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는 달이 밝고 별이 총총한 여름밤이면 나를 데리고 맑은 물이 찰랑찰랑한 개울에 가셨다고 했다. 오십 대 후반의 외할머니 친구들과 함께였다. 외할머니 말씀으로는 모두 수건을 가슴에 두르고 물에 들어가셔서 목간(목욕의 사투리)했는데 그럴 때면 나를 개울가에 두었다고 하셨다. 기특하게 물가에 혼자 서있던 나는 할머니들이 한창 목간하실 때면
“할머니, 수건 내려! 왜 목간하면서 옷을 입었어!”
하고 소리쳤다고 하셨다. 어린 내 외침에 할머니들의 깔깔대는 파대 웃음이 터져 나왔고 그 뒤로 할머니들은 나를 보면
“다섯 살짜리 조 녀석도 사내라고 옷을 내리래. 글쎄!”
하고 서로 농담을 하셨다고 즐거워하시곤 했다. 내 기억에 남은 것은 달빛에 일렁이는 물결과 개울 뒤 컴컴한 산속에서 부엉부엉 들려오던 부엉이 우는 소리뿐이다.
어른이 된 후 가보니, 그때 그 얕고 정겹던 개울은 어디 가고 제방을 쌓아 놓았는데 가물 때라 그런지 개울물은 볼품없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내가 어릴 때와는 달리 5.16 후 조림(造林) 사업으로 인해 지금은 산에 나무가 빽빽해졌는데 수량이 오히려 줄어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어릴 때 보았던 개울을 성인이 되어서 보니 상대적으로 작아 보여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대화에 살 때, 밤이면 외할머니가 어머니와 함께 두드리던 다듬이질 소리를 잊지 못한다. 박달나무 다듬이는 반질반질했는데 밤이면 두 분이 다듬잇방망이를 두 개씩 들고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어 가며 다듬질하셨다. 방망이들이 서로 부딪칠 것 같은 데도 신기하게도 한 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밤이라 호야 등 불꽃이 가물가물한데 다듬질 소리는 때론 빠르고, 때론 느리게, 때론 강하고, 때론 약하게 마치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잠이 감실감실한 나의 눈에는 두 분이 꿈결같이 아득하게 작아지며 멀어졌다가 다시 희미하게 가까이 왔다가 했다.
집 떠난 남편 때문에 과부같이 살아가신 어머니와 외딸을 둔 외할머니의 애환을 담은 이 다듬질 가락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며, 박달 방망이는 청명한 소리를 내며, 기쁨의 춤을 추듯, 슬픔의 한을 삭이듯, 부드럽게 보듬듯 나를 잠재웠다.
나는 지금도 외할머니와 함께 양쪽 끝과 모서리를 잡아당기곤 했던 희고 깨끗한 옥양목 이불잇의 빳빳하고 상쾌한 질감을 기억한다. 그리고 숯불 다리미로 빳빳하게 다림질된 이불 홑청의 깨끗한 느낌과 옥양목이 숯불 다리미에 조금 누른 듯한 그 구수한 냄새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 빳빳하고 깨끗한 흰 이불속에 처음 들어갈 때의 상쾌한 기분을 잊지 못한다.
나는 형제 중 외할머니께 안마를 가장 많이 해드렸다. 장남을 귀히 여기는 당시 관습에 따라 형에게 안마를 시키기는 마음이 내키지 않아 나에게만 안마를 시키셨던 것 같다. 형은 장손이고 여동생은 어려서 심부름도 주로 나를 시키셨다.
“왜? 심부름은 나만 시켜!”
하고 툴툴댔지만, 나중에는 으레 내 일인 줄 알아 군말 없이 하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대화에 살 때 나를 데리고 가끔 먼 길을 걸어 고둣골의 산속에 있는 절에 가곤 하셨다. 그 절에 형과 나의 이름을 올리셨다는 것이다. 고둣골의 절에 가는 길가에는 집채만 한 둥글고 큰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그 옆을 지나 계곡 길을 올라갈 때면 외할머니는
“옛날에 곰이 이 바위를 밀고 서 있었는데 그 아래에서 새끼 두 마리가 개울 속에 숨은 가재를 잡아먹고 있었데. 그런데 지나가던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놀라서 ‘곰이다!’ 하고 큰 소리를 질렀는데 이 소리에 곰이 깜짝 놀라 바위를 밀고 있던 두 발을 떼는 바람에 새끼들이 바위 아래 모두 깔리고 말았데. 새끼가 바위에 깔리자 어미 곰은 바위를 밀쳐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큰 바위를 들 수 없어 새끼 곰들은 결국 죽고 말았데. 새끼를 잃은 어미 곰은 무서운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소리 지른 사람에게 달려들어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데. 사람이든 짐승이든 제 새끼를 고이는 마음은 다 마찬가지란다.”
