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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11권
3. 변차별품⑦
3.8. 제법의 인과론(2-3)
5) 등무간연이 되는 심ㆍ심소법의 상생(相生)관계
제법의 그러그러한 연생(緣生)관계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종의에 따라 등무간연의 뜻에 대해 자세히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앞(본론 제10권)에서 ‘[아라한의] 최후심을 제외한 온갖 심ㆍ심소법으로서 이미 생겨난 것은 모두 등무간연이 된다’고 전체적으로 논설하였지만,
‘어떠한 마음과 무간에 몇 가지의 마음이 생겨나는 것인가’, 또한 ‘몇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어떠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적으로 설하지 않았다. 지금 마땅히 결정적으로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① 계 12심
마음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는데, 어떻게 그것에 근거하여 결정적으로 논설할 수 있을 것인가?
바야흐로 간략히 설하자면 마음에는 열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무엇이 열두 가지의 마음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으니
선ㆍ악과 유부(有覆)ㆍ무부의 무기이고
색계와 무색계에는 악심이 제외되며
무루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바야흐로 욕계에는 네 가지 종류의 마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선ㆍ불선ㆍ유부무기ㆍ무부무기가 바로 그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에는 각기 세 가지 마음이 있으니, 이를테면 불선을 제외한 그것으로, 그 나머지는 앞에서 논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열 종류의 마음을 유루심이라고 한다.
그러나 만약 무루심의 경우라면, 여기에는 오로지 두 종류만이 있을 뿐이니,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 같은 유루심과 무루심을] 모두 합하면 열두 가지 마음이 되는 것이다.
② 12심의 상생관계
이러한 열두 가지의 마음의 상생관계는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의 선심(善心)은 아홉 가지를 낳으며
이것은 다시 여덟 가지로부터 생겨나며
염심(染心)은 열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네 가지를 낳으며
그 밖의 것은 다섯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일곱 가지를 낳는다.
색계의 선심은 열한 가지를 낳고
이것은 다시 아홉 가지로부터 생겨나며
유부무기는 여덟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를 낳는다.
무부무기는 세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이것은 다시 능히 여섯 가지를 낳는다.
무색계의 선심은 아홉 가지를 낳고
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로부터 생겨나며
유부무기는 일곱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무부무기는 색계에서 분별한 바와 같다.
유학은 네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다섯 가지를 낳으며
그 밖의 것은 다섯 가지로부터 생겨나고, 네 가지를 낳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선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는다.34)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즉 입정할 때와 속생(續生)하는 상태에서 순서대로 선심과 염심을 낳는다.
어떠한 선심을 낳으며, 그것은 다시 어떠한 지(地)에 포섭되는 것인가?
이것은 첫 번째 상태[初位]에서는 가행심을 낳지만 그 후의 상태에서는 이욕(離欲)의 득(得)을 낳으니, 수순(隨順)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색계의] 생득(生得)의 선심은 일으킬 수 없으니, ‘생’이 이 사이에 존재하여 능히 그것으로 하여금 일어나 현전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러한 마음은 미지지(未至地)에 포섭된다”고 설하였고,
어떤 이는 “역시 초정려에도 포섭되어 존재한다”고 설하였으며,
어떤 이는 “역시 정려중간에도 존재한다”고 설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존자 구사(瞿沙,Goṣa,즉 妙音)는 이와 같이 설하였다.
“[이러한 마음은] 역시 제2정려에도 존재하니, 예컨대 초정(超定)이 일어날 때 지(地)를 건너뛰어 일어나는 것과 같다.”35)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등인(等引)이 아닌 마음은 능히 지를 뛰어넘는 마음을 견인하여 일으킬 만한 힘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구사)의 설은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은 것이다.
[나아가 욕계의 선심은 자계(自界)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과] 아울러 무색계의 한 가지 마음—즉 속생하는 상태에서 욕계의 선심은 무간에 그러한 [무색계의] 염심—과,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낳으니,36) 수순하여 머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의 선심은 무간에 결정코 색계와 무색계의 전(纏,즉 염심)과 무부무기심을 낳지 않으니, 그것들은 모두 자계(自界)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다.
