)ㆍ명자(命者)ㆍ생자(生者)ㆍ양자(養者)ㆍ사부(士夫)ㆍ보특가라(補特伽羅)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 한다.
‘갖가지 몸[種種身]’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갖가지 현색(顯色)으로 된 몸과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형색이 있으면서 하나의 현색이 아니요, 하나의 모양이 아니며 하나의 형색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갖가지 몸이라 한다.
‘갖가지 생각[種種想]’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즐거운 생각[樂想]과 괴로운 생각[苦想]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생각[不苦不樂想]이 있나니, 이 때문에 갖가지 생각이라 한다.
‘마치 사람[人]과 일부분의 하늘[天]과 같다’라고 함은, 인간과 욕계의 하늘[欲界天]을 통틀어 나타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사람과 일부분의 하늘과 같다고 한다.
‘이것을 첫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漸次)와 순차(順次)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數)로 첫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識住)’라 하는데, 어떤 것이 식주인가?
[답]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薀)을 통틀어서 식주라 한다.
‘형상이 있다’라고 함은, 그 유정에게는 형상이 있어서 형상이 있는 몸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가 있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가 있고 색온이 있기 때문에 형상이 있다고 한다.
‘유정’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에서나 으뜸가는 이치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ㆍ계ㆍ처에 의하여 가정으로 유정을 세워서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구르면서 유정ㆍ인ㆍ의생ㆍ유동ㆍ명자ㆍ생자ㆍ양자ㆍ사부ㆍ보특가라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 한다.
‘갖가지 몸’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갖가지 현색으로 된 몸과 갖가지 모양과 갖가지 형색이 있어서 하나의 형색이 아니요, 하나의 모양이 아니며 하나의 형색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갖가지 몸이라 한다.
‘동일한 생각[一想]’이라 함은,
모든 유정에게는 때[時]가 있고 분한[分]이 있어서 이 세계의 겁(劫)이 파괴하려 할 적에는 대부분 위의 광음천(光音天) 등 중동분(衆同分)에 태어나며, 그곳에서 생각하는 대로 육신을 완전하게 받아 나서[意成色身] 팔다리가 원만하고 형색(形色)과 현색(顯色)이 청정하며 기쁨[喜]을 음식으로 삼아 오래도록 머물러 산다.
때가 있고 분한이 있어서 이 세계에 겁(劫)이 처음 성립되려 할 때에는 아래의 공중에서 하늘의 궁전이 홀연히 생기는데,
어떤 한 유정이 수명[壽]이 다하고 업(業)이 다하고 복(福)이 다한 까닭에 먼저 광음천 등 중동분(衆同分)으로부터 없어지면서 범천 세계[梵世]의 하늘 궁전으로 내려와서 태어나며 오직 하나뿐이요 둘도 없고 모든 시자(侍者)도 없이 그곳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며 산다.
그때에 그 유정은 오랫동안 머물러 산 뒤에 홀연히 욕망[愛]을 내고, 그리고 좋지 않은[不樂] 일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그 밖의 여러 유정으로 하여금 나의 동분(同分)을 내어서 나와 동무[伴侶]가 되게 할까?’라고 한다.
그 유정이 이런 원(願)을 일으킬 때에 그 밖의 다른 유정들도 수명이 다하고 업이 다하고 복이 다한 까닭에 또다시 광음천 등 중동분으로부터 없어지면서 아래의 범천 궁전에 태어나서 앞의 유정과 함께 동무가 된다.
그때에 먼저 태어났던 이는 생각하기를,
‘나는 벌써부터 여기서 혼자뿐이요 둘도 없이 오래 살고 있었다. 오랫동안 머무른 뒤에 홀연히 욕망을 내고 그치고 즐겁지 않은 일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그 밖의 모든 다른 유정으로 하여금 나의 동분을 내어서 나의 동무가 되게 할까?≻라고 하였다.
