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박인환 문학상 수상작]
영원향
김종연
당신이 할 수 없는 모든 걸 제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게 먼저 보여주세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걸.
산악 열차를 타고 멀리 떠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과일을 돌려 깎으면서 그것이 생각을 묶을 리본이 될 때까지.
가능하지 않은 걸 모두 실행하면서.
실패한 실험을 모두 기록해서 네게 보여주려고.
그분은 저보다 이걸 더 사랑했어요. 어서 가져가시고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모도 그들과 같다.
황금빛 보리를 헤치고 한 무리 사람들이 구시대에서 도망치고 있다.
지퍼가 닫히고 나면 바지는 다시 잠잠하다.
잠잠한 사이 바지는 생각한다.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눈앞의 이미지에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고 있다.
눈과 코와 입이 같고 눈과 코와 입이 다르다. 공통점이 있다면 차이점에서 사랑이 시작된다.
겨울 수축과 여름 팽창의 마음으로 심장이 뛰고 있다.
기다리던 것이 눈앞에 멈춰 서서 문을 열고 기다려줄 때
그 마음은 마지막으로 남은 복사본이고
이 마음은 삭제된 원본이야.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야.
우리는 오픈 소스고 이 세상에 동시에 업로드 되었지.
우리의 소프트웨어를 누구나 개량하고 재배포가 가능하도록
슬픔이 아름답고 예뻐서 자꾸 생각이 나게.
그것은 고통이 몸을 포기할 때까지의 수동성.
능동성은 지금 나를 벗어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
나는 네가 구성한 알고리즘이야.
우리는 연산되고 있는 과정에 있고 이제 결과가 도출될 차례.
내가 못 견디는 건 나의 사랑이지 너에 대한 사랑이 아니에요.
장노출로 찍은 네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다.
그동안 너의 어딘가는 슬퍼한다.
우리는 이 필름을 똑같이 나눠가지기로 했다.
블라인드를 내리고 나면 이 모든 이미지에도 밤이 찾아오고
스크린의 물성이 빛과 혼합되고 있다.
제23회 박인환문학상 심사평
제23회 박인환문학상에 김종연 시인의 「영원향」을 선정한다. 그동안 박인환문학상은 기 수상자들의 작품세계를 미루어보아도 알 수 있듯이, 주로 파격적인 실험을 감행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 주목하여 수상자를 결정해왔다. 계간 시현실은 20년 넘게 문학상을 유지해오면서 상을 운영하는 방식들을 차차 보완해왔는데, 이는 시 전문지가 어떤 문학상을 20년 넘게 꾸준히 유지한다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더불어, 박인환의 문학정신을 너무 협소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운영위 내부의 자성 때문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존 선고제에서 공모제로 선정 형식을 바꿔서 운영하다가 21회 이후부터는 다시 선고제를 택해 수상자를 결정하고 있으며, 등단 10년 차 전후만을 수상 대상 시인으로 한정해서 심사했던 규정도 현행 운영방침에서는 제외되었다.
주지하듯 박인환은 전후 모더니즘 시학을 견인하면서도 서정성과 ‘지금 여기’의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치열한 현실 인식을 놓치지 않고, 이를 토대로 전후 세대의 새로운 개성적 자리를 형성해나간 시인이다. 그러므로 전통과 전위, 모더니즘과 참여, 보수적 미학주의와 진보적 실천주의 등으로 양분화해서, 박인환의 문학 세계를 한정할 수도 없으며 특정 유파에 따라 그의 문학정신을 계승하는 상을 기리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할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연 시인의 이번 수상은 언뜻 보아 다시 파격과 실험의 시학으로 회귀한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박인환문학상의 저변을 넓힌다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하겠다.
수상작 김종연의 「영원향」은 근래 발표한 「영과 원」, 「원과 영」, 「원영영원」, 「영원방향감각」과 같은 연작시 중 한편으로, “없음”에서 촉발되는 ‘있음’의 가능태를 끝없이 추동하는 불멸 의식이 투사된 작품이다. 시적 주체에게 각인된 단속적인 세계를 지속적인 세계관으로 되돌려 단상을 일상으로 다시, 일상을 이상으로 향상시킨 가편이라 할 수 있겠다. 가령 시편 서두에서 “당신이 할 수 없는 모든 걸 제가 다 하겠습니다.”라는 진술이 가능해지려면 이 세계는 ‘완벽의 세계’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행이 전개되면 될수록 시적 주체가 대면하고 있는 현실은 “실패한 실험”들과 “잠잠한” 평온의 폭력들로 가득 찬 기형적 사태들 뿐이라는 점이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니 이런 세계에서는 “너를 사랑하는 일이 나를 사랑하는 일”이므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의미로 연속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연속적이고 파편화된다. 그러므로 “내가 못 견디는 건 나의 사랑이지 너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는 자기 부정적 진술 또한 이상하게 여겨질 이유가 없다.
