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 이별 뒤의 화해 -
비 오는 날
- 이정옥
똑같은 비라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중 가뭄의 단비란 왕의 대접을 받으니,
참 묘한 게 자연의 이치이며 사람 살아가는 일이다.
사람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평생을 귀하게, 또는 불행한 삶을 살아야 하니
마음씨 착하고 고운사람 만나야겠다.
비를 맞으면 경직된 어깨가 부드러워지며,
더위를 먹은 나뭇잎과 풀 이파리의 어깨처럼
나의 어깨도 올라갈 수 있을까.
우산 없이 나도 비를 맞아야겠다.
*이정옥: 수필가. 2012년 '문예사조' 등단. 수상으로 2014년 경남기독문학상 등
그날, 눈 내리는 풍경을 보러 갔던 일광의 바닷가에서 그녀는 내게 첫 번째 이별을 통보했다.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는 그녀의 격정이요, 혼란이었다, 하고 생각했지만, 도대체 이별이라니? 나는 도저히 내 마음속에 그녀의 이별 통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제대로 사랑이나 해본 걸까. 아직 서로를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 결정하는 것일까. 나는 머리가 어지러웠고 가슴이 답답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분출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그녀가 아니, 나 또한 설령, 진짜 이별을 말하고 싶어도 그건 진짜일 수 없었고, 그저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내뱉는 일종의 분출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인정하는 사랑을 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연희를 찾아오는 일도 뜸했다. 가끔 지하 식당에서 마주치긴 했어도 그녀는 다른 여직원처럼 관례적인 인사 정도만 하였다. 답답한 사람은 나였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그저 이런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예전 같으면 퇴근 후 한수를 붙잡고 술이나 마실 터인데, 이상하게 술이 당기지 않았다. 그냥 집으로 와서 시를 쓰거나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는 정도로 소일 아닌 소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낮에 근무시간에도 멍한 얼굴로 나는 그녀의 얼굴을 떠올렸고, 집에서 슬픈 노래를 부를 때면 어김없이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빌딩 숲은 밤마다 캐럴이 울렸고 상가와 카페 등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멋진 풍경이 연출되었다. 오랜만에 그녀가 연희를 보러왔다. 칸막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밝은 목소리였다. 연희와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낼 건지, 백화점에 함께 옷을 사러갈 건지 등 시시덕거리는 소리가 여과 없이 내 귀에 들렸다. 나는 모른 척하고 그녀가 있는 곳에 가보고 싶었지만, 아직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갑자기 연희의 까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칸막이 뒤로 “안 돼”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희가 갑자기 내 칸막이 안으로 들어왔다.
“과장님! 오늘 유희가 한 잔 산대요. 오늘 약속 없으시죠? 같이 가는 거예요.”
뒤이어 유희가 따라 들어왔다.
“얜! 그냥 해본 소린데.”
“뭐 어때? 어차피 마실 계획이라면 오늘 하면 되지. 너도 과장님 좋아하잖아.”
순간 그녀와 나는 오랜만에 눈이 마주쳤다.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그녀는 매우 단정했고 예뻤다. 오랜만에 본 그녀의 눈빛은 따뜻했고 깊었다. 나는 이 순간이 그냥 계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장님! 어때요? 콜?”
그때 연희가 그녀를 잡으려는 유희를 피해 밖으로 달아나면서 마지막으로 내게 물었다. 나로선 당연히 콜이었다.
퇴근 후였다. 직장과 조금 떨어진 부두 쪽 허름한 식당에 그녀와 연희가 앉아 있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는 연희 앞에는 음료수가 그리고 그녀 앞에는 소주 한 병이 놓여 있었고 안주는 그녀들이 좋아하는 회무침이었다.
“좀 늦었지? 미안해. 나오려는데 부장호출이 있어서.”
“아니에요. 우리도 막 왔어요. 그치? 유희야.”
“그래, 이제 막.”
