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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분 불수불탐분 받지도 않고 탐내지도 않는다.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의 세계에 가득 찬 칠보를 가지고 보시했다 하더라도,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일체법이 무아(無我)이고 무생(無生)임을 깨달아 얻었다면 이 보살이 얻은 공덕은 앞의 보살이 얻은 공덕보다 뛰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복덕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사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사옵니까?”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짓더라도 그 복덕을 탐내어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복을 받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46)
보살은 복을 받느냐 복을 받지 않느냐, 보살이 복이 있어서, 복이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어서, 내가 복을 많이 받고 적게 받는 게 있다면, 그건 둘로 나눈 이분법이잖아요. 그리고 또 복이 많다 적다고 나누는 것도 하나의 생각이지요. 완전히 본래,
본연에는 모든 것이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런 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복덕이 공덕이 완전히, 완전히 구족되어 있기 때문에 복덕을 받고 안 받고의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왜냐면 이거자체로써 공덕이니까. 이거자체로써 부처이고 이거자체로써 지혜와 자비이고 모든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복덕을 받는다, 받지 않는다는 말자체도 붙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보살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보살은 복덕을 수없이 많이 지으면서도 복덕을 짓는다는 생각이 없고, 짓는다는 상이 없고, 당연히 복덕을 탐내어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 모든 것이 뿌리를 알고 나면, 모두가 바다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물결이라는 특정한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그 물결에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요. 본래다 부처라는 사실, 본래다 바다라는 사실을, 사실을 확연히 깨닫고 나면 물결 하나하나에 전혀 집착하거나 사로잡힐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특정한 것을 원하고 추구하고 욕망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복덕을 탐내어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따로 복덕이 있다는 생각을 갖지 않습니다.
29분은 위의적정분이라고 해서 위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요.
“수보리야, 만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온다거나, 간다거나, 앉는다거나, 눕는다’고 하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한 뜻을 깊이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어디로부터 오는 바도 없고, 또한 어디로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하는 것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54)
이제 오고가고 앉고 눕고 하는 행주좌와 어묵동정이라고 해서 뭐 움직이고 머물러있고 앉거나 눕거나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뭐 움직이거나 머물러있거나 간에 어∼이 위의가 언제나 적정하다. 그∼절에 처음 스님들이 출가를 하면요 이제 중물을 들인다는 표현을 쓰지요. 이제 일반 세속사람들에게 중물을 들이기 위해서 이 위의를 가르칩니다. 위의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칩니다. 옷을 입는 법, 벗는 법, 심지어 칫솔질하는 법, 밤에 잠을 자는 법, 뭐 그냥 신도님들을 대하는 법, 뭐 모든 것을 다 가르칩니다. 법회하는 법 뭐 하나부터 열까지 그냥 세세하게 다 가르쳐요. 그래서 처음에 출가를 하게 되면 이제 그게 필요한 것이지요. 아마 세속적인 삶을 살다보니까 처음에는 이제 그런 어떤 위의를 인위적으로나마 갖춤으로써 그런 어떤 일탈할 수 있는 가능성, 이런 것들을 좀 없애고 좀 청정한 어떤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 하나하나 가르치는 것이지요. 대표적으로 초발심자경문(출가한 사미가 지켜야 할 덕목을 적은 기본 규율서)이니 뭐 이런 것에 그런 것들 자세하게 나와 있는데, 그래서 처음에 이제 출가한 스님들은 그 위의에 대해서 되게 신경을 많이 씁니다. 이 가사 하나 입고 벗는 거조차 장삼 하나 입고 벗는 거조차 특별한 방법이 있어서 이걸 제대로 된 방법으로,
약간 야메로 벗고 입으면 바로 선배스님한테 혼나고 그러거든요. (웃음) 그리고 뭐 길을 갈 때 예를 들면 그런 거지요. 길을 갈 때 이렇게 동방(승려의 평상복)이나 적삼이라고 하는 그냥 일반승복을 입고 다니면 안 됩니다. 그건 우리 스님들 안에서는 약간 잠옷 같은 느낌인거예요. 그래서 반드시 바깥에 나갈 때는 두루마기를 입어야 됩니다. 아무리 더워도 그리고 두루마기를 입을 때는 너무 더우니까 안에 그냥 티 하나에 두루마기 입으면 안 됩니다. 반드시 동방이나 적삼의 긴팔을 입고 그 위에 두루마기를 또 입어야 되고,
제가 옛날에,
처음 군에 입대해가지고 종단에 뭔 일이 있어서 그냥 그때 막 정신이 없어가지고 바삐, 바삐 간다고 두루마기를 안 입고 들어갔다가 종단스님한테 얼마나 혼났는지.(웃음)뭐 얼마 혼난 거까지는 아니지만 한분 스님이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야, 참 스님은 배포도 크시네요.(웃음) 야, 이 종단에 들어오면서 어떻게 두루마기 안 입고 올 생각을 하는,
아∼이러면서, 그럴 정도로 특히나 처음에 출가한 스님들한테는 이 위의를 아주 중요하게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제 나중에 어느 정도 법랍(승려가 된 뒤로부터 치는 나이)이 있으신 스님들은 그렇게 밑에 스님들한테는 제대로 하나하나 하라고 가르쳐놓고 당신들은 조금 자유롭게 사세요.(웃음) 그런데 그것을 가지고 우리가 욕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처음에는 계율도, 처음에는 필요했지만 어느 정도 공부가 되면 거기에 스스로 구속 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서 위의자체도 과도하게 사로잡혀 집착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큰스님 같으면 뭐 저잣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같이 막걸리를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고 그런다잖아요. 그런 것이,
위의라는 것이 특정하게 딱 정해져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래요. 계율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의 계율은 유일하게 이것은 지키고 이것은 범하지 마라, 라고 했지만 지킬 줄도 알고 범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는 거거든요.
다른 종교는 절대적인 겁니다. 그걸 어기면 죄를 진거예요. 그런데 불교는 그걸 어겼다고 해서 죄를 진 게 아닙니다. 범할 줄 알아야 돼요. 지킬 줄만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범할 줄도 알고 지킬 줄도 알아야 되기 때문에 불교는 상당히 자유로운 종교지요. 특정한 것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라마다 이 위의가 다 달라요 또.