또한 역시 결정코 무색계의 선심도 낳지 않으니,
그것(즉 무색계)은 이것(즉 욕계)에 대해 네 가지의 원격함[四遠]이 있어 멀기 때문으로,
첫째가 소의원(所依遠)이며, 둘째가 행상원(行相遠)이며, 셋째가 소연원(所緣遠)이며, 넷째가 대치원(對治遠)이다.37)
그리고 이러한 욕계의 선심은 다시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즉 출정(出定)할 때에는 그러한 [색계의] 선심으로부터 일어나며,
초정려의 염오한 선정에 의해 핍박 뇌란(惱亂)될 때에는 그러한 [색계의] 염심으로부터 욕계의 선심이 낳아지는 것으로, 하지의 선에 의해 그것에서 물러나는 것을 방호(防護)하고자 하기 때문이다.38)
아울러 [욕계의 선심은] 유학과 무학[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낳아지니], 이를테면 [무루]관에서 나갈 때이다.
‘염심(染心)’이란 말하자면 불선과 유부무기 두 가지로서,
이것들은 각기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제외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는데, 자계의 네 가지와 색ㆍ무색계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속생하는 상태에서 상계의 여섯 가지 마음은 모두 명종(命終)하고서 욕계의 두 가지 염심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필시 무루에 의해 생겨나는 염오심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유학과 무학의 마음으로부터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욕계 염심)은 무간에 능히 네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로서, 그 밖의 다른 마음은 낳을 리가 없다.
다시 말해 필시 하지의 염심이 무간에 상지와 무루의 마음을 낳는 일은 없는 것이다.
[본송에서] ‘그 밖의 것’이라고 한 것은 욕전(欲纏,즉 욕계)의 무부무기를 말한 것으로, 이러한 마음은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선심이 바로 그것으로, 욕계의 변화심[化心]은 그러한 [색계선심]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부무기심은 무간에 능히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즉 선심과 염오심으로서, 입정할 때 욕계의 변화심은 다시 그러한 [색계의] 선심을 낳으며, 속생하는 상태에서 욕계의 무부무기는 그러한 [색계의] 염심을 낳는다—와, 아울러 무색계의 한 가지—즉 속생하는 상태에서 이러한 욕계 무부무기심은 능히 그러한 [무색계의] 염심을 낳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계의 네 가지 마음이 무간에 다른 마음으로부터 생겨나고, 능히 다른 마음을 낳는 결정적인 내용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이상 욕계4심의 상생관계)
색계의 선심은 무간에 열한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무색계의 무부무기심을 제외한 그것으로, 이숙생의 마음은 자계에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색계의 선심은 다시 아홉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계의 두 가지 염오심을 제외하고, 아울러 무색계의 무부무기심을 제외한 그것이다.
[색계의] 유부무기심은 여덟 가지의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욕계의 두 가지 염오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여섯 가지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욕계의 선ㆍ불선ㆍ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색계의] 무부무기심은 세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말하자면 오로지 자계의 세 가지로서, 그 밖의 다른 마음에 의해서는 낳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39)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여섯 가지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욕계와 무색계의 염심이 바로 그것이다.40)
이상 색계의 세 가지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분별하였다.
무색계의 선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욕계의 선심과 아울러 욕ㆍ색계의 무부무기심을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아울러 색계의 선심과,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무색계의] 유부무기심은 무간에 능히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아울러 색계의 선심과 욕ㆍ색계의 염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역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욕ㆍ색계의 염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제외한 그것이다.
[무색계의] 무부무기심은 색계의 그것에서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세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로서, 그 밖의 모든 마음에 의해서는 낳아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세 가지와 아울러 욕ㆍ색계의 염심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 무색계의 세 가지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분별하였다.
유학(有學)의 마음은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유학의 마음과 아울러 3계의 선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다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앞의 네 가지 마음과 아울러 무학의 마음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3계의 염심을 낳지 않는 것은 서로 상위(相違)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온갖 무부무기심을 낳지 않는 것은 그것이 명리(明利)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송에서] ‘그 밖의 것’이라고 한 것은 무학의 마음을 말한 것으로, 이것은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과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두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무간에 능히 네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과 아울러 무학의 마음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즉 유학의 마음을 낳지 않는 것은, 그것은 [무학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며,
염심과 무부무기심을 낳지 않는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열두 가지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③ 3계 20심
어떻게 하여 이것이 나누어져 스무 가지의 마음이 되는 것인가?41)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두 가지 마음은 스무 가지의 마음이 되니
이를테면 3계의 선심은
가행(加行)과 생득(生得)으로 나누어지고
욕계의 무부무기는 네 가지로 나누어진다.