내가 이와 같이 마음에 원을 낼 때에 이 모든 유정들이 곧 이곳에 태어나서 나의 뜻을 만족시키고 나의 동무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유정들은 바로 내가 변화로 만들었으니, 나는 이런 이들과 그 밖의 세간에 대하여 자재한 이[自在者]요 지은 이[作者]며 변화한 이[化者]요, 낳은 이[生者]며 일으킨 이[起者]니, 이는 진실로 그들의 아버지요 할아버지이다’라고 한다.
그때에 모든 유정들도 역시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일찍이 보았는데 이 유정은 혼자요 둘이 아니어서 오래도록 여기에 살고 있었다.
그때에 그 유정은 오래도록 산 뒤에 홀연히 욕망을 내고 그리고 즐겁지 않은 일을 하면서 생각하기를,
≺어떻게 하면 그 밖의 다른 여러 유정으로 하여금 나의 동분을 내어서 나와 동무가 되게 할까?≻라고 하였다.
그가 막 이런 원을 일으킬 때에 우리들은 곧 그의 동분(同分) 안에 태어났고 그의 동무가 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바로 그의 변화로 된 것이니,
그는 유정과 세간 만물에 대하여 자재한 이요, 지은 이요, 변화한 이요 낳은 이며, 일으킨 이이므로 그는 진실로 아버지요 할아버지이다’라고 한다.
이 때문에 동일한 생각이라 한다.
‘마치 범중천(梵衆天)과 같다’라고 함은, 이 이치에서는 범중천 등에 태어나 있는 이들은 갖가지 몸을 가지고 있되 오직 동일한 생각이 있다는 것만을 나타낸다.
‘겁초(劫初)에 일어나는 지위’라 함은, 겁이 처음에 생기는 때이다.
‘이것을 두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로 두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識住)’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곧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통틀어서 식주라 한다.
‘형상이 있다’라고 함은, 그 유정에게는 형상이 있어서 형상이 있는 몸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가 있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가 있고 색온이 있나니, 이 때문에 형상이 있다고 한다.
‘유정’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에서나 으뜸가는 이치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도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ㆍ계ㆍ처에 의하여 가정하여 유정을 세워서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구르면서 유정ㆍ인ㆍ의생ㆍ유동ㆍ명자ㆍ생자ㆍ양자ㆍ사부ㆍ보특가라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고 한다.
‘한 가지 몸[一種身]’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하나의 현색(顯色)의 몸이요, 한 가지의 몸이며, 한 가지의 형용이 있어 갖가지 현색은 없고 갖가지 모양도 없으며, 갖가지 형용도 없나니, 그 때문에 한 가지 몸이라 한다.
‘갖가지 생각’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즐거운 생각과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생각이라 한다.
‘마치 광음천(光音天)과 같다’라고 함은, 광음천 등의 하늘을 통틀어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을 세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로 세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곧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색온ㆍ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통틀어서 색주라 한다.
‘형상이 있다’라고 함은, 그 유정에게는 형상이 있어서 형상이 있는 몸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가 있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가 있고 색온이 있기 때문에 형상이 있다고 한다.
‘유정’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에서나 으뜸가는 이치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ㆍ계ㆍ처에 의거하여 가정으로 유정을 시설하여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구르면서 유정(有情)ㆍ인(人)ㆍ의생(意生)ㆍ유동(儒童)ㆍ명자(命者)ㆍ생자(生者)ㆍ양자(養者)ㆍ사부(士夫)ㆍ보특가라(補特伽羅)라 하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고 한다.
‘한 가지 몸’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하나의 현색의 몸이요 한 가지 모양이며 한 가지 형색이어서 갖가지의 현색이 없고 갖가지 모양도 없고 갖가지 형색도 없기 때문에 한 가지 몸이라 한다.
‘한 가지 생각[一種想]’이라 함은, 그 유정에게는 오직 즐거운 생각[樂想]만이 있나니, 이 때문에 한 가지 생각이라 한다.
‘마치 변정천(遍淨天)과 같다’라고 함은, 변정천 등의 하늘을 통틀어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을 네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로 네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識住)’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곧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薀)을 통틀어서 식주라 한다.