라고 옛날이야기를 하시곤 하셨다.
이제 생각하니, 외할머니는 다소곳이 여인숙만 운영하시며 일만 하신 어머니와는 달리 외향적이고 적극적인 분이셨다. '노들강변',' 노새 노새 젊어서 놀아' 등 옛날 노래를 입에 달고 사셨고, 목소리도 기름지고 좋으셨다. 붙임성이 좋으셔서 대화읍의 부자인 대화여관 할머니와는 의형제를 맺어 동생이 되었고, 또 화폐개혁 전에 대화 근처의 돈을 모두 싹쓸이했다는 대화약국의 박재식 아저씨와도 누나로 의형제를 맺었다. 그리고 박재식 아저씨가 정치를 하실 때 선거운동을 돕기도 하셨다. 그 아저씨는 우리가 춘천으로 이주 후에도 세번 정도 오셔서 봉투를 주고 가시곤 했다.
외할머니는 내가 생일이 시월이라 3월 이전 출생자만 들어갈 수 있는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자, 시험지와 선화지를 사서 들고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께 사정하여 나를 조기 입학시키셨다.
"얘가 동무들과 항상 같이 놀았는데 모두 다 학교에 가고 나면 이 애는 어떻게 하나요? 그러니 생일은 늦지만 입학하게 해주세요."
당시에는 그래도 그런 일이 가끔 허용되는 시절이었지만, 치맛바람(?)이 쎈 외할머니가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사학년 때 춘천에 이사온 후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가난에 시달리셨다. 어머니가 박남철이란 사촌 동생에게 사기를 당해 일년 만에 집을 통째로 날리신 까닭이었다. 그 동생인 남선이 아저씨는 얼굴도 품성도 착하셔서 늘 어머니와 외할머니가 고생하는 것을 안쓰럽게 생각하시며 가끔 춘천까지 다녀가시곤 했다.
나는 가정 사정이 어렵지만, 철이 늦게 드는 성품인지 늘 명랑하고 활기차게 학교에 다니고 장난도 많이 치며 산으로 들로 개 쏘다니듯 돌아다녔다. 다만 미술시간에 왕자파스를 사지 못해 양초처럼 딱딱하고 색이 섞이지 않는 크레용을 써야 하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나는 겨울이면 교동동회실 근처 꽝꽝 얼은 논에 나가서 하루 종일 썰매를 타곤했다. 외할머니는 언제나 연탄불에 물을 데워놓고 계시다가 내가 집에 들어가면 대야에 물을 받아 손과 발을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닦아주셨다. 그래서 나는 동상(冬傷)에 걸리지 않고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물을 '데운다.'와 '끓인다.'의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늘
"할머니 물 끓여 놨어?"
하면, 할머니는 기기막히다는 듯이 웃으며 대꾸하셨다.
" 왜? 발을 튀겨 먹으려고?"
나는 그런 할머니가 늘 이상했다. 학교에서는 물이 섭씨 백도면 끓는다고 했는데, 끓여서 식히는 것이 맞지 않나? 그것이 내 고집이었다. 내가 미욱하여 그런 실랑이를 4~5년은 한 것 같다.
내가 열일곱살 쯤 나는 남춘천에 있는 병기부대에서 엔진정비 기술을 배우면서 야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열병에 걸려 열이 펄펄 끓어 방에 앓아 눕게 되었다. 크면서 한번도 병치레를 안한 건강한 터라 외할머니는 몹씨 걱정이 되셨다.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나서 눈을 떠보니
"훠이 훠이 물러가라! 열병귀신 물러가라.!"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한쪽 손에는 부엌칼을 들고 방구석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앗 무당이다!' 나는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벽력같이 소리쳤다.
"이 무당아! 나가!"
무당에 깜짝놀라 신도 신지 못하고 허겁지겁 문을 열고 도망쳤다.
"야야~ 너 왜그러니? 널 낳게 하려고 온 사람인데 왜 그리 소리를 질러 신도 못신고 가게 하니!"