즉 이숙생(異熟生)과 위의로(威儀路)와
공교처(工巧處)와 통과심(通果心)이 그것으로
색계에는 공교처가 제외되며
그 밖의 수량은 앞(즉 12심)에서 설한 바와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3계의 선심(善心)은 각기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니,
이를테면 가행득(加行得)과 생득(生得)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42)
욕계의 무부무기심은 네 가지 마음으로 나누어지니,
첫째가 이숙생(異熟生)이며, 둘째가 위의로(威儀路)이며, 셋째가 공교처(工巧處)이며, 넷째가 통과심(通果心)이다.43)
색계의 무부무기심은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지는데,
공교처를 제외한 그것이니, 상계에는 도무지 여러 가지의 공교한 일을 조작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색계에는 가는[行] 등의 일이 없기 때문에 위의로가 없으며, 섭수지(攝受支)인 삼마지가 없기 때문에 통과심도 역시 없다.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욕계에는 여덟 가지의 마음이 있고,
색계에는 여섯 가지의 마음이,
무색계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있으며,44)
여기에 유학과 무학의 마음을 더하여 스무 가지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④ 20심의 상생관계
[욕계의 마음]
이와 같은 스무 가지 마음은 서로가 서로를 낳는 것으로, 바야흐로 먼저 욕계에 대해 설해보기로 한다.
[욕계의] 여덟 가지 종류의 마음 중 가행의 선심은 무간에 열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自界)의 일곱 가지—즉 통과심을 제외한 것으로, [통과심의] 자류(自類)는 정정(淨定)과 무간에 생겨나기 때문이다—와,45)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여덟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즉 두 가지 선심과 두 가지 염오심—와, 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 그리고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생득의 선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한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 그리고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가지 염오심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와,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색계의 네 가지, 그리고 가행의 선심을 제외한 무색계의 세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이숙생과 위의로의 마음은 무간에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여섯 가지와, 색계와 무색계의 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공교처의 마음은 무간에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일곱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일곱 가지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통과심으로부터는 무간에 두 가지의 마음이 낳아지니, 이를테면 자계의 통과심 한 가지와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두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자계와 색계의 두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욕계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색계의 마음]
다음으로 색계의 마음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색계의] 여섯 가지 종류의 마음 중 가행의 선심은 무간에 열두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여섯 가지와 욕계의 세 가지—즉 가행ㆍ생득의 선심과 통과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위의로와 이숙생을 제외한 자계의 네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와,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생득의 선심은 무간에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유부무기심은 무간에 아홉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의 네 가지— 즉 두 가지의 선심과 두 가지의 염오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와 욕계의 세 가지—즉 생득의 선심과 위의로와 이숙생의 마음—와, 아울러 가행의 선심을 제외한 무색계의 세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이숙생과 위의로의 마음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네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와, 아울러 무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통과심을 제외한 자계의 다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통과심은 무간에 두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통과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도 역시 두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바로 앞에서 설한 자계의 두 가지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색계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무색계의 마음]
다음으로 무색계의 마음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색계의] 네 가지 종류의 마음 중 가행의 선심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여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오로지 이숙생을 제외한 자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가행의 선심 한 가지와, 아울러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생득의 선심은 무간에 일곱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와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유부무기심은 무간에 여덟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두 가지—즉 가행의 선심과 유부무기심—와, 아울러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열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와 색계의 세 가지—즉 생득의 선심과 이숙생과 위의로—와, 아울러 욕계의 세 가지로서, 그 명칭은 색계에서 설한 바와 같다.46)
이숙생의 마음은 무간에 여섯 가지의 마음을 낳으니,
이를테면 가행의 선심을 제외한 자계의 세 가지와 색계의 유부무기심 한 가지, 그리고 욕계의 두 가지—즉 불선과 유부무기심—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자계의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무색계의 마음의 상생관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무루의 마음]
다음으로 무루의 마음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루의] 두 가지 종류의 마음 중 유학의 마음으로부터는 무간에 여섯 가지의 마음이 생겨나니,
이를테면 3계 모두의 가행의 선심과, 욕계 생득의 선심, 그리고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네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3계의 가행의 선심과 유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무학의 마음으로부터는 무간에 다섯 가지의 마음이 생겨나니,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유학에 의해 생겨나는 여섯 가지 마음 중 유학의 마음 한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다섯 가지 마음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니,
이를테면 3계의 가행의 선심과, 유학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이상 무루심의 상생관계)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가행의 선심과 무간에는 능히 이숙생과 공교처와 위의로의 마음을 낳으면서도, 그러한 것들과 무간에는 가행의 선심을 낳지 않는 것인가?