‘형상이 없다[無色]’고 함은, 그 유정에게는 형상이 없어서 형상이 없는 몸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가 없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가 없고 색온이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한다.
‘유정’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에서나 으뜸가는 이치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ㆍ계ㆍ처에 의하여 가정으로 유정을 세워서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구르면서 유정ㆍ인ㆍ의생ㆍ유동ㆍ명자ㆍ생자ㆍ양자ㆍ사부ㆍ보특가라라 하나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고 한다.
‘온갖 형상과 생각[色想]을 초월한다’라고 함은, 온갖 안식신(眼識身)과 상응하는 생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대상이 있는 생각[有對想]을 없앤다’라고 함은, 4식신(識身)과 상응하는 생각을 없앤다는 것이다.
‘갖가지 생각을 사유(思惟)하지 않는다’라고 함은, 5식신(識身)으로 이끄는 것과 의식(意識)과 상응하는 빛깔[色] 등을 반연하여 갖가지 선정[定]을 장애하는 생각이 없는 것이다.
‘끝없는 허공[無邊空]에 들어가서 허공이 끝이 없는 것을 완전히 갖추고 머무르나니, 마치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과 같다’라고 함은, 공무변천(空無邊天)을 통틀어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을 다섯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數)로 다섯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곧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통틀어서 식주라 한다.
‘형상이 없다’라고 함은, 그 유정에게는 형상이 없어서 형상이 없는 몸[身]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處]가 없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界]가 없고 색온(色蘊)이 없기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한다.
‘유정’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에서나 으뜸가는 이치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蘊)ㆍ계(界)ㆍ처(處)에 의하여 가정으로 유정을 세워서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구르면서 유정ㆍ인ㆍ의생ㆍ유동ㆍ명자ㆍ생자ㆍ양자ㆍ사부ㆍ보특가라라 하나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고 한다.
‘온갖 허공이 끝없는 것을 초월하여 끝이 없는 의식[無邊識]에 들어가서 의식이 끝없는 것을 완전히 갖추어서 머무르나니, 마치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과 같다’라고 함은, 식무변처천을 통틀어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여섯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로 여섯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곧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통틀어서 식주라 한다.
‘형상이 없다’라고 함은, 그 유정에게는 형상이 없어서 형상이 없는 몸을 시설하고 형상이 있는 처소가 없으며, 형상이 있는 세계가 없고 색온이 없나니, 이 때문에 형상이 없다고 한다.
‘유정’이라 함은, 진실한 이치에서나 으뜸가는 이치에서는 비록 모든 유정들은 얻을 수 없고 있는 것도 없으며,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온ㆍ계ㆍ처에 의거하여 가정으로 유정을 세워서 모든 생각과 평등한 생각과 시설과 언설로 구르면서 유정ㆍ인ㆍ의생ㆍ유동ㆍ명자ㆍ생자ㆍ양자ㆍ사부ㆍ보특가라라 하나니, 이 때문에 유정이라고 한다.
‘온갖 의식이 끝없는 것을 초월하여 아무것도 없는[無所有] 데로 들어가서 아무것도 없는 것을 완전하게 갖추어서 머무르나니, 마치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과 같다’라고 함은, 무소유처천을 통틀어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것을 일곱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수로 일곱 번째가 된다는 것이다.
[문] ‘식주(識住)’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곧 이것에 매여 있는 온갖 수온ㆍ상온ㆍ행온ㆍ식온을 통틀어서 식주라 한다.
[7수면]
[문] 7수면(隨眠)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욕탐(欲貪)의 수면(隨眠)이요, 둘째는 진(瞋)의 수면이며,
셋째는 유탐(有貪)의 수면이요, 넷째는 만(慢)의 수면이며,
다섯째는 무명(無明)의 수면이요, 여섯째는 견(見)의 수면이며,
일곱째는 의(疑)의 수면이다.
[문] 어떤 것이 욕탐의 수면[欲貪隨眠]인가?
[답] 욕심에 대한 모든 탐(貪)과 평등한 탐[等貪]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욕탐의 수면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진의 수면[瞋隨眠]인가?
