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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심시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홍성란
가람 이병기와 현대시조
나민애
1. 현대시조란 무엇인가
1.1. 현대시조의 의의
"나는 이미 비행기 안에서 '론니 플래닛'을 읽었기 때문에 그 도시를 잘 아는 외국인들이 그곳을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한, 좌충우돌의 도시'라고 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이 구절은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또는 서울의 확장으로서의 한국의 이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내가 찾아본 '론니 플래닛(Lonely Planet)'의 한국편에는 이런 첨언도 달려 있었다. 이 여행 안내서에 나오는 한국의 어떤 건물이 사라지거나 명칭이 바뀌었더라도 한국에서는 흔히 그럴 수 있으니 당황하지 말라고. 이 점에 대해서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그러나 '무엇도 영원한 것이 없는'이라는 수식어는 보다 정확하게 수정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는 '영원할 수도 있는' 가능성의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조는 그 몇 가지 중의 한 예가 될 수 있다. 시조란 이 땅에 살아왔던 민족이 오래 전부터 사용해왔던, 전래의 정형시 중의 하나이다. 전래의 것이지만 동시에 현재에도 존속하고 있어서 우리는 이 시조라는 장르 앞에 '고(古)'와 '현대(現代)'라는 말을 붙여 구분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구분을 놓고 보면 시조라는 것이 하나의 전통으로서 고풍스러운 유산임인 동시에 현대문학의 일부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고시조와 현대시조의 합(合)으로서의 시조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조선+한국'이라는 연결과 '과거+현재'라는 접점을 발견하게 된다. 시조 내에 있는 이 연결점이야말로 여전히 시조를 포기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이다. 현재를 이루어내는 것이 지난 역사의 축적이며 현재는 과거 없이 증명되지 못하기에 과거와 현재는 늘 같이 가는 양면인 셈이다. 그 양면성을 우리는 시조라는 하나의 흐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고시조와 현대시조는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고시조는 시조의 출발에서부터 조선시대의 창작물을 의미하고, 현대시조란 그 이후의 근대, 혹은 학자에 따라 현대라고 불리기도 하는 개화기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시조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렇게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구분하는 가장 주요한 변별점은 시간 개념이다. 그러나 단순히 시간적인 차이만으로 이 고시조와 현대시조를 가름하지만은 않는다. 현대시조는 고시조와 다르며 현재 주로 창작되는 현대시, 즉 자유시와도 다르다. 이 논문은 고시조와 비교되고 자유시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현대시조의 특성과 그 미묘한 위치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런 목적의식 하에서라면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시인을 언급해야하는 필연성이 대두된다. 사실 현대시조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가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현대시조사의 첫 장을 기념할만한 『가람시조집』(1939)의 발문은 정지용이 썼는데 지용은 이 글에 "가람 이전에 가람 없고 가람 이후에 가람 없다"고 적었다. 이 말은 비단 가람의 개인적 詩學(또는 시조론)의 뛰어남을 기리거나 『가람시조집』의 내용상 빼어남을 칭송하는 말에 국한되지 않는다. 가람 이전에 가람 없다는 이 말은 가람 이후로부터 새로운 시조의 출발, 시조의 혁신이 이루어져 비로소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현대시조가 시작되었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다.
1.2. 개화기 시조와 육당 최남선의 시조
가람의 시조나 시조론이 어느 날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가람의 현대시조가 있기 전에는 개화기 시조가 시대정신을 담으려는 과도기적인 시기가 있었으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1890-1957)의 '국풍'(國風)이라는 이름의 시조 창작이 있었다.
개화기 시조란 대략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엽 (각주1) 사이에 창작된 시조작품들을 말한다. 개화기 시조는 시조문학사를 털어 매우 집중적인 창작양상을 보여주었던 시기로서, 기존 조사에 의하면 1906년부터 1918년까지 무려 660여수의 시조가 발표되었다(각주2). 동 기간 동안의 880여수의 가사 창작을 생각한다면 기록으로 확인가능한 시조의 창작규모는 상당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개화기 시조는 대체로 《대한매일신보》(1904년 창간)에 실린 시조를 중심으로 언급되어 왔는데 여기에 실린 시조작품들은 다른 지면에 발표된 시조작품들보다 월등히 많으며 형태적인 면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각주3). 당시《대한매일신보》는 개화지 지식인들이 구국적 차원에서 국민에 대한 계몽적 역할을 첨예하게 드러낸 지면이었다. 이 지면의 속성상 발표된 시조의 내용상 성격도 이러한 애국 계몽 의지의 표출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 의지의 표출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 개화기 시조의 특성과 의의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개화기 시조는 형식적으로는 장시조보다 단시조가 월등히 많이 창작되었고 그러면서 자수 배열의 혼란이라든가 가사와 유사하게 4․4조를 반복한다든가 등, 기존 시조와는 다른 형식적 파격을 시도하였다. 