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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월 하순(11수)
하루시조 233
08 21
유자는 근원이 중하여
무명씨(無名氏) 지음
유자(柚子)는 근원(根源)이 중(重)하여 한 꼭지에 둘씩 셋씩
광풍대우(狂風大雨)라도 떨어질 줄 모르는고
우리도 저 유자(柚子) 같이 떨어질 줄 모르리라
광풍대우(狂風大雨) - 미친 바람과 큰 비. 유자를 떨굴 만한 위력의 자연 현상.
중장과 종장에 ‘떨어질 줄’이 겹쳐 나와 긴장감이 떨어지는군요. 그래도 유자라는 게 한 꼭지에 두 개 아니면 세 개가 열려 모진 비바람에도 거뜬히 견딘다는 점을 빌어와 곁의 동무더러 헤어지지 말자고 청하는 품이 너그럽습니다. ‘근원이 중하다’는 말의 근간에는 양반집 자손에게 주었던 일반인의 신뢰와 같은, 나무 열매도 종류마다 다른 근원이 있음을 구별해 내는 자긍심을 찾을 수 있군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4
08 22
청초 우거진 골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시내는 울어 옌다
가대무전(歌臺舞殿)이 어디 어디 어디메오
석양(夕陽)에 물차는 제비야 네나 알까 하노라
옌다 – 간다.
가대무전(歌臺舞殿) - 노래하는 누대와 춤추는 큰 집. 공연장, 무대(舞臺).
물차는 – 물 위를 가까이 나는 모습.
초장 전구만 보았을 적에는, 후구는 당연 ‘자난다 누웠난다’일 줄 알았는데 아니군요. 노래하는 가객(歌客)으로서 공연장을 차지하지 못하고 울며 흐르는 시냇가를 서성이면서 물차는 제비더러 하소연 겸 어디로 가면 좋을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기회를 얻지 못한 인생, 이를 만날 우(遇)를 넣어 불우(不遇)하다고 합니다. 잘나고 못나고는 기회를 얻고 못얻고의 차이라는 말입니다. 때는 석양, 일모도원의 아쉬움이 짙게 깔려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5
08 23
청초 우거진 곳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청초(靑草) 우거진 곳에 쟁기 벗겨 소를 매고
길 아래 정자(亭子) 나무 밑에 도롱이 베고 잠이 드니
청풍(淸風)이 세우(細雨)를 몰아다가 잠든 나를 깨우나니
정자(亭子) 나무 – ‘솔 심어 정자 삼고’라는 구절도 있거니와, 농군이 슬쩍 잠을 잘 수 있는 곳은 그늘이 좋은 ‘정자 삼을 만한’ 나무의 밑이라고 하겠습니다.
도롱이 - 짚, 띠 따위로 엮어 허리나 어깨에 걸쳐 두르는 비옷. 예전에 주로 농촌에서 일할 때 비가 오면 사용하던 것으로 안쪽은 엮고 겉은 줄거리로 드리워 끝이 너털너털하게 만든다.
세우(細雨) - 가랑비.
지금은 보기 힘든, 그러나 불과 몇 십년 전에는 아주 흔했던 풍경을 눈에 잡힐 듯 그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깨끗한 청풍이요 세우일까, 농군의 얼굴을 간지럽혀 단잠을 깨우다니. 오는 비를 푸념하는 노래가 아니라, 도롱이 챙겨왔고 농우(農牛)도 조금 쉬었으니 다시 일을 해야겠다 정신을 가다듬는 노래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6
08 24
초경에 비취 울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초경(初更)에 비취(翡翠) 울고 이경(二更)에 두견(杜鵑)이 우니
삼경(三更) 사오경(四五更)에 울어 예는 저 홍안(鴻雁)아
너희도 나와 같도다 밤새도록 우느니
초경(初更) - 오경(五更)의 첫 번째로 오후 7시부터 9시 사이의 시간대. 이후로 이경(二更), 삼경(三更), 사경(四更), 오경(五更)이 이어진다.
비취(翡翠) - 물총새. 비취옥을 뜻하기도 함.
두견(杜鵑) - 뎌견새. 시에서 이 새를 여러 이름으로 적고 있는데, 귀촉도(歸蜀道), 두견이, 두백, 두우, 불여귀(不如歸), 사귀조, 시조, 자규(子規), 주각제금, 주연, 촉백, 촉조, 촉혼(蜀魂), 촉혼조 등이 있다.
예는 – 가는. 날아가는.
홍안(鴻雁) - 큰기러기와 작은 기러기.
밤이 새도록 울어본 적이 있습니까. 어릴 적에 아비를 잃고 가슴이 심장이 면도날로 저미는 통증으로 밤새도록 울어본 적이 있습니다. 초경부터 오경에 이르도록 이 작품의 저자는 밤새도록 울었습니다. 그 사연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울어본 사람들이 많을진대, 울어봤어야 밝고 크게 홍소(哄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총새, 두견새, 기러기가 시각별로 등장하여 작가와 슬픔을 함께하는군요.