[답] 유정에 대하여 손해를 끼치려는 것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진의 수면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유탐의 수면[有貪隨眠]인가?
[답]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에 대한 모든 탐과 평등한 탐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유탐의 수면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만의 수면[慢隨眠]인가?
[답] 모든 교만[慢]과 믿고 고집하는 것[恃執]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이것을 만의 수면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무명의 수면[無明隨眠]인가?
[답] 삼계(三界)에 있어서 무지(無智)이니, 이것을 무명의 수면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견의 수면[見隨眠]인가?
[답] 5견(見)이니, 이것을 견의 수면이라 한다. 유신견(有身見)과 변집견(邊執見)과 사견(邪見)과 견취(見取)와 계금취(戒禁取)이니, 이와 같은 5견을 견의 수면이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의의 수면[疑隨眠]인가?
[답] 진리에 대한 망설임[猶豫]이니, 이것을 의의 수면이라 한다.
[7무과실사]
[문] 7무과실사(無過失事)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구수(具壽)여, 마땅히 알아야 한다.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여래께 대하여 청정한 믿음[淨信]을 닦고 심어 뿌리가 생겨서 편안히 머무른지라,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혹은 하늘ㆍ악마ㆍ범이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세간법대로 이끌리거나 빼앗기지[引奪] 않나니, 이것을 첫 번째 허물이 없는 일[無過失事]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청정한 계율[淨戒]에 편안히 머물러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별해탈률의(別解脫律儀)를 수호하고 궤칙(軌則)과 가는 곳[所行]이 구족하지 않음이 없으며,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크게 두렵게 보고 학처(學處)를 받아 배우면서 항상 헐뜯거나 범하는 일이 없나니, 이것을 두 번째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착한 벗[善友]에 친근히 하면서 선(善)을 짝하고 벗으로 삼으며, 선과 사귀고 통하는 것이니, 이것을 세 번째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한적(閑寂)한 데에 있기 좋아하면서 두 가지의 원리(遠離)를 갖추는 것이니, 몸[身]의 원리와 마음[心]의 원리이다. 이것을 네 번째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부지런히 정진(精進)하는 데에 머물러 기세[勢]가 있고 힘씀[勤]이 있으며 용기[勇]와 굳셈[堅]과 날램[猛]이 있어서 모든 착한 법에 대하여 언제나 멍에를 버리지 않나니, 이것을 다섯 번째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기억을 갖추어[具念] 편히 머무르면서 가장 뛰어난 상위(常委)의 기억 갈래[念支]를 성취하므로 오랫동안 지은 일과 오랫동안 설한 말을 모두 다 기억하나니, 이것을 여섯 번째의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한다.
또 구수여, 어떤 성스러운 제자는 지혜를 갖추어[具慧] 편히 머무르면서 세간의 출몰이 있는 지혜[世間有出沒慧]와 거룩한 지혜[聖慧]와 벗어나는 지혜[出慧]와 잘 통달한 지혜[善通達慧]와 그가 해야 할 지혜[彼所作慧]와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는 지혜[正盡苦慧]를 성취하나니, 이것을 일곱 번째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한다.
[문] ‘여래께 대하여 청정한 믿음을 닦고 심는다’라고 했는데, 어떠한 분이 여래(如來)인가?
[답] 응공[應]ㆍ정등각(正等覺)을 말하여 여래라 한다.
[문] 어떤 것이 ‘청정한 믿음[淨信]’인가?
[답] 벗어남[出離]과 멀리 여읨[遠離]이 생기는 착한 법에 의거한 모든 믿음과 믿음의 성품이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마음의 청정한 성품이니, 이 때문에 청정한 믿음이라 한다.
곧 이 청정한 믿음을 여래의 처소에서 이미 닦아 심었고 장차 닦고 심을 것이며 현재 닦고 심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여 ‘여래의 처소에서 청정한 믿음을 닦고 심는다’라고 한다.
‘뿌리[根]가 생긴다’라는 등의 말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이것을 첫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첫 번째가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無過失事]’이라 함은, 청정하게 영원히 끊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문] ‘청정한 계율[淨界]에 편안히 머무른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청정한 계율인가?