우리나라는 절에 맨발로 오면 예의가 없는 거지만 제가 태국이나 남방불교에 가서 양발신고 들어가면 정말 부처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탁 양발을 벗고 맨발로 들어와야 부처님에 대한 예의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일본엔 제가 갔을 때 보니까 스님들이 그 호프집 같은, 바(bar) 같은 맥주 집, 맥주 집을 스님들이 오픈을 해가지고 그분들이 맥주를 드시는 건 아니지만, 그 스님들이 여러분 계셔서 이제 술을 내주고,
거기서 사람들이 자신의 고민을 술 먹으면서 막 얘기를 하면 이 스님들이 이제 고민 상담을 해주는 이런 바(bar)가 상당히 유행을 한답니다. 그래서 이 스님들한테 다 얘기를 하고 이럴 수 있는,
참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같이 갔던 법사스님들 몇 사람이 일본 가서 그 얘기를 듣고서는 야∼우리 한국가면 그런 거 한번 해볼까.(웃음) 재미삼아 그런 얘기를 했던 적도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엄청난,
이제 예를 들어 타종교 같아서면 절대 안 됐을걸요, 아마.
그런데 만약에 그 술을 먹지마라 라고 하는 종단 같아서면,
그런데 그 불교도 사실은 그런 게 있거든요. 이렇게 춤추고 노래하고 뭐 술 먹고 하는 이런 자리에 가지도 말라는 계율이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들이 좀 이렇게 융통성이 있지요, 어찌 보면.
그리고 또 그것이 큰스님들이 하게 됐을 땐 아무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 어떤 계율도. 왜냐 하면 깨달음을 얻고 나면,
깨달음을 얻기 전에는 내가 계율을 지켜야 하지만 깨달음을 얻고 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아무문제가 없게 돼요.
스스로도 걸림이 없을 뿐 아니라,
그래서 이처럼 이런 위의라는 것도 정해진 실체적인 뭔가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여래라는 것이 타타가타(Tathagata: 여래)라 해서 어디로부터 오거나 어디로부터 가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온 게 있습니까. 집에 있다가 여기 절로 왔잖아요. 그런데 집에 있다 여기 온 게 맞을까요. 사실은 우리는 아무리 평생을 다녀도요 그냥 여기 있을 뿐입니다. 눈앞에 있을 뿐입니다. 목전이라고 불교에선 얘기를 하는데 목전의 당처 목전, 눈앞에 있을 뿐이에요. 조고각하, 발밑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온 우주를 떠돌아다녀도 발밑을 벗어날 수 없잖아요. 항상 그 발위에 있거든요. 언제나 당처, 눈앞에 있을 뿐이지, 오거나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집을 여기 살다가 저쪽으로 이사 가면 저쪽이 내 집이 되잖아요. 그러면 여기가 오는 거고 저기가 가는 거잖아요. 이거처럼 온다 간다는 생각자체가 하나의 관념이 만들어낸 생각일 뿐이지요.
만약에 여러분이,
저희 그 수련대회 했을 때 그런 거 한 적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절에 오는 수련회사람들한테 지금 이 자리에서 출가를 해라. 출가를 하지 못하겠으면 못하는 이유를 적어봐라. 그거 다 집착이다. 남편, 나 없으면 못삽니다. 남편, 당신 없어도 잘 살 거다. 어쩜 더 잘 살걸.(웃음) 자식이 나 없으면 밥도 못 먹습니다. 아니다. 하나하나 그것이 왜 고정된 집착인지를 하나하나 가르쳐줍니다. 그 자식이나 그 남편이 태어나면서부터 남편이고 자식이었냐. 그 자식도 전생부터 내가 이번 생에 잠시 인연 지었으니까 자식이지, 그게 진짜 자식이라 할 수 있느냐. 뭐 돈 명예 권력 전부다 하나하나 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라고 계속해서 면담을 통해서 깨줘요. 깨주고 나서 스스로 이제 마지막으로 탁 좌선하고 앉아서 지금 이 자리에서 출가를 전부다 해야 된다. 그래서 이제 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집착을 다 비웠기 때문에 이제 난 출가해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만 옆방으로 가라. 그럼 다 10분도 안 돼가지고 여러 사람이 가요. 그 다음 20분 30분되면 한명, 한명 갑니다. 뭐 한 시간도 안돼서 방이 텅비어버려요, 다 출가하겠다고. 만일 그래서 여기지금 출가하겠다고 했다. 그럼 여기가 집 인거지요. 그럼 뭐 여기가 이제 내 집이 되는 것이고 저 집은 낯선 집이 되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게 될 거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런 것이 전부다 관념이 만들어내는 거잖아요. 여기가 내꺼 내 집이다. 저기가 어디다. 난 여기로 왔다 저기로 간다. 온다 간다는 생각자체가 오고가는 게 없다는 거지요. 시간 공간이라는 개념자체가 텅 비어있는 것이지요. 언제나 목전의 현실을 우리는 늘 보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어∼그렇게 오고 간다는 생각자체에 집착해선 안 된다.
제 30분은 일합이상분이고요. 일합이라는 것은 하나로 합쳐진 세계 그리고 이상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모양 상, 자를 쓰고 있는데 그 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동음이자로 떨어질 이, 자를 써서 아마 좀 오타가 난 부분일 것이라는 연구 논문이 있는데 상당히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렇게 여기 적용을 했는데 일합이라는 것은 하나로 합쳐진 온 우주 전체, 삼라만상 전체에 하나로 합쳐진 전체를 얘기하고요. 또 이상은 따로 떨어진 개별적인 존재들, 개별적인 존재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하나로 합쳐진 모양으로써 상을,
우리가 상을 낼 수 있는 모든 존재들 가운데 가장 큰 것, 삼라만상을 비유로 들고 있고 또 가장 작은 것은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가장 작은 티끌, 미진이라는 것을 가장 작은 티끌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 요즘말로 하면 뭐 우주전체와 미립자 뭐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그 두 가지가 다 가장 큰 거에서부터 가장 작은 거까지 전부다 다 텅 비어 공하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겁니다.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진을 만들었다면 네 생각에 어떠하냐? 이 미진들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진들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미진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진들은 곧 미진들이 아니라 그 이름이 미진들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여기서 세존, 여래 다 같은 얘기예요.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 아니라 그 이름이 세계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어야 할 것이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의 합쳐진 모양도 실은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 아니라 그 이름이 하나의 합쳐진 모양일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라 하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그것은 법이 아니고 법 아님도 아니다. 다만 범부 중생들이 그것에 집착할 뿐인 것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62)
여기서 설명한 거처럼 어∼미진이라는 것이 하나하나 다 쪼개고, 쪼개고 이 세계를, 삼라만상을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서 미진으로 만들었다면 그것은 얼마나 많으냐고 했을 때 이 미진들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으셨을 것이지만,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은 뭐 많다고 할 수도 있고 적다고 할 수도 있고 이렇게 방편으로 미진에 대해서 설명하셨다는 것이지요. 아무리 작은 미진, 티끌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고정된 실체적인 무엇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고요. 또 그다음에 보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도 곧 세계가아니라 이름이 세계일뿐이다. 세계가 실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뭐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하나로 통으로, 삼천대천세계로 합쳐진 모양으로써 설명을 하는 것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것 또한 어∼이름이 하나의 합쳐진 모양이고 이름이 삼천대천세계일 뿐이지 고정된 실체적인, 우리가 집착할 수 있는 특정한 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우리가 지금까지 상을 다 타파했습니다. 하나하나 우리가 머릿속으로 관념 지어진 모든 상을 하나씩 다 타파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와서는 이제 우리가 상을 내세울 수 있는 모든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얻을 수 있는 원자나 전자나 미립자나 이런 모든 티끌까지 다 쪼개서 그 티끌은 실체가 있지 않을까요.
