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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학과 창설 100주년 기념 세미나 발표문 (2006.4.17)
불교학과의 현재와 미래
이평래(68졸, 충남대 명예교수)
1 불교학과, 全人敎育의 表象
대승불교의 주체는 보디쌋뜨와이다. 보디쌋뜨와에는 출가보디쌋뜨와와 재가보디쌋뜨와의 두 가지가 있다. 출가와 재가는 삶의 방식을 달리하지만, 上求菩提⋅下化衆生/自利⋅他利를 실현하는 길을 함께 걷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는 보디쌋뜨와로 구성되어 있는 세계적인 명문학과의 하나이다. 출가인 빅쿠와 빅구니 그리고 재가인 우빠싸까(upāsaka, 淸信士)와 우빠씨까(upāsikā, 淸信女)의 사부대중이 어우러져 함께 이론을 공부하고 실천을 몸소 쌓아가는 모범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새의 두 날개처럼 이론과 실천을 함께 갈고 닦아 깨달음의 문으로 들어가려는 불교학과의 설립이념은, 현대뿐 아니라 미래에 걸쳐서도 전인교육기관이라는 커다란 자부심을 향유한다고 볼 수 있다.
불교학이란 무엇인가. 사람을 사람이게 하는 학문이다. 도덕과 윤리는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덕목이다. 선행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불교는 이 보다 더 높은 차원을 제시한다. 깨달음이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사는 것이 제대로 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무한한 힘과 창조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자기를 정화하고 개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학은 그와 같은 이론을 연구하고 실험하는 학문이다.
샤끼야무니 붓다님은 깨달음의 공유를 설파하신다.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으며,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계급으로 분류하여 하층과 상층으로 분별하지 않으며, 피부 빛깔이 검은가, 흰가, 노란가를 묻는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사는가, 모르고 사는가를 묻는 것이다.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또 졸업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내가 누구인가를 알고 사는 길을 배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변함없이 그와 같은 길을 걷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연이 맞아 떨어져야 한다. 한두 가지 인연으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인연이 모여야 한다.
우리나라의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다”라는 말씀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중인계급이던 의학과나 약학과가 왜 그렇게 인기가 높은 것인가. 쉽게 말해서 돈을 잘 벌 수 있기 때문이다. 배고플까 봐 걱정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순전히 경제적인 문제이다. 사람은 절대빈곤의 문제가 해결된 다음이라야 한 단계 더 나아가 文化創造의 의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미친 사람에게 아무리 깨달음을 설득한들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자본주의가 고도화하면 할수록 경제적인 지배구조는 더욱 힘을 얻을 것이며, 인간은 인간을 보고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돈 앞에 무릎을 꿇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우리 불교학과도 이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라는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2 전인교육을 위한 조건의 요구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것이 무엇인가. 깨달음(니르와나)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니르와나보다 더 위대한 것이 어디 있는가. 불교학과는 니르와나를 실현하려는 젊은이들을 모아 인도하는 도량이다. 니르와나에 관하여 이론으로 배우고 실천으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성취하려는 이상을 가진 길동무들의 모임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가 높아야 할 학과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여기에는 많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나라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부국강병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부국강병을 꿈꾸지 않는 나라가 없다. 쿠웨이트는 부국이기는 해도 강병은 아니다. 그러한 결과 이라크로부터 삽시간에 점령을 당해버린 것이다. 세속에 사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귀영화이다. 쌍가에서 스님들이 기도하러오는 신자들에게 무엇을 빌어주는가. 복을 빈다. 부귀영화는 그 속에 내포되는 내용물이다.
부귀영화의 첫째 기반은 무엇인가. 경제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격언처럼, 성⋅속이 모두 돈으로 통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종교의 역할에는 많은 것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우선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빈민과 질병에 시달리는 허약한 사람을 구제하는 일이다. 배고프고 병들어 신음하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설법하는 것은 그림의 떡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문제를 가장 쉽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의대나 약대가 그렇게 인기가 높다고 본다.