먼저 이숙생의 경우, 선행한 업력에 의해 인발(引發)된 것이기 때문에 그 세력이 약하고 저열하다.
즉 [이숙생의 마음은] 공용(功用)을 조작하여 인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능히 가행의 선심을 인기하지 못하며, 그래서 그것은 능히 가행의 선심을 낳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출심(出心,가행의 선심에서 나오는 마음)은 공용에 의하지 않고도 일어나기 때문에 가행의 선심이 무간에 그것(세 가지 무기심)을 낳는다고 하여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47)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염심은 마땅히 무간에 가행의 선심을 낳지 않아야 할 것이니, 경계에 염착(染著)하여 선에 위배되기 때문이며, 그 세력이 저열하기 때문이다.48)
이러한 과실은 없으니, 번뇌가 자주 현전하는 것을 싫어하여 이 같이 생각한다.
‘어떠한 방편을 시설하여 무의(無義)의 무더기[聚,즉 번뇌]로 하여금 멈추게 하고 행하지 않게 할 것인가?
바로 과실을 일으키는 경계대상을 참답게 알고 능히 공덕을 낳아서 나는 마땅히 일어날 번뇌의 현전(現前)으로부터 벗어나, 살피고 다시 각지(覺知)하여 선을 일으켜 방호하리라.’
바로 이러한 원력에 의해 능히 가행을 일으킬 수 있으며, 염심도 무시(無始) 이래 자주 익혔기 때문에 그 세력이 저열하지 않다. 따라서 염심과 무간에 가행의 선심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욕계의 생득의 선심은 그 행상이 명리(明利)하지만, 뛰어난 공용(功用)에 의해 인발된 것이 아니다.49)
즉 그 행상이 명리하기 때문에, 그것은 유학ㆍ무학의 마음과 색계 가행의 선심(즉 定心)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날 수 있지만, 뛰어난 공용에 의해 인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는 능히 그러한 마음(유학ㆍ무학과 색계 가행선심)이 인기되어 낳아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색계와 무색계의 생득의 선심은 명리하지 않기 때문에, 뛰어난 공용에 의해 인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유학ㆍ무학의 마음과 다른 계(界)의 가행의 선심에 의해 무간에 일어나지 않으며, 이것으로부터도 역시 그러한 마음(학ㆍ무학의 마음과 다른 계의 가행선심)을 인기하여 낳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욕계의 생득의 선심은 명리하기 때문에 색계의 염심(즉 味定)으로부터 무간에 생겨나 능히 [물러남을] 방호할 수 있지만, 색계 생득의 선심은 명리하지 않기 때문에 무색계의 염심으로부터 무간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⑤ 여러 종류의 작의(作意)와 성도(聖道)의 상생관계
작의(作意)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50) 말하자면 자상(自相)ㆍ공상(共相)ㆍ승해(勝解)의 작의로서 차별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일컬어 자상작의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색(色)은 변애(變礙)를 자상으로 한다’고 관(觀)하며 내지는 ‘식(識)은 요별(了別)을 자상으로 한다’고 관하는 것으로, 이와 같은 따위의 관지(觀知)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
무엇을 일컬어 공상작의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16행상(行相)과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51)
무엇을 일컬어 승해작의라고 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부정관(不淨觀)과 아울러 4무량(無量)ㆍ유색해탈(有色解脫)ㆍ승처(勝處)ㆍ변처(遍處), 이와 같은 따위의 관지와 상응하는 작의를 말한다.52)
즉 이와 같은 세 가지 종류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聖道,見ㆍ修ㆍ無學의 3道를 말함)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능히 이러한 세 가지 작의를 모두 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이 같은 설을 주장하게 되면 바로
“부정관과 구행(俱行)하는 염(念) 등의 각분(覺分)을 닦는다”고 한 [계경의] 말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53)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오로지 공상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는 바야흐로 세 종류의 작의를 모두 일으킬 수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 ‘부정관과 구행하는 염 등의 각분을 닦는다’고 말하였을 것인가?