이것이 의도적인 시도인지 아니면 내용에 우위를 두어 형식이 내용에 끌려간 것인지는 세밀한 고찰이 필요하겠지만 이 당시에 개화기의 역사상황을 시조가 적극적으로 수용․반영하여 열정적인 시적 태도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개화기 시조가 가진 내재적 에너지나 열기는 시조라는 장르에 새로운 자각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후기의 풍자적이며 해학적인 사설시조를 제외하고 대체적인 경향을 생각한다면 기존의 시조가 강호풍류 식의 은일자적한 태도나 감정의 정적인 승화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화기 시조에서의 시적 화자는 고상하지도 않고 귀족적이지도 않은 살아있는 육성을 내세우며 실제 현실에 대해 직접적이며 강렬한 태도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시조 장르는 개화기 시조의 창작과 독서를 통해 기존의 시조가 지니고 있던 한탄, 자탄, 이념적이거나 은거적인 세계가 깨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는 의의가 있다. 개화기 시조가 담당해야 했던 강렬한 의지의 세계는 근대라는 외부적 조건의 자극에 의한 것이었지만 강렬한 어조가 주되지 않았던 시조의 세계에 의지의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다. 시조의 입장에서는 이 시기가 내용에서나 형식에서나 혼란스러운 과도기였지만 이후 시조의 가용 범위가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개화기 시조 이후, 가람 시조 이전에 육당 최남선의 시조가 있다. 그의 창작 수준이 가람의 것만큼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은 아니지만 육당 최남선의 시조가 중요한 이유는 그의 창작과 시조론이 1920년대 시조부흥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육당은 『시조유취(時調類聚)』(1928)라는 책으로 고시조 1400여 편을 정리할 만큼 시조에 대한 관심이 컸다. 실제 창작은 주로 '국풍(國風)'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육당의 시조는 그가 제작한 잡지인 《소년》지(1908.11-1911.5)와 이후 《청춘》(1914. 10-1918.9)지를 통해 주로 발표되었는데 1907년부터 1911년 사이에 창작된 시조 작품에는 대개 '국풍'이라는 말을 제목으로 사용했다. '국풍 2수', '국풍 4수'식의 제목을 주제목으로 사용하거나 다른 제목의 부제목으로 '국풍'이라는 말을 붙였다. 여기서 국풍이란 시경에 나오는 말로서 주나라 때 각국에 흩어져있던 민요를 각 제후들이 모아서 천자에게 바칠 때 채집된 각국의 민요를 지칭한다. 굳이 이 용어를 차용했던 점에서 육당이 시조에 관심을 보이고 창작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육당의「삼국유사 해제」(육당 최남선 전집 8권)에서 '대저 향가란 것은 말하자면 국풍이라 할 것이니'라는 식으로 국풍이란 말을 우리나라의 노래라는 뜻으로 썼다. 이광수도 『백팔번뇌』(동광사, 1926) 발문에서 '시조는 멀리 삼국적, 아마 더 멀리서 발원한 국풍'이라 말하기도 하였다. 최남선은 국풍이라는 용어로 고시조와는 다른 자신의 창작시조를 구분하려고 했으며(그는 고시조를 국풍이 아닌 국시로 불렀다) 나아가 시조 창작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육당의 님은 구경 누구인가? 나는 그를 짐작한다. 그의 닐음은 '조선'인가 한다. 이 닐음이 육당의 입에서 떠날 때가 없건마는 듯는 사람은 대개 그 님의 님음으로 불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백팔번뇌에는 '님'이란 말이 만하서 특히 그 님이 문제가 될른지 몰으나 그 님을 사랑하는 基調를 가지기는 육당의 말은 작품이 백팔번뇌와 달으지 아니하니 근래 저작으로만 보더라도 단군론은 물론 그러하니 다시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심춘순례가 그러치 아니한가.” (벽초 홍명희, 『백팔번뇌』 발문 중에서)
“나는 다만 처음에서 끝까지 속 깊히 흐르는 조선정조에 도취하는 것뿐이다. 그 속에는 조선과 조선사람의 음향이요, 무엇이 어른거린다면 그것은 조선이나 조선사람의 그림자라도 될 것이다. (중략) 조선인 사람을 차자 보기 위하여 조선의 냄새를 맛기 위하여 이 책을 드는 것이다.” (김팔봉, 「육당의 시-백팔번뇌를 중심으로」, 《현대문학》 1960. 10.)
이후 육당은 시조를 모아 1926년 시조집『백팔번뇌』를 간행한다. 인용된 내용은 각각 이 시조집의 발문과 감상으로서 공통적으로 육당의 시조 안에 '조선'이 가장 큰 주제요 지향점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당대 육당의 문단 내에서의 위치를 고려한다면 그의 시조 창작이나 시조론이 시조 장르의 사장을 방지하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시조를 단순히 하나의 문학장르나 과거 유산이 아니라 '시조=조선'이라는 도식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이 가능할 수 있는 분위기에 기여한다.
1920년대 시조부흥운동은 최남선이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1926.5)'(각주4)를 발표하면서 본격화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時調는 朝鮮人의 손으로 人類의 韻律界에 제출된 一詩形이다. 조선의 풍토와 조선인의 性情이 音調를 빌어 그 過動의 一形相을 구현한 것이다. 音波의 우에 던진 朝鮮我의 그림자이다. 어떠게 자기 그대로를 가락 잇는 말로 그려낼가 하야 조선인이 오랜 오랫동안 여러 가지로 애를 쓰고서 이때까지 到達한 막다란 골이다. 朝鮮心의 放射性과 朝鮮語의 纖維組織이 가장 壓搾된 상태에서 표현된 功든 塔이다. 남으로 우리를 알려할 때에 그 가장 要緊한 一材料일 것도 무론이지마는 우리는 우리를 觀照하고 味驗하는 上으로도 時調는 아직까지 唯一最高의 準的일 것이다. 조선의 國民文學(民族文學)으로서의 시조를 좀더 밝은데로 끌어내고, 힘잇게 만들고, 막다란 골에 길을 터서 새로운 生命을 집어너흐로 함에 남과 가치 多少의 情熱을 가질 뿐이엇다." (최남선,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일부)
이 글에서 최남선은 시조가 조선국토, 조선인, 조선심, 조선어, 조선음율을 통해 표현된, 조선이란 체에서 걸러나온 정수임을 주장한다. 시조의 존재 의의에 대한 근거와 당위성을 본격적으로 주장한 이 시조론에 이어 이광수, 염상섭, 양주동, 김동환, 이병기, 김동인, 이은상, 안자산, 조운 등의 주장이 이어졌다. 그리고 시조의 부흥에 관한 논쟁은 1927년 신민사의 '시조는 부흥할 것인가'라는 설문과 여러 편의 논문(각주5), 그리고 동아일보의 32년의 문단전망(1932, 2.16)까지 이어진다.