보통 우리는 이 세계가 특정한 원소기호로 이렇게 이루어져 있고 그 특정한 원소가 모여서 다양한 것을 이룬다. 이렇게 배웠잖아요. 그래서 그 원소는 없어지지 않는 유일한 실재다. 이렇게 배웠지 않습니까. 인도에서도 부처님당시에 그 외도들이 그 요소설이라는 걸 주장을 해서 4요소설 뭐 7요소설 이래서 지수화풍이라는 근본의 요소로 이루어졌다. 지수화풍의 공식, 뭐 이런 걸로 이루어져 있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를 얘기하기도 하고 또 물질을 중시하는 어떤 곳에서도 이 모든 존재는 아주 미진이라는 특정한 물질들이 인연 따라 조합이 되어가지고 그것을 이루는 것이라서 그 미진, 티끌은 고정된 실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 티끌은 아주 무너지지 않는 고정된 실체이기 때문에 그것은 변함이 없다.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것이 옛날에는 과학에서도 그렇게 어느 정도 믿었다가,
근자에서는 이제 과학에서도 티끌이나 미진도 입자와 파동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으로,
입자라는 것이 영원히 입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텅 비어있는 것이고 그것을 아주 깊이까지 들여다보게 되면 이게 진짜 있느냐 없느냐 이거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없다고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의 어떤 인연 따라 잠깐 생긴 듯, 하지만 그게 또 생겼다고 얘기할 수 없다고 불교에서 얘기하는 어떤 이런 거.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의식이 여기에 있기를 원할 때 갑자기 미립자가 그 자리에 등장을 했다가 그 의식이 사라질 때는 다시 이것이 파동으로 흩어지고, 또 파동으로 흩어져있는 이것이 아무리 먼 곳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의식을 그쪽으로 모았을 때 그 쪽에서 갑자기 등장을 하고, 이런 어떤 놀라운 일들을 이 미립자들이 일으킨다는 겁니다. 양자라고 해서 이것들을 보았을 때 야, 이거 시공간조차 없다는 것이지요, 양자의 차원에서는.
그래서 이것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는
불교적인 용어인데
이런 걸 지금은 양자물리학에서도 실제로 쓰고 있습니다. 이것처럼 불교에서도 그것을 이루는 구성요소라는 어떤 티끌, 이게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소설도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것이 모여 있는 온 우주, 삼천대천세계 이 지구 안에 있는 모든 낱낱의 사람들은 죽었다 살았다 죽었다 살았다하니까,
그냥 거기서 막 나고 죽고 하지만 그럼 이 지구라는 전체와 우주 삼라만상이라는 전체는 뭔가 하나의 실체가 딱 있어서 영원히 지속되는 거 아닐까요, 라는 생각에 그 또한 하나의 상이다. 이 태양계,
태양이라는 것도 지금 그 50억만년이라든지,
하여간 그 수명의 한 50%를 지금 쓰고 있답니다. 한 50%가 남았다고 하는데 그걸 다 쓰면 이 태양계도 사라진다고 하고,
별도 성주괴공(불교에서 우주가 시간적으로 무한하여 생성소멸 변화하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을 하지 않습니까? 그거처럼 이 우주 삼라만상 이라는 것도 또한 그렇게 변해가는 것이고 인연 따라 변해가는 것이지, 거기에 고정된 실체라는 것은 없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것 아무리 큰 것 그 사이에 있는 일체 모든 존재들, 이 미진으로 구성되어져 있는 모든 컵이며 산하대지며 자연이며 바람이며 구름이며 사람이며, 일체 모든 것들 아무리 작은 거에서부터 아무리 큰 거까지 또 그 사이에 있는 일체 모든 것들은 전부다 인연 따라 인연가합으로 잠깐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허망한 것일 뿐, 고정된 실체로써 존재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 경전에서 하나로 합쳐진 모양이나 삼천대천세계라고 말로 표현하는 것은 그냥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가명으로써 방편으로써 말하는 것일 뿐이고,
그것은 법도 아니고 법아님도 아니다. 존재라고 할 수도 없고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이 법이라는 것은 존재라는 의미와 진리라는 의미를 같이 가진다고 했지요. 이 아무리 작은 존재라도 아무리 큰 존재라도 이것이 존재라고 그렇게 얘기할 수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소리지요. 그렇다고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지요. 무언가로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다만 범부중생들은 그 사실을 모르니까 사람에게 집착하고 우주에 집착하고 나에게 집착하고 내 돈에 집착하고 내 명예에 집착하고 온갖 그 상에 집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죽는다고 했을 때 나라는 존재가 무너지는 괴로움,
또 내가 살고 있는 이 우주와 헤어져야 한다는 괴로움, 이런 것도 하나의 내가 집착하는 생각이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죽고 나면 남아 있는 자식은 얼마나 힘들까 라고 고민하는,
죽기 전에 그 고민 하느라고 죽기가 힘들거든요. 이제 죽음을 앞두신 분들이나 시한부인생 사는 분들은 내가 죽고 나면 이 자식들이나 뭐 남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이게 다 허망한 망상인 것이지요. 온 우주가 사실은 거대한 하나의 꿈일 뿐인데 내가 죽고 나면 그 꿈도 깨는 것인데 내가 거기서 진짜 내가 죽고 나면 이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 알겠습니까? 실제 저는 지금 여기 있고 여러분은 거기 계시잖아요. 여러분들 전부다 실제 있는지 없는지 나라는 존재자체가 공하다고 했어요. 무아라고 했잖아요. 무아라서 실재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꿈속에서 실재한다고 우리가 착각하고 있을 뿐이지. 그런데 우리는 실재한다고 집착하니까 거기 사로잡혀 있을 뿐이지요. 그런데 죽고 나서 뭐 남편이 자식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고민을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게 다 허망한 생각이고 망상입니다. 그래서 범부중생들이 이 많은 거, 작은 거 미진이며 우주며 그 사이에 있는 일체 모든 상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집착할 뿐인 것이지요.
