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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5권
7.4. 성승연(聖僧緣)
대각(大覺:佛)께서 니원(泥洹:涅槃)하신 뒤로부터 그 법이 여러 성인에게 돌아가니, 개사(開士:菩薩)와 응진(應眞:阿羅漢)이 말법시대에 가르침을 드날릴 때 모두 여러 사찰에 교화를 펴서 인연을 따라 포섭하여 인도하였다.
보는 것이 다르면 한 방 안에 있어도 하늘처럼 먼 간격이 있고 호응함이 같으면 다른 경계라 하더라도 서로 얼굴을 마주 대한 것과 같다.
송(頌)나라 태시(泰始 :明帝年號)말년에 정승사(正勝寺)의 석법원(釋法願)과 정희사(正喜寺) 등이 처음으로 성승(聖僧)을 그림으로 그려서 벌려 앉혀[列坐]모형을 표시하였다.
당(唐)나라 초기에 이르러 자주 신령스런 상서가 내렸으니, 혹은 발꿈치를 드러내되 평상 사이에 반쯤 나타내 보이기도 하였고, 때로는 지팡이를 꽂아서 그 자취를 남기되 평지가 푹 패어 들어가게도 하였다.
그런 까닭에 양(梁)나라 임금이 그 말을 듣고 찬탄하고 기뻐하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러보며 말하였다.
“국가의 기쁨과 슬픔은 반드시 재(齋)를 올려 기원해야 한다.”
영명(永明 :齊武帝의 年號) 8년(490)에 양나라 임금께서 몸에 병이 들었는데, 화타(和陀:華陀)나 편작(扁鵲) 같은 의술이 있는 사람을 천거하였으나 인침(茵枕)은 오히려 침체되었다.
그러자 서원을 내어 성승(聖僧)에 귀명(歸命)하기로 결심하고 칙명을 내려 연장전(延昌殿) 안에서 칠 일 기도를 시작하였다.
모든 부처님과 여러 성현들에게 음식을 공양할 적에는 재실(齋室)이 준엄(峻嚴)하여 가벼운 티끌 하나도 날아다니지 않았다.
이레째가 되자 비로소 신령이 감동하여 호응하였으니, 하늘 향의 묘한 기운이 코를 통하고 마음에 사무쳐 향로를 가득 메우니, 다른 향냄새는 그 세력을 잃었다.
또 발지취와 신발의 자국이 온 방 안에 가득하였고 지팡어를 흔드는 맑은 메아라는 창 밖에까지 들렸다.
그 발자국을 보고 향기를 맡고서 숙연해져 혼백조차 놀라는 듯하였다.
그 때 서광현(徐光顯) 등 열 명 남짓한 사람이 모두 함께 이것을 보고 듣고는 양나라 임금에게 가서 아뢰었다.
마침내 재를 다 마치고 나자 양나라 임금의 병이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온 조정이 다 신비한 감응을 경험하고 나서 모두 부처님께 귀의하였다.
그 후에 서광현 등 도인(道人)과 속인 여러 사람들이 재를 열고 받들어 청하여 모두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으니, 성인의 통감(通感)은 이루 다 기재할 수 없다.
“옛날 수제가(樹提伽)장자가 전단(栴檀)발우를 만들어 주머니 속에 넣어 높은 상아(象牙) 말뚝 위에 걸어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사문이나 바라문이 사다리를 놓지 않고 이 발우를 가져갈 수 있다면 그에게 이것을 주리라.’
모든 내외도(內外道)들이 이를 알아차리고는 신통을 부리려고 했으나 모두 머리를 흔들면서 떠나갔다.
빈두로(賓頭盧)가 이 사실을 듣고 목련(目連)에게 물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대답하였다.
‘사실입니다.’
‘당신은 사자후(師子吼)가 제일이니 곧 가서 저것을 가져가십시오.’
그러나 목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려워하여 가져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빈두로가 곧 그 집으로 가서 선정에 들어 자리에 앉은 채로 팔을 뻗어 그 발우를 취하였다.”
『사분율(四分律)』에 의하면 이러하다.
“그 때 가로와 세로가 지극히 큰 네모진 돌에 앉아 몸을 공중에 날려 발우를 취해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들으시고 꾸짖어 말씀하셨다.
‘비구야, 너는 왜 외도의 발우를 취했느냐?
또 계율을 받지 않은 사람의 앞에서 어찌하여 신통력(神通力)을 부렸느냐?