외할머니는 나를 위해 그러셨지만, 나는 외할머니께 미신쟁이라고 툴툴대며 그 길로 일어나서 야학에 갔다. 그리고는 그후론 아프지 않았다. 사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부류가 무당이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고을 원님일 때 무당을 쫒아낸 안향 선생이 나의 4대조(4代祖)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어린 마음에 더할 수 없이 큰 자부심을 느꼈으니 말이다.
외할머니는 가끔 나에게 이야기 하셨다.
"종희(대화에 살 때 이름이다.) 저 노무 새끼는 인정도 많고 싱금스러운데(나는 이말이 대개 인정스럽고 배려심이 많다는 뜻이란 건 알지만, 방언이기에 이 말을 대체할 말이 무엇인지 모른다.) 가끔 성질 낼 때는 지랄같고 심통스러워."
나는 그런 외할머니를 의지하고 사랑했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넘치는 사랑 때문에 환경상 비행청소년이 될 수 있었는데도 자연스럽게 빗나가지 않고 모범생처럼 성장했다. 그리고 장성하여서는 그런 두 분의 사랑이 나를 긍정적이며 따뜻한 품성(?)을 지닌 사람으로 만들었고, 열번 넘어져도 또 한번 일어서는 의지를 갖게 만들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외할머니는 내가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생이 되었을 때 몹씨 기뻐하셨다. 그러나 대학 3학년 때 외할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한쪽 팔과 다리가 마비되셨다. 그러나 거의 누워서 생활하시는 가운데서도 늘 수건을 달라고 하셔서 몸을 구석구석 깨끗하게 닦으셨고, 머리도 깨끗하고, 가르마도 가지런히 따셔서 희고 깨끗한 모습을 끝까지 잃지 않으셨다.
외할머니는 여러 해동안 투병하다가 돌아가셨다. 돌아가셨을 때는 교동교회 장 목사님이 오셔서 손수 염을 하시고 장례를 치러주셨다. 그때 나는 취직이 되어 서울에서 근무하다 급히 내려오니 옆방에서 염을 하고 계셨던 것이다. 정말 고맙고 송구스러운 일이었다.
이제 나이 칠순이 넘어 인생살이의 고달픔과 희열도 알고 세상이 제 맘대로 안되는 것임을 알고 보니, 새삼 외할머니의 인생살이가 어떠셨을까 가끔 그리움과 함께 추측해보게 된다.
언제 외할아버지와 이별하셨는지? 청상과부로 어떻게 사셨는지? 아들을 선호하는 당시에 외동딸만 하나 낳아 마음에 괴로움은 없으셨는지? 하나뿐인 딸을 그래도 정든 안미에서 멀리 떨어진 횡성 둔내의 물설고 낯설은 두메산골로 시집 보내실 때 마음은 얼마나 안쓰럽고 슬프셨을지, 하나뿐인 사위가 도지(賭地) 를 놓았던 그 많던 전답을 노름으로 없애고 봉평으로 도라지 농사지으러 가서 가끔 들렀을 때 그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지, 젊을 때는 키도 훤출하고 인물도 좋은 미인이셨을 텐데 남정네들의 추파나 수작은 어떻게 견디셨는지. 젊은 과부의 남에게 말못할 설음은 어떻게 견디셨는지? 하나 뿐인 딸이 손자 둘과 손녀 하나를 키우며 고생하는 것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을지...
나는 어렸을 때 외할머니도 여인(女人)이란 걸 몰랐다. 다만 피붙이인 나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조건없이 품으시기만하는'내 편', '내 할머니'라는 것만을 알았을 뿐이다. (나는 태어나기 전에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사진 한장도 남기지 않고 일찍 돌아가셔서 모습을 뵙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키우시는 할머니가 외할머니란 사실도 어렸을 때는 잘 몰랐다.)
그리운 외할머니.
보름달처럼 빛나는 흰 얼굴, 언제나 쪽 찐 머리에 깨끗한 몸, 키도 훤칠하시고 노래도 잘하시고, 된장국을 유난히 맛있게 끓이셨고, 사랑이 듬뿍 담긴 욕도 구수하게 잘하셨던 외할머니의 함자는 유(劉)자 원(元)자 자(子)셨다.
* 이 글은 올해 3월에 발간한 졸저 '사진자서전쓰기'에 실린 글을 조금 더 자세히 쓴 것이다. 책이 자서전쓰기이기고, 샘플로 실은 나의 이야기라서 줄여서 실었던 것을 시간이 있을 때마다 보완하여 수필처럼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