다음 장은 31분 지견불생분입니다. 지견을 내세우지 말라 라는 분이고요.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
자견을 말했다고 한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사람이 내가 말한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그 사람은 여래께서 말씀하신 진리를 알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은 곧 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이 아니라 그 이름이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일으킨 자는 일체법을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믿고 깨달아서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야, 지금 말한 바 법상도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설했으니 그 이름이 법상일 뿐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78)
어∼아견과 인견과 중생견과 수자견을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금강경에서 지금까지.
부처님이 말씀하신 가르침에서 금강경의 핵심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견, 인견, 중생견, 수자견이라는 ‘나다’라는 상을 가지고서 나라는 견해를 가지는 것을 아견이라고 불러요.
그래서 이것이 아 인 중생 수자를 한마디로 말하면 아상이라고 얘기할 수 있다고 했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금강경의 핵심사상은 아상과 아견을 놓아버려라 라는 얘기인 것이지요. 그러다보니까 이제 사람들은 아∼금강경에서는 아 인 중생 수자상을 타파하라는 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 금강경의 가르침이 뭐냐, 금강경이 말하는 법이 뭐냐.
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아 인 중생 수자견을 타파하라는 것이 부처님 말하신 바입니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내가 지침으로 삼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은 내가 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인 중생 수자를 부처님이 말씀하셨으니까 그건 내가 끝까지 쥐고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이러한 얘기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 인 중생 수자를 부처님은 말해도 말한바가 없다. 방편으로 말했을 뿐이니까 그걸 진짜라고 생각해서 그걸 내가 말했다고 여기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말한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 인 중생 수자는 그 이름이 아 인 중생 수자라고 말했을 뿐이지 그런 어떤 뭔가에 아 인 중생 수자가 뭐냐. 이거에 어떤 고정된 실체적인 뭔가가 있어서 그렇게 설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 아뇩다라샴막삼보리를 일으킨 자는,
또 나왔지요. 일체법을 일체 모든 존재나 일체 모든 진리를 응당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믿고 이와 같이 깨달아서 법상도 일으키지 말아라.
이 아 인 중생 수자를 타파해야 한다.
이 생각이 법상이거든요.
법에 대한 진리에 대한 모양
불법은 이거야. 불법의 진리는 이거다. 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법상입니다.
그래서 불교 가르침은 이거니까 이거를 목숨 걸고 사수해라. 이런 게 불교는 없거든요. 그런 뭔가가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법상에 치우친 것이지요. 그래서 희한하게도 참 불교는 내세우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요. 모든 사상 철학 종교는 거기서 주장하는 주장이 있잖아요. 주장하는 사상이 있고 주장하는 주의가 있고 주장하는 바가 있어서 그것대로 살아가라는 거거든요, 사람들에게. 이것대로 살면 착한 사람 이것대로 안 살면 나쁜사람 이것대로 사는 게 바른길이고 이것대로 안 살면 바른 길이 아니야, 이렇게 얘기하죠. 그래서 종교 사상 철학 학자들마다 또 뭐 중국에 수많은 무슨 노자니 맹자니 하는 사람들 마다 전부다 자기가 올바른 일이라고 여기는 중점적인 부분이 있고 또 사회방식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라는 계율이 다 따로따로 있고 이것이 올바르게 사는 거야라는 게 다 다르게 있어요.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중에 어떤 걸 선택할 것인지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저마다의 주의, 주장, 사상 이런 것에 딱 사로잡혀서 그것이 옳다고 생각한 채, 난 이런 삶을 살 거야. 이런 삶을 살라고 하셨으니까. 이런 삶을 살면 나는 옳은 사람 저 사람은 틀린 사람, 이렇게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세상이 대립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종교로 대립되고 사상으로 대립되고 뭐 온갖 것으로 쪼가리, 쪼가리 나눠져서 대립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옳고 저 사람은 틀렸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 세상의 이제 모든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뭔가 하나를 쥐면 하나를 버려야 되고
내가 취하는 게 있으면 버리는 게 반드시 있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건 옳고 내가 생각하지 않은 건 틀렸다고 여기는.
그것을 이 세상 모든 사상 철학 종교에서 우리에게 주입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주장은 이거야. 우리의 교리는 이거야 라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불교도 그런 건줄 착각하는 거지요. 그래서 불교의 주의 주장은 불성이야 연기법이야 뭐 삼법인이고 사성제야 뭐 이런 식으로 불교를 교리화해서 그것이 불교의 주의 주장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불교에서도 계율을 정해주니까 불교는 이런 계율이 있으니까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그래서 이렇게 사는 것만이 부처님답게 사는 거야.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이해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얘기한 것은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어요. 그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름이 그것일 뿐이었고 그것을 방편으로 방편 가설로써 그렇게 설해놓은 것일 뿐이지.
이렇게 사는 것만이 절대적인 진실이야. 이런 게 없습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부처님처럼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법정스님이
그런 말씀 많이 쓰시잖아요.
나는 부처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나답게 살고 싶다.
이런 표현을 쓰셨거든요.
자기답게 사는 게 부처님처럼 사는 겁니다.
왜냐 하면 내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이 나로서 꽃피어난 것이거든요.
나라는 한 송이 꽃으로서 이렇게
한 존재로서 피어나서 부처의 삶을 이렇게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일 뿐이거든요.