개화기 시조, 육당 최남선의 시조, 시조부흥운동 등은 모두 현대시조의 기틀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가람에 의해 현대시조는 체계화되기 시작하고 오늘날에 이르렀다. 개화기 이후 한국 현대시조의 구분이 여러 사람에 의해 시조됐지만 그 중 하나로 장순하의 다음과 같은 구분을 들 수 있다.
물론 위의 시기 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현대시조의 발달은 중요한 몇몇 시인들의 존재로 인해 발전하는 변화가 잘 포착되기도 한다. 참고로 해방 이전 활동한 주요 시조시인의 시조집 간행사항은 다음과 같다.
2. 가람 이병기와 현대시조
2.1. 가람 이병기의 시조론
“더욱이 確乎한 語學的土臺와 古歌謠의 造詣가 嘉藍으로 하여금 時調製作에 힘과 빛을 아울러 얻게 한것이니 그의 時調는 敬康하고 眞實함이 이를 읽는이가 平生敎科로 삼을만한것이요 傳來時調에서 찾기어려운 自然과 리알리티에 徹底한점으로서는 차라리 近代的 詩精神으로써 時調再建의 熱烈한意圖에 敬服케 하는바가 있다. 이리하야 嘉藍이 傳統에서 출발하야 그와 訣別하고 다시 時流에 超越한 時調中興의 榮譽로운 位置에 선 것이다.” (정지용, 「『가람시조집』 발문」, 문장사, 1939.)
오늘날 가람 이병기(1891-1968)는 전통적인 시조를 계승하고 시조를 혁신한, 현대시조의 개척자라고 평가된다. 정지용의 『가람시조집』 발문과 같이 당대에도 그는 '어학적 토대'와 현대적 '리알리티'를 가지고 '근대적 시정신으로써 시조재건'을 했다고 평가받았다. 가람은 앞서 말한 시조부흥운동에서 탁월한 시조론을 발표해서 시조의 변혁을 위해 두드러진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시조 창작의 실제에 있어서도 그에 못지않은 결과물을 내놓았다. 가람 이병기에 와서 이론적으로나 창작으로나 비로소 현대시조의 체계가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 가람 이병기라는 존재는 한명의 개별 시인이라기보다는 시조의 역사적 운명을 담당한 수호자나 현대시조 그 자체와 동일시되는 정신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잃어버린 존재(선비)이자 살아있는 존재(현대시조의 활발한 개척자)이면서, 시조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고 과거와 현재를 묶는 계사와 같은 존재로서 한국현대문학사에 위치하고 있다.
가람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작업으로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그가 국학, 보다 구체적으로는 한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12년에 주시경의 조선어강습원을 수료했고 1921년에 조선어 연구회를 발기했는가 하면 1930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 제정 위원이 되기도 했다. 이병기의 시조 역시 그의 '한글'에 대한 관심과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이병기는 1926년 영도사에서 시조회를 발기하고 시조에 대한 강연('시조의 사적 발전과 문학적 지위' 1928년 12월 30일 천도교 강당 강연)을 시작으로 하여 시조의 창작 및 보급에 앞장섰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강연들은 시조 단독 주제가 아니라 한글과의 관련 하에서 언급되곤 했다. '한글과 시조'(1929년 1월 14-15일 안국동 예배당 강연), '한글과 고가요', '한글과 우리 문학'(1931년 7-8월 삼남 각 지방 순회 강연) 등의 강연 제목 역시 한글과 문학(시조)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가람이 시조의 혁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 현대시조가 현대시의 압도적인 존재감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방법 등은 가람이 민족어인 '한글'과 '시조'를 상호보완적 관계로 파악했음과 무관하지 않다.
이후 실제 시조론과 시조 창작의 경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가람의 한글에 대한 관심이 시조 창작과 나란히 진행되고 있으며 한글의 효과적인 활용을 통해 현대시조의 기반을 확보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한글과 시조의 관계만으로 가람이 가사, 민요 등의 다른 민족적 시가 양식이 아니라 시조의 양식을 채택한 이유가 설명되지는 않는다. 보통 재래의 문학 양식을 고수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특별한 이유 없는 것이 이유인 경우, 즉 다시 말해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니까 당연히 한국음식을 선택하는 것과 같은 생래적인 이유에서 시조를 선택하는 경우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적인 당위성을 위해 시조를 지속하자는 목적의식을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가람은 이 양자의 어느 한 쪽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육당과 춘원 등이 '시조야말로 우리 민족의 유일한 시형태이며 절대적인 문학양식'이라는 관념체계를 지니고 있었던 데 반해 가람에게 있어서의 시조는 필연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벨하렝은 시의 형식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라 하였으며 괴테는 시의 법칙은 자기가 지을 것이라 하였다. 이런 대시인의 말과 같이 시인의 사상, 감정은 무엇이든지 구속받는 것이 아니다. 자유다. 이 의미에서 이 근래의 자유시, 곧 신시운동이 생기지 아니하였든가. ……그러기에 우리 말과 같이 자기가 선택하든지 자작하든지 하여 보아 시조의 형식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시조를 지은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신시 혹은 민요 동요체의 어느 것이든지 취할 것이다” (가람, 「시조란 무엇인가」, 《동아일보》, 1926. 11. 27.)
