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소문경론 제8권
3.9. 12인연의 뜻(1)
[개관]
[문] 이 설명은 바로 미묘한 설명이다.
번뇌의 업으로 인하여 세간의 나고 죽음이 있다 하고 자재천과 작은 티끌 등이 아니기 때문이라 하는데,
무명 등의 12인연은 그 뜻이 어떤 것인가?
[답] 3세 중의 일을 사실대로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하며,
무명이 더욱 일어나서 후 세상의 원인을 취득하는 복의 업[福業]과 죄의 업[罪業]과 움직이지 않는 업[不動業] 등을 바로 지어감[行]이라 하며,
지어감의 원인이 있음에 의하여 분별하고 물듦의 뜻을 내는 것을 의식[識]이라 하며,
그 의식이 머무르게 됨을 이름과 물질[名色]이라 하며,
그 깨끗한 의식이 의지하고 머무르는 데를 바로 여섯 가지 감관[六入]이라 한다.
감관[根]과 의식과 경계의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의지(意地)에 맞닿는 법을 닿음[觸]이라 하며,
닿음에 의하여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두 가지 뒤바뀐 생각을 내서 받아들임을 느낌[受]이라 하며,
느낌 따위를 보고 집착하여 즐거움을 모으는 것을 욕망[愛]이라 하며,
욕망에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보유하기를 구하고 보유하기를 끊으며 나[我]의 의지하고 머무를 데를 취득하며 모든 번뇌를 즐기고 번뇌를 따르는 것을 잡음[取]이라 하며,
잡음을 점차로 일으켜 후생의 원인인 몸ㆍ입ㆍ뜻의 업을 취득하는 것을 존재[有]라 한다.
의지하여 머무르면서 지어가는 존재로 뒤 세상의 몸을 취득하는 것을 낢(生)이라고 하며,
낢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몸이 더욱 자라서 갈수록 변하여짐을 늙음[老]이라 하며,
먼저 얻은 몸이 무너짐을 죽음[死]이라 하며,
여의지 않을 것을 멀리 여의고 사랑하지 않을 일을 사랑하며 공양을 구하는 것 따위가 의지로부터 나면서 자기 마음을 태우는 것을 근심[憂]이라 한다.
근심을 품은 마음에 의하여 사랑하는 공덕을 말하면서 속마음에는 걱정이 맺혀 가지가지로 슬프게 말함을 울음이라 하며,
빛깔에 의한 몸이 뜻과 함께 서로 응하면서도 사랑과 즐거움의 느낌이 아님을 괴로움이라 하며,
의식만이 의지와 서로 응함을 걱정[愁]이라 하며,
사랑하고 사랑하지 않는 두 가지 경계에서 보유하기를 구하기도 하고 보유하기를 구하지도 않으며 자량을 구하기 때문에 갖가지 고통을 느끼어 그 마음이 몹시 괴로워짐을 바로 극심함[極]이라 한다.
[무명과 지어감]
[문] 무명은 지어감에 반연한다 하는데, 무엇을 지어감이라 하는가?
[답] 의지하고 머무르며 받아들이고 짝하며 자세히 살피고 일으키며 따르고 같이 내는 것을 지어감이라 한다.
[문] 인연(因緣)이라는 이름을 해석하여야 하리라. 무엇을 인연이라 하는가?
[답] 결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을 인(因)이라 하고,
이 법에 의하여 저 법을 나타낼 수 있고 이 법으로 인하여 저 법을 낼 수 있는 것을 연(緣)이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다만 무명은 지어감에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무명은 지어감에 원인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온갖 인연을 포섭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무명은 지어감에 원인한다 하면 원인을 포섭하는 인연뿐이며, 인연을 포섭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무명은 행에 원인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네 가지 인연의 무명 등은 함께 인연할 수 있는 행이니, 그러므로 인연만의 이름에 의하여 말한 것이며, 네 가지 인연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 지어감도 무명의 인연이 될 수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무명은 지어감에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지어감은 무명에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답] 두 가지 이치는 일정함과 일정하지 않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무명이라는 원인은 반드시 행에 반연하지만 업행은 반드시 무명에 반연하지 않는다.