불교학과는 깨달음이란 성스럽고 거룩한 이상을 내걸고 있지만, 그것을 성취하기까지의 과정을 무시할 수 없다. 불교학과를 졸업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마련하여 주어야 한다.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닦은 학문지식과 수행체험을 살려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창출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우도를 보더라도 저자로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慈⋅悲⋅喜⋅捨를 실천하듯(入廛垂手). 자신들의 갈고 닦은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 일터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이것은 조계종단과 학교재단이 공동책임을 져야 할 일이라고 본다.
3 불교학과도 신학과처럼..........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불교학과의 동문치고 모교의 발전을 희구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서원은 과거⋅미래⋅현재의 三世에 걸쳐 변함이 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불교적 신념으로 살고 불교적 신념으로 죽는다는 불교적 인생관이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불교학과에 들어올 후배들의 진로에 대하여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해탈이란 이상으로 모든 공론을 덮어버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탈의 길을 제대로 걷도록 하기 위해서는 진실로 함께 고뇌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학생들의 진로를 결정할 때, 특수목적고인가, 인문계인가, 실업계인가, 예⋅체능계인가로 분류하여 지도하고 있다. 인문계고등학생은 다시 문과인가, 이과인가로 분류하여 진학지도를 한다. 대학교에 들어오면 다시 인문계열인가, 어문계열인가, 사회계열인가, 이공계열인가, 사범계열인가 등 여러 가지로 세분하여 전공을 분류한다.
그렇듯이 불교대학의 성격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많은 종교대학이 설립되어 있다. 힌두교계통의 힌두대학, 기독교계통의 신학대학 그리고 이슬람계통의 이슬람대학이 그렇다. 이와 같은 종교대학을 마친 사람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생명을 걸만큼 종교적 신념이 확고하며, 자신들의 종교를 위하여 정말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제부터 그러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실제로 사례를 들어가면서 이 글의 본의를 개진하기로 한다. 기독교의 구교계통이나 신교계통에서의 신학과의 교육목표를 보면 그들의 종교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음을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구교계통에서는, “본 학과는 교회의 목표에 따라 사랑과 봉사를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가톨릭적 성직자 양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으며, 신학과 영성생활에 대해 중점적으로 교육을 받게 된다.......................”라고 선언하고 있으며, 또한 신교계통에서는, “신학교육의 장으로 문을 연 신학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들을 맑은 지성과 깊은 영성을 겸비한 목회자로 길러내고 있다..............................”라고 공언하고 있다. 그리고 원광대학교의 원불교학과에서도, “一圓大道를 널리 선양하고 濟生醫世의 역군인 원불교 교역자 양성을 목적하고 있으며.................”라고 천명하고 있다.
기독교의 구교․신교의 신학과와 원불교의 원불학과들은 종교계학과로서 敎役者/聖職者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학과의 설립목표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교역자/성직자를 양성하기 위한 종교계학과이기 때문에, 입학할 때부터 성직자의식을 가지고 학교생활을 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학교생활을 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기 개발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동국대학교도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에 문을 열 때는 종교계학과로 출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설립할 당시와는 달리 종교계대학으로서의 존재 이유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동국대학교의 불교학과는, “..................... 그리하여 지혜와 자비를 갖춘 불교적 인격을 함양하고 인생과 세계를 바라보는 능력과 지식을 기르며 종교, 교육, 정치, 문화 등 사회전반에 걸쳐 지도자로서의 기본 자질을 갖춘 인재양성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교육목표를 통하여 그와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불교학과․선학과․인도철학과의 어느 학과를 보아도 기독교계통의 신학과나 원불교의 원불교학과와 같이 敎役者/聖職者를 양성하려는 취지를 찾아 볼 수 없다. 일반대학의 보통학과, 예를 들면 철학과나 국문학과 등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이다. 설립할 당시와는 달리, 현재는 비종교계대학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불교대학이란 이름을 그대로 쓸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불교대학을 어떻게 재정립할 것인가를 재삼 검토할 때라고 생각한다. 불교대학이 조계종의 宗策大學이라면 종교계학과로서 敎役者/聖職者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공부하도록 종교계대학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본다.