이와 같은 언급을 보면 가람은 시조에 대해 강박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보인다. 물론 가람 역시 「시조는 혁신하자」(동아일보, 1932)와 같은 글에서 시조가 가장 소중한 우리의 전통장르라면서 두 가지 근거를 들었다. 하나는 고대 민요의 한 형식으로서 발달되어 적어도 근 천 년 동안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유구한 전통 형식이라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기정한 소시형 중에서도 가장 합리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삼백 여 가지의 다양한 형태를 가진 형식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조의 전통적 중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도 가람은 우리 것이니까 덮어놓고 소중하고 살려야 한다는 당위성을 앞장서서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가람의 자세는 당시 대부분의 한국 민족주의자가 비분강개 상태였으며 순교자적인 지사를 자임했음에 비해 차별성을 지니는 것이었다(각주6).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함은 누구나 다 같은 생각이지마는 우리 소용이 됨에는 낡은 것이라도 새 것만 못지 않다. 우리가 저의 역사를 알아야 함과 같이 문학에 있어서도 고전을 저버릴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제야 우리의 고전연구를 하자는 것은 늦고 뒤진 생각이다. 그래도 않을 수는 없다. 밟을 건 다 밟아야 한다. 성급함보다도 차근하고 찬찬하고 꾸준해야 한다. 우리가 몇 천년 동안 역사 문화 문학 등을 훌륭히 지녔다고 자랑만 할 때가 아니다. 자랑보다도 그것이 과연 어떻든가를 우리부터가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문헌이라고 그대로 믿을 것이 아니요, 전통이라고 그대로 따를 것이 아니요, 제가 스스로 살피고 따지고 깨닫고야 정말 그 가치와 생명이 드러날 것이다.” (이병기,『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320-321면)
가람은 우리 고전양식이니까 무조건 살려야 한다든가, 무조건 한국문학을 위해 가장 먼저 개발해야 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전통양식으로서의 시조도 개발할 필요가 있다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 글을 읽어보면 가람의 시조 선택의 자세는 시조의 확보 자체보다는 민족문학의 전통에 대한 가능성을 확보하자는 자유로운 태도임을 알 수 있다. 시조여야 하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조에 대한 그의 태도가 '차근하고 찬찬하고 꾸준'했던 것이다. 전통적 유산을 대할 때 이것을 현대에 그대로 살리자고 억지주장을 할 수도, 해서도 안 될 일이지만 그래도 없을 수 없는 것이며 '않을 수 없'다는 인식이야말로 어떻게 보면 전통을 대하는 가장 타당한 접근방식이 될 것이다. 가람에게는 민족문화 창달에 대한 조급증이 없었기 때문에 시조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고 따라서 현대시조의 확립이라는 문제가 효과적으로 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시조론의 전개는 일생에 걸쳐 꾸준하면서 파급력 있게 전개되었다. 가람은 시조이론의 태동기라고 할 수 있는 1926년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으며, 「율격과 시조」(《동아일보》, 1928), 「시조원류론」(《신생》, 1929), 「시조의 기원과 그 형태」(《동아일보》, 1934) 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현대시조의 이론적 체계를 잡아나갔다. 특히 1932년 발표했던 논문「시조는 혁신하자」는 당시시조의 현대적 방향으로 전환해 나갈 수 있는 지침을 마련해 주고 있다. 이 논문은 가람의 시조론을 검토할 때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논문으로서 가람은 이 글에서 현대시조의 창작을 위해 다음의 여섯 가지 항목을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1. 실감실정(實感實情)을 찾자. 2. 취재(取材)의 범위(範圍)를 확장(擴張)하자. 3. 용어(用語)의 수삼(數三) 4. 격조(格調)의 변화(變化) 5. 연작(連作)을 쓰자. 6. 쓰는 법, 읽는 법
여기서 1, 2, 3의 항목은 기존 시조가 가지고 있던 것 -한문 문화권의 정서, 한자의 사용, 관습적인 관념의 표현을 벗어나 '지금-여기-우리'의 것, 다시 말해 우리의 말인 한글과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일상을 시조에 담자는 기획이 담겨져 있다. 그는 《문장》지(1939년 창간)의 시조 추천사 등에서 '우리가 고인(古人)의 것을 볼 때, 그 조박(糟粕)보다도 정신(精神)을 배워야한다(각주7)'고 자주 언급했는데 위의 항목들은 이때 고인의 것에서 조박을 빼고 정신을 살리는 구체적인 방법들인 셈이다. 이를테면 꽃하면 술이요 술이면 취하고 신선이 되는 것, 또는 가을하면 기러기, 기러기 다음에는 전전반측 임 생각으로 이어지는 자동적인 이미지 제시를 벗어나 개성적이며 현대적인 언어로 현대적인 정서를 폭넓게 활용하자는 것이다.