[답] 짓는 모든 업(業)이다. 몸의 율의[身律儀]와 말의 율의[語律儀]와 생활의 청정함[命淸淨]이니, 이것을 청정한 계율이라 한다.
‘편안히 머무른다[安住]’고 함은, 청정한 계율을 성취하여 닦아 행하고 훌륭하게 행하며 나아가고 계회(契會)하나니, 이 때문에 편안히 머무른다고 한다.
[문] ‘부지런히 힘써서 별해탈률의를 수호한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별해탈(別解脫)인가?
[답]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등각과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부처님ㆍ박가범께서 스스로 아시고 스스로 보시면서 모든 필추들을 위하여 반 달[半月]마다 항상 널리 설하신 『별해탈계경(別解脫契經)』이니, 이것을 별해탈이라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것을 말하여 별해탈이라 하는가?
[답] 가장 뛰어난 착한 법인 이것을 문(門)으로 삼고 이것을 우두머리[上首]로 삼고 이것을 첫 반연[初緣]으로 삼음으로 말미암아 따로따로 행하고 따로따로 머무르나니, 이로 말미암아 별해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지런히 힘써서 이 율의(律儀)를 수호한다’라고 함은, 이와 같은 별해탈의 법에 대하여 한결같이 따라 짓고 한결같이 따라 구르나니, 이 때문에 부지런히 힘써서 별해탈률의를 수호한다고 한다.
‘궤칙(軌則)과 가는 곳[所行]이 구족하지 않음이 없다’라고 함은, 모든 필추들은 5비궤칙(非軌則)과 5비소행(非所行)이 있다.
[문] 어떤 것을 5비궤칙(非軌則)이라 하는가?
[답] 첫째는 타승죄(他勝罪)요, 둘째는 중여죄(衆餘罪)며, 셋째는 타자죄(墮煮罪)요, 넷째는 별수죄(別首罪)며, 다섯째는 악작죄(惡作罪)이다.
[문] 어떤 것을 5비소행(非所行)이라 하는가?
[답] 첫째는 국왕(國王)의 집이요, 둘째는 망나니[執惡]의 집이며, 셋째는 음녀(淫女)의 집이요, 넷째는 음악(音樂)의 집이며, 다섯째는 술 파는[酤酒] 집이다.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여기서 말하는 5비궤칙과 5비소행에 대하여 언제나 즐거이 멀리 여의면서 그쳐 쉬고 버리며, 바른 궤칙과 바르게 가는 데를 구족하게 성취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궤칙과 가는 데가 구족하지 않음이 없다고 한다.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크게 두렵게 본다’라고 함은,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극히 두려워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로 말미암아 조그마한 죄에 대해서도 크게 두렵게 본다고 한다.
‘학처(學處)를 받아 배우고 항상 헐뜯거나 범함이 없다’라고 함은,
성스러운 제자들은 ‘나는 이러이러한 학처에 대하여 마땅히 부지런히 닦고 배워야 한다’거나, ‘
나는 이러이러한 학처에 대하여 부지런히 닦아 배우지 않는다’라고 함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성스러운 제자들은 항상 생각하기를,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과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나아가 부처님ㆍ박가범께서 스스로가 아시고 스스로가 보시면서 무릇 제정하신 온갖 학처를 나는 모두 받아 배워서 항상 헐거나 범함이 없으리라’라고 한다. 이 때문에 학처를 받아 배우면서 항상 헐거나 범함이 없다고 한다.
‘이것을 두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함은, 청정하게 영원히 끊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다.
[문] ‘착한 벗을 친근히 한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착한 벗[善友]인가?
[답]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과 부처님의 제자는 모두 착한 벗이라 한다.
또 어떤 보특가라로서 계율을 갖추고 덕을 갖춘 이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이 때문에 착한 벗이라 한다.
이 착한 벗을 친근히 하고 평등하게 친근히 하고 지극히 친근히 하며, 따르고 받들어 섬기며, 공양하고 공경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착한 벗을 친근히 한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선(善)을 짝하고 벗으로 삼는다’라고 하는가?