4 불교학과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
(가) 求人難을 구가하는 학과로 육성해야한다
세계는 서로 협력하면서 살아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쟁이 경쟁을 낳는 무한경쟁 속에서 살고 있다. 경쟁에는 제동이 걸리지 않으므로 철길처럼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것이 경쟁의 원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경쟁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고도로 발전시킬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한 대화를 강조하지만 한편으로는 유형⋅무형의 경쟁을 하고 있다. 불교도 이와 같은 험난한 세파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인재를 길러내야 한다. 국내만이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하여 불교적 인생관으로 자랑스럽게 일할 수 있는 인재라야 한다. 세계는 넓고 중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으므로 그 수는 많을수록 좋다.
타종교에 비하여 우리의 불교대학이 길러내는 인재의 수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 서울캠퍼스와 경주캠퍼스, 더 나아가 불교계의 모든 종단까지 합하여도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매년 모집하는 모집정원을 보면 졸업생을 얼마나 배출하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입학을 하더라도 도중에 자퇴를 하거나 전과를 하는 학생을 감안하면 그 수는 훨씬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교단은 할 일을 산더미처럼 싸놓고도 그것을 나중세대에게로 넘기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다음 세대는 다음 세대대로 그 때 할 일이 있는데, 먼저 세대로부터의 짐을 물려받으면 결국은 또 일이 넘치고 쳐져서 악순환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불사가 人才佛事로 집약되어야 한다. 불교도들의 의식을 인재불사에 미칠 정도로 전환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종헌․종법․종규를 개정하여 모든 사찰에 교육분담금을 부과하여 교육기금을 조성해야 한다. 불교대학에 들어온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그로부터 삶의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가치관․인생관․불교관을 심어주는 풍토를 만들자는 것이다. 종단에서는 졸업과 동시에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놓아야 한다. 구인난에 가까울 정도로 일자리를 창출하면 할수록 불교는 무한 성장을 할 것이라고 본다.
(나)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
요즘 바람직한 대학경영방법의 하나로 맞춤식 학과라든지 또는 계약식/맞춤학과라는 것이 출현하였다. 이것은 시대에 적응하고 대처하려는 것을 뛰어넘어 시대를 부리려는 적극적인 방향으로의 변혁을 의미한다. 우리가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옷을 갈아입듯이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면, 그것이 시대를 선도하는 종교로의 발전으로 승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불교가 해야 할 과제들을 발굴하여 총체적인 자료를 만들고, 그것을 분석하여 그에 맞는 대학경영을 하는 것이 맞춤식교육이다.
세계의 모든 대학은 서열이 매겨져 있다. 우리 대학도 노력하면 그 가운데에서 앞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충분조건이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포기해버린 것을 우리는 지혜를 모아 가능한 것으로 만들 때, 불교정신의 위대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샤끼야무니 붓다님의 삶을 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깊게 뿌리를 내린 힌두세계 속에 불교가 뚫고 들어가 오늘날 세계종교가 되었음을 보라. 합리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자세로 문제를 풀어나가면 꼭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쓸모 있는 인재를 많이 길러내면서 장학금도 풍부한 대학을 명문대학이라고 한다. 그런 대학에서는 사회를 선도하는 인재를 많이 배출한다. 그러한 결과 그 학교출신들은 그 사회의 지도층인사가 되고, 선배가 후배를 이끌어 취직률이 높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명문대학에는 양질의 학생이 몰려들고 있다. 불교대학이 명문대학이 되고 또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가 명확하게 드러났다고 본다.
고등학교의 평준화를 아무리 외치지만 그것은 공부를 잘하던 못하던, 모두 고등학교라는 울타리 안에 있으므로 내 자녀처럼 그렇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정상적인 사고를 하면서 성실하게 사는 사람으로 길러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인격적 평준화를 의미하는 것이지, 지식의 평준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과학기술고등학교/특수목적고등학교/외국어고등학교와 같은 영재학교가 존재하는 것은 고교평준화라는 정책을 비웃는 것이며, 교육평준화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정책이라고 본다.