가람이 제시한 항목 중에서 가장 문제적인 것은 무엇보다도 4번 항목, 격조의 문제에 있다. 시조부흥운동을 거치면서 시조는 더 이상 노래가 아닌 것, 부르는 것이 아닌 읽는 것인 문학의 장르로 그 정체성을 확실히 드러내게 되었다. 가람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음악에 종속된 시조 장르가 아닌 독립된 시조를 위한 혁신적인 견해로서 '격조론'을 제기했다. 그가 현대시조의 기반에 있어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고 알려져 있는 것 역시 그의 '격조론'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으로 생겨난 시조가 음악을 버리고 문학 장르로 고정될 때의 문제는 음악을 위한 형식을 어떻게 문학을 위한 형식으로 만드는가에 해당할 것이다. 가람은 이에 대해 '격조는 과연 음악과도 다르다. 음악은 소리 그것에만 의미 있을 뿐이지마는, 격조는 그 말과 소리가 합치한 그것에 있다. 그러므로 말을 떠나서는 격조도 없다. 그런데 시조의 격조는 그 작가 자신의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생기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 의미와 조화되는 그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딴 것이 되어버린다. 공교스럽다 하여도 죽은 기교일 뿐이다.'(『가람문선』, 326-327면)라고 말한 바 있다. 이 글에서 격조를 구성하는 운율과 곡조를 구성하는 가락은 엄연히 구분되고 나아가 시조의 격조가 '말과 소리의 합치'를 통해 탄생됨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가람의 이 말을 읽으면서 음악만큼의 효과를 가진 확실한 격조가 있음과 그 격조의 발생이 아닌 격조의 결과물이 이것이다 확언할 수는 없다. 또한 가람이 제시한 음악적 리듬과 시적 리듬의 구분이 그다지 정교하다고도 볼 수 없다(각주8). 하지만 가람의 논의는 시조가 음악을 떠난 이상 감당할 수밖에 없는 음악의 빈자리에 비로소 언어와 시조의 자수 율격이 조화를 이루어냈을 때의 묘미를 격조로서 자리매김했다는 의의가 있다. 이른바 언어의 의미와 형식과 운율이 삼위일체가 되어 전체 작품을 이룰 때 드러나는 미학은 현대 시조작가들이 시조를 선택하는 중요한 이유이며 시조 창작의 핵심이기도 하다.
2.2. 가람 이병기의 시조 창작 실제
이 시조미학을 이병기의 시조 창작 실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병기는 바로 직전의 최남선 등도 벗어나지 못했던 언어 용법의 구태를 벗어 고시조의 분위기를 현대시조로 혁신하는 작품들을 보여주었다. 고시조를 읽을 때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은 3장 첫 구의 관용적 단어(이를테면 '우리도, 아희야, 아마도, 두어라, 어즈버, 어찌타, 아무리, 어디서, 누구서' 등)의 사용, ‘님, 일, 줄, 제, 술, 말, 후, 사람, 몸, 물, 꽃, 꿈’ 등의 고유어와 ‘백발, 이별, 석양, 백구, 평생, 청산, 백년, 강호’ 등의 한자어가 자주 쓰인다는 점(각주9), '-노라' 계열의 종결어(구체적으로는 어라, 이라, 는고, 는가, 느니, 로다, 더라, 으랴, 오리다, 하료 등)가 사용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가람의 경우 종결어는 완전하게 혁신했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전형적인 단어 사용의 부분에서는 많은 진전을 이루어낸 것으로 보인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앞에 나섰더니 서산 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과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한 어느 게오 잠자코 호올로 서서 별을 헤어보노라. (이병기,「별」 전문)
이 작품을 읽으면 시조의 정형성이 특별히 시어의 감옥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별」이라는 시에서 시조가 이렇게 쓰일 수도 있겠구나 싶은 부분은 1연 종장 첫 구 '산뜻한' 부분, 2연 1장이 '-하니' 형태로 다음 장에 연결되지 않고 '반짝인다'라는 현대적인 종결로 끝맺는 부분이다. 시조를 창작할 때 종장 첫 부분과 각 장의 결구 부분에 오면 관습적으로 사용되었던 단어들이 떠오르게 마련이며 기존 시조의 독서 경험은 새로운 단어를 선택하는데 장애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병기의 경우 시조의 틀을 흐트러트리지 않으면서 고시조에 압도되지 않는 새로운 시조 양상을 선보이고 있다. 언어의 사용 뿐 아니라 서정적인 면에서도 하늘의 별을 유교 윤리, 도덕 관념, 연정 등과 연결하지 않고 하나의 실감있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에 주력하고 있는 점에서 새롭다고 할 수 있다.
가람은 그의 창작에 있어 자수율을 지키는 시문구성을 실천하면서도 형식적 측면이 억지스러움이 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데 각별한 신경을 썼다. 글자의 자수구속을 독자가 느끼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리듬과 작품내용과를 조화시킴으로 해서 당시 시조문단에서 그 위상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시조문장을 되도록 쉬운 우리말로 쓰고 흔히 쓰이는 일상어를 시어화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가람은 시조가 과거와 시조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일반대중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시조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노렸다고 볼 수 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 마디 달렸다
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 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어 사느니라 (이병기, 「난초(蘭草)」 4 전문)
이병기 시인은 생애를 통해 난초 수집과 재배에 열정을 쏟았고 그 수준이 상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난초에 관해 총 네 편의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이 모두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 중 네 번째에 속하는 이 작품은 특히 1연에 있어서 한국어의 묘미를 잘 살린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로 끊어 읽을 수 있는 초장과 '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의 중장은 단어를 반복하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3․4․3․4의 반복을 만들어내서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 '마디마디'라는 단어를 통해 언어의 발음상 묘미와 의미 전달이라는 두 가지 효과를 내고 있다. 그의 시학은 문인 교양을 바탕으로 한 선비 정신의 발휘로 정리되기도 하지만 창작 면에서 이런 섬세한 시도야말로 이병기 시인의 특징이요 장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람은 종래 여타의 문학 장르 중에서 시조야말로 "가장 조선말을 조선말답게 썼다"(각주10)고 생각하고 있었고 시조와 조선말을 동시에 살리는 전략은 늘 강조해 오던 것이었다. 비슷한 예로 《문장》지를 통해 시조를 선(選)할 때도 가장 강조하던 바는 한글의 자연스러운 사용이었고 김상옥의 「봉선화」에 대해 "항용 말을 휘몰아 잘 쓰기도 어려운바, 한층 더 나아가 새로운 말법-우리 어감(語感), 어(語)예(例)를 새롭게 살리는 말법을 쓰는것이 더욱 용하다"(각주11)고 추천 이유를 밝힌 바도 있다.