지금부터 너를 내쫓을 것이니 죽을 때까지 이 염부제(閻浮提)에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리하여 빈두로는 부처님의 교칙(敎勅)대로 서방의 구야니(瞿耶尼)로 가서 사부대중을 교화하고 부처님 법을 널리 폈다.
염부제의 사부 제자들은 빈두로가 생각나고 보고 싶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가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으나 앉아서 신통력을 부렸기 때문에 열반에는 들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교칙을 내려 말세(末世)의 사부 대중들을 위하여 그들의 복밭이 되게 하셨고 그도 스스로 맹세하였다.
‘이 세 천하(天下)에서 어떤 사람이든 청하기만 하면 다 가리라.”
또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해의(海意)비구는 가마솥에서 나와 허공으로 올라가 왕을 위해 게송으로 말하였다.
당신의 몸은 사람들의 몸과 같으나
당신의 힘은 사람들의 힘보다 더 세다오.
나로 하여금 그것을 알게 해주오.
내 그대 위해 신통력을 부리겠소.
왕이 발심하고 사방의 스님들을 청하여 게송을 설하였다.
여러 아라한들이여,
마땅히 와서 나를 섭수(攝受)하소서.
내가 아라한을 청하옵나니
꼭 이곳으로 모두 오소서.”
그러므로 『청빈두로경(請賓頭盧經)』에 의하면 이렇게 말하였다.
“천축(天竺)의 우바새(優婆塞)와 국왕과 장자가 만약 일체의 모임을 열게 되면 항상 빈두로파라타서(賓頭盧頗羅惰誓)아라한을 청하곤 하였다.
빈두로라는 것은 그의 이름이고 파라타서는 그의 성(姓)이다. 그 사람은 수제(樹提) 장자를 위하여 신족통을 부렸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를 막아 열반에 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리고는 그에게 칙령(勅令)을 내려 말법시대 사부대중을 위하여 그들의 복밭[福田]이 되게 하셨다.
그를 청할 때에는 조용한 곳에서 향을 피우고 예배한 뒤에 천축(天竺)의 마리산(摩梨山)을 향하여 지극한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말해야 한다.
‘대덕 빈두로파라타서여, 부처님의 교칙을 받아 말법시대 사람들을 위하여 복밭이 되었으니 부디 제 청을 받아들여 여기에서 이 음식을 공양하시기 바랍니다.’
또 새로 집을 지을 때에도 또한 다음과 같이 청해야 한다.
‘부디 제 청을 받으시어 이 집 침상 위에서 주무십시오.’
또 여러 스님들을 청해다가 목욕할 때에도 역시 꼭 초청하는 말을 해야 한다.
‘저의 청을 받아들이시어 여기에서 목욕하십시오.’
또한 날이 마처 밝기 전에 향탕(香湯)과 잿물(灰水)ㆍ가루비누[澡豆]ㆍ칫솔[楊枝]ㆍ향유(香油) 등을 갖추어 가지고 찬 물과 더운 물을 잘 섞어서 인간 세상에서 목욕하는 법과 같이 하고는 문을 열고 그를 청하여 들어오게 한 뒤에 문을 닫는다.
그리고 나서 여러 스님들은 사람들이 목욕을 마칠 때처럼 시간이 지난 뒤에 들어가야 한다.
무릇 모임에서 음식을 먹고 목욕을 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모든 스님들을 청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해탈(解脫)을 구하되 의심하지 말고 흔미해지지 않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믿는 마음이 깨끗한 뒤에라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근세(近世)에 어떤 장자는 빈두로 대아라한이 부처님의 교칙을 받고 말법시대 사람들을 위하여 복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곧 법답게 큰 대회를 시설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빈두로를 청하였다.
그리고 방석 아래에 좋은 꽃을 두루 펴놓고서 그가 정말 왔었는지를 시험해 보려고 하였다.
대중들이 식사를 마친 후 방석을 들어 보았더니 꽃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 있었다.
그는 고민에 빠져 스스로를 꾸짖으며 그 잘못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정성을 다하여 경사(經師)에게 자세히 물은 뒤에 거듭 큰 모임을 열고 전과 같이 꽃을 펴놓았다. 그런데도 또 꽃은 모두 시들어 버렸다.
그는 또 집안 재산을 다 털어 다시 큰 모임을 열었지만 그래도 그 꽃은 여전히 시들고 말았다.
그는 고민에 빠져 자책(自責)하면서 다시 백여 명의 법사(法師)를 청하여 잘못한 일을 구해 청하고 죄과(罪過)를 참회하며 사죄하였다.