대학교에서 학생을 선발하는 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아무리 바꾸어도 일류대학․이류대학․삼류대학 등의 차별을 피할 길이 없다. 그래서 대학의 서열이 매겨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명문대학이 되려면 장학금의 혜택을 받는 학생의 비율이 높을 뿐 아니라 유망직종에의 취업률도 높아야 한다. 의대․약대에 우수한 인재가 모여드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불교대학은 종립대학교의 종책대학임에도 불구하고 재가학생은 졸업을 하는 것으로 끝이다. 종단의 차원에서 그들을 활용할 마스터플랜이 세워져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들에게 포교사․법사․불교요가․불교다도․예비승려 등의 자격을 주는 제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진지하게 토론하고 심각하게 고민하기를 권고한다. 그래서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성실한 노력을 하였다는 것을 실증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자랑만 혀가 닳도록 하는 구업을 짓는 형상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한 환경 속에 생명을 걸고 불교정신으로 살려는 학생이 불교대학으로 몰려오겠는가.
(다) 불교물을 들일 수 있는 교육환경
불교 집안에서 흔히 쓰는 말에, “강원을 4년 마치고 나면 중물이 든다.”고 하는 풍속어가 이 있다. 그런 것처럼 불교학과를 4년 마치고 나면 불교물이 들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무엇인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철저히 따지고 분석해서 바로 잡아야 한다. 그대로 놓아두면 병을 키우는 논리와 같다.
불교는 종교적 요소와 철학적 요소를 모두 지니고 있는 최고의 종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데 스님학생은 종교적 요소와 철학적 요소를 고루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있으나, 재가학생은 구조적으로 후자에는 강하나 전자는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스님학생은 행자생활을 체험하면서 상당부분의 불교의식을 배운 다음에 사미․사미니계를 수계한다. 그러나 재가학생은 물리적으로 그런 것을 습득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예배를 빼버리면 종교성을 상실한다. 예배는 종교적 정서를 풍부하게 해주는 요인일 뿐 아니라, 신앙심을 굳건하게 해주며, 그것을 통하여 그 종교의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강원을 4년 마치고 나면 중물이 든다.”는 말은 불교 집안의
붓다님을 존경하고 진리를 따르며 진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이 예배이다. 생명의 근원인 목숨을 바칠 정도로 예배를 해야 모든 감각기관을 다스릴 수 있는 종교적 선의지가 성장한다. 목숨은 한 몸의 요체이기 때문에 오로지 그것을 님으로 삼으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이 소중히 여기는 데에 이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예배란 이 둘도 없는 목숨을 받들어 가장 거룩하신 세존을 섬김으로써 신심의 극치를 드러내는 종교의식이라고 본다. 예배는 본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는 길이기도 하다. 중생의 六根은 한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지만 스스로의 근원을 배반하고 육진을 찾아 쫓아다닌다. 진실한 예배는 목숨을 받들어 육정을 다스려서 다시 그 본디 일심의 근원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종교는 사람으로 하여금 제정신을 차려 도리에 맞게 살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제정신을 잃어버리게 한다면 邪道․맹신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의 함의는 대단히 거룩하고 위대하며 성스러운 최고의 미덕이다. 그런 점과 관련하여 재가학생의 생활을 보면, 현재는 불교의 이론을 공부하는 것이 중심으로 되어있다. 그들은 종교체험, 구체적으로는 예배․習儀․수행과 같은 것을 온몸으로 체험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학점과도 연계시키고 단기출가 등을 시켜 예배를 생활의 기본으로 삼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불교이론도 필요하지만 수행을 하여 온몸으로 익히지 않으면 단순 학문으로 떨어져버릴 위험성을 안고 있다. 재가학생을 스님학생과 똑같이 모두 기숙사에 수용하여 불교의식을 가르치고 예배를 실천하는 생활을 하면서 불교학문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꾸려주면, 그야말로 붓다님의 아들․딸로서의 사명감과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며, 또 교단이 바라는 인재로 성장할 것이라고 본다.