종장의 도치(倒置)가 시의 운율을 살립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7
08 25
초당에 벗이 없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초당(草堂)에 벗이 없어 혼자 누워 잠을 드니
청풍명월(淸風明月)이 임자 없이 들어온다
잠깨어 이 좋은 경(景)을 뉘더러 물으랴
초당(草堂) - 억새나 짚 따위로 지붕을 인 조그마한 집채. 흔히 집의 몸채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임자 - 물건을 소유한 사람.
벗이 없어 무료(無聊)커늘 청풍과 명월을 맞이하고 보니 그리 좋을 수가 없구나. 초장의 ‘벗이 없어’는 누구든 언제라도 맞닥뜨리는 상황입니다. 다들 바삐 돌아가는데 저만 홀로 한가하니 함께 놀아줄 이가 없는 것이지요. 중장의 ‘임자 없이’는 ‘값을 치루지 않았음에도’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종장의 후구는 ‘어찌된 판국인지 영문 몰라 하는데, 혼자 누리기에는 너무 과분하다’고 풀이 됩니다.
초당이라도 짓고 살 정도면 갖춰진 살림이요,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벗하고 노래할 정도면 남 부럽지 않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8
08 26
초산에 나무 베는
무명씨(無名氏) 지음
초산(楚山)에 나무 베는 아이들아 나무 벨 제 행여 대 벨세라
그 대 자라거든 베어 휘우리라 낚싯대를
우리도 그런 줄 아오매 나무만 베나이다
초산(楚山) - 뷱한에 있는 평안북도 소재 지명. 우거지다는 글자 뜻을 살려 ‘나무가 우거진 산’으로 풀어도 되겠습니다.
제 – 때.
벨세라 – 벨까봐 걱정되는구나.
휘우리라 – 휘어 손질하리라.
대나무 베지 말아라, 낚대 만들 것이니라. 이런 어른의 당부에 나무하는 아이들이 ‘예 알고 있습니다’ 공손히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용은 단순한데, 작가의 기법에서 돋보이는 점이 있습니다. 초장에서는 일단 음수율에 무관하게 아이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나무가 우거진 산에 들어 나무하는 초동(樵童)들아 혹시나 대나무는 건들지 말거라. 중장에서는 그 이유를 풀어 놓았는데, 낚대 만들 것임을 드러냈습니다. 후구의 도치(倒置)가 돋보입니다. ‘휘우리라’는 사라진 옛말입니다. 대를 다듬어 곧게 펴서 뭔가를 만드는 일을 이르는 단어로, 살려 쓸 필요가 있습니다. 종장에서는 초동들이 순하게 답을 하는데, 불안감을 씻어버린 어른의 뒷모습이 숨어 있습니다. 노파심만 남았습니다.
대나무의 북방 한계선이 점점 올라가고 있는 요즘과는 달리, 어쩌다 숲에 자라는 대나무 몇 그루는 이래저래 쓰임새가 많았을 것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39
08 27
추위를 막을선정
무명씨(無名氏) 지음
추위를 막을선정 구태어 비단옷가
고픈 배 메울선정 산채(山菜)라고 관계(關係)하랴
이 밖에 잡시름 없으면 긔 좋은가 하노라
막을선정 – 막기만 하면 될 일이거늘.
구태어 – 구태여. 일부러 애써.
비단옷가 – 비단옷이란 말인가. 비단옷은 가당찮다.
메울선정 - 매우기만 하면 될 일이거늘.
긔 – 그것이.
접미사 ‘-선정’이 새롭습니다. 언중(言衆)이 외면하면 가차없이 사라지고 마는 게 우리말인가 싶습니다. 추위를 막는 데는 굳이 비단옷은 과분하고, 배가 고픈 데는 산나물로도 족하니라. 의식(衣食)이 해결되고, 잡생각 없이 사니 더욱 좋고말고.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0
08 28
춤을 추려 하고
무명씨(無名氏) 지음
춤을 추려 하고 우주간(宇宙間)에 일어서니
부상약목(扶桑若木)에 소매 걸려 못 출로다
두어라 일어선 탓이니 우쭐겨나 보리라
우주간(宇宙間) - 우주 사이. 우주 - 모든 천체(天體)를 포함하는 공간. 무한한 시간과 만물을 포함하고 있는 끝없는 공간의 총체.
부상약목(扶桑若木) - 부상과 약목. 해 뜨는 동쪽과 해 지는 서쪽.
부상(扶桑) - 해가 뜨는 동쪽 바다. 중국 전설에서, 해가 뜨는 동쪽 바닷속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무. 또는 그 나무가 있다는 곳.
약목(若木) - 예전에, 해가 지는 곳에 서 있었다는 나무. 해가 지는 곳을 이르는 말.
출로다 – 추겠구나.
우쭐겨나 – 우쭐거려나. 우쭐대보기나.