그 때 그는 상좌(上座)의 한 노인을 마주하고 사방에 알려 그 허물을 뉘우쳤다.
그러자 상좌 노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세 번이나 나를 청하기에 나는 모두 다 청을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그대는 스스로 종을 시켜 문 앞에서 나를 막았었다. 게다가 내 나이도 많고 의복마저 해어졌으므로 쫓겨남을 당한 뇌제(賴提) 사문이라고 생각하여 기꺼이 나를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네 청이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그러자 그대의 종이 지팡이로 내 머리를 때려 상처나게 했으니, 내 이마의 오른쪽 상처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스스로 한 짓인데 무엇을 그러 괴로워 하는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곧 사라졌다. 장자는 비로소 그가 빈두로임을 알았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모든 사람들이 복을 베풀 때에는 다시는 문을 막을 엄두 조차 내지 못했다.
만약 빈두로가 와서 그 자리에 앉았더라면 꽃은 곧 시들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새로 집을 짓고 평상을 만들고 빈두로를 청하려고 할 때에는 다 향나무 다린 물을 땅에 뿌리고 향유 등불을 켜고 새 평상과 새 담요 위에 솜을 털어 깔아 놓고 그 위에 흰 비단을 덮어야 한다.
그리고 초저녁에 법답게 초청하고서 방문을 다시 닫은 뒤에는 삼가 경솔하게 엿보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모두들 각각 지극한 마음으로 그가 틀림없이 올것이라고 믿으면 그 정성에 감동이 사무쳐서 오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가 오게 되면 담요 위에 누웠던 흔적이 나타나고 욕실(浴室)에도 탕수(湯水)를 쓴 지취가 나타날 것이다.
큰 모임의 청을 받았을 경우에는 혹은 상좌(上座)에 있거나 혹은 중좌(中座)에 있거나 혹은 하좌(下座)에 있거나 간에 어디에서나 승려의 형상으로 나타나리니, 사람들이 그 특이한 점을 찾아보아도 끝내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가 떠나간 뒤에 그가 앉았던 자리에 꽃이 시들지 않은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가 왔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自述] 요즈음 재를 올리는 집안을 보면 대부분 법을 따르지 않고 다만 인정(人情)만을 쫓아 시행하고 있고, 평범한 사람들은 부처님과 성승(聖僧)의 자리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고 있다.
이미 앞의 경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시주(施主)과 성승을 안치할 자리부터 미리 깨끗하게 청소한 뒤에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최고로 이름 있는 향을 피우고 비단으로 만든 번기와 일산을 달아 놓고 여러 가지 꽃을 섞어 뿌려야 한다.
손으로 향로(香鑪)를 잡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고 우러러 삼보와 성승을 받들어 초청하고 시방 법계의 모든 범부들과 성인들도 다 널리 초청해야한다.
“제자의 청을 받아들이시어 성의(聖儀)를 굽히시고 저의 집으로 오셔서 참석하소서.”
그리고는 온 집안의 노소들은 모두 정성을 다하여 이레 전부터 미리 이렇게 존중하는 마음을 내어야 한다.
만약 집이 가난하여 좋은 향과 꽃이 없고, 또 안치할 만한 자리조차 만들 장소가 없으면 그때그때 형편을 보아 처리해야 한다.
성승이 앉기 전에 먼저 제일 좋은 곳에 부처님의 자리를 안치하고 법대로 물을 뿌리고 청소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좋은 곳에는 성승의 자리를 안치하고 부드럽고 새롭고 희고 깨끗한 것을 깔고 그 위에는 솜을 펴야 한다.
만약 시주가 마음으로 존중하고 느낌이 있어서 공양을 마치고 그 자리를 불 때 사람이 앉았던 흔적이 있으면, 그것은 곧 보신(報身)이 왔던 것으로 알아야 하고 만약 아무런 현상이 나타나지 않으면 다만 화신(化身)이 온 것이다.
그러나 만약 완전하게 업신여기거나 오만하게 굴면[輕慢]보신도 화신도 다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채색 그램이나 찬란한 비단이나 금ㆍ은 등 온갖 장식과 꽃을 뿌리거나 두지 마라. 그가 비록 아라한이긴 하지만 범승(凡僧)과 함께 이백오십 개의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동시에 받았기 때문에 온갖 비단이나 금ㆍ은 따위의 물건을 받지 않을 것이다.