재가학생들로 하여금 샤끼야무니 붓다님의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면학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양질의 학생들이 몰려들 것이며, 또한 세계를 佛敎化하기 위한 교육education․조직organization․전도missions라는 세 가지 요소를 구축할 수 있는 계기도 될 수 있을 것이다.
5 불교학과, 宗敎系로의 전환만이 살길이다
우리나라 사람의 마음속에서 살아 숨을 쉬고 있는 불교정서가 여러 가지로 표출되어 한국의 불교를 이끌어가고 있으며, 출산율이 급격히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출가의 미풍이 이어져 쌍가Saṃgha를 수호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의 불교를 들여다보면, 고려가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불교는 가시밭길을 걷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그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변화의 원리를 진리(sarva-saṃskārā anityāḥ, 諸行無常)로 삼고 있는 불교가, 아이러니하게도 변화하는 시대상을 보지 못하여 그렇게 된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와 같은 변화는 언제 어디서나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므로 한 순간이라도 놓치면 그렇게 될 가변성을 앉고 있다는 것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더구나 오늘날은 교통․통신․IT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세계가 아주 가까워져서 문화교류의 형태가 예전과는 달리 시공을 좁혀버린 짧은 시간․좁은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시대이다. 그 결과 여러 사상과 종교의 교류와 접촉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문화충돌로 인한 분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교가 유입되어 종교백화점이 되어버린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는 불교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진지하고 면밀하게 연구하여 그 대처능력을 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붓다님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그렇게 만든다는 것이지, 이곳을 놓아두고 다른 데로 가서 다시 새로운 세계를 만든다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현생의 문제를 풀려고 하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과거세와 미래세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고난에서 벗어나 안락을 얻어(duḥkha-vighāta sukha-lābha, 離苦得樂) 평등한samatā 삶을 누리는 것을 불교의 이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것을 실현하려고 스스로를 구제하고 남도 구제하는 자․비․희․사를 실천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남에게 베풀고 사는 삶이, 곧 받으며 사는 삶이라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자비정신이 투철하게 작용하고 있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너와 나를 가리지 말고 온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들이 다 함께 니르와나nirvāṇa를 성취하여 평등하게 안락한 삶을 누리자는 것이다. 니르와나를 성취하려면 수행을 하여야 하며, 수행을 하려면 그 주체가 논의되고, 그 주체를 논의하려면 사람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여러 가지 방향에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연구는 실험실에서 실험기구를 가지고 자료를 분석하고 관찰하여 데이터를 추출하거나, 문헌적인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론을 도출하는, 그런 연구가 아니다. 붓다님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여야 할 뿐 아니라, 스스로 계śīla․정samādhi․혜prajñā의 삼학śikṣā-traya을 실천․수행하여 체험한 바탕 위에 우뚝 서는 연구이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보면 불교대학은 어떤 성격의 대학이어야 하는가가 분명하다. 宗敎系이어야 한다. 신학과와 원불교학과처럼 宗敎系로 변혁시켜 운영하는 것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것이며, 학생들의 미래지향적인 대책이기도 하다. 불교대학을 현재와 같은 一般系大學으로 놓아두면, 불교는 이 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인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드디어는 쇠퇴의 길을 자초하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본다. 대승불교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출가이든 재가이든 모두 보디쌋뜨와승bodhisattva-yānika이며, 여섯 가지 빠라미따pāramitā인 보시의 완성dāna․지계의 완성śīla․인욕의 완성kṣanti․정진의 완성vīrya․선정의 완성dhyāna․지혜의 완성prajñā를 닦아 온전하면서도 최고의 지혜를 드러내는 안웃따라쌈약쌈보디an-uttarā-samyak-saṃbodhi를 완성하는 것이다. 출가보디쌋뜨와와 재가보디쌋뜨와는 삶의 양식이나 수단이 다를 뿐, 그들은 같은 목표를 향하여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길동무이다. 이제는 불교의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불교화를 위한 방편을 부릴 수 있는 보디쌋뜨와를 많이 길러 국제무대에서 무애자재하게 포교활동을 벌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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