그녀는 조금 어색한 듯 마지못해 연희의 말에 대답했다.
“과장님이 오셨으니 안주 하나 더 시켜야죠. 뭐 드실래요? 오늘은 어차피 유희가 다 낼 건데 뭐.”
연희는 까르르, 하고 웃고 있었고 그녀는 그런 연희의 등을 가볍게 때리고 있었다.
“좋아. 멍게랑 해삼 한 접시 더 시키지. 오늘은 내가 계산할 테니, 유희 씨는 그만 괴롭혀.”
그러자 연희가 발끈했다.
“무슨 소리여요? 남의 사무실 직원이 사겠다는데 굳이 과장님이 나설 필요가 뭐 있어요? 안 돼요. 오늘은 유희가 내야 해.”
“그렇게 하세요. 오늘은 제가 낼게요. 연희에게 고마운 것도 있고, 과장님께도 오랜만에 제가 대접하고 싶네요.”
나는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소란을 피우는 것 같아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유희의 말을 듣고 연희가 갑자기 뾰로통했다.
“뭐야? 오랜만이라니. 유부남인 과장님과 처녀인 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란 말이네. 그치?”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니야! 그런 말이 아니고 일전에 우리 관세사 대표님이랑 과장님이랑 합석한 적이 한 번 있었어. 그때를 말하는 것뿐이야.”
나는 그녀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변명하는 것이 우습기도 하고 귀엽게 생각되었다. 이쯤에서 끼어드는 게 도리에 맞다 싶었다.
“그래. 그때 우연히 같이 합석한 적이 있었어.”
“그래도 질투 나는걸요? 과장님은 평소에 저는 잘 안 부르셨잖아요.”
연희의 마음이 아직 풀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날은 내가 아니라, 한수가 불렀어.”
“치! 변명은. 안 되겠다. 얘. 유희야. 그런 의미에서 나도 한 잔만 줘. 과장님! 우리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위해 다 같이 건배해요.”
모든 게 연희 덕분이었다. 연희는 우리사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우리를 엮기도 하고 떼기도 하면서 부드러운 분위기를 이끌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나도, 그녀도 연희도 모두 취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 물론 술을 잘하지 못하는 연희는 소주 석 잔에 녹다운될 정도로 취했지만.
“우리 나가서 맥주 한잔 더해요.”
의외였다. 오늘은 웬일인지 연희가 2차를 제안했다.
“왜 그래? 괜찮겠어?”
“이판사판이에요. 오늘은 나도 좀 취하고 싶단 말이야. 요새 세상 돌아가는 꼴 하며, 시집가라고 난리 치는 엄마며, 매일 꼴 보기 싫은 옆좌석의 박 대리며, 왜 이리 세상사는 게 힘든지 몰라. 과장님 ‘못 먹어도 고’할 거죠?”
나로선 잘된 일이라 그녀의 제안에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아까부터 불편한지 계속 내 눈치만 살피는 유희 때문에 살짝 걱정은 되었다.
“그래요. 같이 가요. 산 사람 소원을 들어줘야죠.”
의외로 유희는 당당하게 나갔다.
전에 그녀와 함께 갔던 그 카페였다. 여전히 카페 안은 사람이 많았고 더웠다. 내가 윗도리를 벗으려는데, 놀랍게도 유희가 옆으로 오더니 내 옷을 받아 자신의 옆자리에 가지런히 두었다. 그런 그녀의 태도에 나는 마음이 풀어지면서 그간의 서운함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맥주 두세 병을 나눠 먹을 때, 연희가 몹시 취한 모양이었다. 혀가 꼬이기 시작하며 앞뒤 분간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야! 너희 둘! 그래, 최림이랑 너, 유희.”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에 나와 그녀는 깜짝 놀랐다.
“요새 왜 그래? 둘이 싸웠니? 왜 서로 말도 안 하고 지랄이야. 지랄을.”