[답] 산목숨을 끊고 도둑질을 하며 음욕의 삿된 행동을 하고 거짓말을 하며 모든 술을 마시는 것 등에 대하여 모두 멀리 여의고 그쳐 쉬며 버리고 싫증내며 영원히 끊는 것을 말하여 ‘선’이라 하며,
이 선을 행하는 이를 짝하고 벗으로 삼아 따르고 향해 나아가되 몸과 마음에 둘이 없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선을 짝하고 벗으로 삼는다’라고 한다.
[문] 어떤 것을 ‘선과 사귀고 통한다[交通]’고 하는가?
[답] 믿음을 갖추고 계율을 갖추며, 견문이 많고 평정[捨]을 갖추며, 지혜 등을 갖추는 이에게 따라 움직이고 따라 속하며, 따르면서 거스르지 않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선과 사귀고 통한다’라고 한다.
또 만일 벗어남과 멀리 여읨이 생기는 착한 법을 두루 갖춘 이에 대하여 즐거움[樂]을 하나로 하고 바람[欲]을 하나로 하며,
기쁨[喜]을 하나로 하고 사랑[愛]을 하나로 하며 즐거움을 같이하고 바람을 같이하며,
기쁨을 같이하고 사랑을 같이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선과 사귀고 통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세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세 번째가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함은, 청정하게 영원히 끊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문] ‘즐거이 한적(閑寂)한 곳에 산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을 즐거이 한적한 곳에 산다고 하는가?
[답] 비어 있고 멀리 떨어져 있는 집을 모두 한적하다고 하며,
만일 이 가운데 머무르면서 기뻐하고 좋아하며 근심하지 않으며 마음에 싫증과 두려워함이 없으면, 이 때문에 말하기를
‘즐거이 한적한 곳에 산다’라고 한다.
‘두 가지 원리(遠離)를 갖추나니, 몸[身]의 원리와 마음[心]의 원리이다’라고 함은,
이 가운데 머무르면서 부지런히 닦고 배우며, 속마음이 고요히 그쳐서 정려(靜慮)를 여의지 않고 묘한 관(觀)을 성취하며, 비어 있고 멀리 있는 집[空迵舍]을 더하게[長] 하면서 부지런히 스스로의 이치[自意]를 닦는 것이다.
‘부지런히 닦고 배우며 속마음이 고요히 그친다[內心寂止]’고 함은, 이 가운데 머물러서 부지런히 정진하며, 세간의 4정려(靜慮)를 닦고 배우는 것이다.
‘정려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함은, 세간의 4정려를 항상 부지런히 사모하여 낮추지도 않고 비열하지도 않고 겁내지도 않고 끊어짐도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정려를 여의지 않는다’라고 한다.
‘묘한 관(觀)을 성취한다’라고 함은, 세간의 4정려와 상응하는 묘한 지혜를 구족하게 성취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묘한 관을 성취한다’라고 한다.
‘비어 있고 멀리 있는 집을 더하게[長] 한다’라고 함은,
비어 있고 멀리 있는 한적한 집에 머물면서 간택(簡擇)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근심을 내지 않으며,
마음에 싫증과 두려워함이 없어서 몸과 마음 그리고 모든 착한 법을 더욱 자라게[增長]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비어있고 멀리 있는 집을 더하게 한다’라고 한다.
‘부지런히 힘써서 스스로의 이치[自意]를 닦는다’라고 함은,
모든 애욕이 다하여[愛盡] 여의고 사라진[離滅] 열반을 가장 으뜸가는 이치[最上義]라 하며, 또한 스스로의 이치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이치에 대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닦고 배워 빨리 증득하기를 바라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부지런히 힘써서 스스로의 이치를 닦는다’라고 한다.
‘이것을 네 번째라고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네 번째가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함은, 청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말[增語]이다.
[문]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머무른다’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정진인가?