만약 이들이 모든 부처나 보살 등 대승의 사람으로서 출가한 모습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때문에 갖가지 공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성스런 스님들을 자리에 앉히고 음식을 드릴 때에도 그 자리를 여섯 자 이상 높은 곳에 안치해서는 안 되며, 여섯 자 이하의 법다운 승좌(僧座)라야 합당하다.
또 성스런 스님의 소형(素形)이 스스로 오더라도 어찌 소상(素像)을 밀어내어 물리치고서 그 자리에 앉겠는가.
또 절에 늘 거주하고 있는 스님의 그릇에 음식을 담아서도 안 되나니, 보신이 왔을 때 접촉할 수 없는 스님의 깨끗한 그릇에 담겨 있는 음식을 먹게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만일 발우와 속인들의 소반과 그릇으로 드리면 그것은 곧 화신과 보신에 다 통하는 것으로서 가장 법다운 것이다.
만약 어떤 거룩한 스님이 있을 경우 돈이 들어오면 거룩한 스님을 위해 쓰되 장차 발우나 수저ㆍ구리단지ㆍ수건을 사 두거나 또는 가장 좋은 소반이나 그릇을 사 가지고 그 등에 글자를 써두어 다른 사람이 감히 잡되게 쓰거나 아무 집에서나 일상적으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매일 아침과 접심 때마다 그 그릇에 음식을 담아 항상 부처님과 스님께 드리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남은 돈이 있으면 하나의 호상(胡床:걸상)과 하나의 식단(食單)을 사서 쓰고 식사를 마치고 나면 그릇을 가루비누로 깨끗이 씻어 호상 위에다 두고 유파(油帊:기름칠한 천)를 덮어두어야 한다.
날마다 따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삼보께 공양하는 마음이 늘 끊어지지 않으면 크게 공덕을 얻게 될 것이다.
만약 돈을 많이 얻었으면 서쪽 나라의 사법(寺法:사찰)과 속인들의 집처럼 비고 고요하여 아주 좋은 곳에 거룩한 스님을 위해 방과 마루를 만들고 사시(四時) 중 겨울과 여름을 따라 갖가지 물건으로 공양해야 한다.
만약 여름이면 날마다 방 안에 따로 좋고 깨끗한 자리를 깔고 몸에 걸칠 속옷 [儭身]과 단부(單敷)와 구리단지ㆍ구리병ㆍ가루비누ㆍ깨끗한 수건을 준비하고, 만약 오전이 되면 아울러 음식을 드려야 한다.
밤중에는 등불을 켜고 향을 피우며 마음을 따라 힘닿는 대로 법에 맞게 공양해야 한다.
만약 추운 겨울이 되면 두터운 옷과 담요ㆍ숯불ㆍ더운 물ㆍ등불 등을 안치하고 때에 따라 공양해야 한다.
아무리 여분의 돈이 있다고 해도 거룩한 스님의 돈과 재물은 다른 스님에게 갖다줘도 안 되고 나아가 항상 절에 머무는 스님이 써서도 안 되며 또한 불법(佛法)에 써도 안 되고, 그것으로 다른 거룩한 스님의 형상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거룩한 스님의 돈으로 채색을 써서 불상을 그리거나 사방 벽에 거룩한 스님인 가섭(迦葉)과 아난(阿難) 등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빈두로(賓頭盧) 나한 성인은 현재까지 열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이미 거룩한 스님의 부촉(付囑)과 진지(進止)를 얻을 수 없거늘 어찌 함부로 그것를 호용(互用)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사사로이 쓰는 사람이 있으면 꼭 갑절로 반환해야 하고 반환하지 않으면 죄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이곳에서는 허용되지만 다른 곳에 쓰면 안 되니 그렇게 하면 죄를 얻는다.”
[다른 사람 것을 자기 물건처럼 써서 자기와 다른 사람을 불문(不問)하고 문득 가져다가 다른 곳에 쓴다면 어찌 옳은 일이라고 하겠는가?]
이상에서 기록한 것은 모두 다 경전과 율전의 성의(聖意)의 기록에 의한 것이니, 이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삼보의 물건은 귀중한 것이어서 호용(互用)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털끝만큼의 차질로 인하여 천 리만큼 잃게 될까 두렵다.
진실한 말은 거짓이 없으니 자신을 성찰하여 그러한 말만 해야 한다.
그러므로 양나라 무제(武帝) 때에 한국(漢國)의 대덕(大德)과 영유(英儒)들이 다 함께 서역(西域) 삼장(三藏)을 청해다가 성승법용(聖僧法用)하여 다섯 권으로 번역해 냈던 것이니, 앞에 기록한 것과 같이 이 내용도 대략 그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