무엇으로써 아는가?
아라한은 비록 업은 있다손 치더라도 무명은 없나니, 그러므로 업은 반드시 무명에 반연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지어감은 무명에 반연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또, 무명의 인연에 의하여 업에 있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저 무명의 인연에 의하여 업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만 무명의 인연에만 의지하여 업이 있으므로 무명을 멀리 여의면 업이 있지 않아야 하는데 실은 무명을 멀리 여의고서도 업이 있으니,
그러므로 무명에 의하여 지어감에 반연한다고 하며 지어감에 의하여 무명에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지어감과 존재]
[문] 무슨 이치 때문에 이미 결과의 업을 받았으면 지어감이라는 이름으로써 말하며,
아직 결과의 업을 받지 못했으면 존재[有]라는 이름으로써 말하는가?
[답] 아직 결과의 업을 받지 못했으면 다만 함이 있음의 부분만이 있나니, 그러므로 존재라고 말한다.
마침내 존재하기 때문에 미래의 세상에 마침내 과보를 얻으며, 업의 바탕이 비록 없어졌다 하더라도 마침내는 존재하여 반드시 미래세상의 과보를 줄 수 있나니,
그러므로 존재라 하며 존재라는 이름으로써 말한다.
이미 결과의 업을 받았고 이미 함이 있음의 부분을 받았으므로 그 때문에 지어감이라 하며,
결과를 얻고 받을 것이므로 존재라 하며 존재라는 이름으로써 말한다.
또, 뜻이 있다.
무엇 때문에 존재라고 하는가?
이 법에 의하여 낼 수 있으므로 존재라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어떠한 업을 따라서 끝내는 미래의 세상의 과보를 내게 하므로 존재라는 이름으로써 말하며,
어떠한 업을 따라서 이는 끝내 미래의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면 마치 앙구리마라(鴦瞿離魔羅) 등의 업은 일찍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지어감이라는 이름으로써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전 중에서
“지어감은 업의 과보에 연유하므로 의식이라는 이름으로써 말하고 낢(生)라는 이름으로써는 말하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왜 그러한가?
저 지어감의 업은 마침내 낢의 인연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현재의 몸 중에서 과보의 업을 받는 그 업행의 인연은 의식을 낼 수 있으나, 저 낢은 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힘이 있음과 힘이 없음을 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무엇 때문에 지어감이라 하는가?
일을 이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세상에 살면서 한 일의 모든 업은 그것이 힘이 있어서 결과를 이룰 수 있음을 보나니, 그러므로 그 업은 지어감이라는 이름으로써 말한다.
현재세상에 살면서 한 일의 모든 업은 아직 그 힘을 못 보았고 아직 결과를 이루지 못했으며, 그 업의 과보는 미래에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 업은 지어감이라 할 수 없고 존재라는 이름으로써 말한다.
[문] 어떠한 이치 때문에 움직이지 않음[不動]이라 하는가?
[답] 다른 자리에서는 과보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음이라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욕심세계의 업 같은 것은 다른 자리 가운데서 과보를 줄 수 있어서 어떠한 선한 뿌리의 업 길에 따라서 사람 안에 태어나야 하지만, 곧 저 선한 업은 서원과 구하는 마음에 의하여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까지 난다.
마치 여래께서 공덕에 의하여 난다는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또, 어떠한 악행과 선하지 못한 업을 따라서 으레 지옥에 나야 하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과보를 받는 이는 곧 그 업에 의하여 인간 안에서 고통을 받지만, 저 여래의『의염유경(依鹽喩經)』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형상세계와 무형세계의 업은 그와 같을 수 없다.
이는 무슨 뜻인가?
초선 자리의 업으로 2선에 나지 않고 2선 자리의 업으로 초선에 나지 않나니, 이와 같이 그 밖의 자리에서도 모두가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형상세계와 무형세계의 업을 움직이지 않음이라 하느니라’고 하셨으며,
또 모든 번뇌로써 움직일 수 없는 것이므로 움직이지 않음이라 하는데, 마치 문을 꼭 닫아둔 방의 등불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