[답] 벗어남[出離]과 멀리 여읨[遠離]이 생기는 착한 법에 대하여 부지런히 힘써서 용맹스럽게 기세 있는 작용으로 다잡고 격려하며, 이 억누를 수 없는 다잡은 마음이 서로 이어지는 것을 정진(精進)이라 한다.
그는 이와 같은 정진을 성취한 까닭에 닦아 익히는 것에 대하여 능히 행하고 뛰어나게 행하며, 나아가고 깨달아 알게 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머무른다’라고 한다.
‘기세[勢]가 있다’라고 함은, 그것은 상품(上品)의 정진으로서 원만하기 때문에 기세가 있다고 한다.
‘힘씀[勤]이 있다’라고 함은, 곧 그 정진이 견고한 것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힘씀이 있다고 한다.
‘용기[勇]와 굳셈[堅]과 날램[猛]이 있다’라고 함은,
정진하는 힘을 성취한 까닭에 용감[勇]하게 결단하면서 취하고 견고[堅]하게 머무르면서 취하며,
날래고[猛] 날카롭게 취하는 것이니, 모든 취하는 것은 선(善)이요 악(惡)이 아니며,
따라 취하는 것의 모양을 수호해서 버리지 않음이 마치 다른 나라를 얻은 뒤에는 잘 수호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용기와 굳셈과 날램이 있다’라고 한다.
‘모든 착한 법에 대하여 언제나 멍에[軛]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함은,
착한 법에 대하여 근면과 용맹을 버리지 않고 왕성하게 정진해서 사이가 없고 끊어짐이 없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모든 착한 법에 대하여 언제나 멍에를 버리지 않는다’라고 한다.
‘이것을 다섯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다섯 번째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함은, 청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말이다.
[문] ‘기억을 갖추어 편히 머무른다[具念安住]’고 하는데, 어떤 것이 기억인가?
[답] 벗어남과 멀리 여읜 데서 생긴 착한 법에 의거한 모든 기억[念]과 따라 기억하는 것[隨念]이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이것을 기억이라 한다.
‘가장 뛰어난 상위(常委)의 기억의 갈래[念支]를 성취한다’라고 함은, 8지성도(支聖道)를 말하여 상위라 하며, 이 기억은 곧 그것의 한 갈래에 속하나니, 바로 바른 기억[正念]의 갈래이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가장 뛰어난 상위의 기억의 갈래를 성취한다’라고 한다.
‘오랫동안 지은 것과 오랫동안 설한 말을 모두 기억한다’라고 함은, 이 기억[念]으로 말미암아 일찍이 겪었던 일들을 잊지 않고 잃지도 않으며 마음에 분명히 기억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오랫동안 지은 것과 오랫동안 설한 말을 모두 기억한다’라고 한다.
‘이것을 여섯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여섯 번째가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함은, 청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말이다.
[문] ‘지혜를 갖추어 편히 머무른다[具慧安住]’고 하는데, 어떤 것이 지혜인가?
[답] 벗어남과 멀리 여읨에서 생긴 착한 법에 의거한 모든 법상(法相)에 대하여 능히 간택(簡擇)하고 지극히 간택하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나아가 비발사나(毘鉢舍那)이니, 이것을 지혜라 한다.
‘편안히 머무른다[安住]’고 함은,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한 까닭에 모든 법상에 대하여 능히 행하고 뛰어나게 행하며, 나아가고 깨달아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혜를 갖추어 편안히 머무른다’라고 한다.
‘세간의 출몰이 있는 지혜[世間有出沒慧]를 성취한다’라고 함은, 세간이란 바로 5취온(取蘊)을 말한다.
어떤 것이 5취온인가? 색취온(色取蘊)ㆍ수취온(受取蘊)ㆍ상취온(想取蘊)ㆍ행취온(行取蘊)ㆍ식취온(識取蘊)이다. 그는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한 까닭에 이 5취온이 생기는 것과 변하고 파괴되는 것을 사실대로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세간의 출몰이 있는 지혜를 성취한다’라고 한다.
‘거룩한 지혜[聖慧]’라 함은, 두 가지 거룩함[聖]이 있다.