지금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은하(銀河)와 태양(太陽)과 지구(地球)의 개념적 공간을 알고 있습니다만, 불과 수백 년 전만해도 달에는 항아(嫦娥)가 산다고 믿었답니다. 이 작품 속에 나오는 우주(宇宙)와 부상(扶桑)약목(若木)의 표현들이 우주 개념, 나아가 개인의 존재의식과도 연관되려니 싶어서 흥미롭습니다. 춤을 추렸더니 걸리적거려서 못 추겠거니와, 이왕 마음을 먹고 일어섰으니 우쭐대기라도 해보겠다는 가상함이 전해져 옵니다. 이왕 이 세상을 살게 되었으니 뭔가 꿈틀거려는 봐야지요, 암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1
08 29
칠산 바다 깊은 물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칠산(七山) 바다 깊은 물에 풍덩실 배 띄워라
만고(萬古) 흉적(凶賊) 악(惡)한 당(黨)을 가득 실어 던지고자
알거라 수중(水中)에 저 어룡(魚龍)도 받지 않아
칠산(七山) - 전남 영광군 부근을 가리킴.
만고(萬古) - 아주 오랜 세월 동안.
흉적(凶賊) - 흉악한 도적.
어룡(魚龍) - 물고기와 용. 물속에 사는 동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칠산 바다는 조기 파시(波市)로 유명했습니다. 물결이 거칠기로도 한 이름 했고요. 이 바다에 도적들을 몽땅 수장(水葬)시켜 청소(淸掃)하겠다는 바람을 담았습니다. ‘만고 흉적 악한 무리’는 그 때도 있었지만, 이 시조를 읽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 아닌가 싶어 뜨악해집니다. 그리 수중에 넣어진 도적들의 살과 뼈는 물고기들 모두가 외면(外面)할 거라는 저주(咀呪)가 종장을 가득 채웠고, 마무리조차 절룩댑니다.
종장의 끝구는 시조 창법에 따른 생략으로 ‘하노라’ 정도가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2
08 30
태백이 술 실러 가서
무명씨(無名氏) 지음
태백(太白)이 술 실러 가서 달 지도록 아니 온다
오는 배 긘가 하니 고기 잡는 어강(漁舡)이로다
아이야 잔(盞) 씻어 놓아라 하마 올까 하노라
태백(太白) - 이백(李白)의 자(字).
이백(李白) - 중국 당나라의 시인(701~762). 자는 태백(太白).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 젊어서 여러 나라에 만유(漫遊)하고, 뒤에 출사(出仕)하였으나 안녹산의 난으로 유배되는 등 불우한 만년을 보냈다. 칠언 절구에 특히 뛰어났으며, 이별과 자연을 제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현종과 양귀비의 모란연(牧丹宴)에서 취중에 <청평조(淸平調)> 3수를 지은 이야기가 유명하다. 시성(詩聖) 두보(杜甫)에 대하여 시선(詩仙)으로 칭하여진다. 시문집에 ≪이태백시집≫ 30권이 있다.
어강(漁舡) - 고깃배.
하마 - 바라건대. 또는 행여나 어찌하면.
시 잘 짓고 술 잘 하는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자(字)를 앞세워서 ‘술 기다리는 마음’을 잘 읊었습니다. ‘긘가 하니’는 ‘그인가 하고 살피니’의 뜻인데, ‘긔다’의 쓰임새를 보게 되어 반갑습니다. 우리말 어휘에 ‘아니다’의 반대말이 무엇이냐 물으면 답이 궁색한데, 전라도 사투리에 ‘긔다’가 있더군요. 종장의 해석이 다소 헷갈릴 수 있는데 ‘하마’를 긍정적으로 해석하여 ‘어쩌면 곧’으로 풀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243
08 31
태산이 다 갈리어
무명씨(無名氏) 지음
태산(泰山)이 다 갈리어 숫돌만치 되올지나
황하수(黃河水) 다 여위어 띠만치 되올지나
그제야 부모형제(父母兄弟)를 여의거나 말거나
태산(泰山) - 높고 큰 산.
여위다 - 몸의 살이 빠져 파리하게 되다.
여의다 - 부모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서 이별하다.
부모와 형제는 오래도록 함께 살아 ‘사는 재미’를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뜻을 과장(誇張)된 표현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종장 끝구 ‘말거나’는 끝까지 헤어지지 말자는 뜻이 들어 있군요. 시적 기교를 살펴보면, ‘만치’나 ‘되올지나’의 반복 사용이 초장과 중장에 거듭 나와 운율을 이루고, 또 전혀 다른 뜻인데 우리말로는 비슷하게 들리는 두 단어 ‘여위다’와 ‘여의다’로도 묘한 반복의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옛문헌들을 보면 중국의 역사와 인물을 마치 우리나라 사람인 것처럼 데려와 요모조모로 빗대기도 하고 우러르기도 합니다. 우리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공통된 한문문화권이라고 좋게 말하지만, 황제와 제후국이라는 외교적 수사가 솔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