다만 내가 부처로서 살고 있으면서도 늘
부처를 쓰고 살고 부처와 함께 자고 먹고 있으면서도
부처에 집중하기보다는 그냥 이 세상만사
바깥에 있는 모양이 진짜라고 믿고
그것을 쫒아가는 삶만을 살았다보니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계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사실은
본래 부처란 말이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특정한 어떤 주의 주장, 뭐 이런 것들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법상을 타파해야 한다.
진리라는 여건도 하나의 상이라는 것이지요. 법상,
진리라는 상이잖아요. 진리라고 내세울 거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상 법상, 이러면 나와 법이라는 진리라는 상을 타파해라는 의미로도 쓰이고요. 또는 나와 나 아닌 모든 것들, 법이라는 건
존재라는 의미로도 쓰이니까 왜,
존재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라는 상도 타파할지언정 남이라는 상. 타인이라는 상. 일체 모든 존재라는 상. 그것도 또한 법상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나와 남이라는 상. 나와 일체 모든 존재라는 상. 또 나와 이것이 바로 법이라는 상.
아 인 중생 수자를 타파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구나. 부처님의 주의 주장이구나. 부처님의 법이구나. 라고 하는 그 상조차 타파해야한다 라고해서 법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법상도 여래가 법상이 아니라고 설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이 법상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이 법상 얘기를 한참 했을 때,
내려가서 커피 드시면서 법상스님이 법상얘기만 계속했다고.(웃음)
마지막으로 이제 제 32분 응화비진분입니다.
응화신, 그 화신을 얘기를 하지요.
응화신은 참이 아니다 라는 어떤 부분이고요. 뭐 부처님으로 우리 앞에 오신 분 석가모니부처님을 응화신 혹은 화신이라고 부릅니다. 좀 포괄적으로 설명을 하면 우리 눈앞에 있는 일체 모든 존재, 일체 모든 여러분들이 전부다 화신인 것이지요, 응화신, 응해서 나타난.
내가 정말 힘들 때 누군가가 나타나서 나를 도와주잖아요.
그게 응화신이 나타난 것입니다, 사실은.
내가 너무너무 힘들어 죽겠는데, 갑자기 뭐 어디가 되게 아플 때 tv를 터는데 마침, 그 무슨 건강tv에 그 내용이 나와서 나에게 도움을 줬다. 그게 tv부처님이 나에게 도움을 준 것이거든요. 그게 진짜 그럴까요. 그 이유를 원리부터 생각하시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이 뭐라 그러냐면 내가 정말 힘들 때 누가 와서 날 도와줬는데,
어, 스님 그거 아니던데요. 제가 걔한테 가서 물어봤습니다. 그때 나를 어떻게 도와줬냐고 물어봤더니 얘가 나를 어떤 영적인 계시를 받고 나에게 와서 딱 얘기를 해 준줄 알았는데,
그냥 우연히 거기 갔다가 그 얘기 나와서 그 애도 그냥 했다는데 그게 왜 부처님이 한 겁니까? 이렇게 따진단 말이지요.
그냥이라는 말이,
그냥이라는 말이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이 부처 아닌 것이 없어요. 우리가 하필 그 자리에서 왜 그냥 그 얘기를 했을까요?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을 만났고 왜 하필이면 그 자리에 있었고 그냥 이루어진 거 같은 모든 일들이 전부다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들이예요. 나를 돕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다 인연 따라서 모든 존재가 전부다 나를 돕기 위해서. 그래서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를 괴롭히는 사람조차 사실은 나를 돕기 위해서 나에게 나온 것이고,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의 동체대비라 그러잖아요. 일체 모든 존재는 나와 둘이 아닌 존재로서 동체대비를 실천하기 위해서 내 앞에 있는 겁니다.
동체, 하나의 몸.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크나큰 자비
조그마한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온 사람은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은 부처형상을 가지고 스님의 형상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법을 딱 일러주니까 그건 작은 자비일 수 있어요. 대놓고 자비를 실천하는 거니까. 그런데 적의 모습으로 아니면 나쁜 사람의 모습으로 나를 괴롭히는 사람의 모습으로 뜻하는 바대로 안 되는 상황의 어떤 모습을 띠고 나에게 오는 것은 겉으로 봤을 때는 나를 미워해서 저 사람이 저러는 거 같고 겉으로 봤을 때는 절망인 거 같고 괴로움인 거 같고 저 사람이 나를 무시하는 거 같지만 동체대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 의미가 뭐냐? 그 의미가 뭘까, 고민하면 이건 분별세계로 빠져드는 거예요. 고민 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지금 내가 괴로운 그 자체가 진리로써 왔구나.
동체대비로서 왔구나.
라는 사실을 그냥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허용해주면 되는 겁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그거를,
사람들이 이제 그러거든요. 이게 다 인과응보라고 그러니까, 다 좋은 일이 있어서 왔다니까 아, 이게 이러이러한 것들은 나를 도와주기 위해 왔을 거야. 이건 이러한, 이러한 일로 나중에 나에게 뭔가 언젠가 도움이 되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놓으니까, 나중에 그게 도움이 안 되면 부처님이 나에게 사기 쳤나.(웃음)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나의 인연은요 그 인연이 벌어진 것이 하나의 원인 때문에 하나의 인연이 벌어진 게 아닙니다. 불교경전에서는 무수한 인연이,
정말 수십 수백 수만 가지 무수한 인연이 모여야지만 하나의 일이 벌어져요.
꽃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서
온 우주 삼라만상 전체가 도와야지만
꽃 한 송이를 피울 수 있다고 하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
그런데 내 인생에서 저 놈이 나한테 와서 욕하는 것은 뭣 때문이지? 이걸 단편적으로 하나로 생각할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저 사람이 성격이 나빠서? 그 사람 문제로 딱 치부하고 끝내기도 하고 아니면 뭐 내가 무슨 문제가 있나? 온갖 고민도 하고 하지만 그렇게 머리로 헤아려봐야 그건 내 머리가 만들어낸 또 다른 상이고 또 다른 관념일 뿐이지. 사실은 정말 진정한 의미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때로는 지금 당장 괴로운 일이 너무나 괴로운 일이 벌어지고 이 괴로움은 나에게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 거 같은 괴로움, 철저하게 나를 무너뜨리는 거처럼 느껴지는 괴로움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그것조차 작은 눈으로 봤을 때는 나의 괴로움인 거 같지만,
동체대비의 눈으로 본다면 정말 큰 이 법계의 시선으로 본다면 그 또한 나를 돕기 위해서,
왜냐하면 동체라는 건 뭡니까? 하나의 몸이니까 온 우주전체가 하나의 몸이니까 내가 나를 괴롭힙니까? 근원적으로 내가 나를 진짜 괴롭히는 일은 아무도 안하잖아요. 내가 나를 돕는 일만 하거든요. 이 우주법계가 하는 일이 그겁니다. 본래 하나니까. 본래 하나니까 거기서 둘로 나눠서 진짜 괴롭히고 싶은 일이 있겠습니까?