부정관에 의해 마음을 조복하고 나서야 비로소 능히 공상작의를 인기하여 낳을 수 있고, 이것으로부터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니, 이 같이 전전(展轉)한다는 은밀한 뜻에 의거하여 설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어떠한 허물도 없다.”54)
그러나 어떤 유여사는 다시 말하기를
“오로지 공상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오로지 공상작의만을 능히 일으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말에는 과실이 있다.
까닭이 무엇인가?
미지정(未至定) 등의 세 가지 지(地)에 의해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증입(證入)하였을 경우에는 성도와 무간에 욕계의 공상작의를 낳을 수 있을 것이니, 욕계 중의 공상작의는 그러한 성도와 떨어져 있을지라도 지극히 먼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55)
그러나 만약 제2ㆍ제3ㆍ제4정려에 의해 정성이생에 증입하였다면, 성도와 무간에 어떠한 작의를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욕계의 공상작의를 일으키지 못할 것이니, [제2정려 등은 욕계와] 지극히 멀기 때문이다.
또한 그러한 [제2정려 이상의] 경지에서는 [어떠한 작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 경지에 [공상작의가] 존재한다면 일찍이 획득된 공상작의로서, 일찍이 획득된 순결택분(順決擇分)과 다른 것이 아니다.56)
나아가 모든 성자에게는 순결택분이 더 이상 다시 현전할 수 없으니, 이미 득과(得果)하였으면서 거듭하여 가행도를 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57)
따라서 그는 지금 마땅히 설명해 보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성도 후에 어떠한 공상작의가 현전하여 일어난다는 것인가?
어찌 [별도의 공상작의가 있어] 순결택분에 계속(繫屬)된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역시 그러한 종류의 공상작의를 닦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가행도의 공상작의에서] ‘제행은 모두 무상하다’고 관찰하고,
‘일체법은 모두 무아이며, 열반은 적정(寂靜)이다’고 관찰하였듯이,
성도와 무간에도 그러한 [종류의] 공상작의가 인기되어 현전하는 것이다.58)
이러한 해명도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가행도(즉 순결택분)에서 닦고 거기에 계속(繫屬)된 작의는 득과(得果) 후에 인기되어 현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바로 그러한 종류이기 때문이다.59)
따라서 앞에서 설한 ‘성도와 무간에 세 가지 작의가 모두 현전한다’는 것이 이치상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미지정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라면,60)
그 후 출관(出觀)하는 마음은 혹 어떤 경우는 바로 그러한 경지(미지정의 유루정)이며, 혹 어떤 경우는 바로 욕계(즉 散心)일 것이다.
무소유처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라면,
그 후 출관하는 마음은 혹은 바로 그러한 경지(무소유처의 유루정)이며, 혹은 바로 유정처(有頂處)일 것이다.
만약 그 밖의 다른 지에 의해 아라한과를 획득한 자라면,
그 후 출관하는 마음은 오로지 바로 그러한 자지(自地)일 뿐 그 밖의 다른 경지가 아니다.
다시 욕계 중에는 세 가지 작의가 있으니,
첫째가 문소성(聞所成)이며, 둘째가 사소성(思所成)이며, 셋째가 생소득(生所得)의 작의이다.
색계 중에도 역시 세 가지 작의가 있으니,
첫째가 문소성이며, 둘째가 수소성(修所成)이며, 셋째가 생소득의 작의이다.
즉 [색계에서는] 마음을 움직여 사유하고자 할 때 바로 선정에 들기 때문에 사소성의 작의가 없는 것이다.
무색계 중에는 오로지 두 가지 작의만이 있을 뿐이니, 첫째가 수소성이며, 둘째가 생소득의 작의이다.61)
그럴 때 욕계의 문ㆍ사소성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는 세 가지 작의가 모두 일어나 현전한다.
즉 모든 성도는 반드시 가행도에 계속(繫屬)되어 일어나기 때문으로, 생득선(生得善)의 작의와 무간에는 성도가 현전하지 않는다.
또한 색계의 문ㆍ수소성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그러한 두 종류의 작의만을 일으킬 뿐이다.