첫째는 선(善)이기 때문에 거룩하며, 둘째는 무루(無漏)이기 때문에 거룩하나니,
이 지혜는 두 가지 거룩함을 다 갖추었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거룩한 지혜라 한다.
‘벗어나는 지혜[出慧]’라 함은, 그는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한 까닭에 욕계(欲界)를 벗어나고 색계(色界)와 무색계(無色界)를 벗어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벗어나는 지혜라 한다.
‘잘 통달한 지혜[善通達慧]’라 함은,
그는 이와 같은 지혜를 성취한 까닭에 괴로움[苦]ㆍ괴로움의 원인[集]ㆍ괴로움의 소멸[滅]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道]의 네 가지 진리에 대하여 괴로움ㆍ괴로움의 원인ㆍ괴로움의 소멸ㆍ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의 모양을 능히 통달하고 잘 통달하며 저마다 따로따로 통달하나니, 이 때문에 잘 통달한 지혜라 한다.
‘그가 지어야 할 지혜[彼所作慧]’라 함은, 그가 이끌어야 할 배울 것이 있는 이[學]의 무간도(無間道)에 있는 온갖 뛰어난 지혜를 여기서 말하기를 ‘그가 지어야 할 지혜’라고 한다.
[문] ‘바르게 괴로움을 다하는 지혜[正盡苦慧]’라 했는데, 어떤 것을 ‘바르다[正]’고 하는가?
[답] 인(因)이기 때문이요 문(門)이기 때문이며, 이치[理趣]이기 때문이요 행상(行相)이기 때문에 ‘바르다’라고 말한다.
‘괴로움을 다하는 지혜[盡苦慧]’라 함은,
5취온(取蘊)을 괴로움이라고 말하는데 이 지혜는 이 5취온을 다하고 평등하게 다하며, 두루 다하게 하면서 영원히 다함을 증득하게 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다하는 지혜라 한다.
‘이것을 일곱 번째라 한다’라고 함은, 점차와 순차와 서로 이어지는 차례의 순서로 일곱 번째가 되는 것이다.
‘허물이 없는 일’이라 함은, 청정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말이다.
이 가운데서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믿음[信]과 계율[戒]과 착한 벗[善友]을 갖추고
고요히[寂] 있으면서 정근(精勤)하기 좋아하며
기억[念]과 바르게 앎[正知]을 성취하는 것을
일곱 가지 허물없는 일[七無過事]이라 한다.
[7지쟁법]
[문] 7지쟁법(止諍法)이라 함은 어떤 것인가?
[답] 첫째는 당사자를 바로 앞에 세워 놓고 쟁론(諍論)을 결단하여 그치게[止] 하는 비나야[現前毘奈耶]요,
둘째는 기억을 더듬어 무죄를 입증하여 쟁론을 그치게 하는 비나야[憶念毘奈耶]며,
셋째는 미치광이나 어리석은 이가 아닌가를 조사하여 쟁론을 그치게 하는 비나야[不癡毘奈耶]요,
넷째는 자백과 참회하는 그의 태도 여하에 따라 쟁론을 그치게 하는 비나야[求彼自性毘奈耶]며,
다섯째는 여러 사람들의 말과 결정을 취하여 쟁론을 그치게 하는 비나야[取多人語毘奈耶]요,
여섯째는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갈마(羯磨)에 의하여 쟁론을 그치게 하는 비나야[取自言持毘奈耶]며,
일곱째는 풀이 땅을 덮는 것처럼 법다운 태도에 의하여 쟁론을 그치게 하는 비나야[如草覆地毘奈耶]이니,
이와 같은 것을 일곱 가지의 지쟁법이라 한다.
[문] 무슨 연유로 이 일곱 가지를 지쟁법(止諍法)이라 하는가?
[답] 쟁(諍)이라 함은, 피차간에 싸우고 어기고 다투는 것이어서 이 일곱 가지 법 중의 어느 하나라도 앞에 나타나면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다툼을 모두 조정하여 그치고 쉬게 하는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이와 같이 다툼을 그치게 하는 법을 지쟁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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