입동(立冬)이 멀잖은데 아직도 날씨는 덥다 어제 두어 잔 찬 술을 마셨더니 이 밤이 들기도 전에 배가 자주 끓는다
잠은 든숭만숭 꿈으로 밤을 보냈다 그리고 피곤한 몸이 일어나기도 싫다가 첫새벽 참새소리에 오도(悟道)한 듯하고나
한 포기 꽃도 없는 사막과 같은 이 생활 부귀나 영화는 아예 바랄 것 없거니와 한 나이 더해갈수록 더 외로운 이 마음 (이병기, 「외로운 이 마음」 전문)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무심코 읽으면 자유시와 별 차이 없이 읽히면서도 시조로서의 정형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시조의 좋은 예로 들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볼 부분으로, 1연 초장의 '입동(立冬)이 멀잖은데 아직도 날씨는 덥다'는 부분이 지극히 자유시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멀잖은데'와 같이 시조의 자수를 지키고 있다는 것, '그리고 피곤한 몸이 일어나기도 싫다가'(2연 중장)와 같이 '그리고'라는 연결어를 가지고 운율의 일부를 채우는 매우 현대적인 언어 사용감 부분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만한 이러한 현대적인 시도들이 없었다면 당대 다른 문인들에게 시조는 별다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1920년대의 시조부흥론의 열기가 잊혀질만한 1930년대 후반대에 이르러서도 아래와 같이 시조에 대한 관심이 그치지 않았다. 《문장》지의 신춘좌담회(각주12)의 여러 문학의 문제 중에서 '시조의 현대정신'이 하나의 주제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시조의 현대화에 대한 서로 다른 의견의 개진은 근대문학의 장르와 경쟁하여 시조가 패배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태준 : 시조는 書齋人의 여기에 지나지 못했는데 최근에 와선 문단적 위치를 분명히 차지하려는 기세가 보입니다. 시조가 현대문학에 합류할 수 있겠습니까. 이원조 : 이전에 권구현이라는 이가 새로운 시험을 하다 실패한 일이 있었지요. 이태준 : 내지의 和歌나 俳句의 위치와 어떨른지요. 이원조 : 완전히 딴 세계지요. 이병기 : 시조라는 것이 원래 특이한 결속이 있는 것이라 이왕에 시조를 질려구 한 사람들두 많으나 모다 모방에 불과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중도에서 고만두었지요. 일종의 이상한 결속이 있는가해서 까다로워 하는모양입니다. 임화 : 시조가 和歌만큼 현대정신을 담어서 성공할수 있을까. 정지용 : 할 수 있겠지요. 양주동 : 요컨대 사람에 달렸겠지. 임화 : 새말로 시조를 써서 실패한것은 형식만 시조에서 빌어왔기 때문아녜요. 일종의 결속을 통해서 현대시보다 아름답게 성공할수있나가 문제일것입니다. (<시조의 현대정신>, 《문장》, 《문장》2권 1호 (1940. 1.))
인용문에서 현대시조의 성공여부가 문제시 된다는 것, 하이쿠 등과 비견되는 민족문학으로 인식된다는 점은 이미 어느 정도 현대시조의 존재와 성립을 인정하고 있다고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는 가람의 활동이 큰 역할을 한 것이 사실이다. 가람의 시조론과 그에 부합하는 창작의 실천이 있은 후로 현대시조의 변화는 확실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조운의 시조나 김상옥, 이호우, 이영도 등의 시조는 정형적이고 재래의 시가 양식이 현대화하는 적극적인 양상을 보여주었다. 나아가 시대정신을 넘어 각 시조시인의 개성적 시학이 추구될 만큼 다양한 변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컴컴한 하늘에서 쏙쏙 빠지는 사비약눈
종일 드러누어 소설이나 읽으련다.
오늘은 메주 삶은 덕으로 방이 뜻뜻 하거니. (조운, 「×月 ×日」 전문)
1940년대에 창작된 조운의 이 작품은 가람 이후의 현대시조가 얼마만큼 시조를 진화시키고 자유시와 경쟁하고 있는지 알게 해준다. 이 작품은 가벼운 소품이지만 1960년대의 현대시라고 해도 무방할만큼 일상의 공감대를 압축적이면서 감각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종일', '메주 삶은 덕으로' 부분에서 자수율이 흐트러지고 있지만 매우 자연스럽게 시조의 정형성을 활용하고 있다. 이 시기부터 현대시조의 3장 배열은 시인에 따라 선택적으로 이루어진다. 가시적으로 3행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자수율과 음보를 유지하는 한에서 시행의 구성은 비교적 자유롭게 배치되었다.