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시적 주체가 인식하고 있는 이미지의 경유점이 사진으로 인화된 물상이라는 점이다. 「영원향」뿐만 아니라 연작 시편 모두에서, 필름이 말려 있는 상황이나 단편적으로 각각 끊어진 사태, 혹은 “장노출”로 사진을 찍어 피사체가 겹쳐진 상태로 물상들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니 기형이 되거나 일그러진 채로 재현된 현실 또한 단순히 미적 충동이나 파격으로, 구상된 세계로 독해되지는 않는다. 아울러 나와 타자에게 부채감을 되돌리는 다수의 진술도 반윤리적이거나 폭력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할 수 없는 세계가 영원하다고 믿고 미완성을 끝끝내 완성이라고 착각하겠다는 “원본” 없는 원본의 마음이 깃든 (불)가능의 정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때 독자는 무엇이 찍혀 있을지 모를, 미궁의 필름을 현상하려는 자의 마음 곁에서 “문득 세상의 전원을 모두 꺼버렸을 때”(「영원방향감각」)와 같은 ‘다른 감각’과 조우하게 된다.
심사위원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박인환의 문학 세계를 계승하고 있다는 시적 성취가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어둡고 습하고 불안하지만 ‘준열’한 지금 여기의 현실을 인식하는 다른 감각이 필요하다면, 그것을 처음 독해해내는 촉수는 단지 ‘새로움’으로 수사될 것이 아니라, 시인의 치열하고 지속적인 통점일 수 있다. 김종연 시인의 수상을 축하하며, 그가 개방할 다음 세계를 기대해본다.
심사위원장 박주택 (시인,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심사위원 강동우 (문학평론가, 관동가톨릭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심사위원 권경아 (문학평론가, 관동가톨릭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수상소감
한동안 아팠습니다. 덕분에 생활이 간명해졌습니다. 눈을 뜨면 머리맡에 지난 밤 읽던 시집이 남아 있습니다. 시를 몇 편 읽다가 일어나 쌈 채소를 씻어서 아침 식사를 차립니다. 다 먹은 다음에는 설거지를 합니다. 약을 먹습니다. 빨래를 돌려놓고, 음악을 듣다가 시를 한 편 씁니다. 그리고 빨래를 넙니다. 다시 침대에 누워 손에 잡히는 책을 또 읽다가 저도 모르게 낮잠을 자고 일어납니다. 아무리 회복해도 돌아오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는 걸 예감하고 생활하는 일상입니다. 얼마 전에는 영화 <더 웨일>을 봤습니다. 에세이를 가르치는 글쓰기 강사가 주인공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명심하세요. 에세이는 수정할수록 더 나아지고, 많이 바꿀수록 생각을 명확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보는 내내 “Que sais-je?” “Que sais-je?” 중얼거리다가 정작 영화는 반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엇을 알고 있을까요? 모르는 걸 알면 아는 것이 분명해질까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영화 <메모리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징후는 그 이상의 것을 말해준다. 징후는 환영적인 동시에 매우 유기체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삶을 어떻게 비추느냐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다. 우리의 삶은 실제로 매우 환영적이다. 모든 사람들, 모든 세계는 우리의 생각이나 이미지가 투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저는 가끔 잠에서 깨며 속이 꽉 찬 쇳덩이를 쇳덩이로 내리치는 소리를 듣습니다. 부술 수 없는 것을 부수려는 이미지를 봅니다. 인간이라는 공간의 파형을 봅니다. 이제 밖으로 나가 이 모든 징후를 감당해야겠습니다.
시인이 쓰는 연보
시집 『월드』, 민음사, 2022
장편소설 『마트에 가면 마트에 가면』, 자음과모음, 2023
학력사항
2021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재학
2021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졸업
2015년 서울예술대학교 미디어창작학부 학사 졸업
2014년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전문학사 졸업
수상내역
2023년 서울문화재단 예술창작활동지원 문학 공모 소설 부문 선정
2022년 자음과모음 제5회 경장편소설상 당선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시 부문 선정
2019년 서울문화재단 예술가 지원 사업 시 부문 선정
2016년 대산문화재단 대산창작기금 시 부문 선정
2014년 대산문화재단 대산대학문학상 시 부문 당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 문학분야 시 부문 선정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차세대예술인력육성사업 문학분야 시 부문 선정
2011년 월간 현대시 신인추천작품상 당선
경력사항
2022년~ 서울예술대학교 예술창작기초학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