당황한 그녀가 연희의 팔을 잡았다.
“연희야. 왜 그래? 많이 취했어?”
그러자 연희는 그녀의 팔을 뿌리쳤다.
“취하긴! 누가? 말 돌리지 말고. 어쨌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둘이, 끅, 싸웠다 쳐. 끅. 그러면 화해하면 되지. 둘이 좋아하든, 사랑하든 난 상관없어. 그래도 이건 알아야지. 내 앞에선 좀 다정해 봐. 요즘 세상에 불륜이 무슨 대수야? 둘이 좀 당당해 봐.”
나도 충격이었다.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다더니 맞는 말이었다. 은밀하게 그것도 내밀하게 진행된 나와 유희와의 관계를 연희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소위 말하는 여자의 직감이었다. 당황해하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하죠?”
그녀가 내게 이렇게 물었을 때, 나는 어처구니없이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다.
“어쩌긴, 연희 말대도 계속 만나면 되지.”
그러자 그녀는 내게 눈을 흘겼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지금.”
그제야 나는 정신이 번뜩 들어,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동작을 취한 뒤, 곧바로 연희를 부축했다.
“빨리 나가자고. 택시 태워줘야지.”
“제가 따라갈게요.”
“그대가?”
“네. 혼자 위험할 것 같아요.”
나는 카운트에서 계산하고 택시를 불렀다. 부축하여 찬바람을 맞히자 연희는 조금 술이 깨는가 싶더니 이내, 유희에게 기대어 횡설수설했다.
“야! 최림! 넌 행운아야. 마누라도 예쁘고, 유희도 예쁘고.”
나는 그녀가 어떻게 생각할까 봐, 마침내 화를 내었다.
“이 녀석이! 어른에게.”
“어른은 개뿔! 사랑에 나이가 어디 있어. 어쨌든 하나만 택해! 알았어?”
택시가 저만치서 오고 있었다. 나는 어떡하던 그녀에게 어떤 말이라도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이 생일이야?”
“네.”
“서울에 있을 거지?”
“그래야죠.”
택시가 정확히 우리 앞에 섰고 나는 연희를 먼저 밀어 넣었다. 그녀는 택시를 타기 전, 내게 하고 싶은 말을 했다.
“그때, 미안했어요. 진심이 아니에요.”
마침내 연희와 그녀를 태운 택시는 사라졌지만, 난 미친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환호를 질렀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노래를 하나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를 위한 생일 축하 노래였다. 아내와 아이가 모두 잠든 밤, 나는 기타를 꺼내고 오선지를 준비했다. 아주 오랜만의 작업이었다. 학창시절 여러 곡을 만들었던 나였지만, 녹슨 머리에 곡이 잘 쓰일까 걱정이 되었다. 기타 대신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이용하면 작곡이 훨씬 쉬웠지만, 그건 잠든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나니 술은 어느 정도 깨었다. 나는 기타를 조율하고 먼저 눈을 감았다. 고상하게 악상이라 할 것 없이, 그녀를 떠올렸다. 하얀 얼굴과 예쁜 몸매 그리고 몽환적인 그녀의 눈빛만으로 노래를 만들기엔 충분한 것 같았다.
입으로 흥얼거리고 기타로 하나하나 음을 따서 그 음을 연필로 오선지에 하나씩 적어 내려갔다. 모두 잠든 밤에 작업은 의외로 잘 되었다. 다시 찾은 사랑의 기쁨 때문인지 머릿속에 음률이 저절로 생각났다. 곡을 완성한 다음, 나는 마치 시를 쓰는 것처럼 가사를 썼다. 새벽이 가까워져 오는 시각에 그녀를 위한 생일 축하 노래는 완성되었다.
나는 예전 헤밍웨이가 작품을 끝내고 나서 반드시 했던 행동, 즉 포도주 한잔과 짙은 향의 시거 하나를 물었다.
첫댓글 대단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