다음 장에서 현대시조의 현장을 확인하겠지만 가람 이후 많은 현대시조 시인이 탄생하여 풍성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에 참고로 가람의 후예들을 소개한다.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태학사, 2006)을 기준하여 195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시조의 명단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0년대 - 박재삼, 이태극, 장순하, 고원, 정소파, 박경용, 최승범, 송선영 1960년대 - 이우종, 정완영, 김제현, 이근배, 이상범, 서벌, 박재두, 정하경, 윤금초, 김종윤, 김교한, 김호길, 조오현, 진복희, 김춘랑, 류제하 1970년대 - 박시교, 한분순, 선정주, 김상묵, 유자효, 김남환, 김원각, 이한성, 유재영, 서우승, 이우걸, 임종찬, 김영재, 박영교, 조영일, 김정희, 민병도, 김종, 백이운, 조주환, 정해송, 조동화, 김영수, 이승은 1980년대- 강영환, 박기섭, 김일연, 지성찬, 이정환, 전원범, 오승철, 문무학, 노중석, 이지엽, 이일향, 박옥위, 박연신, 정수자, 정공량, 이요섭, 이복근, 정일근, 오종문, 김연동, 전병희, 이재창, 박현덕, 홍성란, 고정국, 양점숙 1990년대- 박권숙, 권갑하, 하순희, 이종문, 전민, 정휘립, 이복현, 이수엽, 홍성운, 강현덕, 이달균, 이해완, 서연정, 김동찬
3. 현대시조 문단의 현황과 창작의 실제
이병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時調라면 料理집에서나 妓生房에서 長鼓나 두드리며 「南薰殿 달 밝은 밤에……」하고 늘어지게 부르던 것으로나 알고'(각주13)있다고 한탄했다. 조운은 '개화(開化)세상이 되면서부터는 또한 개화적(開化的)으로(?) 천대(賤待)를 바덧다. (…) 자유시(自由詩)를 주장(主張)하는 동시에 자유로운 표현을 구속(拘束)하는 캐캐묵은 고정적(固定的)시형(詩形)은 도라볼 필요(必要)가 업다거니 하야 본체만체는 고만두고 한시(漢詩)와 아울러 무용론(無用論)까지 주장하는 바람에 숨을 자리 조차도 엊지 못하든 시조(時調)(각주14)'라고 시조무용론자들을 강력 비판했다. 이병기와 조운의 이러한 비판적 어조가 있었기에 현대시조는 혁신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현대시조가 이 시대의 중심적 문학장르로 기능하고 있다고 쉽게 단정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현대시조의 실제 문단 상황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문단의 조직과 문예지 등의 현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시조문단의 조직으로는 <한국시조시인협회>와 <오늘의 시조시인회> 등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1964년 결성된 <한국시조작가협회>의 계승으로서 인원이 1000명(2007년 해당조직 공식집계 1200여명)을 넘어가는 시조문단의 가장 전통적이며 규모있는 단체이다. 후자는 <오늘의 시조시인협회>로 결성되었다가 현재 <오늘의 시조시인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이 시조시인회는 인원이 많지 않지만 젊은 신진 작가들을 중심으로 시조시단의 활발한 창작을 주도하고 있다. 이 외에도 <한국문인협회>의 '시조분과' 등이 있다. 시조단체의 조직 역사라든가 소속 시조시인의 숫자는 시 문단 조직과 비교해보았을 때 그다지 큰 열세에 놓여 있지는 않다. 비교하자면, 시 문단의 핵심적인 조직인 <한국시인협회>는 1957년 결성되었고 2009년 현재 협회 회원 시인이 1300여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그리고 <한국작가회의>는 1974년 결성된 이후 2009년 현재 회원 시인 920명을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현대시와 현대시조 모두 각 지방의 소규모 창작 및 감상 모임이 다수 이루어지고 있어 시인 양성과 작품 향상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조직적 규모나 기반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시조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과는 달리 현대시조가 꾸준한 자기발전을 지속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 가능하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현대 시조의 지속적 창작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안정되고 고정적인 발표지면의 확보가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시조가 발표되는 잡지의 현황을 보면 크게 세 종류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현대시를 주로 싣지만 현대시조를 함께 싣고 있는 문예지이다. 《시와시학》, 《유심》, 《불교문예》, 《시안》, 《시선》, 《내일을 여는 작가》, 《문학정신》, 《문학의 문학》, 《열린시학》, 《서정과 현실》, 《시와시》 등이 여기에 속한다. 다음으로 《문학사상》이나 《현대시학》과 같이 평소에는 현대시를 싣지만 비정기적으로 현대시조를 특집으로 다루는 문예지가 있다. 그리고 시조만을 싣는 시조 전문잡지에는 《시조문학》, 《현대시조》, 《시조시학》, 《시조세계》, 《시조 21》, 《화중련》, 《나래시조》, 《한국시조》, 《오늘의 시조》 등이 있다.
또한 문단에는 시조문학상이 있어 시조 창작을 독려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시조문학상의 현황을 살펴보면 중앙일보 중앙시조 대상(및 신인상, 신인문학상), 가람 시조문학상, 노산문학상, 이호우 문학상, 이영도 문학상, 고산문학대상, 한국시조작품상 등이 있으며 시조와 시 두 부문을 분리해서 각각 시상하는 상으로는 유심문학상 시조부문, 현대불교문학상 시조 부분이 있다. 지금에 와서 '시'하면 현대시, 즉 자유시를 떠올리게 되지만 이렇게 살펴보면 시조 문단의 규모나 활동 역시 상당한 수준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시조시단의 활성화 이면에는 개개인의 시조시인이 안고 있는 ‘굳이 왜 시조냐’는 질문이 담겨있다. 조선시대라면 음악이 그 이유가 될 것이며 또한 시조 창작자가 시조를 주고받는 그 자체에 상당한 즐거움이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남다른 어법으로 일정한 형식에 담아 의사를 소통하는 데는 소통 그 자체의 기쁨도 있을 것은 물론이고 특이한 형식을 향유한다는 쾌감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현대시조 창작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자유분방하며 가능성의 최대치를 보장해주는 현대시(자유시)가 있으며 또한 이것이 더 보편적이고 중심적이라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굳이 현대시조의 정형성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조시인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흔히 돌아오는 대답은 ‘시조가 나에게 맞는다’는 애매한 대답이다. 그러나 어떤 점이 맞는지를 살펴본다면 질문 속에 이미 답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시조시인이 자유시가 아닌 시조를 선택하는 데에는 보다 엄격한 형식 안에서 자기 갱신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을 이유로 삼는다. 무한한 확장과 자유가 허락되는 자유시 안에서도 예술의 새로운 갱신이 가능하지만 형식이 정해진 시조 안에서는 오히려 정제된 형식미를 추구할 수 있는 장점이 있으며 이 정제된 형식을 통해 시조미학의 추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정해진 형식 안에서 언어를 고르고 고민하는 것 자체를 즐기고 그 안에서 정제미, 절제미, 균제미를 추구하기가 더 용이하다는 말이다. 현대시조의 창작 실제를 살펴보면 좋은 현대시조는 형식의 내면화를 통해 저절로 형식 안으로 언어가 갈무리 되고 율격과 언어가 동등하게 나아간다. 물론 단어가 7,8음절이면 사용하기가 곤란하고 길고 새로운 신조어들을 다루는데 한계가 있다. 이러한 언어 운용의 폭이 좁고 답답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시 작법의 묘미라고 느끼는 사람의 경우 시조를 선택한다. 이것은 현대시조의 초입에서 민족주의적 당위성을 제기하여 시조의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시작 태도라고 할 수 있다. 현대시조는 그만큼 ‘현대적’으로 발전해왔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시조에서 자수율의 파격을 어느 정도 용인하고 있는 추세이다. 3음절(혹은 1음절과 2음절의 합), 4음절(혹은 1음절과 3음절의 합, 2음절과 2음절의 합)이 가장 자주 쓰이기는 하지만 3음절이나 4음절이 와야 할 자리에 2음절이나 5-6음절이 오는 경우도 상당부분 보인다. 이 아슬아슬한 파격을 비판하는 논자도 있지만 현대시조에서의 음보를 통한 율격은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시행의 배열에 있어서도 자유로운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그 예로서 아래 이종문, 「고백」 1연(《대구시조》, 1998. 2.)을 들 수 있다.