내가 타인을 괴롭히는 거고 내가 나를 괴롭히는 건데. 부처님이 나를 괴롭힐 아무런 의도가 없지요. 부처님이 나를 괴롭히는 거는 부처님이 부처님을 괴롭히는 것과 똑 같은 일이니까. 그래서 어떤 괴로운 일이든 즐거운 일이든, 그 어떤 일들이 나에게 오더라도 그 자체가 응화신으로써 온 겁니다. 부처님이 나에게 화현(化現:불보살이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려고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하여 세상에 나타남)해서 온 것이다. 어떤 사건이든 어떤 사람이든 어떤 존재든, 그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나툼이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부처님의 나툼이고 진리의 나툼이고 실상의 나툼이다. 제법실상이고 촉목보리다.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진리의 나툼이다. 그러니까 제가 수만 가지, 여러 가지 가르침 사상 철학을 많이 공부해봤다 그랬잖아요. 이 불교처럼 진짜 쉽고 간단하고 아주 심플하고 너무 심플한 가르침이거든요. 애쓸 필요 없고, 노력할 것 없고, 갈고닦을 것 없고, 막 공부하려고 머리 싸매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막 필기해가면서 팔만대장경을 다 공부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할 게 없으니까. 이미 완성되어 있으니까. 그 실천방법이라고 한다면 이미 부처니까 뭘 실천할 게 있어요. 실천할 게 없다는 게 실천이거든요. 그러니까 실천할 게 뭐밖에 없느냐면 지금 이대로 그냥 있어라. 지금 이대로 이기를 허용해주어라. 지금 이대로 인거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허용하고 인정하라는 거거든요.
지금 이대로를 내식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거거든요. 이 문제가 나에게 도움일 거야 아니면 해악을 줄 거야라고 내식대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이게 왜 벌어진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식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다만 내가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내 가슴이 시키는 무엇이든 열정을 가지고 해야 되는 겁니다. 내가 해야 된다는 마음이 난 것은 최선을 다해서 해야 된다는 것이지요.
그 무위법으로 사는 사람 있잖아요.
마음에 집착을 탁 내려놓고 무위법으로써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 그냥 턱 내맡기고
사는 사람들은 일을 안 할 것 같잖아요.
게을러질 것 같잖아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해야 할 일을 더 열심히 하지요.
더 열정을 가지고 하고 더 에너지 넘치게 합니다.
삿된 생각이 개입되지 않으니까
나에게 이익 되지 않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은 그냥 합니다.
이게 나한테 이익 되는지 되지 않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이게 참인가 참이 아닌가.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이고 내가 정말 좋아서 하는 일이고
이게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면
그냥 저절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이 머리가 우선인 사람은 분별심이 우선인 사람은 이거하면 나한테 이익이 될까? 안 될까? 도움이 될까? 안 될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보니까 함부로 저질러서 실천하지 못하고 그 생각 때문에 내 발목을 잡는 일이 너무 많습니다. 그때 했어야 되는데,
또 다른 분별심이 야, 이거하면 네가 좀 어떨 거야 어떨 거야 너한테 안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이런 속삭임 때문에,
머릿속에 속삭임 때문에 못하는 일들이 너무 많지요. 그런데 그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속삭임들은 전부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라는 이러한 아견에서
올라오는 나를 중심으로 쏘아올리고 있는
무수한 분별심들 이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내려놓으면,
내려놓으면 힘을 뺐는데도 불구하고 더 열정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됩니다. 더 정말 열심히 살게 돼요. 그냥 놀게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노는 건 힘들거든요, 노는 게 쉽지가 않거든요. 오죽했으면 예전에 군대에서 참선하는 벌을 주겠다고 뭐 했던 적도 있었다는 거 같아요. 가만히 앉아 있으라면 그 제일 큰 벌이거든요, 그 아무것도 하지 말라 면요.(웃음)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아무것도 안해서 너무 에너지가 떨어져가지고 그냥 멍하니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해보세요, 멍하니 있어지나.
멍하니 있으라면 있지 못하는 게 사람이거든요. 멍하니 있게 안 됩니다.
오히려 집착을 내려놨는데
더 열정과 에너지를 가지고 자신이 처한 것을 하게 됩니다.
순수한 마음으로써.
순수한 마음은 그냥
내 마음에서 일어나면 하는 겁니다. 그럼
그것이 다 진실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렇게 내 가슴을 가지고 팍 저질은 것에 대해서 옳은지 그른지 맞는지 틀린지 계산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옳다고 믿고 그냥 가는 겁니다. 모든 것은 옳다. 심지어 그것이 머리에서 나온 생각조차 그것도 그 순간, 머리에서 나온 생각을 내가 믿기로 했고 그것을 따르기로 했다면 오케이,
그것도 내 인연이야,
하고 그것을 믿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후회할 필요가 없어요.
이것을 a라는 것을 결정을 해가지고 가다가 아,
이게 아니구나, b였구나. 라고 그때 깨달았어요.
그럼 그때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시간 낭비한 게 아닙니다.
그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만큼 가다가 다시
돌아온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갔을 수 있거든요.
이처럼 내가 내리는 모든 결정에 대해서 나라는 아상이 내렸다는 생각을 갖지 마시고 번뇌 즉 보리라고 했잖아요. 번뇌가 일어나는 거 또한 부처자리에서 일어나는 거거든요. 번뇌는 부처라는 바다에서만 파도가 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번뇌의 생각이 일어났어도 사실은 그것조차 부처가 일으킨 생각입니다. 분별심조차 부처에서 일어난 생각이라니까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분별심을 버리려고 애써라 막 없애려고 애써라 싸워 이겨라 이러지는 안잖아요. 분별심, 그대로 내버려둬라. 다만 그걸 막 힘을 실어주고 따라가지만 말고 그냥 내버려둬라. 분별심은 그냥 일어나는 거다. 그 일어나는 거니까 그걸 가지고 욕하고 싸울 필요도 없다고 얘기를 하지, 분별심과 싸워 없애는 게 명상이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올라오는 생각과 생각을 없애려고 싸워 이기려는 노력, 그걸 명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하는 겁니다.