무색계의 경우, 오로지 수소성의 작의와 무간에 성도가 현전하며, 성도와 무간에도 역시 수소성의 작의만을 일으킬 뿐 생소득의 작의는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제2정려 이상에 태어나 초정려의 세 가지 식신(識身)을 일으킬 때, 온갖 유정으로서 아직 자지의 염오함을 떠나지 않은 자라면,
그에게는 자지의 선ㆍ염오ㆍ무기의 작의로부터 무간에 세 가지 식신이 현전하며,
세 가지 식신은 무간에 다시 자지의 세 종류의 작의를 낳는다.
온갖 유정으로서 이미 자지의 염오함을 떠난 자라면,
염오의 작의를 제외한 선과 무기의 작의로부터 무간에 세 가지 식신이 현전하며,
세 가지 식신도 역시 무간에 오로지 이러한 두 종류의 작의만을 일으킬 뿐이다.
⑥ 12심에 따라 획득되는 마음의 수(數)
그렇다면 앞에서 설한 열두 가지 마음 중에서 어떠한 마음이 현전할 때 획득될 수 있는 마음은 몇 가지인가?62)
게송으로 말하겠다.
3계의 염심(染心)은 차례대로
일곱 가지와 여섯 가지와 두 가지 마음을 획득하고
색계의 선심은 두 가지를, 유학의 마음은 세 가지를
두 가지는 획득되는 것이 없고, 그 밖의 것은 자류(自類)만을 획득한다.63)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의 염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의 마음 가운데 일곱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고,64)
색계의 염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의 마음 가운데 여섯 가지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으며,65)
무색계의 염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 마음 가운데 오로지 두 가지 마음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다.66)
[그러한 마음은] 일 찰나에 [획득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마땅히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한다.
이를테면 욕계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에는, 혹은 계퇴환(界退還), 혹은 속선본(續善本), 혹은 퇴승덕(退勝德)의 세 상태에서 헤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모두 일곱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하였다.67)
즉 계퇴환 시에는 자계의 네 가지를 획득하며, 아울러 색계의 염심 역시 획득할 수도 있다.
속선본의 상태에서는 자계의 선심을 획득하니, 의심하는 중에 선근을 상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퇴승덕의 상태에서는 3계의 염심과 유학의 마음을 모두 획득할 수도 있다.
만약 색계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라면, 혹은 계퇴환, 혹은 퇴승덕의 상태에서 헤아릴 수 있는 가능성에 따라 모두 여섯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하였다.
즉 계퇴환 시에는 자계의 세 종류를 획득하며, 아울러 욕계의 무부무기심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통과심(通果心)이 바로 그것이다.
퇴승덕의 상태에서는 색ㆍ무색계의 두 가지 염오심과 아울러 유학의 마음을 모두 획득할 수도 있다.
만약 무색계의 염오심을 일으킬 때라면, 단박에 두 마음을 획득하니, 이를테면 유학과 자계의 염오심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로지 퇴승덕의 상태만이 존재한다.
색계의 선심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 마음 가운데 두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자계의 선심과 무부무기심이 바로 그것으로,68) 승진(昇進)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69)
만약 유학의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열두 가지 마음 가운데 세 가지의 마음을 획득한다고 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유학의 마음과, 아울러 색계의 무부무기심과 무색계의 선심이 바로 그것이다.70)
즉 만약 처음으로 정성이생(正性離生)에 증입(證入)하는 경우라면, 그 때 유학의 마음을 획득하였다고 바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성도로써 욕계의 염오심을 떠나 최후로 해탈도가 일어날 때 색계의 무부무기심을 획득하며, 혹은 성도로써 색계의 염오심을 떠날 때 무색계의 선심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궁극[畢竟]의 떠남은 아니니, 색계의 염오심을 아직 완전히 떠나지 않았을 때에도 무색계의 선심은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71)
그리고 [본송에서 말한] ‘두 가지’란 욕계와 색계의 무부무기심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 중에서는 아무 것도 획득되는 것이 없다.
‘그 밖의 마음’이란 이를테면 앞에서 설한 염오 등의 마음을 제외한 그 밖의 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무색계의 무부무기심과 욕ㆍ무색계의 선심과 무학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획득되는 마음의 차별을 설하지 않으니,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러한 마음이 바로 현전하는 상태에서는 오로지 자류의 마음만을 획득할 수 있음을.
즉 여기서 온갖 ‘획득한다’는 말은, 이러한 종류의 마음이 일찍이 성취된 일이 없으며, 지금 비로소 획득한다는 사실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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