봄바다 내 몸 속에 죄가 꿈틀, 거린다네. 티 없는 눈길로는 피는 꽃도 차마 못 볼, 들키면 알몸이 되는 죄가 꿈 틀, 거린다네.
이 외에도 현대시조에서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자체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현대시조의 다양한 양상 중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한 특징으로 아래 시편을 소개한다.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지만
그 어느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조오현,「아득한 성자」전문)
이 작품은 2007년 정지용 문학상 수상 시집 『아득한 성자』(시학, 2007)의 표제작으로 조오현 시인의 작품은 오도송이나 게송과 같은 선시의 세계와 현대시조를 결합시켜 현대시조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과거 현대시조의 정착이 가능할까를 의심하던 시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시조는 이렇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활약을 펼치고 있다. 100년이 채 못 되는 시간 동안에 현대시조는 고전시조를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하는 한편 정형성을 단점이 아닌 장점으로 삼아 자유시와 경쟁하고 있다. 현대시조 문단 내에서는 이론적으로도 시조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의 확보와 현대시조의 위기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가람을 중심에 놓고 그 전후의 상황을 살펴본 결과 현대시조의 굳건한 존재야말로 한국 문학의 세계화나 민족문학의 자긍심 등의 구체적인 토대가 될 수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각주>
1. 개화기의 시기 구분에 대한 여러 설이 있으나 대표적으로 이홍직(『국사대사전』, 지문각, 1975.) : 병자수호조약 1876년부터 한일합방 1910년 이후에도 계속, 이광린(『한국개화사연구』, 일조각, 1970.) : 1870년대에서 1900년대 초까지, 전광용 외(『한국문학사』, 한국방송통신대, 1987.) : 갑오경장 1894년부터 기미운동 1919까지, 김용직(『한국현대시사』, 학연사, 1986.) : 1890년대 중반기 이후부터 약 1918년 이전까지, 권영민(『한국현대문학사』, 민음사, 2002) : 개화계몽시대라 명명하여 1910년 이전까지 등 2. 김영철, 『한국 개화기 시가의 장르 연구』, 학문사, 1987, 21면. 3. 이상 개화기 시조에 대한 논의는 김영철, 『한국 개화기 시가의 장르 연구』외에 정한모, 『한국현대시문학사』(일지사, 1974), 김재홍, 「개화기 시조의 일고찰」(《육사논문집》 13, 1976), 권영민, 「개화기 시조에 대한 검토」(《학술원 논문집》 15, 1976), 박철희, 「최남선 시조의 정체」, 『한국시가연구』(형설출판사, 1981) 등 참조. 4. 최남선,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 《조선문단》, 1926. 5. 5. 시조부흥 논쟁을 거치는 동안, 시조단에서는 염상섭의 「시조에 관하여」(1926), 「시조와 민요」(1927), 이광수의 「시조의 자연율」(1928), 「시조의 意的 구성」(1928), 이은상의 「시조문제」(1927), 「시조문제소론」(1928), 이병기의 「시조란 무엇인가」(1926), 「율격과 시조」(1928), 「시조원류론」(1929), 안자산의 「시조의 연원」(1930), 조윤제의 「시조의 字數考」(1931) 등 많은 논문들이 집중적으로 발표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송정란, 『한국 시조시학의 탐색』(문학아카데미, 2003)의 「시조부흥운동편」 참조. 6. 김윤식, 『한국근대문학사상』, 서문문고, 1974, 14면. 7. 이병기, 「시조선후」, 《문장》 1권 6호 (1939.7.) 이병기, 「고시조선(古時調選)」, 《문장》 2권 3호 (1940.3.) 8. 황종연, 「조선주의로부터의 일탈-이병기의 시조부흥론에 관한 고찰」,『국어국문학논문집』13, 1986, 9면. 9. 정병욱, 『한국고전시가론』, 신구문화사, 1999, 177면. 10. 이병기, 『가람문선』, 신구문화사, 1966, 257-258면. 11. 이병기, 「시조선후」,《문장》,9집 (1939.10.) 12. 「신춘좌담회」, 《문장》2권 1호 (1940. 1.) 13. 이병기, 『가람문선』, 315면. 14. 조운, 「병인년과 시조」, 《조선문단》, 192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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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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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심시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홍성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