삶 자체를 통째로 신뢰하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를 온전히 신뢰하는 겁니다. 뭐로서,
부처로써.
부처가 하는 것이 틀릴 게 있겠어? 하고
턱 내맡기는 겁니다.
이걸 또 이제 잘못 막 해석해서 내 고집을 막 부리면서 부처가 하는 거야, 이러면서 자식들에게 스트레스 주라는 얘기가 아니고 누군가에게,
이제 큰스님들이 이런 표현을 쓰세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마음껏 저질러라.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피해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또 일을 할 때는 부득이하게 이거 아니면 저걸 해야 되는데 누군가가 도움이 되면 누군가가 피해가 된다. 그러면 그건 뭐 마음을 내서 당연히 또 무엇이든 결정해서 해야 되는 것이지요. 이걸 결정하는 게 옳으냐 저걸 결정하는 게 옳으냐는 없습니다.
그냥 내가 결정하고 거기
책임을 스스로 지는 거밖에 없어요.
이 길이 옳고 저 길이 옳은 건 없습니다.
어느 특정한 옳은 길을 선택해 주십시오.
그런 길이 없습니다.
내가 내 가슴이 시키는 대로 그냥
하면 됩니다.
내 가슴이 뭘 시키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아무거나 하면 됩니다.(웃음) 왜냐하면
그냥 아무거나 하라고 하면 내마음가는 대로 하거든요.
그냥 아무거나 하세요. 이러면 아이 좀 성의 없이 대답하시지 마시고.
성의가 좀 없어야 돼요. 왜냐면 자꾸 머리를 가지고 성의라 생각하면서 머리를 가지고 자꾸 고민 고민 고민하는 거 성의라고 생각하거든요. 머리를 쉬어야지만 직관이 가슴이 작동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머리로 막 애쓰고 노력하는 걸 내려놓으면 저절로 가게 되어 있어요. 여러분 인생 한번 보세요. 내버려 놔보세요. 저절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절로 다 해요. 저절로 다 합니다. 본래 부처기 때문에 본래 이미 구족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저절로 다 이루어지게 되어 있으니까 아무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부처가 살아가고 있는데,
중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분별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괴로움을 쥐는 거뿐이지, 우리처럼. 야, 내가 본래 부처고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삶은 하나도 잘못된 게 없었다. 그때 잘못한 거조차 그거조차 내가 딱 참회하고 나면 끝이다. 그걸 통해 나는 배우고 깨달은 것이 있다. 뭔지 모르지만 있을 거다. 나는 모른다. 알 수 없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요, 사실은. 난 아무것도 모르지만 부처님말씀이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온전하다고 했으니,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겁니다, 불교에서는.
여기 다 믿음입니다.
삶 자체가 있는 그대로 부처고
있는 그대로 진리의 실상만이 언제나
매순간 피어나고 있다. 나의 모든 결정은
하나도 어긋난 것이 없다. 단,
타인에게 과도한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자유롭게 자연스럽게
미래걱정 하나도 하지 말고 미래걱정 하나도 하시지 마시고요. 왜냐면 미래걱정 지금 해봐야 아무 답이 안 나와요. 그 걱정하는 대로 미래가 벌어질 거라는 건 가장 큰 착각이고 삿된 생각이거든요. 걱정하는 대로 그 생각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걱정하면 걱정하는 에너지가 크면 클수록 걱정하는 바대로 이루어져요. 왜냐면 걱정하는 마음이 두려워하는 마음이잖아요. 두려워하는 것은 지속되게 되어 있거든요. 두려워하는 마음을 자꾸 쥐고 있으니까 두려워하는 대로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는 미래 모르겠다. 나는 걱정 안하겠다. 왜냐면 걱정해봐야 답이 안 나오니까.
나는 지금 열심히 그냥 살면 미래도 알아서 되겠지.
왜냐면
지금의 결과가 미래거든요.
그런데 미래걱정 하느라고
지금을 버리면 미래도 버려지지요.
그런데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난 지금만 살 거야. 지금 행복하게 살면
미래도 행복하게 살아집니다.
지금 불행하게 살고 나중에 가서 행복해야지라는 생각으로 지금을 힘들게 고통스럽게 살면 사실은 지금 그걸 연습했기 때문에 미래도 고통스러워져요. 그리고 우리는 즐기고 누리고 만족하고 이렇게 사는 것을 죄악시하고 살아왔거든요, 많은 사람들이.
쉬면 안 될 거 같아요. 놀면 안 될 거 같아요. 나에게 휴가를 주고 나에게 휴식을 주고 나에게 좀 편하게 쉬어도 괜찮아. 이렇게 못한단 말이지요, 사람들은. 남들보다 뒤떨어질 거 같고 뭔가 세상에 기여를 못할 거 같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기여입니다, 세상에 할 수 있는.
무위법으로써 완전히 그 법에 하나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어떤 잘못된 생각들 우리가 스스로를 막 구속시키고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뭔가 막 어마어마한 걸해야 될 거 같은 생각,
어마어마한 걸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내 앞에 있는 단 한사람에게
내 아들이 좀 전에 밥 먹고 또
간식 달라 밥 달라 자꾸 이러고 이러면
그냥 그 아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서 그 아이를 맛있게 먹이는 것
그게 내 앞에 있는 부처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공양이고 최상의 찬탄이고
부처님 전에 공양 올리는 것과 똑 같은
공양 올리는 거거든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냥 그거 하나예요.
내 앞에 있는 아들에게 밥을 챙겨주는 이 불사,
그냥 이 불사를 행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는 중요하지 않으니까
야, 이거는 대충 해먹고 나 지금 딴 거해야 돼.
나 지금 부처님 공부해야 돼. 나 지금 법문 들어야 돼. 나 뭐 중요한 일 해야 돼.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그러면 자식도 상처받고 나도 자식에게 하지 못하니까 괜히 마음 찜찜하고 그런데 내가 따듯하게 맛있게 정성을 다해 음식을 차려주면 나도 행복하고 아이도 행복하고 그 행복감을 누리는 것이 행복이라는 거지요. 거대한 머릿속에 있는 거대한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느라고 시간을 허비하는 게 아니라 지금 누릴 수 있는 작은 행복을 누리는 연습을 해야 됩니다. 지금 이거밖에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 내가 어떤 것을 느끼고 누리고 만끽하느냐에 따라서 내가 미래에 느끼고 누리고 만끽할 게 뭔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그러니까 얼마나 쉽습니까.
야, 나는 죄가 없구나. 나는 아무 문제도 없었구나.
내가 문제라고 만들어 내는 일만
지금까지 계속했을 뿐인데 그 만들어내지만 않으면
나는 아무문제가 없었구나.
아, 나는 지금까지 완벽하게 살아왔구나.
부처가 지금까지 잘 살아온 것이구나.
내가 지금 내리는 모든 것도 다
진리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구나.
그렇게 굳게 믿어버리라는 겁니다.
그러면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고 나 자신에 대해서 완전히 신뢰하고
허용하고 인정하고 지금 일어나는
무엇이 오더라도 나는 생기발랄한 눈빛으로,
이게 탐험가들이 탐험을 할 때 뭔가 새로운 게 나타나지 않을까, 이렇게 생경하게 보잖아요. 여행하는 사람이 맨 날 보는 거 보여주면 짜증내잖아요. 막 새로운 걸 자꾸 보여줘야 여행하는 사람이 좋아하듯이
우리 인생을 여행하듯이 살아야 됩니다.
생경한 눈으로
지금 이 순간
옛날
이미 나, 아는 거야.
라는 마음으로 자식이 들어오면 저놈 또 들어오는구나. 이렇게 맨 날 볼게 아니고 아까 아침에 나갔던 자식이 아니에요, 지금 들어오는 자식은.
전혀 새로운 난생 처음 보는 자식으로 들어오는 거거든요. 왜냐하면 지금밖에 없으니까. 나는 지금밖에 없는데 지금 처음 보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 여행가는 마음은 뭐냐 하면
내가 안다는 마음이 없는 마음이거든요.
지금 이 순간밖에 없는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내 앞에 펼쳐지는,
무엇이 펼쳐지든 좀 낯선 일이 펼쳐져도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이 벌어져도 내가 좀 싫어하는 일이 벌어져도 그걸 무조건 틀어막을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열어놓고
무엇이든 한 번 경험해보자.
어차피 내가 해야 되는 일이라면 즐겁게 해보자.
한 번 도전해보자.
그러며 사는 게
있는 그대로 허용하고 사는 것이거든요.
진리와 하나 되어 사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살게 되었을 때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문제를 만들지만 않는다면.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이대로 부처인거예요.
추구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지금
이대로 부처로 자꾸 살아야지만 점점
내가 부처와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내가 법과 가까워질 수 있고
그래서 결국에 내가 깨달음에 가까이 가서
언젠가는 딱 자기성품을 확인하는 날이
온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경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요거그냥 정리하는 내용이에요.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한량없는 아승지 세계에 가득 찬 칠보로써 널리 보시했더라도, 만약 선남자 선여인으로서 보살심을 일으킨 이가 이 경이나 이 경의 네 글귀로 된 게송만이라도 받아 지녀 읽고 외워서 다른 이를 위해 전해 준다면 그 복이 더욱 뛰어날 것이다. 어떻게 남을 위해 전할 것인가? 기르침을 전하되 전한다는 생각과 상에 집착하지 말고 전하며, 여여하고 부동하게 하라. 그 까닭은 이러하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88)
많은 사람에게 법을 전하되 법을 전한다는 건
크게 보면 뭐냐 하면 괴로움을 없애주겠다는 겁니다.
사성제가 법을 전하는 겁니다.
불법을 야, 불교교리 공부해.
불교라는 법을 전하는 게 아니라 크게 봤을 때는
상대방의 괴로움을 없애주는 것이 법을 전하는 겁니다. 그렇게 법을 전하되 내가 법을 전한다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생각과 상에 집착하지 말고 내가 해도 했다는 바에 집착하지 말고 여여하고 부동하게 하라. 마음을 한결같이 내가 막 잘났다 못났다 이런 생각, 왔다 갔다하는 생각없이 여여 한결같이 내가 저사람 보다 우월하다 열등하다 이런 생각 가질 필요 없다는 거지요, 한결같이.
너와나, 대평등심입니다. 그래서 부동하게 하라. 탁 움직임 없이.
왔다 갔다하는 좌우로 분별심으로 움직이는 마음 없이 여여부동하게 하라.
그 까닭은 왜 그러냐, 현상계의 모든 법 모든 존재는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또한 이슬과 같고 번개와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할지어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88)
이게 핵심이지요.
공이라는 말을 이렇게 해설한 겁니다.
공하다 아무것도 없다 텅 비었다는 얘기가
꿈과 같다는 거지요. 우리 삶은 꿈과 같다.
실체가 아니라는 겁니다.
과도하게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환영과 같고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처럼 인연 따라
잠깐 생겼다 사라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무엇에 집착하겠느냐,
무엇에 사로잡히겠느냐, 하는 얘기지요.
부처님께서 이 경을 다 설하여 마치시자 장로 수보리와 비구 비구니와 우바새 우바이와 일체 세간의 하늘과 인간과 아수라 등이 부처님 말씀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하여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금강경과 마음공부 p488)
이렇게 해서 금강경 강의를 모두 마치겠습니다.(박수)
(제 28,29,30,31,32분 응화비진분, 응화신은 참이 아니다. 1시간 46분까지 녹취)
첫댓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희유한 공덕이옵니다.
함께 기뻐합니다.
법정스님이
그런 말씀 많이 쓰시잖아요.
나는 부처님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나답게 살고 싶다.
자기답게 사는 게 부처님처럼 사는 겁니다.
나에게 이익 되지 않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내 가슴이 시키는 일은 그냥 합니다.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난 지금만 살 거야. 지금 행복하게 살면
미래도 행복하게 살아집니다.
이제 큰스님들이 이런 표현을 쓰세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도 괜찮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마음껏 저질러라. 이런 표현을 쓰거든요. 피해주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해도 괜찮습니다.
언제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